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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특집/김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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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그 미지의 기호 혹은 법칙
김석준|문학평론가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그것뿐
한 잔의 술을 들며
그대를 바라보고 한 숨 짓는다.
― 예이츠, 「술의 노래」 전문
1. 글에 들어가며
삶을 살아가다가 가끔 왠지 모를 막막함에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혹은 시간의 저편. 나 왜 바로 이 순간 속에 존재하지. 나 하필이면 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 스스로를 의식하지. 자기의 존재성을 의식한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만은 아니다. 아니 자의식은 기쁨이 아니라 모든 불행의 원천이다. 존재의 타자 혹은 비존재. 심연으로 추락하는 나. 필연으로의 이입. 허나 생에의 시간이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부조리한 세계 속을 사랑의 기호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고통의 타자 혹은 주이상스의 전이. 미지의 사랑 기호 속에의 완전한 몰입 혹은 자기 망각. 사랑의 법칙은 자기를 망각하면서 타자에게로 가고픈 전일한 의식이다.
허나 침묵하는 사랑 기호. 자본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 살가운 사랑. 분명 자본적 전망이 지배하고 있는 21세기의 후기산업사회는 살가운 정을 나눌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을 지향하지 않는다. 현란한 기호와 감각화된 유희. 사랑은 사랑대상에게로 다가가 은일한 욕망을 주고받는 따스한 손길의 교환이 아니라, 무릎맞대고 살가운 정 나누는 인륜성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거래이다. 왜냐하면 후기산업사회에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유혹하고 유혹 받기를 자초하는 기호들의 유희. 미적 코드의 성적 코드로의 전환. 아날로그적 그리움과 향수는 사랑으로 고양되지 못하고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영화 '러브 스토리'나 '라스트 콘서트'가 펼쳐낸 정신적이고 순결한 사랑은 사랑대상이 아니다. 사랑의 지표를 상실한 후기산업사회의 물적 욕망. 유희적 쾌락만이 존재하는 21세기적 전망. 사랑은 사랑하는 타자에게 다가가 은일한 욕망의 기호를 순결하게 펼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 사태에도 불구하고 시말은 사랑의 사랑 즉 사랑만들기를 꿈꾼다. 사랑대상에게 집중되는 리비도 혹은 카텍시스(cathexis). 삶에의 에너지 총량의 투사. 그리움 혹은 전이되는 교감. 사랑은 사랑대상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자기의식을 거세시키고 삶의 에너지 전체를 타자에게 투사하게 된다. 자기망각. 타자의 존재감 속에 기입되는 영혼의 흔적. 기쁨의 전이. 주이상스의 교환. 그러나 현대의 사랑은 리비도의 총량이 투여되는 전일한 사랑이 아니라 감각만의 전이다.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화학반응이 일으키는 저 찬란한 육체의 향연. 사랑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만들어내는 화학기호의 작용이 틀림없지만, 어쩔 수 없는 호르몬 분비가 이룩하는 암컷과 수컷의 육체적 제의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그리움이 차고 넘쳐서 사랑 대상에게 도달하는 전일한 의식임에 틀림이 없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한 것처럼 물욕에 빠져 사랑을 잃어버린 외계인으로 사느니, 사랑하고 사랑받은 가난한 시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아니한가.
2. 그리움 혹은 사랑에의 승화
사랑은 마음의 동요상태이다. 사랑은 그 흔들림 속에서 촉발되는 정서적 감각인데, 그것은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전일한 의식, 즉 그리움이다. 하여 사랑은 하나의 특발적인 사건이다. 가슴이 터질 듯한 소통 불가능한 울체의 상태. 지향대상에게 가닿지 못하는 그리움. 모든 사랑은 타자에게서 촉발된 미지의 감성의 상태인데, 그것은 그리움의 자장 내에서 발효 성숙된다. 따라서 사랑은 타자다. 사랑은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의 사랑이다. 마음이라는 공간 혹은 빈 지대 속에 적체되는 그 무엇. 울체 혹은 간절함. 그러나 모든 그리움이 타자에게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과 벌이는 상호 소통적 게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한 영혼이 다른 한 영혼과 만나서 상호 정서적 합일 속에 피어나는 육체의 향연이다. 입 맞추고 애무하면서 성적 합일에 이르는 주이상스의 전이, 그것이 바로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여보세요?
빛 위에 피운 나의 목소리는 한 송이 꽃
0.4초 만에 그가 꺾어들고 사라졌다.
발신자 제한 표시가 무음의 악보처럼 새겨져 있다.
한 덩이 어둠인 그는
먼 미래의 사람
광막한 공기의 휘돌기 속을 헤치며
수십억 광년 후의 빛이 내게로 오는 중
말이 되려다만 꼭 다문 입술 하나 떨어져 있다.
늘 문만 두드리다 가더니
기어코 문안까지 들어와서는
슬픈 벽 하나 세워두고 갔다.
도저히 열어볼 수 없는
― 박춘석, 「쓸쓸함의 주파수」 전문
실패한 사랑, 가닿지 못하는 그리움, 교감의 실패. 혹은 스토킹, 미지의 기호, 차연적 기표놀이. 상호 소통되지 못하는 사랑은 쓸쓸하다. 노을이 지는 해거름 오후. 약간의 권태와 나른한 무료함. 바로 그때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전화기의 신호음. 그러나 뚜 뚜 뚜------. 나와 그 사이에 소통이 되지 못하는 그 모를 심연이 가로놓여져 있다. 벽인 그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대, 허나 미지의 기호로 존재하는 그대. 시인 박춘석은 「쓸쓸함의 주파수」에서 발화되지 못한 사랑 혹은 그리움의 감정을 애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해독되지 못하는 기호로만 존재하는 그의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추론 추적하면서 시인은 시간의 저편에 존재할지 모르는 ‘그’라는 존재를 상상해가고 있다.
현존하지만 부재한 그. “여보세요?”라는 나의 목소리만 듣고 0.4초 만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 그를 궁금해 하는 나(시인 박춘석). 미지의 그를 상상하는 나. 그런데 그와 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점은 그는 나의 정체를 알지만, 나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는 점인데, 시인의 시말운동은 이 미묘한 부재와 현존의 지점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 박춘석은 이 일방통행적인 관계망 내부를 응시하면서 미지의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나의 모습을 역투사해내거나 그의 존재론적 양태를 추적해가고 있다.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미지의 기호처럼 유랑하는 그를 라캉적 기표놀이로 시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의미가 사상된 기표이다. 그는 시인의 상상적 의식 속을 가로질러가면서 애드가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로 둔갑하게 된다. 존재론적 의미 확정을 차연 유예시킨 채 수백억 광년의 시간을 유랑하는 어둠인 그. 박춘석은 바로 ‘그’라는 미지의 타자에 관한 존재론적 정체성을 정의내리고 있다. 그는 벽이다. 그는 수신이 불가능한 슬픈 기표이다. 발화되지 않는 말, 목소리가 부재한 그, 그는 열리지 않는 문이다. 부지불식간에 그가 시인의 가슴 안에 들어와 요동치고 있지만, 그는 문밖에서 노크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는 정체불명이다. 그는 먼 미래의 사람인데, 그는 현재완료형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제에 완료될지 모르는 미지의 기호이다. 따라서 시인 박춘석은 그의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는 도저히 열 수 없는 슬픔이 가득한 하나의 벽이다.
도달하지 못하는 그리움. 편집증적 스토킹. 혹은 강박신경증적 집착. 박춘석의 「쓸쓸함의 주파수」는 어쩌면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아주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의 사랑은 그리움의 대상에게로 다가가지 못하거나 다가갈 수 없는 자폐-편집증적인 그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 소통이 불가능한 슬픈 벽이 가로 놓여있다. 사랑대상에게 가 닿지 못하는 그리움이 슬프다. 아프다. 하나의 커다란 벽이다. 슬픈 현대인의 사랑방식.
안되지요.
빠른 속도로 달려가면 빨간딱지 받지요
질투로 휘어진 신작로 따라
희로喜怒에 굴곡진 황토길 따라
적당한 속도로 달려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마음 한 켠 벼리고 벼려
그리움의 메질로 날이 설대로 서면
뭉텅뭉텅 가을산 단풍을 한아름 끊어
서간문 한 줄에 마음 담아 보내려 해도
참을 수 없어,
터널 저편 점멸하는 붉은 신호등이
시린 발목을 단단히 여밀지라도
견딜 수 없어,
몸뚱어리보다 훨씬 사무친 그리움
눈 깜짝할 사이 당신께 달려갑니다
물론 위법이지요.
― 최성민, 「속도위반-도원동연가․9」 전문
최성민의 그리움은 박춘석의 그리움과 달리 보다 건강성을 견지하고 있다. 더 많이 그리워하기. 더 많이 사랑하기. 그러다 사랑대상에게 달려가기. 그리움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사무칠 때, 사랑은 질투, 기쁨, 분노 그리고 연민이라는 감정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사랑대상에게로 모든 의식을 고정시킨다. 집중하는 리비도. 대상에 응고된 감성. 사랑은 위반이다. 사랑은 분배적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 사랑은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 양자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부로써의 사랑은 리비도의 경제학인데, 그것은 융적인 의미의 리비도, 즉 삶의 에너지 총량이 사랑대상에 투사되는 것을 말한다. 전무로써의 사랑은 에코적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대상에게 모든 리비도가 고착되어 자신의식을 무화시켜 사랑대상을 신적인 위치로 고양시킨다. 사랑은 나를 지워 타자를 영광되게 만드는 지고한 희열의 순간이다.
사랑대상에게로 향하는 전일한 의식.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순탄한 길만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 사랑은 마음의 길을 따라 다양한 감성의 색조를 띠게 되는데, 그것은 사랑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농밀 정도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사랑은 감성의 돌기 속에 기입된 영혼의 흔적들의 총합인데, 그것은 사랑대상과 벌이는 일종의 줄다리기게임이다. 절망과 희망, 환희와 우울, 분노와 기쁨. 사랑은 이항대립적 감성의 체계 사이를 무한 왕래발착하면서 황홀경(Ecstasy)의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게임적 사랑은 황홀한 성적 결합의 순간을 무한히 차연시키면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최성민의 「속도위반-도원동연가․9」는 사랑의 속성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노래하고 있다. 사랑은 위반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사랑은 몸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 펼쳐내는 전일한 의식이다. 사랑은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심적 상태에서 기술되는 그리움의 기호인데, 그것은 속도의 속도, 즉 위반이다. 몸보다 더 빨리 달려가는 사무친 그리움. 질투로 휘어지고 분노와 기쁨으로 굴곡진 길을 따라 사랑을 메질로 견고하게 다져가면서, 시인 최성민은 마음을 벼리고 벼려 그리움의 날을 세운다. 그러나 그리움의 칼날은 부메랑처럼 시인에게 되돌아와 시인의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그리움에 사무치기. 그리움에 사무치다 못해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하기. 허나 사랑은 그리움의 심연 속에서 작은 심지를 돋우어 사랑대상에게 도달한다. 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그리움, 속도위반.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리운 사랑대상에 가닿기.
3. 교감 혹은 사랑의 종말
사랑은 항상 소멸시효가 적용이 되는 둘만의 물권적 사건인 것 같다. 따라서 전일했던 사랑도, 삶에 있어서 운명을 건 사랑도 항상 시들해지고 다른 사랑을 찾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랑을 나누었던 그 애절한 혹은 가벼운 교감의 순간은 시효가 종료되자마자 증오로 끝나는 때도 있다. 사랑의 미적분 값은 늘 그런가. 모든 사랑은 항상 실패할 운명을 승인하여야만 하는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방대한 저작인 '사랑의 역사'는 사랑의 계보학을 총체적으로 논구했지만, 사랑은 항상 완결된 그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항상 흐른다. 사랑은 흘러 내려가 현재의 사랑을 종료시키고 다른 사랑대상을 찾는다. 그것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한 것처럼 사랑대상에게 투사되었던 리비도의 철회의 순간인데, 왜 인간의 사랑은 사랑대상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향유하지 못하는가.
어쩌면 사랑은 그 자체로 억압이 아닌가. 수컷과 암컷이 벌이는 사랑의 제의는 애초부터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만들어내는 화학기호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호르몬 분비의 정지. 자아이상의 소멸. 따라서 사랑의 지속 혹은 완전한 사랑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사랑은 애초부터 암컷과 수컷이 벌이는 자유로운 교감이었는데, 사랑이 제도(초자아)화된 순간 사랑은 순수한 남녀 간의 운동을 소멸시킨다. 사랑은 억압이다. 사랑은 사랑본능 위에 초자아가 보태진 순간, 사랑의 위반, 즉 달콤한 로맨스(불륜, 치정)을 꿈꾸게 된다. 따라서 제도화된 사랑은 항상 사랑의 종말을 향하여 치닫게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의 법칙이 펼쳐내는 필연적 과정이다.
가장 좋은 일은 여태까지 일어나지 않았는데 가장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고양이
그대는 민들레 대궁, 민들레꽃
그대가 고양이면 내가 민들레 대궁, 민들레꽃
고양이는 민들레를 툭툭 치고
민들레는 툭툭 맞는 민들레
고양이와 민들레가 희롱하는 것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
고양이는 민들레와 희롱하며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 박찬일, 「고양이는 민들레와 희롱할 때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전문
그리움이라는 감성이 사랑대상에게 도달해 상호 소통이 이루어졌을 때, 게임적 사랑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은 너(민들레, 사랑대상)와 나(고양이, 시인 박찬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특발적인 사건이다. 사랑은 남녀가 벌이는 주이상스의 교환인데, 시인 박찬일은 「고양이는 민들레와 희롱할 때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다」에서 사랑이 벌이는 오묘한 의식 작용을 알레고리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사랑은 고양이와 민들레가 벌이는 둘만의 교감인데, 민들레는 고양이를 고양이는 민들레를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가끔씩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은밀한 감각을 주고받으면서 상호 희롱할 때, 희롱은 운명적 사랑대상을 기롱하는 농지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무수한 기호들이 기입된 놀이다. 사랑은 몸의 언어이다. 사랑은 비음이다. 사랑은 연애감정이 펼쳐내는 애정행각인데, 그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를 교묘하게 전도시켜 남녀 간에 벌이는 사랑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박찬일은 그러한 사랑행위를 가장 좋은 일이라고 명명하면서 사랑의 행태를 정언적으로 정의를 내린다. “희롱하는 것”과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라고 남녀 간의 연애감정을 정의 내렸는데, 이것은 이중의 시점을 교묘하게 언술한 것에 해당한다. “희롱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고양이와 민들레의 애정행각을 타인들의 관점에 서서 객관적으로 언술한 것이고,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점은 고양이와 민들레가 벌이는 사랑 감정의 주관적 층위를 묘파한 것이다. 이 상호 이질적인 관점이 시 「고양이는 민들레와 희롱할 때 잡것을 의식하지 않는다」의 매력이다. 다시 말해서 남녀 간에 벌이는 애정행각은 타인들의 눈에 그저 유치한 희롱이고 스캔들이지만, 사랑 주체에게는 절실한 그 무엇이다. 하여 사랑은 이 세계에 전부인 동시에 너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아무 것도 틈입을 허락하지 않는 사랑. 말하자면 너와 나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었을 때, 사랑은 정지되고 소멸한다.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잡것들을 끼워 넣지 않고 둘만의 밀어를 즐기는 순간이다. 하여 고양이와 민들레가 사랑할 때 잡것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고양이와 민들레 사이의 교감, 즉 전일하게 의식을 집중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다. 나머지들은 다 잡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만의 아름다운 사랑 제의. 흥분하는 몸. 음핵과 남근이 펼쳐지는 감각의 제국. 이제 남은 것은 몸을 통한 사랑이다. 고양이와 민들레가 벌이는 교감은 전희다. 성기결합을 준비하는 살가운 정 나누기. 부드러운 애무. 열리는 몸.
열나흘 달이
달안개 아래 옷을 벗고
부끄러운 몸을 드러낼 때
그대의 암쇠에서 흐르는 사랑을
나는 꼿꼿한 수쇠 세우고
밤새 몽땅 마시고지고
맷손을 돌릴 때마다
빙빙 도는 그대 사랑 따라
촉루가 되도록 살고지고
올콩 늦콩 다 넣고지고
우리들 사랑이
이고 가는 하늘은
고인돌마냥 캄캄할지라도
또륵또륵한 그대의 암쇠 아래
수쇠나 이냥 되고지고
― 오탁번 「맷돌」 전문
사랑의 완성은 다양한 체위로 육체를 향유하는 데 있다. 전이되는 오감. 온몸에 퍼지는 오르가슴. 사랑은 이 마지막 순간으로 치닫는 암컷과 수컷 사이의 감성적 전투인데, 시인 오탁번은 ‘맷돌’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사랑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비딱하게보기'에서 포르노그라피를 구역질나고 지저분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과연 포르노그라피가 추하고 더러운가. 아니 그 더러움과 추함이라는 외설스러움 속에서 인간의 리비도는 만족되고 충족되는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리비도의 충족은 순수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예민한 육체적 감각을 직접적으로 느끼어 주이상스적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오탁번의 시 「맷돌」은 포로노그라피를 시적 언어로 치환시켜 인간의 성에의 욕망을 즉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추하고 더러운가, 아니면 아름답고 숭고한가. 사실 포르노그라피와 「맷돌」은 동일한 성적 사태를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전달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것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말한 것처럼 매체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테제 위에서 작동한다.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의 차이, 문자와 시각의 차이. 시말운동 속에 묘파된 성적 사태는 결코 포로노그라피의 직접적 묘사가 표현해내는 강렬함이 없지만, 시말 속의 성적 사건성은 말의 연상 작용이 이끌어내는 상상적 섹스를 도발하고 있다. 시말운동 속에 내파된 성적 코드가 구체적인 성적 사태를 도발할 때, 그것은 추한가, 아름다운가. 직접성과 승화 이 양자 중에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가. 사랑을 직접적인 육체성 위에서 도발할 때, 그것은 사랑인가, 동물인가. 성기결합이 맷돌의 수쇠와 암쇠로 은유화되었을 때, 그것은 미적으로 승화된 사랑인가, 동물적인 것의 차연인가. 전이되는 주이상스. 지고한 열락의 순간. 성적 사랑은 오르가슴의 순간이다.
사실 성은 무치無恥다. 성은 자연이다. 인간이 옷을 입는 원숭이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륜화한 순간부터 성은 소유의 양식이 되었다. 더 나아가 성은 자유로운 암컷과 수컷의 향유가 아니라 제도적 성으로 고착화된 후부터 무치가 아니라 유치有恥해졌다. 그러나 오탁번의 「맷돌」은 보다 직접적인 성의 향유, 즉 성적 자연성을 즉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압축 전치된 억압의 리비도의 경제학 내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맷돌의 직접적인 원운동의 자장 속에서 다양한 체위를 펼쳐내고 있다. 비록 옷을 벗고 나누는 사랑행위를 부끄러움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오탁번의 육체적 사랑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자발적인 역학적 운동성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말하는 성적 코드는 모두 “몽땅 마시고지고, 살고지고, 다 넣고지고, 이냥 되고지고”라는 동사들의 완료적 행위 속에 절묘하게 내파되어 있다. 따라서 오탁번이 「맷돌」에서 묘파한 육체적 사랑의 함수는 맷돌의 원운동과 수쇠와 암쇠가 결합한 직선운동의 무한변주로 짜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 운동역학적 사랑은 “우리들 사랑이/이고 가는 하늘은/고인돌마냥 캄캄할지라도”에 묘파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사랑 또한 예감하게 된다. 성기결합이 펼쳐내는 아름다운 운명적 사랑. 그러나 그 운명적 사랑은 항상 또 다른 운명을 낳는다.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 전이의 운명. 그것이 사랑 법칙의 본질이다.
떼어 버릴 수도 없고,
아니, 그렇다고 해서
같이 살 수도 없는
치질 같은 사랑이 있다. 깊은 밤
고통 속에 홀로 일어나
튀어나온 치질을 밀어 넣을 때, 문득,
창밖에 흩날리는 눈. 치자꽃보다
희디흰 눈.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용서해라,
지난 시절 내가 키운 것은
사랑이 아니라 원한이었구나. 수없이
빌면서, 나는 또 속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을
지독한 결별을 준비했다.
치정이여, 사랑의 말기암이여.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줄 수 없니?
― 원구식 「치정」 전문
사랑이 성적 사태로 완결될 때, 사랑은 감각의 전이 속에 펼쳐지는 숭고함이라는 희열, 즉 주이상스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도 결국에는 필연적 위반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사랑했던 사랑대상을 사랑하지 않음 쪽으로 모든 사랑-사태를 수렴 귀결시킨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랑은 사랑하지 않음으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전이된다. 동일한 사랑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권태가 되거나 변태가 된다. 따라서 만약 변태성(다양한 성적 취향)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이제까지의 사랑은 종료 전이되어 다른 사랑대상에게로 사랑이 옮겨간다. 왜냐하면 사랑은 항상 더 강력한 것을 원하거나 소멸시효가 적용이 되는 물권적 특발성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멸시효가 적용이 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결코 멈추는 일은 없다.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사랑이라는 형식을 벗어날 수 없다. 원구식의 시 「치정」은 소멸시효가 적용되는 사랑의 한 형식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하여 사랑은 운명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 운명 내부에 항상 불완전한 사랑의 변주곡을 탄주하도록 이미 예정되어져 있다. 사랑은 완전한 만족에 도달하지 못한다. 사랑은 항상 잔고를 남겨놓는다. 사랑의 경제학적 지평은 미수금을 조금 남겨 놓거나 지불을 유예하면서 항상 다음의 사랑을 준비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남아있는 사랑의 잔고나 미수금은 사랑의 불완전성의 징표이다. 비록 사랑의 사슬이 잔고나 미수금에서 비롯하지만, 그것이 다음 사랑을 할 수 있는 동력인이기는 하지만, 이 잔고와 미수금이 사랑의 경제학 전체를 파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잔고나 미수금은 때론 사랑의 전이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랑대상에게로 도달하고픈 마음. 사랑의 경제학의 파산선고.
원구식의 시 「치정」은 잔고 위에 기술되는 사랑의 형식을 설파하고 있다. 사랑의 전이적 에너지가 다른 사랑대상에게 옮겨갈 때, “치질 같은 사랑”이 운명적으로 다가왔을 때, 그것은 “창밖에 흩날리는 눈. 치자꽃보다/희디흰 눈”과 같은 사랑이었지만, 그것은 이내 원한이자 말기암 같은 사랑이 된다. 비록 모든 사랑이 권태로 수렴하여 사랑의 파산 상태에 이르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파산을 번거롭게 하거나 유예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전이, 즉 불륜적 치정을 막을 수는 없다. 비록 고통 속에 지독한 결별을 준비하고 있기는 하지만, 권태를 이겨낸 전이적 사랑에너지는 너무도 강력하게 찬연히 타올라 짜릿한 열락의 순간, 즉 새로운 신체적 감각을 부추긴다. 멈출 수 없다. 법과 질서의 바깥. 혼외정사. 흥분 혹은 발기.
한번 전이된 사랑은 옛사랑에게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 비록 치정 같은 사랑을 멈추고자 하나 “이제 그만/나를 놓아줄 수 없니?”라고 반문하기는 하지만, 파산된 사랑은 결코 봉합이 되지 않는다.
4. 결론을 대신하여-사랑의 진실
여자를 밝힌다고 욕하지 마라
음란한 놈이라고
관음증 환자라고 치부하지 마라
입때껏 치부를 한 것도 없고
드러낼 치부도 하나 없다
여자를 활짝 핀 꽃 같이 밝혀주는 것은
무엇일까
환한 대낮 같이 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둔 길을 갈 때
등롱을 들 듯
꽃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인가
등명접시 받쳐 놓고
불을 댕길 것인가, 아니,
여자는 스스로 열리는 호수
환하게 빛나는 대지라서
하늘 아래
세상에서 여자를 밝힐 일은 없다.
― 홍해리, 「여자를 밝히다」 전문
예이츠가 말한 것처럼 사랑은 눈으로 든다. 그러나 눈으로 든 사랑이 하나의 온전한 사랑으로 발효 성숙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사랑은 존중이다. 사랑은 여자가 남자를 혹은 남자가 여자를 밝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은 타자의 타자성이 나의 존재성으로 고양되는 순간인데, 그것은 사랑의 대상을 소유로 인식하지 않는다. 사랑은 여성의 여성성이 혹은 남성의 남성성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사랑은 성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내적 자아(남성은 아니마anima를 여성은 아니무스animus를)를 찾아가는 인간 완성의 길이다.
홍해리의 시 「여자를 밝히다」는 남성이 여성을 탐닉하는 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 육체적 사랑 너머에서 작동하는 대지적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스로를 밝히는 여성의 대지적 사랑. 리비도적 사랑의 승화. 성적 차이를 지우는 인간애적인 사랑. 진정한 사랑은 성적인 것을 거세시킨다. 만약에 사랑이 작동하는 기제가 리비도의 승화에 있다면, 사랑은 그 자체로 가장 완전한 삶의 형식이 된다. 무성적無性的인 사랑. 스스로 열리는 대지적 사랑. 예이츠가 말한 알아야 할 사랑의 진실. 홍해리가 밝힌 여성의 여성성.
모든 사랑은 향유에서 승화에로 향하게 되어 있다. 운명 같은 사랑의 법칙도 치정 같은 사랑의 흥분도 사랑의 진실 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하여 사랑은 사랑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사랑을 사랑할 때, 혹은 사랑이 이 세계의 최종심급일 때, 이 세계는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는 공간이 아닐까. 예이츠의 진실과 홍해리의 대지적 여성성은 사랑의 법칙 내부를 지배하는 사랑의 진실은 아니었을까. 사랑의 기호가 충실한 이 세계. 아름다운 이 세계. 분명 21세기에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불 같은 사랑 기호가 흘러 넘쳤으면 좋겠다.
김석준∙1999년 ≪시와시학≫으로 시 등단. 2001년 ≪시안≫으로 평론 등단. 평론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 시집 기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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