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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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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만신전萬神殿 외 1편
저는 오래 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 밤거리를 나서면 골목의 이곳저곳에서 토하는 소리 들립니다. 저는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는 술집을 찾아 헤맵니다. 너무 시끄러워 고독합니다. 어제 올랐던 사다리를 허방지방 오르다가 기우뚱합니다. 차라리 길 위에 몸을 던질까요. 공중으로 힘껏 차올라 활갯짓을 합니다. 귀신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몸이 터져 귀신들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변할까요. 기도의 시간도 포기할까요.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됩니다.
촛불을 집어 삼키고 가슴에 등을 켭니다. 환한 가슴으로 지나가는 개에게 절을 합니다. 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전 세상에서 쫓겨난 귀신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제 목이 점점 뻣뻣해지고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머니가 자꾸 저를 부르십니다. 아들아, 아들아 문 밖에 나와 목이 쉬도록 부르십니다. 칼날이 제 목젖을 지그시 누르고 천천히 들어옵니다.
할례의 연대기
큰 물고기를 잡았다.
한 아름이 넘치는 몸집이었다.
혹시나 죽을까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었다.
물고기의 눈이 나와 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고기는 내 자랑이었다.
눈물도 없이 날 바라보며
몸을 뒤채는 성실한 영혼.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재훈∙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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