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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특집/송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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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53회 작성일 08-03-01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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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성 예찬의 시대, 디지털 영화를 사유하다
― 영화의 스펙터클
송효정|영화평론가


우리는 지금 사유화私有化된 이미지의 시대, 편재하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맞게 노트북, PMP, 핸드폰 등 다양한 크기의 휴대용 액정 화면이 있는 곳에서라면 어디서든 움직이는 영상을 향유할 수 있다. 가공할 양의 정보 풀에서 영상물을 다운받아 개인 하드에 저장할 수도 있다. 동영상과 스틸 영상을 편집해서 보관하거나 타인들과 공유하는 일도 빈번하고도 용이해졌다.
이러한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맞춰 영화 역시 자신의 진로를 영악하게 모색하고 있다. ‘작은 화면에서 언제 어디서나 사유화할 수 있는 이미지’들에 대항하여 더 크고 자극적이며 시각적으로 화려한 스펙터클로 이미지의 시대를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영화 스펙터클은 일종의 ‘과잉의 과잉’으로 대중들의 감각에 호소한다. 이러한 영화 스펙터클은 디지털 영화의 도입으로 인해 무한한 가능성을 얻고 있다.  
영화가 부르주아들의 사소한 기분전환물이거나 새로운 도시 구성원들의 일상적 삶의 체험이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 동시대의 디지털 영화는 대중들의 시각을 장악하는 이미지의 집합체가 되고 있다.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사실주의 영화의 시대가 서서히 퇴조하고, 다시금 환상과 환영, 눈속임 기술로서의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사실적 재현 영화를 대변하던 뤼미에르의 시대에서 환상적 볼거리 영화를 대변하는 멜리에스의 시대로의 회귀. 영화의 역사는 그 100년을 돌아 다시금 피상적인 ‘시각적 환영’의 시대, 양식과 장식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서사에 눌렸던 이미지들의 귀환과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대중영화에 나타나는 스펙터클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 양식화의 특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 영상 장르의 표현은 ‘장식적’이라 알려진 예술 전통에 가장 적합하다. 이러한 표현은 형식과 스타일, 표면, 기교, 스펙터클, 센세이션을 권장하며 의미를 희석시키고 침묵을 독려하면서, 직접적이며 단속적인 순전한 오락으로 치우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외관과 형식, 표면과 양식, 스펙터클과 센세이션을 지지하는 미학 쪽으로 새로운 세기의 영화들이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스펙터클의 귀환, 새로운 매혹과 환영의 시대
스펙터클이란 크게 보아 ‘보이는 것 일반’을 말한다. 영화에서 스펙터클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의 의미에서 사용되어 왔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관습적인 의미에서 스펙터클을 대중영화의 하위 장르로 보는 경우이다. 이 경우 ‘스펙터클 영화’란 스케일이 큰 전투·자연재해·군중 등의 장면을 구경거리로 하여 만든 영화이자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된 볼거리 위주의 영화를 말한다. 한국어에서 ‘스펙터클하다’가 관용적으로 ‘거창하다’ 혹은 ‘웅장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러한 유형의 영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황금기가 퇴조하던 시기인 1950-60년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벤허(1959), 스파르타쿠스(1960), 클레오파트라(1963) 등이 있다. 이 시기 스펙터클 영화의 제작 붐은 TV 수상기의 보급으로 안방에 관객들을 빼앗기기 시작하던 영화계가 느꼈던 위기의식으로 인해 가능했다.  
둘째는 스펙터클을 영화 속에서 변별적 지위를 점유하는 ‘볼거리’의 요소로 보는 경우이다. 이 경우 스펙터클은 서사와 상대적으로 배치되는 요소가 된다. 초기 조르주 멜리에스 류의 속임수 영화들이나 독일 표현주의 양식의 영화들에서는 이러한 시각적 요소가 우월했다. 반면 일반적으로 할리우드는 매끈하게 봉합된 서사를 강조한 고전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서사 영화의 관습에서 본다면 빈번히 스펙터클한 장면을 삽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서사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스펙터클적 요소는 기세가 꺾이기는 했지만 고전 할리우드 영화 안에 잠재되어 있었다. 볼거리 위주의 영화인 뮤지컬이나 SF, 공포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스펙터클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장르기도 하다.
동시대의 스펙터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두 가지 경우의 스펙터클을 모두 포괄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대개가 상당한 자본이 투입된 볼거리 위주의 대규모 스펙터클 영화인 동시에, 매끄러운 서사보다는 장면화 된 볼거리들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펙터클이란 가까운 미래에는 영화와 동의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주류 영화들이 ‘볼거리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의 스펙터클에 대해 논하기 위해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던 시기로 시간을 더듬어 올라갈 필요가 있다.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러한 볼거리에 모여드는 관객들이 만드는 감각적 환영과 마술의 이미지들을 소환하여 그것이 어떻게 20세기 말에 다시금 디지털 영화적 스펙터클로 재현되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매혹’의 시대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동시대 영화 스펙터클을 영화의 역사와 함께 사유하기 위해서 최근에 제작된 두 편의 영화에 주목해 보자. 프레스티지(2006)와 일루셔니스트(2006)가 그것인데, 이 두 작품은 19세기 말, 즉 새로운 대중적인 시각-환영술이 등장했던 시기에 주목한다. 이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직업은 ‘마술사’이다. 이는 실제 직업적 마술사였던 조르주 멜리에스를 상기시킨다. 로라 멀비는 마술사들의 긴 계보의 끝에 서 있던 그가 영화와 마술의 두 전통을 병합하면서 영화를 마술로 끌어들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기 마술사들은 공연장에 운집한 대중들의 감각을 현혹시키며 그들에게 충격적인 시각-심리적 체험을 제공했다. 물체의 사라짐, 혹은 영적인 것의 현시라는 시각적 경험은 관객들에게 상징적인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제공했다. 앞의 두 영화가 보여주는 것도 그러한 구경거리의 시대에 과연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주제다.
이 시기 기술이 열어 보인 것이 물질성의 유물론적 세계가 아니라 대중들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두려움과 경이의 심리적 세계라는 점은 중요하다. 이 두 작품에서 마술사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고 또 나타나게 하며 대중들의 심리를 조정한다. 이는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환기시킨다. 18세기 말부터 발전한 판타스마고리아(요술환등)의 전통의 핵심 역시 관객들에게 정령과 유령이 등장하는 강신술 같은 이벤트를 연출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는 환영과 무대 속임수에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과학의 발전이 새롭게 재편되는 이성의 투명한 빛 아래서가 아니라 그동안 대중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아온 환상과 호기심의 영역을 새롭게 시각화하면서 기술과 환영의 결합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흥미롭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영화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차 무대장치, 정교한 소도구, 기계/환영에 기초하는 특수효과, 속임수 등에 의지하게 되었다. 즉 새롭게 발전하는 영상기술에 이 시기의 상업적 대중 엔터테인먼트였던 보드빌쇼, 소극, 무언극, 마술쇼 등이 결합하면서 ‘볼거리의 미학’으로서의 초기 영화가 정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립은 기술자들과 심령술사들의 결합에 의해 가능했다. 기술자들은 전기와 화학, 광학술을 발전시켰고 19세기 심령술운동은 전기, 무선, 화학 등과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적용시켰다. 심령주의 현상이 공연 산업과 스펙터클의 왕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시각적 이벤트의 강력한 매혹을 발굴해내기 시작했다.
로라 멀비는 대중오락의 뒤편에, 그리고 모던한 아방가르드로서 근대성의 표징이 되고자 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병적인 영혼 뒤쪽에 머물렀던 것이 바로 영화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프로이트의 용어인 ‘언캐니uncanny’와 관련짓는다. 로라 멀비는 언캐니한 대중문화들이 인간의 마음에 있던 불확실성을 이용하여 환영을 창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광학적인 기계들과 유령, 혼령의 환영을 병치시켜 나가며 만다는 기술이었다고 언급한다.
영화의 역사가 사실-환영 변증법의 역사라면, 새로운 전환은 19세기 초에 있었고 두 번째 물결은 디지털 영화의 도입기이던 1997년을 기점으로 해서 찾아왔다. 우리는 또 다른 세기말을 경험하며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환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바야흐로 내용보다는 형식이, 서사보다는 스펙터클이, 전체보다는 장면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키노-아이에서 키노-브러시로
관객의 눈과 동일시되는 카메라의 눈은 회화의 평면을 연상시키는 스크린 앞에 관객-주체를 불러 세웠다. 이러한 원근법적 주체는 근대적 주체,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명징성을 부여받은 주체를 연상시킨다. 세상을 자신의 눈을 통해 합리적으로 재구하고 구성하는 근대적 주체와, 스크린 위에서 구성되는 영화를 종합하는 관객으로서의 주체는 어느 정도까지는 중첩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카메라의 눈, 즉 키노-아이Kino-eye가 세상의 총체성과 진리를 담지할 수 있다는 가정이 받아들여지던 시기의 문제다.
이제 세계의 종합은 카메라의 눈을 통해 가능하지 않으며, 스크린이 보여주는 영상은 실재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탐 거닝은 영화의 역사 초기에 나타난 새로운 근대성의 의식을 ‘불확실성’이라고 보았다. 동시대 디지털 영화들 역시 이러한 불신과 의심의 미학 위에 놓여 있다. 디지털 이전의 영화들, 즉 아날로그 필름영화는 사진적이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게 되는 이미지는 기록되기 전에 이미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듯 현실을 포착하고 담아낸다.
그런 점에서 고다르는 영화를 ‘1초에 24프레임의 진실’로 정의하기도 한다. 본래 영화는 1초에 24프레임의 화판이 빛과 암전을 통과하면서 만드는 이미지로 구성된다. 따라서 정지된 화면이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영화에서 사용되는 특수효과들은 실제 세계를 사진 찍듯이 포착한 것들이 아니다. 원재료(실사 필름) 위에 그려지거나 혹은 원재료 없이 오로지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라 멀비가 고다르의 언명을 전도시켜 영화를 ‘1초에 24번의 죽음’이라 명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영화가 진실의 사태가 아니라 비실재와 죽음의 사유 위에 놓여 있다는 이 말은 ‘찍는’ 영화가 아닌 ‘그리는’ 영화, 깊이의 영화가 아니라 표면의 영화의 시대인 디지털 시대의 영화의 핵심을 간파한 비유로서의 시대적 함의를 품고 있다.
이제 우리는 대중엔터테인먼트의 분야에서 스펙터클의 부활을 목격한다. 할리우드 주류 영화와 TV가 이를 주도했으며, 디지털 이미지 구현 기술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디지털 영상문화의 표현이야말로 스펙터클과 자극으로 회귀하는 최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수 효과의 부흥과 관련된 영화가 개발되고 늘어나면서 새로운 이미지 조작 기법으로 제작되는 자극 충격 놀라움이 선호되고 서사적 요소는 쇠퇴하게 된다. ‘원시적인’ 실사영화의 사실성과 판타스마고리아(요술환등), 초기 속임수 영화의 초자연적이고 환영적인 요인들이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의 스펙터클 영화에서 명백히 드러낸다. 이러한 영화들은 전형적으로 마술 극장과 흡사한 기만행위(이국적이고 불가능한 사건과 행위의 묘사)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최근에 제작되는 디지털 영화들은 영화의 오랜 주류인 사실주의적 극영화보다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가령 300(2005)의 경우는 인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배경이 ‘그려진’ 것이며, 이는 실사 이미지를 리터치해 재구성한 픽실레이션(실사 애니메이션)인 아바론(2001)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이러한 아바론은 또한 3D 애니메이션인 파이털 판타지7(2004)와 그 이미지 운용과 형식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디지털 영화는 이제 실제보다 비실재에 더 가까이 있다. 현실 혹은 실재의 우월성은 사라진다. 디지털 영화에서 이러한 실재성은 일종의 재료구성의 요소일 뿐, 확실성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동시대의 관객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감각한다’. 보이는 것은 점차 진실의 담론과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지위를 매트릭스(1999)의 레오의 지위에 올려둔다. ‘보이는 것이 과연 모두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가?’ 영화는 단지 감각 자료일 뿐 그 기저에 놓인 사유의 깊이를 상실한다. 중요한 것은 피상적인 양식과 스타일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이제 점점 더 회화와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페인팅, 이미지 프로세싱,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과정을 통해 촬영된 이미지를 수정하기도 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원과 관계없이 각 이미지는 최종적인 영화로 완성되기 전 수많은 프로그램을 거치게 된다. 실사 필름은 이제 단지 원재료로서 촬영되며, 그 위에 현대식 수공예작업을 통해 이지미들이 조작된다. 그래픽 양식이 된 디지털 영화는 이러한 점에서 회화와 연결될 수 있다.
레브 마노비치는 디지털 영화에 대해 ‘키노-브러시Kino-brush’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한다. 미디어 테크놀로지로서 영화의 역할은 눈에 보이는 실재를 촬영하여 저장하는 것이었다. 한 번 저장된 이미지는 변형이 어려웠기 때문에 영화를 일종의 기록으로 여길 수 있었으며 그 진정성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각 현실을 자동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얻어진 20세기 영화의 시각적 리얼리즘 양식은 시각재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오히려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오면 다시금 이미지를 손으로 그려내는 단계로 변화된다. 따라서 세상을 카메라의 눈으로 바라보는 ‘키노-아이’가 아니라, 이미지를 다시 그려내는 ‘키노-브러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스타의 사라짐, 얼굴에서 육체로
스펙터클 영화에서 재현하는 것은 이미지 그리기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이며 그것을 향유하는 것은 감각주의적 관객이다. 20세기를 지배하던 문자-쓰기-독자의 축은 서사 구축의 측면에서는 주류서사영화의 전통과 관련되며, 작가성의 측면에서는 작가주의 영화와 관련되었다. 반면 21세기의 이미지-그리기-관객의 축은 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구조와 상응하며 20세기의 주류였던 문학성, 작가성, 서사성과 배치되는 지점에 영화를 가져다 놓는다.
2007년 대중들에게 공개되어 가장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디워, 300, 트랜스포머의 예를 들며 영화의 스펙터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자. 뜨거웠던 디워논쟁의 핵심에는 영화에 ‘서사’가 없고 ‘CG’ 즉 볼거리만 화려했다는 점이 놓여 있었다. 다른 두 영화의 서사도 대단히 단순하며 기본적이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의 경우엔 독자들이 그 서사의 내용을 다 알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특정한 스타 배우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유기물와 무기물 혹은 가공적 상상물의 ‘육체’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도 이 영화들의 특징이다. 전사들의 육체, 로봇의 신체, 상상적 가공물인 이무기 브라퀴가 그러했다. 이제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인하는 것은 더 이상 관음적 충동을 야기 시키는 매혹적인 스타 얼굴의 도상성이 아니다. 새롭게 구성된 물질적 ‘육체’들의 전시성과 시각적 매력이 배우의 존재를 압도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영화 스펙터클은 더 이상 해석학적 독해를 요구하지 않으며, 장면화된 이미지들의 감각적 수용에 집중한다. 영화는 더 이상 진리의 담론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미지의 세공과 그럴듯한 구조화에 몰두한다. 21세기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라 양식이다. 서사는 신화적이며 원형적인 줄거리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 위에 양식이 얹힌다. 프랭크 밀러적 양식, 피터 잭슨적 양식, 오시이 마모루적 양식 등등의 말이 가능하다. 이제 작가로서의 감독이 아니라 양식주의자이자 기술자로서의 감독이 더 부각된다. 어떤 배우가 등장하는가보다 어떠한 스타일리스트가 영화를 맡았는가가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키노-아이 시대의 영화는 스크린의 표면을 통해 일종의 ‘깊이’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키노-아이를 구성하는 관람객 주체의 내면성의 형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관음적 관람의 중심에는 ‘스타의 얼굴’이 있었다. 매혹의 근거로서의 배우의 얼굴은 심연을 만들어내며 영화라는 상상적 공간에 대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키노-브러시 시대의 영화는 이제 깊이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피상성 자체를 예찬하기 시작한다.
스타급의 배우들은 그다지 중요치 않게 되었다. 비닐 슈트를 입은 근육질의 슈퍼히어로들은 대개 가면을 쓰고 나오는 경우가 빈번하다.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육체와 물질적 직접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가 가면을 벗는 순간은 인물의 내면에 집착할 때에 한해서다. 배트맨의 가면 벗은 얼굴은 그의 섬세하고 나약한 내면의 지표이다. 스파이더맨의 우울한 슈퍼히어로인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상당히 이례적인 슈퍼히어로다. 그는 스펙터클 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깊이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가면을 쓰는 순간 현란한 액션과 비주얼 속에서 배우의 얼굴이 지닌 내면은 사라져 버린다.
스타의 사라짐은 이처럼 새로운 물질적 육체성의 격상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화려한 시각주의를 표방한 디지털 영화의 홍보 상술은 더 이상 스타의 강력한 티켓 파워를 요청하지 않는다. 유명 스타의 개런티 대신 정교한 그래픽을 위해 제작비를 충당하는 것이 더 유리한 상업적 전술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의 영화 홍보는 출연 배우의 근황과 이미지를 유포하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기술력과 그래픽의 화려함, 그리고 그러한 제작에 투입된 자본의 산술적 가치를 설명하는 것에도 집중한다. 이제 ‘깊이의 영화’의 매혹은 ‘표면의 영화’의 현혹으로 변모한다. 관객들은 이미지의 환영을 통해 무의식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통한 환각적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현혹의 스펙터클, 플라네타리움에서 만화경으로
디지털 시대의 스펙터클 영화에서 서사란 제 1의 지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보이는 것’의 지위가 격상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하는 관점에서 서사의 부재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시각적 환영에 집중할수록,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가 환상적 영역에 걸쳐 있을수록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일종의 ‘사실성’이다.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이때의 사실성이란 그 진리 기반을 실재 세계에 두고 있는 사실성이 아니라, 가공된 것들의 배치가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실감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므로 일종의 ‘그럴듯함’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럴듯하게 움직이는 자연주의적 영상, 실사 촬영과 그래픽 사이의 매끄러운 결합, 그리고 영화의 서사와 배치되지 않는 그래픽 장면화는 디지털 주류 영화가 요청하는 새로운 사실주의의 요소들이다.
과거의 스펙터클 영화에서 ‘볼거리’는 서사에 굴복하며 한갓 눈요깃거리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동시대 영화에서의 ‘볼거리’는 주류영화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가죽이나 신소재 슈트를 입은 슈퍼히어로들은 이념적 적대가 사라진 도시 공간에 새롭게 재편된 ‘공동체 안의 적’ 혹은 자기 자신과 싸우며 신체를 과시하며 근미래사회의 우울한 전망을 낙관적 할리우드 엔딩으로 보여준다. 역사물들에서 스펙터클은 CG로 리터치된 과장된 인간의 육체를 전시하며 전투 장면을 불가능한 시각화로 형상화한다.
새로이 합성된 유기체 동물-괴물들과 함께 몬스터러스하게 형상화된 적군의 이미지를 보여준 300의 예를 떠올려보자. 이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우리의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에 있는 ‘영화’인가? 배우들의 연기 이외에는 전혀 현실적 참조를 지니지 않는 전적으로 구성된 배경과 그래픽들은 시각화 가능한 것들의 새로운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다. 이제 새로움과 경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굳이 저 오랜 선사시대나 혹은 저 먼 우주공간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방안에 놓인 사물들의 사실성의 첨단을 가공적으로 보여주는 디즈니와 픽사에서 제작한 실감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시즌제로 제작되는 미국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자극적인 소재로 선정성을 내세우는 공중파와 케이블의 엔터테인먼트 쇼 형식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새로운 영화 스펙터클은 디지털 기술의 첨단에서 새로운 대중오락의 형식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제 영화란 사진적인 성격에서 점차 탈피하여 보다 회화적이고 보다 그래픽적인 것이 되고 있다. 촬영보다는 후반작업을 통한 이미지 보정이 더 중요한 작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람들도 점차 화면에 나타난 볼거리들이 현실과 어떠한 연관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 과잉화, 과부하, 과노출된 정보 속에서 점차 사람들이 의미와 멀어지게 되면서 그 대신 표면 스펙터클, 세부 사항과 형식의 움직임과 놀이에 순전히 매혹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잠시의 침체기를 보였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화려한 시리즈물을 내세우며 다시금 세계 시장 전략에 나선 까닭도 이러한 현재의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과거에는 자본과 흥행 배우, 탄력적 서사를 앞세워 세계적인 시각 평균을 만들어나가던 할리우드 영화는 이제 기술과 육체, 환상적 스펙터클을 내세워 대중들의 감각을 선동한다. 이미지들의 황홀경에 빠진 관객들에게 관람의 행위란 19세기 말에 그러했듯이 일종의 현혹의 의식이다.
과거에 극장은 삶의 깊이를 전달하는 공간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일종의 ‘인생극장’이었다. 그러니 현재의 멀티플렉스의 대형화면은 이미지의 황홀한 표피를 제공하는 시각적 환영술의 극장이 되어 가고 있다. 과거의 극장이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적이었다면 동시대의 극장은 만화경(Kaleidoscope)적이다. 깊이의 공간에서 표면적 이미지들이 그 자체의 반복과 반사를 보여주는 폐쇄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환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심령술과 결합했던 ‘시각적 영화’의 전통에는 그러한 경이와 환상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것들을 드러내는 징후를 보여주는 관람의 관습이 있었다. 종교와 합리주의가 해명하지 못하던 대중들의 무의식이 영화 관람을 통해 드러났으며,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인 심리체험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가장 화려한 디지털 영화의 체험이란 단지 표면의 시각적 자극기호들을 무자각적으로 수용하고 쾌락을 느끼는 단순한 시청각 체험이 되는 데 머물고 있다. 이러한 표면의 황홀이 실천과 연관되는 전복적인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대형화면이 아닌 개인들에게 사유화된 스크린들에서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인가. 과잉의 과잉 양식으로서의 스펙터클에 전방위로 포위된 관객들의 수동성을 구원해줄 방법은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송효정
제11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저서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1-멜로드라마(공동집필). 상명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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