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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순
찬스

그런 집요한 눈빛은 보내지 말아요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내게 오든지 난 두려움 같은 건 예전에 버렸어요
내가 배트를 들고 오리궁둥이를 흔드는 동안 당신은 캐츠의 사인을 받고 머릿속을 굴리죠 그러다가 번쩍이는 두뇌로 당신이 내게 달려올 때면 나는 번개보다 빨리 배팅 여부를 결정해야 해요
그러나 섣불리 내가 배트를 내밀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이 정중하게 직 코스로 나를 시험한다고 해도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당신을 걸려 보내기도 해요
물론 당신의 교란에 말려들 수도 있어요
당신이 커브나 너클로 휘어져 내게 머리를 들이밀 때면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판단력이 없어져요 엉겁결에 내민 배트가 헛스윙이 되고 내 헛웃음은 허공에 별처럼 박히죠
그 순간 당신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는 걸 난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요
하지만 어느 한 순간도 내가 배트를 곧추세우지 않을 때가 없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해요
다이아몬드 그릴에서 당신이 내게 보이는 틈과 내가 당신에게 보이는 집착이 익어가며 관중에게 군침을 삼키게 하고 있죠  
그러나 위기일발의 순간에 심판이 결정하는 콜에는 당신과 나 무조건 박수를 보내야 해요
지금 저쪽 전광판을 보세요 당신과 나의 신경전이 치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군요
이젠 당신과 나 피할 수 없는 한 판의 운명적 대결을 할 수밖에 없네요
내가 잡히느냐구요
물론 당신 앞에 내가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요
숱한 좌절과 절망들이 뒤엉킨 빙판 위에서 나는 수없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졌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당신을 쏘아보고 있어요  
내 눈 앞으로 시속 158km로 달려오는 당신이 훤해지고 있어요
내 두 팔에 힘이 실려요 실렸어요
아 내가 노렸던 그 필생의 목표에 움츠리고 흔들렸던 배트가 힘찬 배팅을 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맞았나요
그랬군요 당신이 번쩍이는 두뇌에 날개를 달고서 장외로 훨훨 날아가고 있어요
관중석 아우성이 펄럭이나요 우군이 무아도취에 빠져드나요    
쓰리 런이라는 팡파르가 전광판을 온통 붉게 물들이면서 역전이라는 도가니 속에 내가 휩쓸려 다녀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던 나를 위해 오늘 밤 나는 붉은 샴페인을 온 세상에 폭죽처럼 터뜨려야겠어요



서리*
-일본 아이누 족

이곳은 사계절 내내 길에 서리가 서려있다

이 현縣에 들어서는 모든 이들은
한 번쯤은 누구나 서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한다
번뜩이는 면도날 위를 건너 가야하는
민달팽이의 그 매섭고 비장한 서릿발 선 각오를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야 한다
벼랑 끝에서 등 뒤 야수의 숨소리를 느낄 때까지,
어떤 날은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는 불기둥 위에
양철집을 지을 때까지
서리의 한이 길 밖으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문명의 발자국이 한 번씩 서리위에 불도장을 찍을 때마다
그들은 가슴을 옥죄며
아낙들은 아이를 업고 이훈케*를 부르고
사내들은 뭇쿠리*를 연주하며
그들의 우타리* 안에 날이 선 서리꽃을 피워 올린다
서리에 길들여 있지 않은 이들은
이 낯선 서릿발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곧 서리 안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투명하고 하얗게 반짝이게 된다
작은 바람에도 경계심을 세우며
그들의 서릿발은 허연 이를 드러낸다
서리는 이 현縣의 800여 년 전부터 쌓아올린 성이다
밀리고 사라지면서도 그들은 서리 안에 가늘고 질긴
피돌기를 멈추지 않으며
그들만의 성역을 그렇게 지켜내는 것이다
서리의 성긴 틈이 보이기만 하면
사내들의 어깨는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고
아낙들은 행주치마 안에 가난하고 힘없는 그들의 역사를
쟁여가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서리가 언제까지 반짝일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서리   : 한국에서는 속에 품은 한을 서리로 표현함  
*이훈케 : 아이누족의 자장가
*뭇쿠리 : 아이누족이 부는 악기의 일종
*우타리 : 동료, 동지



강윤순
2002년 ≪시현실≫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