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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특집/권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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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14회 작성일 08-07-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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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을 지우다
권채린|문학평론가


1. 우리 시대의 사랑, 탈낭만화 ‘이후’
사랑 혹은 연애가 일종의 제도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랑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이 18세기에 들어서 고안된 ‘발명품’이라는 데서 드러나듯, 사랑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기에 앞서 시대의 이념과 풍속을 투영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사랑의 감정에 연루된 사회적, 제도적 이데올로기의 흔적들은 그 자체로 감정과 구분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견고히 결속된 미분화의 장 속에서 사랑은 탄생하고 존립하고 도태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사회의 안정화와 효율적인 재생산을 도모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정련되어진다. 낭만적 사랑이 상대에 대한 ‘영구적인 관여’라는 관념으로 이상화되어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적 장치에 자연스레 복속했던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낭만적 사랑과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열정적 사랑(passionate love)이 왜 불안하고 위험하게 여겨졌는지, 불륜이 왜 그토록 불온하고 음탕한 ‘주홍글씨’의 낙인으로 대접받아야 했는지를 알려준다.
2000년대의 한국소설 속의 연애담이 보여주는 뚜렷한 특성 중 하나는 사랑이 제도라는 것을 알아버린 자들의 과감한 ‘탈낭만화’ 전략이다. 타자와의 거리 감각을 마비시키고, 관계/사이에 개입된 억압적 현실 문제를 망각케 하는 사랑의 인력引力으로부터 소설은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는 중이다. 이미 90년대 후반에 은희경이 순정한 연애에 대한 냉소를 통해 사랑을 허구화하는 작업을 인상 깊게 행한 이래, ‘탈낭만화’의 경향은 최근 소설들이 본연적 형식으로 받아들인 생래적 감각으로 보인다. 
사랑을 하기도 전에 사랑의 허위를 알아버린 자들의 연애는 ‘하드 보일드’할 수밖에 없다. 정념을 걷어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불륜, 동성애, 사도매저키즘과 같은 위험하고 급진적인 사랑들이다. 사랑을 ‘낭만적’이고 ‘안전한’ 형태로 옹립해주는 관습적 가치와 제도들-가족, 가부장제, 국가, 결혼, 이성애, 성기 중심주의 등-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비판적으로 폭로하는 가운데, 소설은 낯설고 불온한 ‘전복’과 ‘해체’의 기획을 완수한다. 여기서 소설은 사랑을 둘러싼 억압적 경계선을 ‘넘어’ 이질적이고 낯선 사랑의 징후를 호출하지만, 그 징후 자체가 기존 현실을 되비쳐주는 ‘거울’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다시금 완고한 경계선 안에 연루된다. 불륜의 사랑이 결국 가정으로 회귀하고, 동성애가 이성애의 권력구도를 흉내 내고, 사도매저키즘이 향유가 아닌 또 다른 억압이 되는 것은 이러한 기획의 불완전함을 예증한다. 이질적인, 타자화된 사랑들에서조차도 불가피하게 ‘현실’은 강력한 참조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설들은 이러한 ‘현실’의 참조점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배수아, 강영숙, 김연수 등의 소설에서 연애담은 경계를 ‘넘은’ 자리가 아니라 이미 ‘지워진’ 자리에서 발화한다. ‘상대적으로’ 현실의 밑그림이 희미한 소설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삭제한 소설들이다. 배수아의 소설은 ‘학교’와 ‘가족’을 떠나고 ‘국적’과 ‘성차’마저 지우며, 강영숙의 소설은 젠더, 섹슈얼리티, 육체가 복수적으로 미분화된 영역에 존재하고, 김연수는 필연/우연, 진실/거짓, 역사/개인 같은 사변적이고 거대한 밑그림을 가져온다. 삶을 특징지우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기구가 사라진 매끄러운 공간에서 그들의 소설은 “스스로 개별적으로 존재”('에세이스트의 책상')한다. 사적이면서 공적인, 정신적 교감이자 육체적 쾌락인 너무나 ‘현실적인’ 사랑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랑론을 쓴다. 
그 공간은 ‘무중력’의 지대라기보다, ‘홈 패인 공간’의 이데올로기적 선분들이 자리잡기 이전의 ‘기관 없는 신체’(들뢰즈․가타리)와 같다. 그곳은 고착화되지 않는 욕망의 흐름, 그래서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잠재성 자체이다.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소설 텍스트는 그들만의 질서로 창안된 ‘새로운 현실’이 들어서기 좋은 공간이다. 그들의 소설이 어떤 낯설음을 준다면 그것은 억압된 기억에서 파생한 ‘두려운 낯설음’(uncanny)이 아니라 경험하거나 목도해 보지 못한 낯설음이다. 그 낯설음이야말로 그들이 새롭게 구획하고 분할한, 현실의 전위적인 ‘질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한국소설이 일구어 낸 사랑의 지형도 어딘가의 극한의 지점이자 새로운 ‘현실’의 지대를 감각해 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2. 사랑의 담론에서 담론의 사랑으로
배수아에게 사랑은 ‘이반異般’이다. 작가 스스로 연애소설임을 표방하고 쓴 '붉은 손 클럽'에서 주인공 한나를 “이기적이고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로 이끌었던 인물의 이름은 ‘이반’이었다. 한자로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이반이 ‘일반一般’이 ‘아닌 것’으로서의 동성애를 의미하는 은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반이라는 기이한 단어는 이후 배수아의 소설에서 본격화되는 동성애를 예고하는 동시에 그녀의 소설이 기성 질서와 제도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난,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배수아 소설이 보여주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관습적 성차의 흔적이 지워져 있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사항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작가는 특별히 동성애임을 명시하거나 강조하지 않았으나 애써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에리히의 파티에서 동성애가 표면적으로 가시화된 장면(“이것 봐, 거기 아가씨들!”, 112쪽)은 성별에 대해 무감하게 혹은 혼란스럽게 소설을 읽어내려 가던 독자의 관습적 인식에 균열과 충격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소설 내적으로는 어떠한 동기나 변환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특히 M과 ‘나’의 관계에서 그들 스스로 ‘성’을 의식화하거나 문제화하는 경우는 없다. M이 “단지 순수한 육체적인 호기심 때문에” 에리히와 잤다는 고백조차 ‘이성’의 육체에 대한 호기심인지 ‘보편적’ 육체에 대한 호기심인지 표시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나’의 결별의 심경 또한 “소유욕”과 “유한하고 가변적인 육체”에 대한 절망과 고뇌로 표현될 뿐 젠더적 성애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성별이 문제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에리히에 의해서이다. ‘나’의 작문선생이었던 에리히는 그들의 동성애 관계를 겨냥해 경멸의 언사를 보낸다. 에리히는 ‘나’가 외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이유, M이 보편정신을 찾아 방황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조롱하지만, “단지 슈베르트의 노래 때문에?”라는 마지막 말은 그의 경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려준다.(‘나’가 설명하고 있듯이 슈베르트의 노래 가사는 동성의 애인을 향한 것이다.) 에리히의 논법에 의하면, ‘나’와 M의 보편에의 열망은 동성애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 동성애의 외장이자 그로부터 비롯된 유비적, 귀납적 결론에 불과하다. 보편정신과 동성애, 둘 모두 어떤 ‘차이’를 지우는 가운데 생성된다는 점에서 에리히의 논법은 반쯤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과 배제의 논리를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하지 못하다. 에리히의 경멸은 ‘나’와 M이 만들어낸 절대적이고 충일한 공간이 어떠한 현실적 편견과 오해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정작 흥미로운 것은 ‘나’의 반응이다. ‘나’는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본 가운데 ‘나’가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너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라니. 이것은 조롱인가? 내가 인용한 슈베르트의 노래를 M 앞에서 태연하게 낭독했기 때문에? 에리히는 언제나 나를 약자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가 직접 말한 적은 없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에게 내적 언어의 보편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나는 언어를 배우는 학생이고, 언어를 배우는 학생이란 펼쳐내 보일 수 있는, 제시할 수 있는 정신세계의 열등함에서, 약자인 것이다. 내가 인용한 슈베르트의 노래에서 그는 나와 M의 관계를 유추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는 무례하지 않았고 그 이상으로는 나를 모욕한 것도 아니었다.(127쪽)

에리히가 ‘보편’에 대한 비판으로 에둘러 동성애를 비난하고 있다면, ‘나’는 그러한 비난을 다시 ‘보편’에 대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즉, ‘나’에게 에리히의 언사는 동성애에 대한 현실세계의 편견이 아니라, “정신세계의 열등함”에 대한 권력관계의 구도로서 해석되고 있다. ‘나’가 에리히에게 “약자”인 것은 단순히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고 작품을 읽어내는 능력의 미숙함과 단순함에서 기인한다. 슈베르트의 노래에서 고작 자신과 M의 관계를 유추하고 있는 작문의 ‘열등함’이 에리히의 경멸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자신의 “정신세계”가 지닌 열등함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추론이 에리히의 언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해에 도달하기까지 한번도 ‘나’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외부적 시선이나 사회적 편견을 고려치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타인들의 범속한 인식에 대한 자각조차 허용치 않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의 결과로 볼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의 의식이 상징계적 현실이 아닌 철저히 보편적 정신세계와 개체적 무한성의 세계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성애/동성애, 섹스/젠더의 체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소유욕과 질투, 고독과 고립, 의심과 그리움, 상처와 아픔 등 관계 속에서 파생된 개별적이고 미분화된 가치들이 사랑의 문법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기원이나 역사를 가지지 않은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순수한 ‘특이점’들이다. ‘나’와 M의 사랑은 그 특이점들이 그들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반응하고 교호하여 그려낸 최초의, 유일한 지형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사랑, 특히 동성애가 한국문학 속에서 어떠한 의미론적 토양에 위치하는지 혹은 했었는지를 상기한다면 매우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신경숙의 「딸기밭」('딸기밭', 문학과지성사, 2000)에 대한 다음의 평문은 사랑/동성애가 어떻게 존재하고 의미화 되는지를 알려주는 한 표본이다.

‘처녀’의 성 경험은 ‘범죄형’의 외모를 지닌 ‘그 남자’의 관계와 화사하고 자유분방한 대학친구 유와의 관계로 양분되어 있지만 양자는 아귀가 꽉 맞물려 있다. 처녀의 가족상황은 '바이올렛'의 오산의 경우와 유사하다. 처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끝간데 없는 결핍”에 시달리며 어머니와의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개입되어” 있다. 처녀는 이런 가족의 결손과 생활고로 인해 발육부진인데다, 가혹한 시대의 “사소한 일상에까지 스며 있던 억압”으로 인해 심히 위축되어 있다. 처녀의 욕망의 경험은 이런 ‘결핍’과 ‘억압’과 ‘위축’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중략) 말하자면 그 남자는 처녀에게 부재한 아버지의 대리자인 셈이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처녀의 ‘끝간데 없는 결핍’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가까워지면서 친밀한 ‘근친애’적 사랑을 나눈다. (중략) 유의 화사함과 자유로움은 금기로 옥죄인 처녀의 몸을 풀어주어 “서로의 등을 때리고 발등을 건드리고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는 “억압이 없는 장난기”를 나눌 수 있게 해준다. 동성 간에 이처럼 거리낌 없이 서로의 몸을 건드리는 행동에서 언뜻 동성애를 연상시키지만 이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자매애에 대한 욕구이다. 

신경숙의 「딸기밭」은 딸기밭에서 두 여성들이 나누는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성애장면으로 인상 깊게 회자되었던 작품이다. 위의 평문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에는 사랑/동성애의 성립과 그것의 해석에 관한 어떤 공식이 존재한다. 간략화하자면 먼저, 황폐한 가족관계의 환기. 특히 아버지의 ‘부재’ 혹은 가부장적 억압은 사랑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둘째, 결핍/억압/위축과 같은 정신분석학적 해석에의 연루. 성장과정에서 억압되거나 금기된 욕망은 후에 특정한 사랑의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셋째, 이성애와 동성애의 대립적, 배타적 관계 구도. 동성애는 이성애에 내재한 폭력성을 환기함과 동시에 대체하려는 욕망에 가깝다. 여성간의 교감과 연대에 바탕한 ‘자매애’는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사랑/동성애의 이러한 존재론과 해석 방법은 소설이 ‘시간’과 ‘기억’의 서사라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가족’과 ‘내면’과 ‘(상징계적) 현실’의 확보를 통해 텍스트는 어떤 ‘깊이’를 획득하고, 해석하는 자는 텍스트를 ‘두껍게’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배수아의 소설에서 이러한 해석은 가능한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소설은 의도적으로 그 ‘깊이’와 ‘두꺼움’을 삭제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정신적 원적原籍으로서의 ‘기억’과 ‘역사’를 제거함으로써만 비로소 진정한 ‘개인’으로 존립할 수 있다. 기억과 역사는 개인의 본질을 해명하기보다 왜곡하며, 본질이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조차 폭력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이데올로기화된 ‘영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가족 모델 혹은 가부장적 상징체계에 포획되지 않는 자, 부재와 억압의 내면적 서사로 설명되지 않는 자, 성차의 감각 자체가 마비된 자. 그러므로 시간이 아닌 ‘장소’에 속한 채, 정주하지 않는 ‘이방인’('동물원 킨트', 2002)이 되길 자처하는 자들이 배수아 소설의 인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이 휘발되어 버린 탈영토의 지대에 들어선 것은 무엇인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념’만이 존재하고 사랑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험들은 사라져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의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 육체적 욕망, 결별의 상처와 고독, 상대에 대한 불쾌와 혐오 같은 ‘체감’과 ‘경험’의 차원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와 M의 사랑은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결별 이유가 M이 에리히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는 데에서 파생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배수아의 소설이 그러한 경험, 감정들을 끊임없이 사유와 관념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담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를 깊게 관통했던 것은 소유욕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며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132쪽). 질문하고 답변하고 회의하는 과정에서 소설은 사랑의 실제적인 국면들을 ‘메타’ 담론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사랑에 대한 담론’이 아닌 ‘담론의 사랑’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사유 구조의 형상물이다.
그러므로 배수아 소설은 ‘현실’ 대신 ‘담론-현실’이 있을 뿐이다. 담론-현실은 상징계적 현실이 지워진 자리에 들어선 2차적인 현실이자 ‘새로운 현실’이다. 그곳에 일상적인 현실은 없지만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삶은 있다. 언어와 음악, 육체와 영혼, 배려와 관용 등과 같은 상위 심급의 항목들을 통해 삶의 실제적 국면들을 전유함으로써 배수아의 소설은 보다 ‘큰’ 이야기로 나아가려 한다. 그 속에서 사랑은 현실을 견디며, 그리고 현실을 지우며 정신적 편력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3. n개의 사랑, n개의 육체
다시 한번, 국적과 성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배수아 소설의 무국적無國籍성, 관습적 성차의 지워짐이란 특징은 강영숙의 소설 '리나'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어떤 ‘차이’를 내포한다. 열여섯 살 소녀의 국경 탈출기를 그린 '리나'는 ‘어디론가’의 탈출담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지명이나 지역이 표시되지 않은 채, ‘P국’ ‘탄광촌’ ‘대륙의 북서쪽’ 등의 심상한 표현으로 리나의 행로를 드러낸다. 배수아의 무국적성이 철저히 현실을 벗어난 외재성의 장을 통해 보편적 세계에의 지향을 드러냈다면, 강영숙의 그것은 명료히 표시되지 않고 있을 뿐 충분히 구체적인 어딘가를 환기하고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성차는 어떠한가. 배수아의 인물들이 성별의 특성을 삭제한 ‘무성적無性的’이거나 ‘중성적’인 특징을 지닌다면, 강영숙의 인물들은 한 평문에서 지적했듯이 ‘복수적 젠더’의 소유자들이다. 분명 젠더적 정체성이 드러나지만 하나의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 자들. 그러므로 관습적 성차의 지워짐은 젠더적 성이 ‘없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음’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나'에서 드러나는 ‘사랑’ 혹은 ‘관계’의 국면은 어떠한가. 이 소설에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대략 세 가지이다. 리나와 삐, 리나와 봉제 공장 언니, 그리고 전직 가수 할머니와 그의 애인. 이들은 분명 사랑이라 불리는 어떤 것-육체적 관계와 정신적 소통-을 나누고 있지만, 견고한 결속력으로 묶여져 있지도 않고 상대에 대해 강한 소유욕이나 지배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리나가 어디론가 끊임없이 탈출함으로써 다른 존재가 되듯이, 이들은 특정하고 고정된 관계에 매이지 않고 상대에게서 미끄러짐으로써 또 다른 관계로 맺어진다. 동일한 상대와의 관계조차 하나의 ‘의미’나 ‘본질’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다소 우발적이고 사소하며 경쾌하게 맺어지는 관계들이다. 어떤 것도 초월적 지위나 지배적인 권력을 점유하지 못하는 ‘내재성의 평면’(들뢰즈)이야말로 '리나' 속 인물들이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 장이라 할 수 있다.
내재성의 평면은 운동하고 변화하고 생성한다. 개별자 간의 만남이 만들어낸 상황의 ‘우발점’을 통해 관계는 매순간 새롭게 ‘구성’된다. 리나와 삐의 경우, 그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욕망할 때는 ‘애인’이었다가, 리나가 삐의 미성숙함과 연약함을 자각할 때는 ‘어머니-아들’이며, 고된 탈출의 여정을 공유할 때는 삶의 ‘동반자’이다. 변화하는 관계의 공식은 리나와 봉제공장 언니의 경우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탈출과 살인을 함께 계획하는 ‘공모자’이고, 서로의 삶의 고독과 불안을 육체에 대한 애무/위무로 해소해주는 ‘동성애적 파트너’이며, 출산과 육아의 현장을 공유하는 ‘유사 가족’이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수많은 역할의 옷을 바꿔 입으며 서로에 대한 관계를 재설정한다. 이렇듯 '리나'가 보여주는 관계들은 본래부터 역할 모델에 의해 틀 지워진 관습적 관계망을 허물고, 개별적 상황의 조응과 교차에서 발생하는 복수적 n으로서 수평적인 지평으로 무한히 열려있다.
인물들이 나누는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 이러한 n의 관계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성 정체성의 분화와 확장, 그것의 비관습적 전유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여러 장면에서 환기하듯 리나는 분명 여성성을 각인하고 있는 인물이다. ‘자궁’을 지닌 생물학적인 여성이면서, 여성의 운명에 대해 자각하고 공감하는 여성 젠더이다. 그러나 리나의 여성성은 소설 속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적 현실을 환기하거나 여성적 생명력의 징후로 드러날 뿐, 스스로는 결코 여성의 세계에 상징적으로 ‘입사’(initiation)하지 않는다. 서사적 맥락에서 ‘임신’의 기미가 계속해서 암시되지만(131, 140쪽) 진짜 임신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 단적인 근거이다. 이 점은 리나의 여성성이 ‘출산’이나 ‘어미-됨’이라는 현실의 특정 국면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의 지문에서 드러나듯 리나의 여성성은 오히려 여성이라는 유적類的 존재의 바깥으로 확산되어간다. 

그 조용한 순간에 리나는 갑자기 뱃속 저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둥둥둥 북소리를 들었다. 북소리는 처음엔 아주 작게 시작해서 온몸을 통처럼 커다랗게 울려 때리고는 리나의 귓가에 머물러서야 다시 작은 소리로 잦아들었다. 리나는 북소리를 들을 때마다 낯선 나라의 도시 한가운데로, 뜨거운 사막으로, 심지어 다시 국경으로 나가 서 있고 싶은 충동에 입술을 달싹거린다. 온몸의 핏줄들이 팽팽하게 곤두서고 팔과 다리는 벌써 허공을 짚고 혼자서 저만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고 있다.(145-146쪽)

삐는 그동안 말로는 통하지 않았던,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입술로,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리나의 몸 위에 그려 넣었다. 리나는 삐의 출생에서부터 화공약품 공장에 가기까지의 얘기들을 몸으로 들었고 이해했다. 그러자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비좁은 방안의 벽들이 다 무너지고 저 먼 하늘로부터 둑처럼 펼쳐진 푸른 둑이 리나를 향해 파도처럼 몰려오는 순간, 리나의 골반은 한껏 넓어졌고 삐의 입에서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139-140쪽)

‘배’는 자궁이 위치한 곳이며 임신, 출산과 관련된 여성성의 상징적 공간이다. 배에서 들리는 “북소리”는 여성의 고유한 생명력을 암시하지만 여성의 육체성의 경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낯선 나라의 도시”와 “사막”과 “국경”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그것은 여성의 고유성을 외부 세계와 접속케 한다. 자궁은 그러한 욕망의 진원지, 아니 욕망 자체이다. 여성의 육체는 여성의 개별적 표지만을 각인한 공간이 아닌 외부 세계를 향한 통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리나의 육체에서 여성의 내밀한 장소/체험과 세계에서의 존재론은 구분되지 않는 미분화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자궁-세계’로서의 여성성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여성성의 확장과 새로운 전유의 방식은 두 번째 지문에서 섹슈얼리티의 경계의 확장으로 나타난다. 리나와 삐의 섹스는 몸의 언어를 통해 서로의 기억마저 공유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만의 완전하고 내밀한 우주를 창조한다. 그러나 사적 영역으로서의 섹슈얼리티는 돌연 “푸른 둑”의 이미지의 개입에 의해 교란된다. 푸른 둑이 리나가 동경했던 ‘국경’의 지표라는 것을 떠올려 볼 때, 갑작스러운 공간의 상상적 변환은 개인의 내밀한 ‘사적’ 체험이 세계의 ‘공적’ 지평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현상한다. 이 변환의 지점이 사랑의 ‘절정’의 순간이라는 점은, '리나'에서의 사랑의 궁극이 사적/공적 영역이 혼재한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의 특성이 개인/세계의 관계와 관련해 어떠한 의미론적 차원을 획득하는지를 보다 잘 해명하기 위해서, 삐의 ‘육체’에 시선을 돌려보자. 

리나는 삐의 손길이 몸 한가운데 닿는 순간 입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삐의 손길은 예전에 리나가 알던 것과 전혀 달랐다. 리나는 삐의 손을 잡아 눈앞으로 끌어올려 딱딱한 손마디를 눌러보았다. 손가락도 손톱도 그리고 손의 두께도 거칠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새까만 때, 손톱에 묻어 있는 납빛 줄무늬. 리나는 삐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고 쇳내가 물씬 났다.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리나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쇳내 나는 삐의 몸을 여러 각도에서 보았다. 그리고 리나는 울었다.(253-254쪽)

삐의 육체는 변했다. “얼굴 갸름한 남자애”였던 삐는 이제 “뼈와 근육이 적당히 붙은 단단한 체형”을 가진 건장한 남자다. 예전의 유약하고 미성숙했던 삐의 육체가 남성적/여성적 이분법에 근거한 관습적 성차를 교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면, 현재 삐의 육체의 ‘건장함’은 외관상 거친 ‘남성다움’이라는 관습적 수사를 반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삐의 육체를 하나하나 만져보는 리나의 손길은, 삐의 육체가 관습적인 남성성의 재생산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새까만 때” “납빛 줄무늬” “쇳내”가 환기하듯 ‘노동’의 고단함과 강도가 각인되어 있는 육체,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강제적으로 동원되고 비자발적으로 훈육되어진 육체이다. 이런 점에서 삐의 육체는 세계의 폭력성과 노동의 소외를 체현하는 일종의 공적 텍스트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리나와 삐의 섹스는 그들만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개인/세계, 사적/공적 영역이 혼재된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 위치한다. 삐의 몸을 살피고 어루만지는 리나의 행위가 삐라는 개별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육체를 향한 소통과 위무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리나의 눈물은 일종의 윤리적 태도를 내포한다. '리나'의 사랑은 단순히 하나의 코드로 규정되길 거부하는 n개의 사랑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타자와 ‘나’ 사이의 관계의 정립에 대한 새로운 징후를 보여준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한 윤리임을 강영숙의 소설은 다시금 상기시킨다. 

4. 부재하는 사랑, 상상하기의 윤리
김연수의 소설에서 사랑은 부재, 공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부재를 통해서만 사랑은 이야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 관계의 문제인 한, 사랑이란 쉽게 표현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뿌넝숴’(不能設)로 대표되어지는, 말해질 수 없는 ‘타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말해질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은 결코 이해와 사랑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 역사며 기록이란 세계가 그러하다는 진실을 결코 담아낼 수 없다는 것, 세상은 하찮은 우연이 주도하며 이 모든 것은 되살아낼 수 없는 삶의 궁극이라는 것은 그의 소설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랑 역시 이러한 주제론적 맥락에 놓여있다. 사랑은 ‘알 수 없는 타자의 진실’이라는 대전제를 구성하는 소항목이면서, 대전제를 규명하고 회의하고 탐문한 후에야 조우할 수 있는-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우할 수 없는- ‘타자의 진실’ 자체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각론이자 총론이다. 타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통로’이자 그 ‘통로’들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낸 하나의 ‘지형도’이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사랑은 어떻게 이야기되는가. 김연수의 연애담이 낯설고 독특한 이유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필연/우연, 역사/개인, 진실/거짓, 의미/무의미, 논리/역설과 같은 사변적이고 ‘큰’ 이야기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연수의 소설이 본격적인 연애담이 아닌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사랑의 미시적․개인적 존재론을 큰 이야기 속에서 다시 읽어내고 동시에 큰 이야기가 결핍하고 있는 개인적 진실을 사랑 속에서 구하려는 작가적 인식에서 연유한다. 특히 사랑 이야기가 구체적이고 고증적이기까지 한 역사의 현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지평리 전투(「뿌넝숴」), 박종철 사건이 불거진 혼란스런 시국(「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지나사변 즈음의 대경성(「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등의 시대적 배경은 그들의 사랑이 역사의 갈피에 ‘은닉’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에서 ‘흔들리는’ 것임을 보여준다. 가령 “사랑한다”는 고백은 “죽음이 도처에 널린” 전쟁터에서는 “목숨”을 걸고도 증명할 수 없으며(「뿌넝숴」), 사랑했던 기억과 흔적은 80년대라는 “야만의 시대”에 영원한 침묵으로 남겨진다.(「다시 한 달을 지나 설산을 넘으면」) 
사랑이란 인간이 몸으로 체험한 역사이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보여준 역사의 공식기록, 대문자의 세계에 대한 의심과 환멸은, 사랑을 새로운 역사의 기록, 현실 텍스트로 다시 쓰게 한다. 그것은 ‘역사’와 ‘기록’이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않은 방식으로써의 다시-쓰기이다. 김연수의 연애담이 대부분 지금-여기가 결락한 ‘타자적 진실’을 찾는 여정으로 수렴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데모하느라 죽어가는 애들도 있는데, 연애 따위가 다 뭐야!”(「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라는 말은, 그러한 죽음으로 말해지지 못한 진실이나 오해가 연애 ‘따위’에 존재한다는 부정어법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실패를 무릅쓰고 타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때로 타자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은 ‘문장’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나는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즈음, 버스는 숙소에 도착했다.(114쪽)

그는 어느 날, 무작정 찾아간 내 집을 떠올렸다.(140쪽)

문장들은 낯설고 기이하다. 관습적 시선으로 볼 때, ‘그’와 ‘나’의 위치가 전도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첫 문장을 “나는 이렇게 썼다.”로 시작함으로써 소설의 화자가 ‘나’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한동안 ‘나’는 자취를 감추고 ‘그’의 시점에서 서사가 진행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등장했던 ‘나’의 존재가 석연치 않지만 소설은 엄연히 그의 이야기로 읽힌다. 첫 번째 인용 문장에 와서야, ‘그’의 시점이라 생각했던 문장들이 ‘나’가 대신 서술한 혹은 그의 시선을 빌어 재구성한 ‘나’의 문장들임이 드러난다. 
타자의 시점을 ‘나’의 시점에서 다시 읽어내는 작업은 가능한가. 이때 소설은 실제적으로 나의 이야기인가, 그의 이야기인가. 화자이자 최종적 시점의 주인은 ‘나’이지만 ‘나’가 서술한 모든 것은 ‘그’의 시각과 행위에 근거한다. ‘그’ 속에 침투한 ‘나’, 혹은 ‘나’를 빌어 말해지는 ‘그’의 이야기. ‘나’ 혹은 작가에게 이 독특한 문장법은 선택 가능한 사항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요건이다. 그것이 ‘그’의 삶과 사유를 ‘나’의 것으로 최대한 전유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그’라는 알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타자성의 영역을 읽어낼 수 있는 (불)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령작가’가 ‘대필작가’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은 타인의 이야기를 대신 써내려가는 작가의 존재론이나, 개인의 산물만은 아닌 2차적 텍스트로서의 작품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다. 타자의 이야기를 ‘대신’ 써내려감으로써 그의 타자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대필작가의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성공하거나 완성될 수 없는 기획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에 도달하려는 도저한 욕망인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아무리 ‘나’가 문장의 차원에서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해도 낭가파르바트에서의 죽음의 순간을 현상할 수는 없으며, ‘그’ 또한 사랑했던 순간을 소설로 쓴다고 해도 여자 친구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한 행위인 것은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결국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생각했거나, 혹은 죽는 순간에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상상하면서 주석을 다는 나나 내 일상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나 서로 목숨을 의지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짐작만 할 뿐인 원정대원들도 그런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저 서로 짐작할 뿐이었다.(143쪽)

하지만 나는 그의 마지막에 대해 다르게 상상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154쪽)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의미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타자를 그냥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은 왜곡되지 않으며, 타자에 대한 사유는 비로소 가능해진다. 타자와 ‘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틈’으로 인해 우리는 고통스러워하지만 그 ‘틈’이 사유를 추동한다. 이때 타자에 대한 사유란 김연수에 따르면 ‘상상하기’에 다름 아니다. ‘나’가 말하듯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타자에 대해 “상상”하는 일 뿐이다. 상상하기란 앞서 살펴본 기이한 문장법과 같이, 그의 시점에서 세계를 다시 읽어내는 태도이다.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타자를 동일성의 인식으로 강제하지 않은 채 공백을 경유하여 “짐작할 뿐”이다. 상상이 윤리적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어떠한 논리, 필연, 인과의 체계를 벗어난 존재로서의 불특정한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때, 이러한 타자에 대한 사유는 ‘나’의 삶을, 그리고 사랑의 배치를 이질적으로 변환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롭게 사랑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것. 김연수의 소설이 사랑에 대한 무수한 담론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불)가능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배수아, 강영숙, 김연수의 소설이 보여주는 사랑들에 대해 ‘현실’이 있느냐, 라고 묻는 것은 허망해질 공산이 크다. 이들의 소설에는 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착화되지 않은 현실이 있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란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일 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배수아의 담론-현실, 강영숙의 자궁-세계와 육체-텍스트, 김연수의 부재와 상상으로서의 타자의 공간은 기존의 관습적인 사랑의 흔적을 지운 자리에 창조된 새로운 사랑의 지평을 보여준다. 낭만적 사랑과 탈낭만화의 전략이라는 구도로 재편되어 온 지배적인 사랑의 담론 공간에서 이들의 사랑법은 그러한 구도를 홀연히 돌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들의 사랑법이 ‘전위적’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허위와 환멸로써의 사랑을 ‘인식’하는 데서 나아가 다른 차원에서 ‘전유’하고 ‘구성’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여기서 필요한 것은 사랑은 ‘무엇’인가가 아닌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충격적이고 낯선, 생경하고 이물감을 주는 사랑이 그 자체로 ‘새로움’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라, ‘상황’에 귀속하며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배수아의 소설이 보이는 ‘정신주의’에의 경도나 김연수의 소설에서 진실/거짓의 문제가 ‘말해질 수 없음’의 주제 아래 반복․순환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가 다시금 ‘무엇’으로 환원될 위험을 내포한다. 본질적인 것의 탐구가 아니라 이질적 타자들이 만들어내는 우발점을 생성의 계기로 삼는 것만이 사랑이 다시 억압적 현실로 귀환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여기로부터 논해져야 한다.


권채린∙2005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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