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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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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애
나의 가슴은 개방된 집이다* 외 1편
낙타를 타고 카펫 깔린 거실을 지나 카프카의 방으로 가고 있었다.
하늘과 세상 사이에 성이 있었다.
언덕이 굽이진 곳에서 아코디언의 주름상자처럼 모랫더미들이 움직거렸다. 검은 말 흰 말 흰 말 검은 말……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아랍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구트라 밑의 까만 눈동자에 태양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붉은 화인이 남겨졌다. 사각지대가 없는 거대한 눈이었다.
늘어진 시계들은 모두 오후 4시에 맞춰져 있었다.
* 뢰스케의 「Open House」에서 인용.
사라방드*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를 듣다가 ‘겨울밤, 비상구, 골수를 다 내놓은, 실어증의 길, 불안한 마침표와 쉼표들’ 살기 위해 삶을 버린 시인의 붉은 시어들에 눈을 팔다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여자를 떠올렸다. 까맣게 잊어버린 어젯밤 꿈의 두터운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쥐들이 들끓는 밤거리였다. 하수구에는 헤픈 여자들의 몸짓처럼 김이 피어오르고, 흐린 가등 아래 목이 긴 여자가 적막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 없는 눈으로 푸른 물이 가득한 눈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어둠에 스며 있던 적막이 발을 떼었다. 얇은 먹지 같은 그림자가 번번이 구겨졌다. 오래된 강박이, 자학이 푸석푸석 떨어졌다. 여자의 팔이 그림자에 둘러졌다. 단단히 자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바닥에 끌린 여자의 외투자락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흐린 가등 아래 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 3박자의 느리고 장중한 춤곡.
허정애∙제1회 <짚신문학상> 수상. 시집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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