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8호 서평/임지연
페이지 정보

본문
|서평|
■김행숙, 이별의 능력(문학과 지성사)
■이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문학과 지성사)
감각의 세계에서 기화氣化하거나 질주하는
임지연|문학평론가
감각은 타자적이다. 감관에 닿는 다른 것을 감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를 만질 때조차 감각은 타자의 자리를 요청한다. 가령 메를로 퐁티가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을 말할 때 그렇다. 나의 왼손과 나의 오른 손이 서로 만질 때, 손들은 만지는 주체이자 동시에 만져지는 타자의 자리를 동시에 점유한다. 아니 점유한다기보다 만짐과 만져짐은 떨리는 파동처럼 끊임없이 요동치며 자리를 교환한다. 감각이 가지는 지향적 관계는 타자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다.
김행숙과 이원의 시는 감각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감각은 주체들의 감각도 아니지만 타자적이라는 감각의 필연적 전제를 슬쩍 비껴나가기조차 한다. 이들의 시적 기획은 무엇일까? 시적 기획이라는 말은 시의 계몽이라는 그림자를 설핏 드리운다. 시적 계몽이라는 말의 사정은 이렇다. 최근 미래파적 경향 속에 있는 시들은 일정한 시적 문법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위문화적 상상력, 근대적 주체의 부정과 다른 주체의 발명, 감각의 실재에 대한 믿음, 전통적 서정에 대한 절대적 불신,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낯설게 쓰기 등등. 이들이 단일한 유파를 형성한 것은 결코 아니며, 각각의 미학적 특이지점을 형성하면서도 공동의 지대에 흩뿌려져 있다고 할 때 그 공동지대는 공통성을 함께 전유한다. 그래서 때로 “지겹다”(진은영)라는 내부적 고백을 불러오기까지 한다. 이들 시에 대한 공동의 기획은 계몽의 차원에까지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 서정(시)을 확대하거나, 파괴하거나, 그 바깥을 발명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하기 때문이다. 모험은 시의 운명이기는 하나, 모험은 히드라를 격퇴하려고 떠나는 헤라클레스의 영웅적 몸짓을 닮을 수도 있다.
여기는 미래파 시의 계몽성을 말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두 시인의 시적 기획을 말하는 것은 이원이 미래파적 경향을 선취하고 있었다면, 김행숙은 미래파 시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장 안에 있는 시들이기 때문에 그 자장의 흐름을 떠나서 이들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두 시인의 시는 감각의 세계에 있으면서 감각이 가지는 타자성을 비껴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체와 타자라는 이항화 된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에게 주체는 타자처럼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의 감각은 주체도 타자도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체나 타자를 완전히 무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존재하되 이항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것은 이들의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는지를 들여다볼 때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다. 씌어지되 곧 흩어지려는 언어적 의미들이 운동하는 방식은 천천히 또는 속도감 있게 감각할 필요가 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김행숙의 시는 감각으로 넘쳐난다. 이때 감각은 축복의 폭죽이 터지는 향연의 자리가 아니라, 조금씩 사라지거나 기화되거나 지연되는 정거장 같다. 본래 감각은 선명한 것일 수 있다. 신체라는 물질적 감각 덩어리에서 벌어지는 물리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아프거나 간지럽거나 달콤하거나 향기롭거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실재적이다. 그러나 김행숙 시의 감각적 실재는 모호하다. 분명한 물리적 자극에서 비롯되는 감각의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가능성 또는 잠재적 차원에 있는 감각이다. 김행숙의 시가 갖는 모호한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발원된다. 자극이 있는 신체적 감각이되 모호한 잠재적 감각들의 교향악!
김행숙 시의 감각은 모호하기는 하지만 동적으로 움직인다. 움직여 나가되 천천히, 서서히, 한없이, 점점이라는 부사적 용법이 사용되는 움직임의 지연, 움직임의 기화氣化. 어떤 것으로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무한대로 늘어뜨려서 그것을 점차 희박하게 하기.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동적인 움직임을 갖는다.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의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 「이별의 능력」 부분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다정함의 세계」 전문
모호한 운동성. 인용시를 보면 문장의 대부분이 동사적 용법을 취한다. 태우다, 피어오르다, 타다, 되다, 끓다, 떠나다. 그리고 녹다, 없어지다, 희미해지다, 솟구치다, 다가가다. 언어는 분명 동사적으로 운동한다. 의미는 운동성을 나른다. 그런데 움직임의 운동성은 격렬하지 않다. 그것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희박하게, 한없이와 같은 부사의 용법과 함께 하는 운동성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움직임의 기화氣化, 움직임의 지연 또는 유예이다. 물론 움직임은 소멸을 향하지는 않는다. 존재들이 천천히 자신을 움직여나가거나 변화시켜가되, 자신을 지연시키면서 부지불식간에 다른 존재로 변화되기.
김행숙 시의 운동성은 감각의 차원에 있다. 감각이란 신체와 관련한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살의 물질적 감각을 내포한다. 특히 그의 시는 분자적 차원의 물질성이다. 잘고 미세하게 분해되어 에너지를 갖지만, 어떤 형태를 이미 갖고 있는 사물이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차원의 물질이다. 이 물질성에는 어떠한 목적성도 내장되어 있지 않다. 잘게 분화된 물질성은 그 무엇도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잠재적 사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동사적이되 지연되거나 희미해지거나 없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간다.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이 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인용시를 보자. 시는 어떤 구체적인 정황을 갖지 않는다. 서사적 맥락은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불연속적인 맥락이거나 순간의 사건이다. 내가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이 될 때, 그 순간 모락모락 피어나는 감각적 정황들일 뿐이다. 감각의 정황이란 가능한가? 그 정황을 포착하고 감각화할 수 있는가?
내가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이 될 때, 나는 누구일 수 있는가? 시에 의하면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이다. 잠재적 정황들이기 때문에 시간은 지연된 현재이거나 도래하지 않은 미래이다. 어떤 시간이든 그것은 현재적 시간에서 발생하는 현실적 사건이 되지 않는다.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라는 지연된 현재이거나, “당신을 태울 거야”라는 미래의 시간으로 실현된다. 그럴 때만이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이라는 주체의 선언이 진실이 된다. 동사적이지만 지연되거나 희미해지거나 기화하려는 언어의 물질성은 주체의 성질과 관련한다. 모호한 감각이 그것을 실어나른다.
「다정함의 세계」를 보자. “녹는다”, “없어지고”, “희미해진다”, “솟구쳐오른다”, “한없이 다가간다”라는 동사적 용법이 사용되고 있다. 역시 지연되거나 희미해지거나 없어지려는 움직임을 내포한다. 동적이되 모호한 움직임들은 “다정함의 세계”라는 감각적 정황을 발견한다. ‘다정함’이란 일반적으로 대상과 친밀해짐, 가까워짐, 연대함과 연관된다. 시는 다정함과 관련되는 개념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감이라는 감정을 배접하고 있다. 그러나 다정함의 세계는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의 정황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도중의 미세한 감각을 포착하고 있다.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감이란 어떤 목적지에 도착함일 것이다. 그러나 시는 대상에게 가되, 대상을 목적지로 삼지 않는다. 대상에게 가까이 가는 도중의 시간을 무한대로 늘어뜨리며 그 목적지를 유보하며 이탈한다.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를 보라. 서로 다가가지만 결국 다가감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한없이”라는 한정어가 이들의 행위를 무한대로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정함의 세계”란 대상을 향하지만, 향하고 있는 진행중인 시간이거나 불가능한 도착의 시간일 뿐이다. 움직여 나가되 무한히 움직임을 연장하여 그러한 정황의 감각만을 만들어 낸다. 감각의 물질성, 모호성, 운동성만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김행숙의 시는 구체적이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 또는 구체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이같은 특성을 형상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회화를 다루면서 형상적인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형상적인 것은 구상적인 것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베이컨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그라미는 형상적인 것을 구상적인 것에서 떼어내기 위한 장치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상적인 것, 삽화적인 성격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즉 형상적인 것이란 자족적이고 독자적인 상을 말하는데,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남은 어떤 상이다. 물론 그것은 오브제의 외상을 재현한 구상이 아님은 명백하다.
김행숙의 시가 다분히 지적이고 추상적인 분위기를 갖으면서 완전히 대상에게서 멀어지지 않은 까닭은 형상적인 것들이 추상의 분위기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가령, 「다정함의 세계」를 보라.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라는 행위를 배치함으로써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며 함께 희미해지고 돌고래가 솟구치는 전반부의 불연속적인 의미들이 슬쩍 슬쩍 봉합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의미맥락이 인과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어서 인과적 정황을 파악하려 하면 할수록 그의 시는 의미로부터 도망친다. 그래서 독자는 이 모호한 아름다운 시를 형상적인 것을 통해 불연속하는 시적 정황을 간신히 꿰어가면서 시를 읽어가야 한다. 그의 시가 모호하지만 극단적인 난해의 추상으로 떨어져 얼어붙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더 휘저어라. 나는 충분히 섞이지 않았다. 나는 생
각 못한 알갱이처럼 남아 있어서 목에 걸리고
길고 외로운 팔을 욕조 밖으로 늘어뜨리는 것이다
당신의 목욕시간은 너무 길어, 당신은 소리치는 것이다.
아주 길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소리치는 것이다. 식사시간보다 목욕시간보다 더 길어지면 긴 것, 연약한 것, 갈 곳 없는 것,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극단적인 기침이 어디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람 아닌 것처럼 구부리고
구부렸다, 폈다, 구부리는 운동 속에서 나는 계속 되지 않는다. 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
―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전문
이 시집에서 얼굴 시리즈는 주체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의 표명을 보여준다. 그는 이 시들을 통해 새로운 주체의 얼굴을 발명한다. 얼굴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한다. 특히 타자의 얼굴은 과부이며 고아인 그들이 살인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으로 무섭도록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게 한다. 즉 타자의 이타성에 의해 주체는 자신에게 환원되지 않는 주체로 존재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타자성을 불러오는 개념이다. 그러나 김행숙에게 얼굴은 주체와 타자의 구별을 벗어나 새로운 얼굴의 탄생을 보여준다. 기왕의 얼굴이란 주체에게 귀속된 특질이다.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극명한 장소이지 않은가? 그러나 김행숙의 시에서 얼굴은 눈코입이 뭉개진, 간신히 윤곽선만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면을 드러내는 표정이 없다.
새로운 얼굴에 대한 성찰, 또는 새로운 얼굴의 탄생에 대한 응답을 제시하는 시가 바로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다. 즉 새롭게 발명된 주체의 얼굴에 대해 말한다. 마치 실험실의 용기에 들어있는 혼합물처럼 주체의 이미지는 물질적이다. 물질은 분자처럼 미세하게 분해된 채 알갱이로 존재한다. 여기서 문제는 “나는 충분히 섞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핍이거나 부정성의 결과가 아니다. 충분히 섞이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된다는 것이다.
시적 정황은 서사적 맥락이나 구체적인 사건이 소거되어 있다. 최소한의 의미를 담은 언어들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개입하면서 독자를 낯선 언어지대로 데려간다. 언어는 모국어로 씌어져 있으나, 지극히 외국어적 용법으로 조립되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언어들은 전통적으로 화자라고 불리는 주체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통일적 언어들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가령 제1연에서 나는 충분히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알갱이처럼 남아 목에 걸린다는 정황이 먼저 설정되어 있다. 그 다음 시의 내적 정황들에 의해 시는 전개되지 않는다. 언어의 조립은 우연하고 엉뚱하게 반응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가령 제2연은 1연의 “목에 걸리고”라는 전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목”은 “목욕”이라는 언어를 불러오고, “기침”을 발생시키고 기침은 구부렸다 폈다 구부리는 운동을 불러오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연적 연쇄반응처럼 나는 불연속적 존재로 그려진다.
김행숙 시의 독법은 어쨌든 다른 방식에 의해 읽혀야 한다. 그것은 시적 주체의 내면 풍경이나 내면화된 세계의 질서정연한 건축물로서의 언어로 읽기에는 난제들이 많다. 우연에 의한 언어의 연쇄나 또는 앞서 보았던 시적 형상성에 기대 난해의 커튼을 걷어 올릴 필요가 있다.
인용시는 주체의 얼굴에 대한 새로운 선언이다. 시는 마치 절대온도 직전에 잠시 반응했다가 사라지는 입자들처럼 사라지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람 아닌 것처럼 운동하는 존재이다. “나는 불연속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사람들을 떠난다”는 선언은 역설이 아니라 주체의 운동원리이다. 주체는 없거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라지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이원의 시 역시 감각의 차원에 있다. 김행숙의 시가 분자적으로 미세하게 분화된 감각의 층위에 있다면, 이원의 시는 보이는 세계를 신뢰한다. 시집에 압도적으로 출몰하는 속도, 얼굴, 거울에 대한 시적 지층들은 모두 보이는 감각을 중시하는 증좌들일 터이다. 그러나 보이는 감각을 신뢰한다는 말은 보이는 감각이 가지는 감각의 헤게모니를 겨냥한 말은 아니다. 보이는 감각, 즉 시각은 대상과의 거리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은유들이 함께 길어진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주체를 표상하는 감각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지만, 이원의 시는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서의 감각이다.
이원의 시가 보여주는 방법으로서의 시각성은 높은 강도성을 가지고 전면화 된다. 전면화는 세계를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는 전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확대경을 가지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방식도 아니다. 그의 시각적 강도성은 속도에서 발원된다. 속도는 보이는 대상세계를 재빠르게 지워나가기 때문에 사물의 형태와 속성을 뚜렷하게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앞에서 김행숙과 이원의 시가 이항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려는 시적 기획에 대해 말했다. 이원의 시에 나타나는 방법으로서의 시각은 보이는 세계와 보여지는 세계를 이원화하지 않는다. 속도 때문이다. 속도가 출발지점(기원)과 목적지점(목적)을 잘라낸 중간지대를 경유한다는 점에서 기원론이나 목적론과 같은 이항화된 세계를 소거한다.
텅 빈 심야의 길이 폭주족들을 매달고 허공을 지그재그로 내지른다 어제의 어제와 오늘과 또 오늘의 오늘로 뒤범벅된 시간이 폭주족들의 몸에 확확 불을 붙인다 기우뚱거리며 폭주족들이 몸의 속도를 높인다 허공 속에 뜨거운 알을 낳는다 뒤엉킨 경적을 비집는다 아카시아 향기가 길을 뚝뚝 끊었다 붙인다 한 무리의 폭주족들이 끊어진 길을 굉음을 내며 건너뛴다 뒤따라 달려오던 한 무리의 폭주족들은 끊어진 길 속으로 빠진다 끈적끈적한 괴성과 경적이 함께 묻힌다 봄밤이 눈물처럼 반짝이다 마른다 매몰의 시간을 잘 아는 길은 금방 아문다 시간의 만다라로 타오르며 폭주족들은 길을 꿀꺽꿀꺽 삼키며 달린다 하나의 길을 삼키는 순간 다시 두 개의 길이 생겨난다 휘발되지 않으려면 질주해야 한다 길과 폭주족들은 서로에게 로프처럼 매달린다 온몸이 구멍인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주족들이 히드라처럼 꿈틀거린다 길은 시체와 꽃이 함께 떠다니는 갠지스 강이 된다
― 「폭주족들」 전문
이원의 시는 동적이다. 김행숙 시의 운동성이 천천히, 점점, 한없이와 같이 부사적 용법과 함께 쓰이는 기화의 방식과 관계된다면, 이원 시의 운동성은 속도, 질주처럼 같이 훨씬 격렬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빠른 속도는 보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뭉개버리기 때문에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구별되기 어려운 세계이다. 시간조차 미래를 향해 흐르는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 있다.
폭주족들의 질주와 속도의 운동성을 시각적 감각에 의해 보여주는 이 시는 시적 주체의 개입을 단호히 막는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분명 보는 자이지만 본다는 행위가 인식론적 층위로 팽창하지 않고 단지 감각의 차원에만 머문다. 감각은 정서로 감염되지 않으며 다분히 날것으로 존재한다. 감각은 지성으로 전이하지 않으며 그래서 야생성을 내포한다. 즉 보이는 감각이라는 사태에 전적으로 충실하다. 따라서 날것이면서 야생적인 감각으로 충만한 보는 자의 시선은 형이상학적으로 이원화된 세계를 비껴가면서 대상을 시적 주체의 것으로 전유하는 강력한 정서적 감염의 서정적 세계를 차단한다.
시의 속도를 보자. 속도를 시각화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대상이 연속적으로 운동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의 차원에서만 그렇다. 사실 속도를 내며 움직이는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불연속적일 가능성이 높다. 대상은 금방 사라지거나 다른 사물에 가려 보는 자의 시계視界 바깥으로 빠르게 벗어나기 때문이다. 속도를 개념적으로 사유한다는 것과 실제 보는 감각에 충실하다는 것은 다르다. 다시 시의 속도를 보자. 속도의 운동성은 “지그재그로 내지른다”, “길을 뚝뚝 끊었다 붙인다”, “끊어진 길을 굉음을 내며 건너뛴다”“길을 꿀꺽꿀꺽 삼키며 달린다”와 같이 불연속적이다. 폭주족들의 속도는 직선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않다. 길은 뚝뚝 끊어졌다 이어지고, 그래서 건너뛰어야 한다. 정서나 지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감각의 차원에서 속도가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적 현상을 오규원은 “날이미지”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나이키」 연작이나, 「오토바이」, 「폭주족들」, 「퀵서비스맨」, 「영웅」과 같은 시들에서 날이미지적인 시각성이 느껴진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빠르게 흐르지 않는다. 속도는 시간을 “어제의 어제와 오늘과 오늘의 오늘로 뒤범벅”될 뿐이다. 그것은 “매몰의 시간”이다. 뒤범벅된 시간 또는 매몰의 시간은 시간이 역행이나 퇴행, 또는 시간의 짓이겨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속도와 함께하는 어떤 시간이 있다는 차원의 시간이다. 내적으로 깊이를 가진 시간이 아니다. 과거의 반성도 회상도 아닌, 미래의 도래하는 시간도 전제하지 않은 오직 속도와 함께하는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온몸이 구멍인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주족들이 히드라처럼 꿈틀거린다”, “길은 시체와 꽃이 떠다니는 갠지스 강이 된다”는 보이는 세계가 보는 자의 시선과 부딪혀서 만들어지는 정서적, 개념적 화염이 일렁이는 장면으로 읽히지 않는다. 가령, “히드라”는 n개로 존재하는 주체들의 자기선언이거나, “갠지스 강”은 주체와 대상이 화합하는 축제의 장으로 읽을 수 없다. (물론 언어의 잉여작용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이다. 폭주족들은 히드라처럼 꿈틀댄다. 꿈틀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길은 시체와 꽃이 떠다니는 갠지스 강이다. 갠지스 강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감각은 은유적 세계를 벗어나게 한다.
거울 속에 있으니 나는 거울의 몸이다 거울의 꿈이다
내가 제 몸이 되어도 꿈이 되어도 거울은 출렁이며 넘치지는 않는다 꿈은 보이지 않는 바닥이 바닥을 찾는 거울의 허공이 삼켰다 거울은 몸을 나누지도 않는데 내 꿈은 양쪽으로 벌린 두 팔을 접었다 폈다한다 거울 속의 나는 딱딱한 거울이 아프지도 않다
(중략)
거울의 구석에 있으니 나는 거울의 구석이다 거울이 벗어놓은 신발이다 내가 거울의 한쪽으로 밀려가 있으니 나는 거울의 벽이다 거울이 더 이상 파고들지 못하는 막다른 광장이다 내가 거울의 한가운데로 와 있으니 나는 거울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거울이 보인다 거울의 핵이 보인다
―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부분
이 시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공포의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이상의 시는 거울과 거울바깥의 세계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그 불일치의 공포를 다룬다. 그러나 이원의 시는 거울의 세계와 거울바깥의 세계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두 세계가 일원화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마치 경첩에 의해 연결된 것 같다. 이질적인 다른 세계이되 경첩으로 연결된 세계. 시적 주체는 거울 속에 들어가 있다. 거울 바깥의 내가 투사된 영상물로서의 내가 아니다. 나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 거울의 몸이 된다. 따라서 “거울은 몸을 나누지 않”으며 “딱딱한 거울이 아프지도 않”다고 고백할 수 있다.
이상이 나와 거울의 대칭적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이원의 거울은 거울의 내재적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상호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적 관계성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울 속 나는 거울 바깥의 나와 타자적 관계에 있지 않다. 거울과 나의 관계 역시 타자인 나를 투사하는 대상이 아니다. 나는 거울 속에, 거울 속 구석에, 거울 속 허공에 들어가 있다. 그때 나는 거울의 몸이고, 거울의 구석이고, 거울의 허공의 몸이 된다. 결국 “나는 거울의 거울이다”라는 선언에 이른다. 나는 거울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즉 나는 거울을 존재하게 해주는 이타적 존재가 된다. 그것은 거울과 나의 관계가 상호적이 아니라, 이타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상호성은 타자를 또 다른 나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그러나 또 다른 나 만들기는 나의 확대가 아니겠는가? 이때 타자는 타자의 고유성을 보존하지 못한 채 (전통)서정시의 동일화 기획에 굴복하게 될 뿐이다.
거울과 나는 대등한 상호성의 관계에 있지 않다. 나는 거울 속에서 존재할 수 있듯이, 거울은 나를 비추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거울과 나는 타자이되 대립하거나 대등하게 교환되지 않는다. 이상처럼 거울과 나는 배타적이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투자관계처럼 대등하게 자신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로 고유성을 포기하며 융합하지도 않는다. 거울이라는 타자는 “딱딱한 거울이 아프지도 않”을 만큼 내가 내적으로 개입될 때 거울일 수 있다. 나는 거울에 대해 이타적이다. 그것이 “거울의 핵”이다.
나와 거울은 어떤 공동체성을 실현한다. 상호성의 공동체성이 아니라 <너-나>의 공동체성. 장-뤽 낭시가 말한 <마주한 공동체>. 상호적 교환성을 배제하고 제3항이라는 매개항을 삭제하고 나서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 대한 공동성(레비나스). 이원의 시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이상의 기획처럼 적대하지 않으며, (전통)서정시의 문법에 따라 두 항을 폭력적으로 융합하지 않는다. 타자성을 보존한 채 새로운 공동성을 구현한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물음을 던진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내가 오히려 거울의 거울이 될 때, 그때의 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 거울이 나의 거울이며 동시에 내가 거울의 거울이 될 때, 그때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방식은 거울의 존재실현을 위해 이타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이러한 주체는 거울이라는 보이는 감각, 즉 시각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원의 시가 감각의 차원에 있다고 할 때, 시각성에 대한 신뢰는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깊이를 소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뿌리가 있다면 시간이 아니며 뿌리가 있는 것이 시간이라면 뿌리째 뽑힌 공간이 시간이며 그러므로 지상은 뿌리째 뽑힌 시간이며(그러므로 오해마라 나무의 뿌리는 어둠인 대지의 것이지 어둠을 뚫고 나온 나무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믿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부재한다 고로 존재한다」 부분
배치되는 언어가 서로 교묘하게 스며들어 기법적 반어의 미감을 보여주는 오규원의 “시는 언제나 패배이니 승리는 오해마라”(「시인들」)가 인용되는 이 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보이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보이는 세계, 즉 감각의 세계가 형이상학적 깊이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한다. 뿌리의 세계, 깊이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는 대지의 세계, 표면의 세계, 보이는 세계, 감각의 세계를 앞서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 믿는 것은 단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뿌리는 나무의 소유가 아니라, 뿌리의 깊이를 메운 채 우리 눈에 보이는 대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는 깊이의 세계가 아니라 표면의 세계이다.
임지연
문학평론가. 2005년 ≪시작≫으로 등단. 서울교대 강사.
추천79
- 이전글28호(2007년 겨울호) 서평/양윤의 08.03.01
- 다음글28호 연재| 김영식의 하이쿠 에세이⑥/김영식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