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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특집/박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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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06회 작성일 08-07-09 17:30

본문

현대시 속에 나타난 연애관
― 90년대 이후의 시를 중심으로
박남희|시인


1. 권력과 성
문학에서 가장 중심 되는 주제를 말하라면 그것은 단연 사랑과 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사랑은 인간의 삶과 문학에 가장 보편적인 주제이면서 늘 새로운 주제이다. 하지만 사랑과 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삶의 본질이면서도 끊임없이 왜곡되고 억압되어온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르쿠제가 '에로스와 문명'에서 현대문명의 연원을 사랑과 성의 억압에서 찾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성이 억압되기에 이르렀는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권력 때문이다. 권력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할 성을 집단화, 이데올로기화해서 왜곡된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17세기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성적 억압의 권력화를 들 수 있다. 당대의 성적 욕망은 권력이 추구하는 집단화된 욕망에 의해서 억압되고 거세된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보면 권력과 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현대시에 나타난 권력과 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부독재가 판을 치던 7, 80년대 문학에 나타난 성이 권력집단에 대한 안티테제적 성격을 띠고 나타난 반면에 90년대 이후에 오면 그것은 차츰 개인화된다. 남성권력에 대한 대항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페미니즘 문학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차츰 약화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90년대 이후로 오면 성은 지극히 개인화되고 물질화된다. 80년대가 이른바 광주가 중심이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압구정동이 중심이 된다. 이른바 성이 본격적으로 소비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상의 전제를 바탕으로 필자가 이 글을 통해서 살펴보려는 것은 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연애시의 경향과 징후들이다. ‘연애’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거나 사랑하는 것을 주제로 한 시는 모두 연애시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글의 범위는 보다 광범위해진다. 그렇다면 그리움과 사랑과 성을 주제로 한 시는 모두 사랑시에 넣어도 될까? 사랑이 없는 섹스, 이른바 성을 물질화된 소비의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도 사랑시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랑 없는 섹스를 주제로 한 시도 그것이 유사 사랑행위라는 점에서 사랑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2. 사랑시 같지 않은 사랑시
현대시를 살펴보면 사랑시의 면모가 고도의 시적 장치에 의해서 은폐되어 있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쉽게 드러나 있는 경우가 있다. 시는 산문과 달라서 시적 주제를 감추어서 보여주게 되는데, 감추어져 있는 시적 주제를 찾아내는 일은 시를 읽는 즐거움을 배가 시켜 주기도 한다. 우선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끓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환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 정병근, 「유리의 技術」 전문 

이 시는 화자가 창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집 안으로 들어와 있는 햇빛을 보면서, 그것이 마치 유리의 기술로 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이야말로 ‘유리의 기술’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간의 양면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 사랑(삶)과 죽음을 두 개의 이질적 공간으로 나누는 생의 비의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숨을 끊고 오래 버티며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비로소 신음 소리를 낸다는 것은 창문의 안과 밖이 이승과 저승의 서로 다른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과 ‘소리’와 ‘고통’이 있는 곳이 이승이라면, ‘적막’이 있는 곳은 저승인 셈이다. 이처럼 이 시는 언뜻 보면 삶과 죽음의 이원적 공간을 상징화해서 보여주고 있는 시로 읽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사랑과 고통에 대한 담론이 숨어있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이라든가,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라는 말 속에는 “고통은 사랑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이나, “삶은 사랑의 맛이 아니던가”라는 의미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리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초고속 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그 배후가 궁금하다”가 전문인 이덕규의 시 「풍향계」는 어떤가? 이 시를 사랑 시로 읽는다면 ‘풍향계’는 ‘사랑의 풍향계’이고  ‘그 배후’는 ‘사랑의 후폭풍의 배후’ 쯤 될 것이다.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 반칠환,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전문
                            
이 시는 흡사 안도현의 「겨울 강가에서」를 연상시키는 시인데, 안도현의 시가 강물과 눈의 관계였다면 이 시는 왜가리와 냇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을 보여준다. 안도현의 시가 강물의 모성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 시는 왜가리와 냇물의 상호관계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성적이다. 양재천에 왜가리가 하필이면 외다리를 담그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렇고, 냇물과 왜가리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다른 의미의 배려를 통해서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즉 사랑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것도 그러하다. 즉 남녀가 육체적인 사랑을 하며 헤어지지 않고 오래 같이 있는 것이야말로 겨울에도 물을 얼지 않게 하는 사랑의 힘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3. 자연, 또는 우주를 통해서 깨닫는 사랑의 본질
인간과 자연(우주)은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연결되어 있어서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볼 수도 있고 인간을 통해서 자연을 볼 수도 있다. 인간 자체가 소우주이면서 동시에 커다란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을 통해서 사랑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주 속에는 사랑의 원리와 비밀이 무수히 숨어있고 시인들은 원광석을 캐내듯 자연과 우주를 통해서 사랑의 비밀을 캐내고 싶어 한다. 이렇듯 우주 속에 편재한 사랑의 비밀을 캐내는 과정에서 시인은 새로운 깨달음과 더불어 사랑의 이치를 알게 된다. 
이렇게 새롭게 발견되고 묘사된 사랑시들은 어떠한 사랑시들보다도 아름답고 시적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자연이나 우주는 사랑의 유기체일 뿐 아니라 시적 비유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비유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사랑의 명시들은 사랑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므로 자연(우주)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진 사랑시를 읽는 일은 늘 새롭다. 자연과 우주가 무한하듯이 자연을 통한 사랑의 발견도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의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 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함민복, 「선천성 그리움」 전문

사랑이 먼저인지 그리움이 먼저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있고 그리움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이라면 사랑과 그리움은 어쩌면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함민복의 시는 남녀 간의 사랑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고 끝내 서로 겹쳐질 수 없다는 사랑의 이치를 ‘선천성 그리움’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를/날아오르는 새떼”나 “내리치는 번개”야말로 그리움의 자연적 현현顯現이면서 사랑이 우주적 원리 중의 하나라는 것을 증거해 주는 자연적 매개물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어긋나는 것도 사랑의 본질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리움은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천적 그리움인 것이다.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 김혜순, 「지평선」 전문
  
하늘이 남성이라면 땅은 여성의 상징성을 띄고 있다. 1연에서 지평선을 사이에 두고 하늘과 땅이 갈라진 것은 남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운명적 징표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간은 저녁이다. 어둠이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지우는 저녁이야말로 남녀의 사랑이 절정을 이루는 시각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항상 붉은 노을로 상징되는 상처가 존재한다. 이처럼 시인은 남녀 간의 사랑을 숙명적 갈라짐과 상처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적 만남으로 정의하고 있다. 시인에 의하면 사랑이란 상처와 상처가 만나서 서로 스미는 것이다. 낮이면 그녀가 매가 되어 남성적 공간인 하늘을 나는 것이나, 밤이면 그가 늑대가 되어 여성적 공간인 땅을 걸어 다니는 것은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란 하늘과 땅, 낮과 밤이 만나는 시간인 저녁에 남녀가 칼날처럼 스치듯 만나 사랑을 나누는 촌음寸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남녀 간의 사랑의 본질을 하늘과 땅, 낮과 밤의 만남으로 보고 있는데, 이 시를 좀 더 깊게 읽어보면 상당히 성적인 코드가 발견된다. 2연에서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은 시인의 안과 밖의 통로인 눈(眼)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여성성기의 상징이다. 육체적인 관능은 저녁 어스름 같은 것으로 하늘과 땅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하는 매개물이다. 낮에는 매처럼 고고하던 그녀도 밤이 되면 늑대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시인의 내적 어스름(그리움)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어스름은 저녁에 수시로 찾아오듯 시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리움을 통한 남녀 간의 만남 뒤에는 늘 상처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야말로 서로 영원히 겹쳐지지 않는 남녀 간의 알 수 없는 사랑의 비밀이다.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이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문정희, 「응」 전문

인간의 사랑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이 상처이지만 그래도 남과 여, 하늘과 땅이 합일을 이루는 순간이야말로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김혜순의 ‘지평선’이 사랑의 붉은 상처를 보여주는 지평선이라면 문정희의 ‘지평선’은 해와 달 사이의 사랑의 조응을 이루게 해주는 매개물이다. 문정희 시인은 “햇살 가득한 대낮”에 사랑을 하고 싶냐는 상대방의 문자에 주저함 없이 ‘응’이라는 대답을 한다. 이것은 문정희 시인이 추구하는 육체적 사랑이 밝고 긍정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반면에 김혜순 시인의 사랑은 저녁 어스름만큼이나 그늘지고 아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정희 시인의 사랑이 보다 페미니즘적이고 능동적이다. 이처럼 남녀 간의 육체적인 사랑에 당당한 것이 문정희 시의 특징인데, 이것은 보수적인 윤리관이 지배해온 우리 시에서는 비교적 희귀한 것이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지평선이 놓여있는 우주적 사랑의 본질을 ‘응’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해 언어미학적 성취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시는 인간이 그동안 무수히 질문해온 사랑의 본질에 대한 가장 경쾌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4. 엇갈린 사랑과 운명적 사랑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신의 섭리이고 자연의 이치이지만, 사랑은 그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경우 보다는 어긋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게 된다. 설사 그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그늘지고 아픈 사랑이라고 해도 인간은 그 사랑을 쉽게 지워버리지 못한다. 더구나 두 사람 사이에 지울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상처와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쉽게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속시킬 수도 없는 사랑이야말로 엇갈림과 운명 사이에 놓인 이율배반적 사랑이다.

구름을 뒤덮은 샛노란 유채꽃밭이었어도
구름이 차지하면 그늘진 방석이었지
뉘게나 환한 화원花園은 아니었다
어두워지기 직전을 
자진 여울로 타넘고 오는 무너미 같은 어스름 속에
널 혼자 세워두고 돌아서는 저녁
흔들리는 가지에나 걸쳐놓은 바람이 
빈 터를 둘러 녹슨 철조망에도 붐비고 있다
문득 그 자리에 모자를 걸어둔 채 떠나왔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갑자기 으스스해져 한기에 떤다
해마다 이맘때면 화관花冠을 고쳐 쓰는
대지의 어떤 습관처럼 거기 어딘가 폭죽을 매단
수만 꽃송이로 엮어 민 대머리에 얹는
나비날개로나 져 나르는 구름모자가 있었는지
내 몸에 돋아난 가시로 
널 찌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꺾인 가지 하나 아직도 자꾸만 
허공 속으로 뻗어가자고 한다
― 김명인, 「모자」 전문

유채꽃밭 같은 사랑도 구름, 즉 걱정이나 근심을 유발하는 복잡한 생각이 차지하게 되면 그늘진 방석이 되어 마냥 ‘환한 화원’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무너미 같은 어스름 속에” 그녀를 세워두고 혼자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시인의 마음은 그녀와 함께 했던 곳에 붐비던 바람으로 인해 끝내 허전함을 느낀다. 그것은 문득 시인의 마음에 떠오른, 그곳에 걸어둔 채 놓고 온 ‘모자’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이 두고 온 모자를 “해마다 이맘때면 화관花冠을 고쳐 쓰는/대지의 어떤 습관처럼 거기 어딘가 폭죽을 매단/수만 꽃송이로 엮어 민 대머리에 얹는/나비날개로나 져 나르는 구름모자”라고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시인의 전 존재를 건 사랑의 모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사랑의 운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된 것이 자신이 가시가 되어 그녀를 찌르려 한 것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끝낼 수 없는 사랑이기에 “꺾인 가지 하나 아직도 자꾸만/허공 속으로” 사랑을 뻗어가자고 하는 것이다.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노란 풀꽃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나희덕, 「시월」 전문
처음 보는 것인데 언젠가 본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을 데자뷰 현상이라고 한다. 시인은 시월이라는 조락의 계절에 깊은 산에 들어가 문득 데자뷰 현상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시인은 자신이 있는 곳에 문득 사랑하는 ‘당신’이 왔다가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흘려보내기도 하고 어깨에 햇살을 받으며 담배도 피우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급기야는 지금 자신 앞에 보이는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바위, 도토리, 청설모, 노란 풀꽃 같은 것들의 이름이 온통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느껴지기에 이른다. 사랑도 이쯤 되면 운명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이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시인 곁에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혼자서 ‘당신’을 생각하며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물 위로 흘러내리면/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라는 막연한 소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인이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단풍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는 행위는 ‘당신’과의 마음 깊은 사랑의 교감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설렘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의 어긋남은 이처럼 그리움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어준다.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늘 어긋나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안진 시인은 그의 시 「만나면서 못 만나는」에서 인간이 만나고 싶은 존재를 늘 만나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늘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희덕 시인은 유안진 시인과는 달리 주변의 사물들을 통해서 ‘당신’을 느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시인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고 싶어 한다. 아마도 이런 사랑이야말로 운명적 사랑일 것이다.

5. 금지된 사랑과 일탈에의 욕망
인간은 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막상 어떤 사랑과 만나게 되면 그 사랑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이 꿈꾸는 사랑에는 환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일처제를 중심으로 한 결혼이라는 가족 제도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사랑의 도덕적 규범과 일탈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계기판보다 단 한 번의 느낌을 믿었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조종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런 착시현상이 내게도 있었다. 바다를 하늘로 알고 거꾸로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수평비행으로 알았다가 뒤집히는 비행기처럼 등대 불빛을 하늘의 별빛으로, 하강하는 것을 상승하는 것으로 알았다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그가 나를 고속으로 회전시켰을 때 모든 세상의 계기판을 버리고 딱 한 번 느낌을 믿었던 사랑,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었다. 궤를 벗어나 한없이 추락하다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까무룩하게 거꾸로 거꾸로 날아갈 때 바다와 별빛이 올라붙는 느낌은 죽음 직전에 갖는 딱 한 번의 황홀이었다.
― 최문자, 「Vertigo 비행감각」 전문

‘Vertigo 비행감각’이란 조종사가 고속으로 비행할 때 느끼게 되는 순간적인 착시현상을 말한다. 시인은 이러한 비행사의 착시현상을 사랑의 착시현상에 비유한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고속으로 회전하듯이 시인은 자신을 사랑의 비행기에 태워 고속으로 회전시키면서 도덕이나 윤리라는 계기판보다는 딱 한번의 ‘느낌’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시인은 비행기가 추락하다 산산이 부서져 바다에 빠져죽는 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인이 이처럼 위험한 사랑을 택하게 된 동기는 “까무룩하게 거꾸로 거꾸로 날아갈 때 바다와 별빛이 올라붙는 느낌” 즉 “죽음 직전에 갖는 딱 한 번의 황홀”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시인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일이지만 ‘딱 한번’의 경험에 그칠 수밖에 없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두려움보다는 일탈의 황홀감을 잊지 못해서 끊임없는 일탈을 꿈꾸게 된다.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 문혜진, 「질 나쁜 연애」 전문
요즘 젊은 여성 시인들을 보면 연애나 사랑관이 매우 도발적이다. 문혜진의 시 역시 무더운 여름날 도서관에 묻혀서 책과 씨름하는 것보다 잠자리 모양의 선그라스를 끼고 불량한 남자와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바다로 놀러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일탈의식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를 입히고 성적으로 억압을 했던 엄마의 행동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이 강하다. “바다가 펄럭이는/바람 부는 길로/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검은 구름을 몰고/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라는 화자의 독백은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 즉 젊은 날이 다 가기 전에 누려보고 싶은 일탈욕망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일탈에의 욕망은 젊은 여성 시인에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중년 여성들도 일탈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과거의 억압적 환경과 이미 지나가 버린 젊음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이러한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근거리는 자궁이 되는 거야
중년의 처녀막
기꺼이 찢어 내고
아지랑이의 젖물
보얗게 채우는 거야
부푼 아기집 속에
내가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거야, 무럭무럭 자라는 거야
비늘로, 날개로, 메아리로, 그림자로, 천둥으로……

혼자서도 울리는
북이 되는 거야
급 화살 같은 햇살에
골반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에
물고기의 혼인색에
위아래 뻥 뚫린 모자라
자꾸자꾸 숭숭
구멍 뚫리는 거야

그물코 없는 그물이 되는 거야
무엇이 걸리고
무엇이 빠져나가는
내버려 두는 거야, 이 봄엔
― 강기원, 「달거리가 끝난 봄에는」 전문
  
“중년의 처녀막 기꺼이 찢어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근거리는 자궁이 되는 거야”라는 도발적인 진술로 시작되는 이 시는 중년의 사랑과 성이 더 이상 ‘폐경’이 아님을 우리에게 선언한다. 이 시는 중년의 사랑이 오히려 더욱 자유롭고 도발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중년의 처녀막을 찢어내고 자신의 부푼 아기집 속에 자신이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기존의 중년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낡은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갱신해 보려는 페미니즘적 몸부림으로 읽힌다. 과거에는 감추어야 할 대상이었던 성이 오히려 적극적인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당신을 자신의 속눈썹 위에 올려놓고 눈을 깜박여 나락으로 떨어뜨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작아지게 만들겠다는 박연준의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은 기존의 남성 우위의 가치관에 대한 전복을 꿈꾸는 연애시이고, 옛 애인의 전화를 받고 얼레지 꽃을 생각하며 자위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김선우의 「얼레지」, ‘번개 여관’에서 낯선 여자와 ‘번개’를 해서 매춘을 하는 일회적인 사랑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그린 정병근의 「번개를 치다」 등은 각기 다른 양상의 사랑의 일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특히 젊은 여성시에서 ‘자위’를 주제로 한 시가 많다는 것은 이색적이다. 김이듬의 「지금은 自慰 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와 신미나의 「부레옥잠」, 이민하의 「오이에 관한 편견과 중독」 등도 자위를 주제로 한 시들이다. 이처럼 과거에는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던 주제들이 여성시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남성에 비해 비교적 성적 억압이 심한 여성적 삶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위’를 주제로 한 시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성의 사랑시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6. 사랑의 환상과 폐허의식  
사랑은 그것이 찾아올 때는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강렬한 격정과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한차례 그것이 스쳐 지나가고 나면 허전함과 공허가 찾아들게 된다. 이처럼 사랑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크면 클수록 환멸 또한 커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득한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 스스로가 ‘불쌍한 사랑기계’(김혜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사랑이란 김혜순의 말처럼 “자기보존 프로그램대로 움직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랑이 모두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있다
뭔가 휙, 지나가버린 때
주방 구석에 앉아 상추쌈 먹으며 울었다
쑥갓 두어 잎 얹어 먹으며 울었다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않았지만
지나갔다,
막막해서 입 미어지도록 상추쌈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었다 혀가 씹혔다
치명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아무 키나 누르면 회복되기도 하지만
그나마 남은 것 다 지워질까 봐
노심초사 상추쌈만 꾸역꾸역 넣는다
쌈장에 찰지게 버무려진
환幻이라는 것,
마늘 환幻, 양파 환幻, 참깨 환幻
꼭꼭 씹어 먹는다
내가 먹은 게 너였나
너가 먹은 건 나였나
가부좌 틀고 앉아 들었다 놨다 한 너,
잘 가라, 환幻
속치마 레이스 같은 환幻을 걷어내면 문득
실핏줄 아른아른 비치는 늙음이 다가와 있을 거다
여기서부터 가파르다
단물 빠진 거친 밥상 위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
깊은 맛은 씹은 뒤에 안다고
넌지시 또렷하게 말하는,
― 이규리, 「잘 가라, 환幻」 전문
누구나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한번 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때는 금방 휙, 하고 지나가 버린다. 시인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환상을 되뇌이듯 상추쌈을 씹으며 운다.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환상이 흡사 상추쌈의 맛과 흡사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쌈장에 찰지게 버무려진/환幻이라는 것,/마늘 환幻, 양파 환幻, 참깨 환幻/꼭꼭 씹어 먹는다”. 흡사 과거의 사랑의 환상을 되뇌어 꼭꼭 씹어 먹듯이. 그리하여 그녀는 속으로 외친다. “잘 가라 환幻”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지배했던 사랑의 환상을 걷어내며 문득 자신에게 늙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스로 중년 이후의 삶이야말로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 자위하듯 중얼거린다. 
이규리의 또 다른 시 「폐허라는 것」에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누구에겐가 한 때 폐허”였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의 ‘폐허’는 누군가를 사랑해서 마음이 허물어져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듯 사랑의 환상은 필연적으로 환멸이나 폐허를 동반한다.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에서 보듯이 자신이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라는 것을 느낄 때 인간은 사랑의 공허함과 진실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까지 들어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뼈아프다. 이러한 사랑의 결과는 그 누구와도 타협할 줄 모르는 시인 자신의 자아 때문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자아의 문제이며, 자신의 자아가 찾아간 사랑의 자리가 폐허라고 느껴질 때 인간은 슬퍼진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어느 정도 자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단절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사랑의 단절을 치유하는 길은 또 다시 사랑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길 밖에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 김상미, 「사랑」 전문

김상미 시인의 「사랑」은 꽃을 품은 화초가 햇빛을 온몸에 받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힘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남쪽은 태양을 의미하는 것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화초로 상징되는 시적 자아가 남쪽으로 젖혀지는 것은 사랑에 대한 화응의 몸짓이다. 그렇게 할 때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길들이/내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몸에 난 길을 닦는 것이 사랑이라는 진술을 통해서 사랑의 육체성이 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햇빛이 도처에서 지상을 비추듯이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사랑의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박남희∙195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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