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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시/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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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바람 냉장고 외 1편
-우울증
안에서는 결코 열리지 않는
바람 냉장고에 갇혀 살지요
밤마다 갸릉갸릉 더 크게 앓는
나의 냉장고에는
칸칸이 들어찬 기억이며
칸칸이 들어찬 울음이며
아무도 손댈 엄두가 안 나는
맛없는 것들만 가득,
너무 오래된 나를 버리러 가야 하는데
문은 꼼짝을 하지 않네요
보일러 배관을 타고
바람의 냉매冷媒가 흐르는 방
손잡이는 언제나 밖에만 있으니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람의 맥이나 짚고 있어요
더는 꽝꽝 얼지 않는 겨울과
조만간 플러그가 뽑히고 말
이 방의 운명을 점치는 거죠
문득 생각이 났다고
이제 방문 열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신이 먹지 않고 버린 나를
허연 곰팡이가 말끔히
먹어치우고 있으니
귀를 파는 밤
이 야심한 밤에도
내 욕을 하는 사람이 있어
가려운 밤,
귀를 파다가
그 사람이 너일 것 같아
대꾸는 못하고
창문을 여니
며칠 째 소화불량이던 먹구름
한꺼번에 터져
새하얀 눈이 내린다
이제,
잘 자라
길상호∙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현대시동인상, 이육사문학상(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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