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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계간평(시)/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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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13회 작성일 08-03-01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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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악기여, 잘 있거라.

조하혜|시인


∙정서영, 「유리벽 안에서」(≪리토피아≫, 2007년 가을호)
∙최정례, 「혹시나 해서」(≪시안≫ 2007년 가을호)
∙김소연, 「사의 찬미」 中에서(≪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
∙김록, 「바닥」(≪문학과 사회≫, 2007년 가을호)
∙강성철, 「곡비와 팽이」(≪詩作≫, 2007년 가을호)
∙박진성, 「아라리6」 中에서(≪문학사상≫, 2007년 10월호)
∙김언, 「두 도시 이야기」 中에서(≪시와 사상≫, 2007년 가을호)
∙김행숙, 「하늘의 길」(≪시와 사상≫, 2007년 가을호)
∙이장욱, 「아침의 발견」(≪시와 사상≫, 2007년 가을호)


1. 근대적인, 너무도 근대적인 
2000대 이후 한국의 현대시는 그야말로 각개전투의 장이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적 화두가 사라지고 각기 다른 개인의 내면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쉽게 이해되거나 환산할  수도 교환될 수도 없는 내면들은 특유의 고백적 성격을 넘어 타자의 다성적 고백들을 재생산해내기에 이르렀다. 소통의 불통이 불통의 소통을 만들어내는 현장에서 새로움에 아직까지도 목말라하는 이들은 더 극심한 갈증을 느꼈으며, 소통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고수하려는 이들은 어느 때보다 문법의 실효성과 문학의 진정성에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사회 현실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때보다 권리 찾기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동반되었다. 소외되어 왔던 변두리 의식의 중심에서 권리 찾기의 목소리를 통해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해체되었으며 급기야 권리 탈환에서 주류로, 그러니까 아웃사이더에서 주류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문화적 현상은 타자의 힘을 과시하며 낡은 전통에 대한 회의와 종언을 예고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그동안 수없이 강박적으로 논의되었던 ‘근대’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각개 전투의 내면들을 쏟아내며 비로소 근대적인 현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일상성과 사회주의 혁명의 축제의 시간을 넘어, 역사 ․ 사회적 문학으로서의 고단한 소임을 벗어버리고 존재의 울림과 시원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문학의 기원에조차 의문을 제기하며 근대 문학의 문학적 기원과 결별하려는 것이다. 
이때 근대문학의 문학적 기원에 대한 회의 속에서 주체의 동일성에 대한 비판은 근대 문학을 구성한 주체의 시각적 구성방식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 정서영의 시 「유리벽 안에서」는 주체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러한 시각성이 폭력적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벽 안에서 나는 

베란다 쪽을 바라본다
저만치 아래 그가 보인다 
작은 분수 안에 두 발을 담근 채 쭈그리고 앉아 
아이비 잎에 얼굴을 반쯤 가린 그가. 

소철이 그의 머리를 찌르고 있다

(그를 편한 자리에 있게 하고 싶어)

나는 오른쪽으로 옮겨 앉는다 
늘어진 소철잎이 그의 얼굴을 찌른다

왼쪽으로 앉는다 
그가 목 밑까지 관음죽으로 덮인다 
조금 뒤로 물러 앉는다 
뒤엉킨 화초의 줄기와 잎들이  
그를 몽땅 가린다 

앞쪽으로 바짝 다가 앉아본다 
...............
...............

나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곳에서 
그와 딱 마주친다 

그는 여전히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정서영, 「유리벽 안에서」(≪리토피아≫, 2007년 가을호)

이 시에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벽’ 사이로 시적 화자인 ‘나’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아이비 잎에 얼굴을 반쯤 가린 그’는 ‘나’의 위치 때문에 ‘소철’에 ‘머리’를 찔리는 상황에 처한다. 그를 ‘편한 자리에 있게 하고 싶어’ ‘나’는 자리를 ‘오른쪽’으로 옮겨보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 ‘소철’이 ‘그의 얼굴’을 찌르게 된다. 따라서 ‘나’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위치를 바꾸는 것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그’의 ‘앞쪽으로’ 다가가 ‘그’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는 ‘여전히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불편한 자리’가 암시하듯 인간의 만남이 불가능한 상황을 드러낸다.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를 주체와 타자의 피 흘리는 투쟁으로 이해한 샤르트르처럼 주체 형성의 시각적인 장에서 타자는 소외되어 나타난다. 
이때 ‘불편한 자리’는 ‘나’와 ‘그’라는 호칭처럼 나와 그가 엄연하게 다른 세계, 즉 상징계의 질서를 의미한다. 프로이드는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편한 자리’의 꼭대기에 ‘아버지’를 모셔두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문명의 불편을 설명한다. 아버지에게 도달하기 위해, 불편한 자리의 꼭대기에서 아버지를 거세하기 위해 그대는 프로이드의 경전에 기대어 불안과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과 절망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매달려’ 방황하지는 않았던가. 최정례의 시 「혹시나 해서」는 이 ‘불편한 자리’를 감내하며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고단한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오랜 시간 문명과 개인의 정체성 형성의 계기로 작동되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허위를 드러낸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매달려 
쓰다듬고 끌어 안고 
그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중략)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잠시 거기에 
아무 것도 아닌 그 곁에 가만히 마침표처럼 

그를 얻기 위해서라면 
턱뼈를 깎고 눈꺼풀을 뒤집고 
척추를 늘여서라도 

제발 
아무 것도 아닌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그가 그리워

아무 것도 아닌 거라니?
그를 위해 그 동안을 살아왔는데 
아무 것도 아니라니 그럴 리가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는 것
   ― 최정례, 「혹시나 해서」(≪시안≫ 2007년 가을호) 

‘아무 것도 아닌 아버지’를 얻기 위해서 이 시의 시적 화자인 ‘나’는 ‘턱뼈를 깎고 눈꺼풀을 뒤집고 척추를 늘여서’라도 ‘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행동, 즉 ‘아버지’찾기는 ‘내 자리’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때 ‘아버지’라는 표상은 ‘내 자리’를 함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를 이 시의 시적화자는 ‘아버지’라는 표상을 통해 설명한다. 그런데 문득 자신의 정체성의 계기로 작동되었던 ‘아버지’가 ‘아무 것도 아닌 것’, 즉 허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를 위해 그동안을 살아왔는데/아무 것도 아니라니 그럴 리가/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는 놀라움과 부정의 고백은 이 시의 제목처럼 ‘혹시나 해서’ 살아온 고단한 삶을 클로즈업하면서 ‘아버지’라는 정체성의 계기가 허황된 것임을 폭로한다. 
이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잠시 멍해진다. 80년대 자본주의적 일상성을 비판하며 등장했던 사회주의 일상성의 용어들 속에서 친근했던 동무의 이름은 혁명적 투사의 이름이 되었으며, 시대적 명분 속에서 사랑은 유치한 개인의 감정놀음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리고 9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소비적인 삶이 가열화 되었을 때 의식 세계의 심층에 가려진 인간의 욕망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의 계기로 작동되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 개인의 절망이 다루어져왔음을 생각해볼 때 이들 모두 전체주의적인 정체성의 계기를 통해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역으로 인간의 가치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정치적 혁명과 무의식의 혁명 속에서 시적 혁명은 외연적으로 혁명의 세계를 모방했으나 김수영의 말대로 진정한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버린’ 셈이 된 것은 아닌가. 
혁명의 세기, 즉 한 시대를 지배했던 근대적인 세계의 장황한 아버지들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각성 속에서 근대적인 자아와 결별하려는 이와 같은 시의 몸짓은 주체의 시각성과 이분법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소외되어 왔던 타자를 재사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때 병든 타자를 대면하는 자아의 모습은 황폐할 수밖에 없다. 출구가 없는 문을 향하여 아무런 전망도 기대하지 않는 법이라니. 전망 없음의 전망에 기대어 당신의 늙어가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닮은 봄날은 왜 그리 징그럽고 혹독하게 계속되어야만 하는가? 김소연의 시 「사의 찬미」는 ‘봄날’이라고 하는 심리적 계절, 즉 전망 없음의 전망을 상징하는 시간적 계기를 통해 절망적인 타자와 연대된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을 본 후로 나에겐 모습이라는 말보다 몰골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고 살다 보니 기다림 따위는 버려지지 않고 낡아가는 만년 달력이 될 뿐이더라고 당신 또한 마찬가지인 거라고 이 소리를 들으면 또 당신은 복수를 하느라 아름답고 말겠지 온갖 잡것들이 소생하는 봄날처럼 징그럽게 혹독하게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만날 사람 다 만나며 내가 도착해 있는 곳을 둘러보나니 당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으셨던 나와 당신을 기다리며 치는 화투 같은 나의 시와 짝짝 패가 붙어 끝발이 오르는 시를 치는 벗들과 당신이 펴놓은 명당에 둘러앉아 나누는 기쁨과 낙관에 대한 이 요란한 교류들과 달빛을 세 살로 두르고 만취한 채 엎어진 술병들과 눈 앞에 나타나자마자 작살이 나는 거나한 육고기들과 

문 열어라 이것도 끝이라면 끝이고 집이라면 집이라니 문 열어라  
―  김소연, 「사의 찬미」 中에서 (≪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

이 시에서 ‘당신’의 황폐한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시적 화자인 ‘나’의 모습은 ‘몰골’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황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병든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동안 자아의 모습은 병든 타자의 모습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당신을 기다리며 치는 화투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시적 화자는 죽음과 같이 어두운 전망인 ‘명당에 둘러앉아’ ‘술병들’과 ‘거나한 육고기들’에 취해 있다. 그러나 전망이 부재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작렬하는 삶에 대한 욕망을 응시하며 전망 없음, 출구 없는 ‘문’과 ‘끝’이라는 인식 속에서 절망의 미학을 찬양한다. 그런데 이때 ‘문 열어라 이것도 끝이라면 끝이고 집이라면 집이라니 문 열어라’라는 외침은 시의 사제라고 불렸던 미당 시의 한 구절―  문열어라 꽃아― 을 연상케 한다.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 같은 근대적 미학의 수사 앞에서 현대시는 오랜 시간 피폐한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상처를 위무해 오지 않았던가. 나아가 시의 육체성은 근대적 미학의 이러한 위무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대적 미학의 위무 속에서도 ‘몰골’과 같이 낡아가는 시의 육체성은 왜 한 치도 새로워지지 않는가? 토대와 층위에 대한 고단한 해석으로도 왜 현실은 더 이상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  
   
2. 낡은 악기, 혹은 낡은 육체성의 필사    

의자는 궁둥이를 아파하고 
때론 온몸을 아파하고 
침상은 등을 아파하고 
때론 온몸을 아파하고 
신발은 두 발을 아파하고 
때론 온몸을 아파한다

의자가 없어도 궁둥이는 아파하고 
때론 의자가 없어서 궁둥이는 아파하고 
침상이 없어도 등은 아파하고 
때론 침상이 없어서 등은 아파하고 
신발이 없어도 두 발은 아파하고 
때론 신발이 없어서 두 발을 아파한다 

아프다고 했는데 계속 앉아 있고 
아프다고 했는데 계속 누워 있고 
아프다고 했는데 계속 걷고 있다 
무언가 아프다고 했는데
― 김록, 「바닥」(≪문학과 사회≫, 2007년 가을호) 

이 시는 ‘의자’와 ‘침상’, ‘신발’과 같이 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발명한 이기에 의해서도 ‘몸’이 처한 고통의 상황이 처음부터 개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드러낸다. ‘의자가 없어도 궁둥이는 아파하고/침상이 없어도 등은 아파하고/신발이 없어도 두 발은 아파하고’의 상황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계속 앉아 있고/계속 누워있고/계속 걷고 있다’의 상황은 지속된다. 왜냐하면 이 시의 제목처럼 이러한 몸의 총체적 고통은 ‘바닥’이라는 공간성의 상황에 의해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닥’에 존재하는 동안 인간의 고통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이러한 총체적 고통의 상황은 총체성에 대한 루카치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물질적인 상황을 지시함으로써 고통의 원인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나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토대 위에서 비롯되었음을 드러낸다. 정신주의적인 시의 가치를 일면 부정하는 김록의 시에서 지독한 현실인식을 목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새로울 것도 없는 서러운 노래를 필사하는 것. 낡아가는 몸의 육체성을 통해 오랜 시간 낡은 악기는 ‘살기 위하여/울기 위하여’ 노래했던 것이다.  

곡비는 살기 위하여 울고 
팽이는 울기 위하여 산다. 
그리하여 곡비는 밥 먹다가도 울고, 
잠 자다가도 울고, 심지어는 웃다가도 우는데,
울음이 서러울수록 울음의 값도 높아만 간다. 
타인의 죽음을 위해 실컷 울어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질긴 삶이었던 곡비. 

팽이는 울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깎으면서 울고, 더 울기 위하여 
한겨울 꽁꽁 언 얼음장 위에 내던져진 채, 
부단히 자신을 채질찍하며, 뜨거운 눈물을 삼킨다. 
맞을수록 온몸으로 하늘을 빙빙 이고 돌며, 
이를 악물고 울어대는 팽이. 

굴곡진 삶의 뒤안길을 돌아, 돌아오면서 
나는 그동안, 살기 위하여 울어왔는가? 
아니면 울기 위하여 살아왔는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자웅동체인양 
곡비와 팽이가 징징 울고 있다.     
― 강성철, 「곡비와 팽이」 (≪詩作≫, 2007년 가을호)

이 시에 등장하는 ‘곡비哭婢’는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집에서 초상이 났을 때 주인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계집종을 말한다. ‘살기 위하여’ 우는 ‘곡비’의 삶과 ‘맞을수록 온몸으로 하늘을 빙빙 이고 돌며/이를 악물고 울어대는 팽이’의 삶이 ‘자웅동체인양’ 제 ‘마음 깊은 곳’에 있어 울어대고 있다는 시적 화자의 고백은 시인의 삶이 살기 위하여 우는, 울기 위하여 사는 서러운 악기의 삶임을 드러낸다. 
이때 서러운 삶을 필사하는 서러운 노래는 전통적인 시의 육체성을 관통하는 ‘거대한’ 목소리가 되어 서러운 삶의 내력들을 불러낸다. 그런데 전통적인 시의 육체성 속에서 ‘물’을 흡수하는 ‘나무’의 ‘근육’처럼 ‘아픈 사람’을 끌어당기는 시의 흡인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박진성의 시 「아라리․6」은 이러한 성격을 드러낸다.     

거대한 나무가 가지 끝까지 잎잎이 물기를 적시듯 온다

제 힘이 아닌 듯 애초부터 내 것과 네 것 구분이 없었다는 듯 사랑인 듯 공포인 듯 (중략)

게으른 듯 격렬하게 아픈 사람을 잡아당긴다 새벽 강가에 서보면 안다 불수의근육이어서 멈추지도 못하고 양각인 듯 음각인 듯 천지간 새겨 넣고만 싶어서 (중략)

경계를 막 밟으면서 나무는 마침내 江의 근육이 된다 사랑도 근육이어서 나는 내가 아픈지도 모르고 경련인 듯 

음악인 듯 강물에 빠져들어서 남은 실뿌리를 죄다 풀고 싶은 것이다.
― 박진성, 「아라리6」 中에서 (≪문학사상≫, 2007년 10월호)

이 시에서 ‘애초부터 내 것과 네 것 구분이 없었다’라는 것은 ‘사랑인 듯 공포인 듯’이 암시하듯 현대인들에게 시의 전통적인 육체성이 낯선 경험, 즉 ‘공포’에 가까운 상황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아와 타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시적화자는 차이를 부정하고 ‘경계를 막 밟으면서’ ‘江’을 흡수해 마침내 ‘江의 근육’, 즉 ‘사랑의 근육’에 도달하고자 한다. ‘나무’가 지상에 뿌리박혀 있음의 상황을 넘어 ‘江의 근육’이 된다는 것은 ‘제 힘’이 지시하는 ‘나무’의 한계를 넘어 ‘강물’이나 ‘음악’과 같이 근원적인 존재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라리’는 ‘나를 넘겨 주소~’의 가사처럼 근대적 주체로서의 존재방식, 즉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차이의 존재방식을 넘어 ‘음악’과 ‘강물’과 같이 ‘애초부터 내 것과 네 것 구분’이 없는 근원적인 존재성에 대한 지향인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존재성을 회복하려는 오래된 시의 육체성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주체로서 한 치도 새로워지지 않는 현실의 엄연한 차이 속에서 오늘의 현대시는 문학의 기원에서 벗어나 오래된 시의 육체성에 대해 폐기를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근대적 주체에 대한 부정뿐 아니라, 낭만적 주체에 대한 부정을 통한 탈근대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이후 현대시는 불연속적인 세계의 여행 지도를 통해 지극히 근대적인 도식들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불연속 세계의 여행지도와 근대적 도식의 재확인     

우리는 두 도시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는 두 도시 사이에서 개인적인 과거가 있는 사람들을 압니다. (중략)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두 도시 사이에 없나 보군요. 네 우리는 길을 잃는 법을 몰랐어요. 이쪽이 아니면 저쪽에서 버스가 몰려왔어요. 기차는 약속시간을 안 지키고요. 나는 열차를 타고 내리는 방법을 모르는 한 노파를 실어주고 두 도시 사이를 떠나왔어요. 아 두 도시로 사이로 돌아온 느낌은 어떤가요? 두 도시 사이에서 떠나온 사람들은 말 못하는 불만이 많아요. 가령?  두 도시 사이에서 배운 말씨를 버리기. 두 도시 사이에서 사라지는 냄새를 두고 오기. 가져오지 말아야 할 것과 가져와야 할 것을 구분해서 지갑을 열기. 입을 다물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진실로 화내지 말기. 아무튼 술값은 치르기. 개인적인 과거는 사생활의 차원에서 고백하지 말기. 가끔은 실수하기. 가끔은 주정하기. 가끔은 도망 다니기. 가끔은 앞에 가는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고 반가워하기. 
아 모르는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불쾌함은 두 도시 사이에서 몽땅 버리고 왔으니까요. 기차에서 내릴 때 짐이 없었으니까요. 버스는 언제 처음 타보셨나요? 두 도시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다음날. 나를 데리고 온 건 버스였어요. 나를 데리러 온 것도 두 도시 사이에서 출발한 버스였어요. 이쪽이 아니면 저쪽에서 길을 잃은 거니까요. 아 다음부터는 복잡한 신작로를 사랑했겠군요. 네 이곳의 지하철보다 단순하지는 않아요. 두 도시 사이에서 우리들의 과거는 우리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아 그때가 풍요로웠군요. 네 전혀 기억이 없어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기차가 지나가면서 소리를 칩니다. 차창 밖으로 참으로 조용한 버스가 지나갑니다. 아 그곳의 지리에 밝은 버스였군요. 네 너무도 밝은 버스였습니다. 다음날 에도 그 다음날에도 심야버스를 타고 떠나온 우리들이 많아요.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요? 이쪽이 아니면 저쪽에서 손을 흔듭니다. 저쪽이 아니면 이쪽에서 두 도시를 애기합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타고. 
― 김언, 「두 도시 이야기」中에서 (≪시와 사상≫, 2007년 가을호)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두 도시’ 사이에서 ‘태어난’, 그리고 ‘두 도시’ 사이를 떠난 사람들의 다성적인 목소리를 통해 ‘두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때 두 도시 사이를 떠나온 사람들은 ‘두 도시 사이에서 배운 말씨를 버리기/두 도시 사이에서 사라지는 냄새를 두고 오기’등을 통해 ‘풍요’로웠던 ‘과거’의 기억마저 지워버린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심야버스를 타고 떠나온 우리들이 많아요’라는 고백처럼 풍요로운 과거를 뒤로 하고 계속해서 두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이 아니면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저쪽이 아니면 이쪽에서 두 도시를 얘기 합니다’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타고’의 상황, 즉 미래로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문득 이 시를 읽다가 ‘기차’와 ‘버스’의 여행 지도를 따라 가던 것을 잠시 멈추고 ‘두 도시 사이’의 풍경을 둘러보기로 한다. ‘두 도시’라니? 애초부터 두 도시를 떠나온 이들은 고향의 연대감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의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두 도시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공통된 조건, 즉 떠남을 통해 이들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가 두 도시 사이를 떠나온 사람들의 떠남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즉 그들은 ‘과거’의 시간과 단절하고 미래의 시간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두 도시’를 떠나왔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되어 서로 서로를 구속하는 연대적인 관계의 ‘불쾌감’을 벗어버리고 어느 누구도 주체를 고집하지 않는 차이의 타자로서 존재하기.  

물 속에서 물 밖으로 2분 1초 후에 올라온 P의 얼굴을 본 순간, 
아, 이 얼굴은 무엇인가.      

3년 후, 비행기는 무서워 탈 수 없다고 P는 내게 말한다.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사진에서 본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나는 P에게 말한다. 여기서 헤어지자고 P는 내게 말한다. 3년이 지나면, 나는 P에게 편지를 쓰지 않게 된다. 

모든 게 비행기 때문이라고, 나는 물 속으로 들어가는 P에게 말한다. 물 밖으로 나온 P는 숨을 멈추는 고통과 숨을 쉬는 고통이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P에게 모래를 뿌린다. 

3년이 지나면 나는 P에게 모래를 뿌리지 않게 된다. 3년이 지나면 나는 다른 해변에서 더 고운 모래를 덮고 눕는다. 모래를 덮치는 구름. 비행기와 비행기와 해가 질 때의 비행기. 구름 속에서 꺼내 보여주는 가짜 여권들. “좋습니다.” 그런 끄덕임. 

목 아래의 더 큰 가슴과 팔다리는 모래, 목 위는 얼굴, 비가 와서 나는 찡그렸다.  
― 김행숙, 「하늘의 길」 (≪시와 사상≫, 2007년 가을호)

앞에서 살펴본 김언의 시가 ‘버스’와 ‘기차’의 여행 지도를 통해 타자의 존재방식을 드러냈다면 김행숙의 시는 ‘비행기’가 상징하는 ‘하늘의 길’을 통하여 낭만적 주체와 결별하는 시적 화자의 몸을 통해 낭만적 주체의 육체성에서 벗어나 신체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드러낸다. 즉 분할된 신체를 통해 전통적인 시의 육체성, 즉 유기적이고 낭만적인 몸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물’의 삶이 익숙한 ‘P’는 지상에 뿌리내린 유기체적인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와 너가 구분되지 않는 근원적인 삶의 존재방식을 지향하지만 ‘물 속’과 ‘물 밖’의 공간을 방황하는 낭만적 주체에게 유기체적인 몸에 대한 염원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때 ‘모든 게 비행기 때문이라고’ 시적 화자가 ‘P’에게 결별을 고백하는 것은 낭만적 주체, 즉 낡은 육체성의 고통에 연대된 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비행기’의 공간성을 통해 시적 화자는 낭만적 주체에 연대된 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분할된 신체의 존재방식을 통해 근대적인 미학인 낭만주의적 세계관과 영영 결별하려는 것이다. 
르네상스로 인한 휴머니즘의 가치에 반대하여 불연속적인 세계관을 설명한 흄의 지적처럼 탈근대를 지향한 이러한 시들은 합리적 주체에서 오히려 오랜 시간 낭만주의로 신화화한 근대 주체에 대해 비판한 것은 아닐까. 이때 이장욱의 시 「아침의 발견」은 불연속적인 세계의 풍경을 드러낸다.

(중략)
그림자들에게는 그림자들의 세계가 있고 
음악에게는 음악의 세계가, 
나는 또 나도 모르게
내 손끝에서 자라난다
저녁의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고 
나는 밤새도록 태양의 주위를 천천히 
이동했을 뿐이지만, 
  
오늘은 아침마다 달걀을 사러 가는
19세기의 여자가 보인다. 
여자가 무심하고 긴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런 아침이다. 
― 이장욱, 「아침의 발견」 (≪시와 사상≫, 2007년 가을호)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고한 고진의 말처럼 흡사 오늘의 현대시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고하기 위한 학교 종이 땡땡땡처럼 근대 문학과의 결별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장욱의 시에서 ‘19세기의 여자’를 보는 일이 불쾌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강박적으로 문학의 근대성에 사로잡혀 문학을 호도했던 일, 나아가 최첨단의 문학을 기대하며 시류에 기대어 문학적 경험이 다른 작가와 작품들을 소외시켰던 일, 문학을 정치적․사회적 장을 아우르는 거대한 혁명의 목소리로 오인했던 등등의 일련의 문학적 사건 속에서 불연속적인 세계의 ‘아침’을 바라보는 일. 이때 ‘그림자들에는 그림자들의 세계가 있고/음악에게는 음악의 세계가/나는 또 나도 모르게/내 손끝에서 자라난다’는 고백은 이러한 불연속적인 세계를 일련의 문학적 사건들의 이합, 집산을 통해 결산하려는 시적 화자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적인 세계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여자’가 함께 걸어가는 아침 풍경을 통해 시적 화자는 탈근대적인 양식과 근대적인 양식이 혼융된 ‘아침’의 풍경을 발견한다. 
그런데 탈근대 지향에도 불구하고 김언과 김행숙의 시가 여행의 도식을 통한 타자의 존재방식, 나아가 낭만적 주체(유기체적인 몸)에 대한 부정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도식을 재확인하는 데 반해 다양성의 타자를 통해 불연속적인 세계의 풍경을 발견함으로써 이장욱의 시는 근대적 도식의 확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이미 지난 세기의 풍경임을 인식한다. 이때 그가 다양성의 타자를 통하여 ‘아침’의 발견을 예언한 것은 불통의 소통과 소통의 불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소통의 ‘아침’을 통해 현대시의 미래를 전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체에 대한 부정 속에서 자아와 타자의 피 흘리는 투쟁으로부터 현대시가 결별의 징후를 반복적으로 감내하고 실행하는 것, 나아가 현실반영의 문학적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리를 발견하는 것은 악기가 제 공명의 소리에 도달해 소리를 잃고서 마침내 여러 다른 악기의 소리에 반응하는 해금의 현대적 변용의 원리처럼 근대적 공명을 버리고 새로운 소리의 공명을 발견하려는 현대시의 징후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악기의 계절이었던 눈물과 낡은 악기의 몸과 결별하며 오늘의 현대시는 화음과 불협화음의 일상을 넘나들며 생의 컷과 컷 사이를 질주하는 경주를 비로소 시작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하혜
1972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와 울지 말아요, 비둘기가 있다. 성신여대, 한양여대, 백석대 등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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