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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특집/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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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6회 작성일 08-07-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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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애를 만나다
― 2000년 이후 한국영화로 만난 연애戀愛, 그리고 우리
김선희|영화평론가


연애란 우리 영혼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성스러운 그리움이다. 
― George Sand 조르주 상드 / 본명 : Amandine Aurore Lucile Dudevant


80년대를 돌아보면 프랑스와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들의 낭만적공간과 멜랑콜리한 장치들은 연애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주인공의 아름답고 훤칠한 외모와 감성적인 행동, 이러한 기호들은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연애판타지를 품게 만드는 환각제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으로 우리는 연애를 말할 때 하얀 눈 나부끼는 겨울날 따스하게 온기를 불어 넣어 주는 이미지들과 낭만적 기호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었다. 9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의 변화된 모습들은 연애하는 그들의 사고를 대변해 주듯 진솔하고 리얼한 스토리들이 버무려진 작품들을 간간히 만나게 된다. 타자를 흠모하는 막연한 연애가 아닌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모습을 담아낸 소재의 변화는 연애의 로맨틱과 낭만적 판타지보다는 관습과 규율에 대해 전복적인 형태로,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접근한다. 한국의 90년 이후의 영화 속 연애를 보면 지금 우리가 바라고 있는 그리고 가려고하는 길이 어떠한 방향일까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는 작품들에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구조와 방식들이 사회적 흐름을 반영하였다 하더라도 연애에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연애가 주는 에너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체의 리듬을 활성화하는 에너지’ 이것은 욕망하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나타나며, 하나 둘 나타난 연애의 기호들은 행복의 문으로 진입하는 작용을 하게 만드는 연료가 된다. 이 연료들은 개개인의 가치관과 지적 정보량에 따라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준 후, 자아와 타자에 대한 사랑을 알아 가게 되는 여정을 만든다. 문제는 이러한 사랑을 알게 되는 여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갈등적 요소 즉 두려움, 애절함, 그리움, 사회구조적 질타 등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연애戀愛의 말뜻을 풀이하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이라는 의미의 명사로 연애의 뜻 안에는 육체적 교감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2000년 이후 한국영화의 연애를 만나 연애가 주는 에너지를 현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며 활성화되어 작용되는지에 대해 그리고 사랑할 때의 문제들(갈등, 두려움, 그리움 등)은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려한다. 연애를 소재로 담아낸 이야기들 중에서 원고를 위해 선택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 2001), 「너는 내 운명」(박진표 감독, 2005), 「연애의 목적」(한재림 감독, 2005), 「해변의 여인」(홍상수 감독, 2006). 
이 4편의 영화로 우리의 모든 연애를 다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 영화 안의 주인공들을 통해 연애하는 사람들과 사랑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연애戀愛에 대한 안부와 희망사항을 옮겨 보려한다.

1. 봄날은 간다.
우리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합일점이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하고 완전한 관계의 연애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연애에서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란 것이 있다면, 정신적 육체적 합일점을 잃어버린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사랑하는 대상이 떠날 것에 대한 두려움’ 일 것이다. 이런 ‘두려움, 슬픔’ 이란 것에 대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는 ‘떠나려는 사람’과 ‘떠나지 못하게 잡으려는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집착과 후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다. 연애할 때 겪어 봄직한 떠나버림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을 상우(유지태)를 통해 ‘사랑은 유혹 당하는 자의 마음이 항상 더 애절하다’고 누군가에게 호소하듯 슬프게 표현한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상우의 할머니를 통해 ‘나를 유혹할 타자가 사라진 공간 그리고 내가 사랑의 유혹을 전할 타자가 없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시간과 공간이란 것은 언젠가는 지나갈 봄날처럼, 화려함도 달콤함도 두려움도 다 사라져 버린 시간, 마치 끝나버린 연극무대의 텅 빈 공간처럼 허전하고 아쉬움 남는 그런 ‘쓸쓸함’이라고 들려주는 듯하다.

1-1. 연애, 타자에게 유혹당하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그의 저서 '유혹에 대하여'에서 현대사회를 읽는 키워드로 ‘유혹’을 제시한다. 우리가 무엇엔가 유혹 당할 때 특히 연애에 있어서 가장 처음의 감정은 유혹 당해 버린 마음의 동요일 것이다. 유혹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흐름과 함께 변화를 자극하는 심리적인 기술로써 자리하고 있다. 물론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이 계획된 유혹이 동기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계획되지 않은 것, 우발적인 것, 우연적인 것, 그러한 모든 상황에서 유혹은 존재하므로 특히 사랑에 빠지는 관계들에서는 계획적인 상황보다 ‘운명적인 마주함의 순간’을 빼놓을 수 없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유혹의 신호에 반응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 감정이란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길 ‘매혹 되어 버린……’이라고 말한다.   
유혹적이라는 것은 실질적인 기호를 창출하는 형체가 있으나 사랑이라는 것은 특정 형체를 뜻하기 어려우며 정신적인 부분의 운동에너지와 연결되어진다. 보드리야르가 정의한 유혹에 대해 언급해보면, ‘유혹의 전략은 바로 속임수의 전략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실재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들을 노리고 있다.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수단이 있다. 왜냐하면 생산이 대상들, 즉 실재적인 기호들만을 생산할 줄 알고 그것들의 어떤 힘을 획득한다면, 유혹은 속임수만을 생산하고 그것의 모든 힘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혹은 생산과 실재를 자신의 근본적인 속임수로 되돌려놓는 힘을 획득하게 된다.’('유혹에 대하여' 중에서) 

유혹에 관한 보드리야르의 생각을 빌려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와 연결 지어 보면, 연애 자극을 받는 순간이란 것은 타자의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브랜드라벨을 붙여 놓아 부르주아적이든, 그것이 허름한 빈티지로 이루어져 서민적이게 보이든, 건강함 아니면 청순함, 이지적이거나 자연스러움이거나 어떠한 상징적 이미지로 구체적 의미화작용을 만들어낼 기호들을 통해) 자아는 타자의 그 어떤 기호적 이미지들을 읽어내어 실재가 아닌 제2, 제3의 의미들을 형성하는 단계 즉 ‘유혹 당해버리는 순간’이 발생한다. 자아가 일차적으로 무엇에 유혹 당한 순간 일어나는 자아의 심적 상태를 우리는 ‘매혹 당했다.’라고 말한다. 매혹은 소유의 본능을 자극하며 유혹적인 그 무엇을 ‘자아와 하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욕망을 타자와 자아의 합일체적 경험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대부분 공유의 의미가 아닌 소유적 욕망이 먼저 발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이 보드리야르가 서술한 전략적인 유혹의 기호들의 사용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발동하는 심리들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혹의 근원으로 지칭된 타자를 향해 유혹당한 자의 반응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매혹된 그 대상에게 유혹적으로 표현할 작은 초석작용을 유발 시킨다. 이것은 반드시 계획된 전략적 유혹이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며 나타나는 기호들로써 반드시 계획적인 유혹의 기호들만을 동반한다고는 볼 수 없다. 앞에서 언급되었듯 우연한 순간들, 계획되지 않은 우발적 순간들에서도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매혹된 순간부터 타자(유혹자)를 향해 자신의 유혹의 기호들을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의 시작은 자신을 유혹해 버린 타자와의 연애로 가는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하려는 심리적 반응들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여기서 오해와 망상이 혹처럼 따라다닌다. 어떠한 순간 발견된 유혹적 이미지가 자신을 향한 직접적인 유혹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또는 자신을 향한 직접적 유혹을 부정하는 것, 이러한 엇갈림은 우리에게 오해라는 사건을 만든다. 그러나 어떠한 오해는 연애를 아름답게 만들 구실을 제공하기 때문에 연애에 있어서 오해와 망상은 언제나 혹부리 영감의 이야기처럼 제거되어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두 배의 크기로 영원히 달고 살아야할 복병이 될 수도 있다.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인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젊은 시절 상처한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의 마음을 흔드는 상대는 강릉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는 상우와 녹음여행을 떠난다. 차분한 성격의 두 사람은 서먹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것은 함께하는 동안 만들어 가는 에피소드들이다. 같은 소리를 들으며 풍경을 함께 느끼고, 같은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같은 차를 타고, 둘이서 밤길을 달리고, 서로의 피곤한 하루 일과를 걱정해주는 그런 추억들은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도록 하는 동기이기도 하다. 이런 둘 사이에 어느새 보드리야르가 설명했던 유혹의 전략적인 기호들이 오간다. 은수의 자고 가란 말에 상우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낸다. 그리고 둘이 나누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해석되는 입맞춤, 바로 ‘키스’라는 사랑의 동작언어를 행한다. 육체적 정신적 교감의 합일점을 찾는 과정, 에로틱한 눈동자에 동요되면서 ‘키스’라는 그 상징적 행위가 곧바로 ‘행복’과 연결 짓게 되는 지점이다. 반면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의미작용화 됨과 동시에 스스로 반문할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 행복한 키스를 나눌 상대는 있는가?’ ‘나는 지금 저 두 사람처럼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연애는 앞으로 계속 진행될 것인가?’ 등의 반문을 하며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어느새 동화되어 주인공들의 연애가 오래도록 행복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그 소망과 달리 주인공들의 사랑은 변한다. 이제 관객으로서 나는 상우 편에 서야 할지 은수 편에 서야 할지 갈등하게 된다.  ‘사랑이 떠나버리면 나는 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자문과 함께.

1-2.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상우가 은수에게 돌 던지듯 뱉어낸 말이다.  이 돌에 우리도 한 대 얻어맞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변하는 걸 수없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은수의 경우 ‘사랑하는 감정’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단지 상황과 대상만 바뀔 뿐이다. 그렇다면 상황은 왜 바뀌고, 사랑의 대상은 왜 바꾸려 하는 것일까?  
문제는 두 사람의 소유 심리와 존재 심리에 대한 정신적 구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에 있다. 연애라는 행위는 결혼이라는 목적을 향해 암묵적인 계약을 형성시킴으로써 상대방의 육체, 감정 및 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한다. 이 암묵적 계약인 연애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즉 하나의 재산처럼 사랑하는 타자가 등록된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마치 내가 소유한 그 무엇 중 하나인 것 같은 연애 상대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것은 내 소유에서 남의 소유가 되었다는 생각을 들게 함으로써 사랑 자체의 감정이 사라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은수의 경우 사랑하는 감정이 단지 대상만 바뀌어 행해지고 있다는 것으로써 이것은 달리 말하면 상우와의 정신적 육체적 합일점을 찾는다는 것이 불편해지는 순간으로 작용되어 다른 대상을 향한 소유심리를 더 자극하며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의 누적으로 인해 서로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실망스러움과 당혹한 상황을 맞이하는 것을 우리는 ‘배반’ ‘더 이상 내 것이 아님’ ‘사람이 변함’ 등으로 말한다. 그것은 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인가? 바로 사회구조에서 우리가 소유하려는 그 무엇이 충족되지 못한 결여상태가 드러난 순간을 말한다.  특정 타자와의 연애의 그 순간을 자아는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된 관계라고 느끼다가 어느 한쪽의 결여상태로 이제 더 이상 유혹의 전략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개 각자는 상대방이 변한 원인을 찾으며 속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들은 서로가 사랑할 때의 사람이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사고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한 이유이며, 사랑하지 않게끔 한 과오인지 알고 싶어 한다. 이러한 관계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관객의 입장으로써 너무나 현실적인 이유를 알아챈다. 그 현실적 이유라는 것은 사회구조 틀 안에서 필요한 가치관, 사회적 지위, 혹은 배경적 힘, 가정, 지식 등을 함께 공유하거나 공동 소유하고자 욕망했던 대상이 ‘너는 아니다.’라는 것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나는 필요충분조건의 결여 상태인 것이다. 어느 한 쪽의 결여 상태란 것은 서로가 아닌 어느 한 쪽만의 ‘필요조건’ 또는 ‘충분조건’ 공식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어서 은수의 입장에서 상우를 외면하고 다른 대상을 만나는 것에 대해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수긍과 야유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발견한다. 사회구조적 특성과 흐름에 따라 어떤 경우 우리는 연애가 소유형태로 변모하는 것을 옹호하거나 모방하게 된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연애에 대한 관점들은 연애를 하면서도 사랑하기보다는 그 대상을 소유하기를 원함으로써, 타자를 소유가치로 생각하거나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치료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들의 어긋남을 통해 우리는 소유와 존재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직 은수만이 단 하나의 사랑인 상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날 자격이 무너진다. 은수가 변했기 때문이다.  연애의 대상을 바꿔버리는 은수의 행동과 매달리는 상우의 행동은 현대 사회의 소유지향 주의적 모습들을 엿보게 한다. 은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상우, 보다 나은 조건의 대상을 찾으려는 은수의 선택과 왠지 측은해 보이는 지고지순한 상우의 은수를 향한 소유욕망을 통해 현대사회의 연애는 갖춰야 할 조건들과 성과를 이루어야 할 사항들이 맞물려있다고 은근 슬쩍 비틀어 꼬집는다. 상우는 단 하나의 무대 단 하나의 파트너와 아름다운 무대이길 간절히 소망하지만 감쪽같이 변해 버린 무대와 홀로 남겨지는 상황을 무엇으로든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은수의 다른 파트너를 만나는 상황이란 것에 대해 ‘떠나버림’, ‘외도’, ‘이별’, ‘배반’이라고 말하며 슬퍼한다. 그것은 마치 베일 속에 숨겨둔 자신만의 상자를 열쇠가 없어 열지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열쇠를 찾고서 열어버린 형태일 수도 있고, 스스로가 상자 안에 숨겨둔 것인지 아니면 가둬 놓고 있는 것인지 영원히 알지도 못한 채 지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연애하는 그들 스스로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진실된 마음을 따르고 있다고 최면을 걸고 타자의 존재 가치가 아닌 자아 존재 가치에 중심을 두며, 타자를 소유가치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연애대상과 상황이 달라진 은수의 사랑을 두고 상우가 던진 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우리를 향한 돌 던짐이자, 우리가 뱉어낸 야유이기도 한 것이다. 이 대사는 정신적 운동의 충족, 에로티시즘의 충족이 이루어질 타자의 사라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려는 욕망이 뱉어낸 개탄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랑에 있어 상황과 대상은 변하지만 사랑하는 감정 자체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를 통해 연애는 결국 자신만이 쌓아 놓았던 경험들의 연장들로써 사랑이라는 것이 주는 가능성 있는 변화의 높낮이가 서로 다른 레벨을 만들어 내는 것을 경험한다.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을 부여할 대상을 찾을 때 겪어야할 몇 가지의 ‘유혹의 기술들’을 누적하고, 이러한 유혹의 기술들만을 습득하여 소유를 위한 욕망을 표현하는 현상들은 서두에 언급한 바람직하고 완전한 연애로 가는 길이라 말하긴 뭔가 석연치 않다. 사랑하는 감정을 ‘소유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앞세워 연애를 위한 유혹의 기호들을 보강해가는 사람들, 유혹의 이미지만 난무한 연극무대에 있는 것이 아닌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현대의 연애라는 것은 우리가 감명 받았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처럼 대상의 불변적인 사랑이 아니라 연애의 감정이란 것은 대상이 바뀔 수 있는 변화 가능한 상황, 마치 무대가 바뀌고도 다시 재연할 수 있는 연기가 바로 연애이니 상황이 변해도 슬퍼 말라고, 다시 시작하라고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연애응원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애응원가를 서로 불러주며 연애에 대해 보다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이 반드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이러한 새로운 견해는 상대를 더욱 자주 바꾸게 했지만 보다 정직해지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사랑의 빈도를 보다 높일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예전의 상대보다 새로운 상대와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다. 오늘날이야 말로 남자든 여자든 자신을 타자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를 낳는다고 보일 만큼 진실된 사랑이란 것은 적절한 경계선을 오가며 조율된다. 지금 우리의 세대는 결혼과 개인적 삶에 영향을 주는 구조변동이 시작된 이래,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위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소유적 친밀성의 영역이 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우리의 연애는 타자를 온전히 가지지 못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순간을 스스로 만들며,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성, 혹은 희생적 가치관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고, 오직 집착적인 정신분열 현상을 낳거나 자아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가능성 있는 타자를 찾는 유혹을 재시도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곤 한다.
떠나버린 은수와 바라보는 상우,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났다. 그리고 우리들은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그 행동들을 모사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과연 우리는 상우역을 하게 될 것인가? 은수역을 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너는 내 운명」에서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친 시골총각이 될 것인가? 이제 배역은 스스로가 결정하면 된다. 그 몫이 부디 아름다운 연애를 위한 선택이 되길 소망해 본다.

2. 너는 내 운명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 행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 Herman Hesse

오늘날 한국의 결혼이란 것은 어머니 세대의 그것과는 다른 과제와 관심사에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지속적인 관계와 유대를 담고 있으되 도덕적 규율이나 사회적 활동에 있어 서로가 그것의 주도자가 되어야 하며 사회적 활동이란 것도 경향에 따라서는 마땅히 바뀌는 것이라고 여긴다. 변화된 사회만큼 결혼에 대한 생각도 진화된 듯 보인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변화들은 연애의 과정에도 변화를 가져 왔다. 순리적인 관계보다는 유혹 또는 정복의 테크닉이라는 것들이 우선시되는 경향과 상대가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현상들, 이런 경향들은 연애가 진실한 사랑을 위해 서로가 융화되어 헌신하며 믿음이 충만한 공존의 의미들을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타자를 유혹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 무성하게 자라 ‘사랑의 전문가'들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현대의 다양한 연애물결들 틈새로 진실한 사랑을 보여준 영화 「너는 내 운명」의 주인공 석중(황정민)과 은하(극중 본명 전옥분/전도연)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진정성, 진실성을 마주하게 된다. 

2-1.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을 위해서 자신보다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마음이란 것은 탐욕, 미움을 버리고 도피가 아니라 견디어 내는 진실함,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과 행동으로 감동을 나누는 것이다.
‘석중의 사랑하는 은하가 사라졌다.’ 은하의 옛 애인이 나타난 후부터 그녀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좀먹기 시작한다. 결국 은하는 옛 애인의 잔혹한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편지를 남기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석중은 실성한 사람처럼 1년도 넘게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런 석중을 보면서 사랑이 뭐길래 저토록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그의 가슴 아린 나날에 우리도 맥이 빠져 버린다. 결국 어느 사창가에서 발견한 은하는 에이즈를 전파했다는 혐의를 받고 구속 수감되고, 석중은 사랑하는 여인을 찾았지만 더 힘겨운 좌절과 절망의 늪에 던져진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무게 가운데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은하를 만나러 간다. 면회를 번번이 거절당하는 석중, 그를 보며 사람들은 미친 사랑이라고 그만 포기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애처로운 석중을 향해 은하와의 행복한 시간이 찾아오길 내심 응원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하지 못하는 아픔에 슬퍼하던 석중은 어머니와 말다툼 끝에 독극물을 마시게 되고 그 때 그는 목청을 잃게 된다. 은하는 그런 석중을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결심하고, 자기에 대해 단념하라고 단호하고 차갑게 말한다. 그러나 목소리도 변변히 나오지 않는 석중은 면회실 앰프를 뜯고 복받치는 감정을 담아 더듬어 말한다. “사. 랑. 한. 다.” 면회시간이 끝났지만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우리는 석중의 사랑이 우리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그런 사랑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석중이 사랑한 여인의 그 모든 아픔과 석중이 감당해야 할 아픔이 자꾸만 심장을 울컥거리게 만든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그 실존의 인물들의 사랑 또한 우리를 감동시켰고 우리는 연애할 때 그토록 가슴 설레게 하던 순간들을 오래도록 지켜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랑의 깊이에 반해버려 그 어떤 과오도 보듬게 된다. 석중과 은하는 그런 커플이다. 형기를 마친 은하는 밝은 모습으로 출소하고 그녀를 기다린 끝에 둘은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은하와 석중이 함께 부르는 팝송 “You are my sunshine” 가사처럼 네가 나의 빛이 되어 행복한 삶이란 것은 진정 순수한 사랑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죽음을 넘어선 사랑은 우리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그리고 우리의 심장에 강한 빛으로 남을 메시지 ‘사랑의 진실성’을 심어주었다. 진실한 사랑이야 말로 타자를 위한 감동의 열매의 씨앗이며,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2-2. 연애의 기본자세
사랑은 열정을 불러오고, 연애는 사랑의 힘의 원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동안 자아와 타아가 ‘몰아’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를 배려하지 않은 연애의 형태는 일방적 사랑으로 그중 난폭하고 거칠고 상처를 만들어가는 것은 사랑도 연애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포악한 욕망일 뿐이다.   
「너는 내 운명」에서 은하의 ‘옛 애인’의 경우 사랑의 관계에 대해 오류를 범하는 나쁜 연애의 대표적 인물이 있다. 그의 행동은 즉각적 희열에 대한 욕구 형태이며, 신뢰가 결여되어 있으며 권력적 폭행을 행사하는 비타협적인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공포와 뒤섞인 열정은 석중과 확연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우정과 배려에서 비롯된 섹스가 아닌 고통과 절망의 순환만을 만들어 내는 행동들은 다분히 치료를 권고해야 할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진정성이 결여된 소유욕망만이 존재하는 연애가 사랑이라는 것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만 충족하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가 깊이 있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평온하고 만족스런 사랑의 순환이란 것은 결국 진실성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나의 운명을 만났거나, 만나게 된다면 한번쯤 되새겨 보면 좋은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연애의 기본자세-a. 먼저 자기 자신을 알 것. b. 그리고 나의 운명적 사랑이라고 칭하는 타자와 함께 자신에 대해 서로 알아가는 것을 두려워 말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서로 노력할 것. c. 지배하고 착취하고 파괴하려는 욕망을 버릴 것. d. 타자와 협력하는 것에 이유와 보상을 바라지 말고 이해와 성장하는 관계로 이끌 것. e. 타자와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그리 높지 않다고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운명적 만남에 감사하고 서로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에 행복의 의미를 두고 격려할 것. f. 서로가 연애의 생동성을 통해 모든 과정에서 행복을 맛볼 것. g. 연애란 것은 자아가 타자와 함께 충족된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는 시간들이므로 어떠한 것을 성취하고 함께 나눈다는 것에 대해 성공과 실패 또는 걱정을 앞세우지 말 것. h. 항상 함께 하는 그 시간들만 앞세우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된다.
이 글을 읽고 나를 위해 이런 모습을 보여줄 타자를 찾지 말고 나 자신부터 행동으로 옮길 것. 그렇지 않으면 영화 「연애의 목적」의 체육교사 이유림(박해일)과 교생 최홍(강혜정)의 관계처럼 원망하고, 슬퍼하고, 상처를 안겨주는 답답한 시간들을 오래도록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3. 연애의 목적
교생 최홍은 사랑에 배신당해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교사 이유림은 진실된 사랑법을 모르는 남자다. 예쁘고 새침한 홍을 바라보는 유림은 일차적으로 연애의 목적성이 몸을 섞는 섹스와 연결 짓는다. 유림의 행동은 마치 엄마에게 먹고 싶은 것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최홍을 향해 집요함을 보인다.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최홍은 유림을 경계하지만, 어느새 그 남자의 어설픈 유혹의 기술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는 생닭을 만질지도 모르면서 그 남자를 위해 닭강정을 요리해 도시락에 담아 들고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다. 그녀가 남자를 기다리던 시간들은 연애하는 동안의 설레는 순간들이자 행복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비참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의 잘못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앞세워 서로 상처 주는 시간들을 가고 있는 젊은이들을 영화 「연애의 목적」을 통해 바라본다.
성적 욕망으로 접근하는 능글능글한 남자 이유림과 섹스를 거부하는 여자 최홍의 모습에서 한국 사회의 그 요상한 계급적 관계와 권력적 관계들이 엿보인다. 교생을 상대로 연애를 하려는 교사가 강간을 일으키는 듯이 여겨질 행위들을 한다는 것과 그러한 권력을 즐기는 교사 이유림이란 남자가 약혼자 몰래 교생과 섹스를 즐기고 연애의 순간들을 이기적 욕구 충족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슬며시 드러낸다. 결국 그는 ‘강간자’라는 타이틀을 최홍으로부터 명명 받는다.  물론 이 장면은 궁지에 몰린 최홍의 몇 마디 울먹임이었지만 마치 21세기는 권력자처럼 군림하는 그 무엇도 한 순간 전복 가능한 듯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 한국영화의 여주인공들은 사랑을 위해 목매고, 사랑을 위해 희생하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며, 사랑의 힘을 사회로 환원하는 것을 반영한 캐릭터들이었다. 그리고 여성의 이미지는 지고지순한 여성, 정숙한 여성, 방탕한 여성으로 기준을 나누어 연애대상을 구분 짓는 성향이 높았으며, 남성은 혼전 성관계가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반면 여성은 혼전 성관계는 불결한 것으로 취급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과거와 달리 2000년도를 기점으로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들 중 달라진 하나의 큰 형태를 본다면 남녀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연속들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영화에서 ‘연애’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를 시도 한다고 볼 수 있다. 남녀의 성적인 협상이나 섹스에 대한 변화된 관념들에 대해 반영하고, 세계의 성적 가치관들 또한 반영되어 여러 면에서 성적 권력의 구도가 새로이 변화됨을 담아낸다. 과거에는 여성이 헌신과 순종, 혹은 복종의 형태의 캐릭터였다면 이제는 여성과 남성의 친밀성과 함께 즐기는 게임의 관계들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그래서 여성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헌신적 사랑과 구애를 발견하거나 결혼한 후에도 이중적인 연애가 통용되는 사회의 변모를 반영하듯 ‘순결’이란 단어에 매인 여성이 아닌 다른 대상과의 관계도 가능하다는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2000년 이후의 한국영화들의 연애 소재의 큰 변화는 사회 속에서 일어난 남성의 동요, 남성의 폭력을 넘어 남녀 각각의 개인적 삶과 새로운 욕구, 사회적 불안들이 구성해주는 것을 바탕으로 연애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연애가 결혼과 가족을 만드는 초안이 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개방된 그리고 개인적인 존재들의 변모를 보여주는 에로티시즘의 변화와 섹슈얼리티의 확장을 보다 노골적으로 대중 영화에 담아가고 있는 현상으로 하나의 개방된 기획 의도라 볼 수 있으며, 여론을 담은 기획의도에도 포함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대중과 창작자의 ‘상호의존적 문화 현상’이라 하겠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기 위한 방편에서 다루어지든 작가의 창작열에 의해 다루어지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연애는 개방된 성적 욕망과 다중인격적인 심리가 담겨있는 듯 보인다. 이것은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의 전면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호들이 속속들이 개방되고 있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연결된 21세기를 표현한다. 어떠한 측면에서 21세기는 무방비상태에서 인지되는 섹슈얼리티의 기호들로 인해 에로티시즘적 욕망과 소유적 욕망의 관계망을 형성함으로써 연애에 있어 성적 자유와 숨기는 연애가 아니라 표현하는 연애로 전환되는 길을 열어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긍정적인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연애의 목적」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목적’에 대한 지적이며, 오만과 이기심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깨닫게 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당신의 연애의 목적은 건강한가?’이다.

3-1. 변화되는 ‘연애의 목적’
한국의 경우 1950년대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전쟁의 잔해와 같은 군사문화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전쟁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폭력과 강간의 공포가 없는 안식처를 찾는 것이 연애의 목적 최우선 순위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여성성이 강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기라도 하듯이 그 시대의 여성들은 남성이라는 대상이 자신을 전쟁의 공포에서 감싸줄 상징체인 ‘군인=남자’이라는 계급적 덩어리를 ‘남자=보호막, 듬직함’이라는 아이콘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이 시절의 역사적 흐름은 여성과 남성의 계급적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한국의 군사문화, 군사독재의 기나긴 여정은 남자의 폭력과 여성의 순종이라는 라이프스타일을 자연스럽게 형성시켰고, 그 속에서 읽혀지는 사랑이나 연애는 동등한 관계가 불가능 할 정도였으며, 연애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나라를 위한 반공사상에 입각한 무엇인가를 ‘지켜주는 것’과 ‘지킴을 당하고자 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동반되었다. 1980년대의 한국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바로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물결로 인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싹이 트기 시작한 시기이다. 1990년 한국은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면서 연애영화들 또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렇다면 비로소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군사 문화적 지배하에 살던 시대에 넘쳐나던 남성을 ‘권력의 대상’으로 보던 시각은 여전히 잔금을 남겨 놓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억압이 통제의 수단이었던 80년대의 정서와는 달라진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은 21세기의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로운 통로로 자리 잡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역시 대중문화 속에서의 억압적 양상을 보이는 연애담은 여전히 우리의 무언가를 저울질하고 있다. 남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우선순위로 작용되던 여인들과 대를 이어야 하는 종족보존의 욕망이 우선순위로 작용되었던 연애의 목적이 전쟁과 빈곤에서 비롯되어 권력적 억압에 의해 자리 잡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권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해석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왜냐하면 권력적인 힘을 나타내는 단어인 ‘억압’자체는 무언가에 대한 해방解放(몸과 마음의 속박이나 제한 따위에서 풀어 놓음)을 위한 하나의 전제로 사용되는 의미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은 권력적 지배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의 하나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설명을 덧붙여보면 억압적 요소가 넘치고 있는 사회에서 연애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억압적 규제 아래 연애의 경험이나 활동의 토대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본능적인 행위를 바탕으로 연애감정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연애감정들은 결국 몇몇 개의 관념들을 만들어 내는데 ‘희생적 사랑, 숭고한 사랑, 이기적 사랑 등등’ 이것 모두가 역사적 시대적 흐름의 하나로 ‘연애란?’ 그리고 ‘성이란?’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나 활동의 토대에 자리 잡고 있는 의식적인 행위이거나 무의식적 충동이자 그 자체는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연애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억압의 형태는 권력자와 피권력자 각각의 자아에게 해방을 원하는 욕망을 만들어 내며, 연애의 양상을 만들어 내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본질적인 연애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회적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형성한 자아가 타자라는 개체에게 유혹되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결국 연애는 각 시대별 라이프스타일의 실천적 산물로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 발상을 도울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연애와 성에 대하여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구도가 아니라 자아와 타자의 평등한 개체로써 소중히 다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과 인간관계망에서 정신이 진화하는 시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연애와 사랑에 관련되어진 욕망은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인지력을 뒤섞어 놓기 때문에 연애목적의 변화에 대해 정답지를 만들어 내기란 쉽지가 않다 하더라도 연애는 진실한 사랑과 별개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연애의 목적이 추함의 형태로 뻗어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연애를 다시 시작하려던 최홍은 이유림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지탄 받게 되었을 때, 사회적 지탄에 저항하는 행동을 취한다. 그것은 자신이 했던 섹스는 연애가 아니며 강간당한 것이라고 오히려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표현된다. 서로가 황당한 위치에서 서로를 고발하는 모습, 두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는 알게 된다. 이 두 사람의 관계처럼 처참하리만큼 구질구질한 시간들을 지나고서야 회복되는 사랑은 처음부터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연애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한 듯 보이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의 연애는 안녕한지 되돌아보면 좋겠다.   

4. 해변의 여인

질투는 늘 사랑과 함께 탄생한다. 그러나 반드시 사랑과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다. 
― 라 로슈푸코 La Rochefoucauld 

사회적 관계에서 일탈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듯 보이는 욕구형태는 정신적, 육체적 합일점을 여러 타자들을 통해 찾으려는 태도를 발생시킨다. 수많은 타자들과 정신적 교감을 통해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 경우에 비해 육체적 관계를 여러 대상과 교감하는 것에 대해 오랜 세월 규정지어진 관습과 규율의 잣대는 부정적 행위로 간주한다.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관계를 만들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에서 비롯된 욕망의 형태인 듯 보인다.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문숙(고현정)은 싱어송라이터이다. 그녀는 키스 한 번 한 사이쯤 되는 창욱(김태우)을 따라 서해안 여행길에 오르고 영화감독 중래를 만난다. 이들은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층이며, 지성을 겸비한 듯하다. 혹은 더 많은 지식을 향유하려는 듯하다. 그들은 문숙을 사이에 두고 2대 1이라는 구조로 티격태격 연애 스캔들을 만들어간다.  
‘우주를 호명하는 내가 있어 우주가 있노라’ 말하는 문숙(고현정)의 취기 섞인 행동들은 유혹의 전략적 접근의 태도를 보여 준다. 감독 중래는 조감독 창욱을 따돌리고 취기 오른 문숙과 함께 빈집으로 들어가 섹스를 한다. 서로 대화도 했고, 섹스도 했는데 그들은 뭔가 허전해 보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달아올랐던 섹스와 반대로 서로는 서먹하게 멀어져간다.  
「해변의 여인」에서 얽히고 있는 인간관계를 바라보노라면 중래라는 중년의 이 남자는 여러 여자와의 섹스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곳에서 사랑을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감독 중래는 아내가 바람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메워질 것 같지 않은 빈자리들을 획득하고자 서해안에서 여인들과의 친밀성을 섹스로 채웠다. 중래는 섹스를 하면서 과거의 아픔이라고 명명한 아내의 떠남에 대한 불편한 상심을 치료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 정말 절실히 진정한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 남자가 아닌가 싶을 만큼 영화는 중래의 치유되기 어려울 것 같은 행동들을 보여준다.
한편 문숙은 중래가 유부녀 선희와 함께 있었을 거라는 의구심을 품고 당당했던 며칠 전과는 달리 유치찬란한 질문을 중래에게 하고 만다. ‘나를 넘어갔어? 나를 넘어 갔지?’ 문숙의 억지스런 질문은 마치 사랑하는 이성들이 빠져드는 함정이자 굴레인 듯 보인다. 이것이 연애할 때 우리가 달고 사는 ‘질투’라는 병이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서로 간의 동일시에 집착한다. 이것은 열정적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발동시켜 타자의 방종한 어떠한 모습을 찾으려는 것으로 바로 질투라는 감정이다. 그러나 질투의 힘으로 발견한 타자의 진실되지 않은 욕망들은 연애를 파괴시키는 폭탄이 되기도 한다. 
연애하는 자아의 중추적 욕망은 타자로부터 ‘영원한 존재’, ‘유일한 존재’가 되기를 추구한다.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질투는 극대화되며 나타난다. 질투가 극에 달할수록 사랑의 궁극적 욕망이었던 유일한 존재가치 인정이 점점 하락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질투가 더 강화될수록 타자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자아의 가치가 유일한 연애의 대상이 아니며, 영원히 이루어져야할 사랑의 가치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과 중래를 통해 질투의 값이 높아질수록 에로틱한 효력은 바닥나버리고 서로의 관계를 특별함에서 허물 많은 관계로 상처만 가득한 시간으로 전락시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질병 같은 질투를 치유하는 약은 없는가?

4-1. 연애의 질병과 약

‘사랑, 그것은 몸과 마음에 많든 적든 고통을 주며 수많은 곤경과 스캔들과 비극을 가져오지만, 간혹 삶을 밝히고 마음을 넓히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하기도 한다.’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Kaspar Malinowski

남자 경험 많은 여자 문숙은 중래와 하룻밤을 보내고 서울로 떠났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해보려는 시도, 즉 체념의 과정을 진행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 또한 연애하는 이들의 과정 중 하나다. 물론 체념하려 애쓰지만 첫 번째 체념을 시도한 후에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되고, 또다시 치사한 말과 행동으로 얽혀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지성인들을 홍상수 감독은 작품을 통해 표현해 준다. 중래는 이혼한 전처로부터 피해의식을 안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려고 바동거리는 행동들은 자신감 결여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 중래는 기질을 발휘하여 문숙과 닮았다는 선희(송선미)를 만나 이야길 나눈다. 중래가 선희에게 하는 행동들은 문숙에 대한 연장선처럼 보인다. 이들 유부남 유부녀의 하룻밤 정사는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둔 명확하지 않은 이상형 혹은 그들만의 착각의 인물을 향하고 있지는 않을까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선희의 남편은 바람이 나서 떠났고, 중래의 아내는 친한 친구와 정분나서 떠났다. 그런 그들은 지금 그 허전함 공허함을 서로에게 한탄하고 고백하고 몸을 섞었다.  선희와 중래의 하룻밤은 중래가 문숙과 나눈 하룻밤과 뭐가 다를까? 분명 같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등장인물들은 상대에게 호감이 가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유혹하고 타자에게는 진실을 요구하는 군상들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시각각 변하는 말과 태도, 주장도 강한 그들의 입담과 감정의 변화들은 어디선가 들었던 누군가의 삶을 닮기도 했다. 현대의 연애라는 것이 과거와 달리 지고지순, 순종적 사랑,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유일한 존재라는 의미를 타자에게는 요구하되 자아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쯤으로 인식되는 다분히 아이러니한 가치관이 보편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애의 질병인 의심, 거짓, 변명, 집착, 질투는 가지치기를 하고, 헤어짐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해변의 연애담은 ‘관심 있는 사이’라는 전제로 치사한 자존심 게임과 자기 속의 집착 폭로담으로 인물들의 위장된 태도 틈새로 슬쩍 번져 나오는 속물기질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내심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상처 받는 영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숙은 서해안에서 일어난 하룻밤 정사와 며칠간의 연애 사건으로 그녀만의 생채기를 남긴다. 그녀는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당당히 ‘체념’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휴지통 비우기처럼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구질구질하게 집착하고 가슴 아프게 상처 받고 멍드는 후유증을 치료할 유일한 방법이다. 체념하고 다시 부팅하기를 시도하는 여인 문숙은 으스스한 밤길을 헤쳐 나가며 노래했다.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척척해낸다.’ 그리고는 다음날 해변을 질주해서 체념의 굵은 획을 그으며 떠난다.  
주인에게 버려진 후 새 주인을 만나 새 이름을 부여 받은 진돗개 돌이의 여정이 암시하듯, 해피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연애란 것은 거짓과 위선적인 사랑 따위를 위해 질병을 안고 있지 말고 체념하고 새롭게 시작 하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연애에 필요한 연애질병 퇴치법이다. 
젊거나 중년이거나 남녀노소 모두는 연애를 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연애의 순간은 그 시간들을 잠시 고정시켜버리고 싶은 욕망, 그 감정을 오래 지속하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문제들, 절망과 불확실한 감정들은 연애를 비극으로 흐르게 만든다. 사랑은 모호한 감정, 설레임, 망설임, 긴장감, 이 모든 것을 긍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연애 연기에 몰입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질투가 아니라 신뢰성의 문제다. ‘여자들은 사랑을 원하고 남자들은 섹스를 원한다?’ 그 방식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해변의 여인」에서 보여준 연애처럼 사랑은 쉽게 섹스하고 쉽게 보상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진실한 사랑을 원한다고 타자 또한 진실한 사랑을 한다고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일한 사랑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진실할 때만 성립된다. 유일한 사랑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아주 짧고, 어떤 이에게는 영원하다. 우리가 타자에게 유일한 사랑의 존재가 되지 못한 순간이 찾아올 때 곪기 시작하는 상처들 그 사랑의 질병들을 치료하고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체념이라고 해도 그것이 좋은 약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연애의 질병들을 ‘체념’을 통해 관계의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은 편안함의 원천은 제공 받지만 이 경험은 언제나 다소 일시적이다. 사랑의 질병들을 치유할 약이란 것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깨달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질투의 힘으로 타자를 신문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연애는 둘만의 흔적을 함께 남기며 걸어가는 것이다. 진지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해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연애의 초행길은 위태롭고 안타까운 일들을 만들어 가겠지만 사랑의 질병으로 생긴 상처를 체념이라는 약으로 응급처치 한 후 다시 시작하게 될 연애는 아름다운 ‘연애의 목적’으로부터 시작되길 바래본다.  
연애의 시작은 달콤한 순간이며 각자의 행복의 모양새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합병을 위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모든 과거는 용서되고 현실의 진실한 사랑만이 가치가 있다 말하지만 인간은 관습과 도덕과 법 같은 사회구조의 틀에 살아가고 있기에 문제가 제기된다. 영화를 통해 우리의 현실도 그렇게 문제점을 드러낸다. 너무나 달콤한 연애였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할 각자의 문제들은 헤어짐을 선택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첫 순간은 어떠한 말로도 다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문제란 바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못하는 어떠한 작은 사건들에서 비롯된다.  
서로에게서 발견된 진실이 결여된 여타 행동들. 예를 들어 다른 사람과 밀애를 하거나, 학위를 속이거나, 자라온 환경을 속이거나, 현재 하고 있는 어떠한 행보를 속이는 등의 속임수들은 실망과 갈등을 불러온다. 그런데 진실을 숨기고 허위적인 행동과 비도덕적이며 불법적인 어떠한 일을 하였다 하여도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 이것은 언어의 힘을 빌려야 하므로 힘든 것이고 이해하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지만, 고백은 진실한 것들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진지한 태도를 만들어 내며 서로의 신뢰도에 기여한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관계들은 고백을 통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욱 감싸 안으며, 모든 것을 함께 헤쳐 나가는 힘을 동원하게 된다. 고백이란 힘든 것이지만 진실한 반성이 담겨진 고백은 서로를 재발견하여 더 이상 거짓된 무엇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을 기회를 가지게 한다. 2000년 이후 연애의 소재가 희생적 사랑이나 유일한 단 하나의 사랑에 집중하기보다는 저울질하는 듯 대상의 가치기준을 정하거나, 자아를 위한 방편들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을 법한 길을 제시하는 등으로 표현되어 어떤 방식으로는 그것을 지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사랑의 근본적 흐름은 변하지 않는 듯 보인다.
사랑은 도덕적 무방비상태마저도 감당할 만큼 열정이란 것을 담고 있다. 이 열정이란 것은 섹슈얼리티 즉 성적행동과 연관된다. 연애하는 그들의 성행위란 것은 친밀성과 연결된다. 친밀성이란 무엇보다도 타자와 자아가 감정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공간의 이미지와 행동들을 집중해서 아낌없이 몰입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낸다.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라는 사랑은 타자가 필요한 이유와 타자의 존재목적이다. 결국 연애는 나와 타자가 서로 유일한 존재가치로 느끼는 과정과 연결된다. 연애는 진실한 사랑을 통해 자아가 아주 특별한 존재로서 인정되는 과정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상상적 대상만을 대입시켜 달콤함만 쫒다가 질병에 빠지지 말고, 곧 끝나버릴지 모를 연애라고 미리 허둥대지도 말자. 조르주 상드의 말처럼 연애란 우리 영혼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성스러운 그리움이므로.


김선희∙영화 「그녀의 서른 번째 생일」 2006전주영화제 상영.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원. 부산아시아 단편영화제 프로그래머. 경성대, 동의대, 영산대 출강하며 영상미학, 영화의 이해, 장르영화, 영화 사운드, 편집 강의.
추천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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