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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2007년 겨울호) 서평/양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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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81회 작성일 08-03-01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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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숨, 침대(문학과 지성사)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윤리적 미니멀리즘과 감각적 맥시멀리즘
양윤의|문학평론가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은 전통적인 재현 방식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 에 속한다. 미니멀리즘이 거대담론의 세계를 빙산일각의 방식으로 축소하는 발화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맥시멀리즘은 전달하고자 하는 테마를 인접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상호텍스트성의 무한 확대를 지향하는 발성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이 현대 사회의 문화를 설명하는 두 개의 극단적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이 다양한 관점과 복잡다단한 층위들의 해석들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양쪽 극단의 관점에서 출발한 어떤 목소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다양한 접점과 분절을 만드는지, 또한 그들이 서로의 좌표를 통과하면서 어떤 형상의 지형도를 그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발표된 김숨과 편혜영의 작품은 각기 개성 있는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의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발언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이 최근 보여준 시도는 지금-여기 우리 문학판의 새로운 지형을 확인하는 데 좋은 참조점이 될 듯하다. 김숨의 백치-아버지가 보여주는 폭력적 상징성이나 편혜영의 그로테스크 도시 괴담이 보여주는 과잉의 알레고리는 주제적 차원을 새로운 형식 미학을 통해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들이라 할 만한다. 그런 점에서 두 작가는 실험적인 방식적 지향점을 공유하면서도 각각의 이질적인 텍스트의 결을 보여준다 하겠다. 무엇보다 이번 계절에 발표된 김숨의 '침대'와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는 두 작가의 소설적 성과와 일정한 단락적 도약의 지점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파시즘 Vs 윤리적 미니멀리즘 
백치-이버지의 집에서 나온 김숨의 소설은 한층 성장했다. 물론 김숨이 관심 갖는 거대 시스템이라는 테마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상징적) 아버지의 이름 안으로 포섭할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숨의 세 번째 창작집인 '침대'의 경우 개인의 고독과 소외를 보다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전작에 비해, 보다 함축적이고 확장적인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침대'에 수록된 8편의 작품 중 「409호의 유방」, 「침대」, 「두 번째 서랍」, 「도축업자들」, 「손님들」, 「쌀과 소금」 6편은 집단적 질서에서 배제된 고립된 인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축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박의 책상」과 「트럭」은 전작에서 보여준 바 있는 백치-아버지의 모습을 사물(트럭과 책상)과 주인(아버지)의 유비 구도 안으로 축소시켜 보여주고 있다. 「트럭」의 스토리는 장편소설 '백치들'의 미니어처형 단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김숨은 사물과 인물, 혹은 사물이 놓인 장소와 인물이 있는 장소를 겹쳐놓으면서 같은 공간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자리바꿈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도축업자들」의 경우 “한 트럭 분량의 닭들이라고 했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면서 도축할 닭들을 기다리는 도축업자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제시한다. 어떤 플롯으로 요약될 만한 서사의 진행이 없고 그저 도축업자들의 기다림과 도축업의 비인간적인 작업방식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도축업자들은 대가리가 없는 닭들이 도축장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춤을 추듯 고무장화 신은 발을 쿵, 쿵, 쿵 굴렀다. 대가리가 없는 닭들을 도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축업자들은 도축장에서 대가리가 없는 닭들을 기다렸다. 한 트럭 분량의, 대가리가 없는 닭들이 축복처럼 도축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기를 바랐다. 
― 「도축업자들」, 191면

도축업자들은 닭 농장에서 매일 정해진 숫자의 수평아리들을 도축하고 그것들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공된다. 인용한 부분은 도축업자들의 도축행위를 서술하는 부분이다. 이들이 ‘대가리 없는 닭’을 잡는 도축 장면은 매우 야만적인 행동으로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무심하게 서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도축업자라는 상징적 호명을 유지 해 주는 것은 행동의 주체(도축업자)가 아니라 대상(닭들)에게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 장면은 획일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시스템의 기능적인 인간형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이 소설은 야만적인 문명화의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테마를 형식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자본주의 문화란 기계문명의 효율성만을 강조할 뿐 아니라 획일화를 강요하며 전체성과 목적성을 지향하는 진보의 파시즘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때 인간이 겪는 소외와 고립은 김숨만이 강조해 온 특별한 측면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숨의 소설이 의미있는 이유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현상을 대하는 인물들의 양가감정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대한 시스템의 메커니즘을 몸소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소외되어야 하는 인간들이 느껴야 하는 이중감정이다.    

[1]
도축업자들은 닭들을 콘크리트 벽으로 집어던지거나, 붉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우악스럽게 닭들의 날개를 찢어발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무장화를 신은 발을 내리쳐 닭들의 대가리와 모가지와 날개를 짓밟았다. 무참히 짓뭉개버렸다. 한 마리의 닭도 빠짐없이. 빗살무늬가 어서어서 닳고 닳기를 바라며. 
― 「도축업자들」, 200면

[2]
손님들은 ‘집단’이었지만 ‘개별’로 보이기도 했다. 손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암묵의 의견을 나눌 때 특히 그랬다. 그녀는 손님들이 서로를 지극히 낯설어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손님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탐색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중략) 서로를 완벽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길거리에서 마주친다고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차갑게 지나칠 것이다.
― 「손님들」, 95면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도축업자들은 이제 흔적만 남은 고무장화의 ‘빗살무늬’와 함께 점점 소멸해 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한때 모든 것을 걸고 진보와 발전의 동력이 되겠노라고 투신했으나 결국 발전의 가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버림받은 처연한 ‘가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대문자 문화와 거시 경제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소멸되어 가는 어떤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면 이들이 경험하는 어떤 기다림은 이제 “소멸된 약속”에 불과한 것이고 “마모된 흔적”으로 밖에 증명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이토록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도축업자들’의 장면에서 오히려 처연하고 서글픔이 느껴진다.  
이러한 문제는 [2]에서 드러난 개인과 집단의 관계의 측면에서 다시 한 번 논의될 수 있다. 인용된 부분은 「손님들」의 일부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의 집이 철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자신의 집을 방문한 어떤 무리를 만난다. 그러나 주인공이 ‘그들’이라고 부르는 집단 혹은 어떤 조직은 개인이 대면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존재한다고 전제된 가정假定형의 명명에 불과하다. 그러니 개인이 군중 속에서 만나는 대상은 어떤 집단성이 아니라 가차 없는 개별성일 수밖에 없다. 익명적 개인들은 매우 우발적으로 또 다른 개인을 스쳐 지나간다고 ‘예상’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을 때 다수의 군중 속에서 개인은 훨씬 손쉽게 방관자가 될 수 있다. 
문명의 전체성은 개인을 단자화하거나 고립시키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가치를 수량화하는 데 앞장선 것이 사실이다. 그를 통해 발생한 극단적인 개인의 소외는 자발적 고립을 조장하거나 편집증형 인간형을 낳기도 한다. 그것은 병리학적 도피를 통해 한 개인이 마련한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가 「두 번째 서랍」의 주인공이 겪는 편집증적 증상에 대한 묘사이다. 서랍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 채 두 번째 서랍에 집착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동굴 같은” 서랍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자신이 “역진화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두 번째 서랍」, 174면)이 든다. 정신분석적으로 무의식적 도피는 유아기적 퇴행이므로 일종의 역진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고쳐 말하면 이것은 주인공 스스로 자발적 망명을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그녀는 남편도, 가족 혹은 일상도 잊고 오로지 ‘두 번째 서랍’에만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 서랍이 은유하는 것은 ‘불임의 몸’을 견디고 있는 ‘여성의 방’이기도 하고, 가족의 외면이나 남편과의 소원함을 견디느라 만들어 온 ‘자신의 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행위는 적어도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 교환, 자본주의적 소비와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소비의 운동은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욕망(의 만족)을 유예시키는 환유적 운동일 터. 그러나 그녀의 집요한 집착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의도하지 않게 사회의 결함과 관계의 불가능성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윤리성을 확보한다.         

평균적 일상 Vs 감각적 맥시멀리즘 
편혜영의 소설 속에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넘친다. 그러나 딱히 스토리를 간추리기 힘들만큼 서사가 파편적이고 암시적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전작인 '아오이가든'에 비하면 상당히 일상적인 차원으로 내려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시체나 쓰레기, 부패한 동물의 시체들이 가득한 도시 괴담류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편혜영의 소설 속에는 의미화 할 수 없는 수많은 소음과 괴성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하다. 전작에서, 시체나 기괴한 동물들의 형상을 구성하는 시각적 환영이 주를 이루었다면 '사육장 쪽으로'에서 강조되는 것은 분리해 낼 수 없는 환청과 비명소리가 빈번하게 출현한다.   

개들이 사방에서 짖어댔다. 그는 차를 멈췄다. 개들도 짖기를 멈췄다. 그가 멈췄던 차를 움직였다. 개들이 다시 짖기 시작했다. 개들이 짖는 소리가 그의 귀가 만들어낸 환청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보, 지금 개 짖는 소리가 들려? 그는 귓가에 떠도는 사나운 으르렁거림을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빨리 가기나 해요. 울먹이며 아내가 소리쳤다. 
― 「사육장 쪽으로」, 58면

소리가 ‘출현’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개 짖는 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혜영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소리’는 일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힘든 공포심을 유발시킨다. 주인공의 차를 따라다니는 듯한 ‘개 짖는 소리’는 아픈 아이의 울음소리조차 삼켜버리고 한 가족을 극단적인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는다. 더욱이 “야산을 넘어서니 그가 살고 있는 마을과 똑같은 모습의 주택단지나 나타났”다는 암시를 통해 이들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을 느끼게 한다. 
자연과 문명의 접점지대를 차로 달리는 주인공은 어떤 소리에 이끌리는 동시에 대항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 소리는 병원으로 닿을 수 있다는 위안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파멸을 예고하는 경고음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조는 불안을 증폭시키는 ‘과정’만을 보여줄 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 
이처럼 편혜영은 일상의 반복성, 문명의 획일성이 낳은 악몽을, 피할 수 없는 청각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주는 데 성공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전망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을 강하게 암시를 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희망이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도록 유도한다. 말하자면 그로테스크한 비극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가 자주 활용하는 반복적인 이미지는 환청, 소음, 굉음 등의 청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청각적 감각의 비물질성은 시각적인 이미지의 물질성과 달라서 소위 강 건너 불구경일 수가 없다. 일방적으로 소리에 노출되어 있는 청각 기관은 인간을 그 소리로부터 한 발짝도 피할 수 없는 답답한 위치에 붙박아둔다. 그러한 극단적 수동성은 소리에 대한 기민한 인물들의 경우, 더욱 강한 환기력을 갖게 된다. 

안개 때문에 번호판을 보지 못했으니 계속 같은 차량의 방해를 받는 것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구도 남자의 차를 의식적으로 방해하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차선을 넘나들고 뒤차의 주행을 방해하는 난폭 운전은 밤의 고속도로에서 대형차를 모는 사내들의 특성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불현듯 탱크로리 운전자가 자신이 길가로 뭔가를 끌어내는 것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악랄하게 달라붙는 걸 보면 틀림없어.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나를 저렇게 쫓아오는 걸 거야. 그는 불안해하며 입술을 떨었다. 
― 「소풍」, 31면

「소풍」은 연인이 떠난 즐거운 여행이 악몽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풍을 떠난 한 커플은 자신들의 자동차 주변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어떤 트럭 때문에 불안에 떤다. 무엇보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 때문에 그 차량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그 여행은 점차 악몽이 된다. 인물들은 트럭이 자신들을 악랄하게 추격해 온다고 느끼게 되는데 인물들은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이유로 ‘같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여자는 휴게소에서 만난 트럭기사에게 자신이 호감어린 눈빛을 던진 것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어 불안감을 느낀다. 남자의 경우는 조금 전 자신이 뺑소니 친 것을 트럭 운전수가 목격했다고 생각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다. 여기서 이들에게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믿어지는’ 트럭은, 안개에 가려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거대하게 느껴진다.
「소풍」의 안개(시각 이미지)와 「사육장 쪽으로」의 개 짓는 소리(청각이미지)를 통해서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 갇힐 뿐 아니라 대상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이 차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거부하거나 그것에 대처할 수가 없게 된다. 인물들은 대상을 쉽게 혼동할 뿐 아니라 어떤 사건들의 전말을 뒤섞인 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짙은 안개가 걷히거나 개 짖는 소리만 잦아든다면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이 나아질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오히려 상황이 명백해지면서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그 사실뿐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맹점blindness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소풍」에서 이정표라는 은유를 통해 함축적으로 제시된다. 즉 “이정표는 언젠가 도착할 도시의 이름을 알려줄 뿐, 여기가 어딘지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여기-지금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만날 것이라고 예정된 어딘가를 지시할 뿐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작가가 보여준 강한 환기력은 일상에서 매우 실체적이고 명증하다고 여겨온 사실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한다. 
편혜영의 ‘헤어나오지 못하는’ 공간상의 반복은, 명료한 전도의 ‘시점’을 강조하는 김숨의 반복과 대비적이다. 김숨은 위계질서의 자리바꿈을 통해 물신화된 사회에서 인간이 왜소해지게 된 ‘순간’을 강조한다. 그 비참한 ‘순간’을 ‘지속’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숨의 반복을 거대한 물질문명의 공간-기계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내준 개별자가 보여주는 윤리적 미니멀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편혜영은 인물들을 강하게 환기하는 강력한 이미지를 통해서 인물이 갇혀있는 폐쇄적인 상황을 점층적으로 보여준다. 인물의 몸을 누르는 무한반복의 일상은 소풍을 악몽으로 ‘서서히’ 바꿔버릴 만한 아찔한 감각으로 인물들을 옥죄어온다. 이 악몽은 어쩌면 평균적인 삶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편혜영의 작업은 감각의 과잉을 통해 평균적 삶에 대항하는 감각적 맥시멀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편혜영의 반복은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하는 소비되지 않는 ‘축적’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것은 더러운 대기층이 공기를 덥히는 대기의 더러운 담요효과(blanketing effect)처럼 때묻은 안개, 겹겹이 쌓이는 소음을 통해 알 수 없는 더위와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매끈하게 구획된 공간의 이미지에 대치되는 조밀한 감각의 맥시멀리즘의 효과이다.    
두 작가는 ‘재현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고자 공력을 들이는 2000년대 신진 작가들에 속한다. 이들의 노력이 재현 그 너머의 문제를 폭발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형식 미학적 성과를 통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시점을 반복하는 김숨의 끈질긴 자전운동과 같은 장소를 집요하게 반복하는 편혜영의 공전운동은 시스템 안에서 획일화되고 계량화된 공간-기계가 되어 버린 우리의 일상을 흔들리게 하고 요동치게 한다고 확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전통적인 재현방식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면서, 다양한 서술 장치를 통해서 일종의 타개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들의 작품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지금-여기의 현재적 문제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성과를 인정하는 한에서, 문명 비판이나 개인의 단절감에 대한 레퍼토리의 진부함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간혹 거시적인 테마의 차원이 반복되면서 일종의 방법적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점이 들기도 한다. 일상의 탄력적인 지점과 다양한 변화의 미세한 지점들이 거시적인 담론이나 단순화된 프레임으로는 드러나기 어려울 터. 이들이 보여준 새로운 상상력과 세련된 스타일이 조금씩 내밀한 삶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오기를 기대해 본다.



양윤의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평론 「기억의 산파술, 망각의 복화술」,  「미완의 귀향과 벌거벗은 구원을 위하여」 등.
추천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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