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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신작단편/최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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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손, 흔들다
최옥정
집안은 눈이 부시게 밝았다. 나는 시린 눈을 손으로 가리며 뒤로 움찔 물러선다. 밖은 곧 비가 올 것처럼 잔뜩 흐린데 거실은 조명으로 노랗게 달궈져 있었다. 내가 유난히 빛에 민감하다는 걸 아는 그가 나를 잠깐 돌아본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 몇 명이 현관을 향해 인사말을 쏟아낸다. 나는 환대의 대상이 내가 아님을 확실히 안다는 듯 그의 등뒤에 서서 긴 대면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 중 몇은 내 쪽으로 다가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어정쩡한 미소로 답한다. 그들의 시선이 얼른 내게서 떠나기만을 기다리며 실로 지루한 몇 초를 견딘다. 어떤 이의 악수도 친절한 인사도 내 눈에 생기를 불러오지 못한다. 실눈을 뜨고 조명에 점령당한 창백한 실내를 훑어본다. 그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 갑자기 분주해진 태도로 짧거나 긴 지시를 내린다. 나는 누구의 주의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지금 창밖으로 향한 내 시선을 받아내는 대상은 허공이다. 허공은 맞은편 아파트에 가로막혀 있다. 이곳과 거의 비슷한 높이의 왼쪽 끝 베란다에 한 사람이 서 있다. 허술한 파자마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는 중키의 남자. 내 쪽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켠다. 나는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젓는다. 나른한 표정과 달리 내 손은 자못 진지하게 움직인다. 어떤 의미가 담긴 규칙적인 움직임.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외친다.
‘내 소리가 잘 보이나요?’
그 순간 나는 바늘에 찔린 듯 가슴께에 통증을 느낀다.
“엄마, 내 소리 잘 보여?”
요즘 수화에 재미를 붙인 아이는 아무 때고 손으로 의사 표현을 했다.
“내 말 안 보여? 천천히 할까?”
아이의 손놀림이 아무리 느려져도, 어제 그리고 그제 가르쳐준 말들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해야 할 말을 전달할 방법이 그것뿐인 양 크고 정확한 손동작을 반복한다. 뻗은 왼팔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린 후 주먹을 쥐어 앞에 놓는다. 헬로. 그것은 뜻도 없는 말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이의 성화로 뒤져본 인터넷 사이트에는 수화에 대한 몇 가지 주의사항이 나와 있었다.
‘가슴 높이에서 양어깨를 한계점으로 필요에 따라 큰 동작과 작은 동작을 절도 있게 해야 한다. 지화指話를 할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하여 천천히 한 음절씩 또박또박 전달하라.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사를 소리가 아니라 표정으로 감정을 풍부하게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할 수도 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하도록 한다.’
그 말들을 되새겼다. 표정을 풍부하게 하라! 표정이 말을 대신하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건너편 베란다의 남자는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어쨌는지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 미련 없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다. 사방이 유리로 막혀 있어서일까. 베란다가 물이 다 빠져나간 수족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베란다 창문을 힘주어 밀어본다. 묵직한 스테인리스 새시는 꿈쩍도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갇힌 곳에 살기 적당한 감수성의 결을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여간해서는 갑갑함을 느끼지 않는다. 눈앞을 가로막은 유리문에 막혀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유리창을 두어 번 쓰다듬고는 문 열기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베란다와 대조적으로 부엌 창문에서는 갓 물을 댄 논이 내려다보인다. 논 가운데 솟은 아파트. 곧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울어대겠지. 이 집을 빌려준 주인은 노란 티셔츠를 입은 조명담당의 삼촌이라고 했다. 삼십대 부부교사인 그들은 낮 동안 비어있는 집에서 무슨 소동이 벌어지는지 알까. 남의 집을 방문할 때면 나는 이상한 흥분에 휩싸이곤 한다. 그들은 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이 식탁에서 밥을 먹고 저 변기에서 배설물을 처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할 것이다.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밖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쇳덩이가 벽에 부딪혀 내는 소리가 그들의 아우성에 섞여 현관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카메라와 카메라를 밀고 움직일 트랙이 차례차례 거실로 옮겨졌다. 고개만 까닥이며 눈인사를 하고서 그들은 식탁 쪽으로 몰려간다. 아침도 거르고 서둘러 촬영장에 도착한 스태프들은 비닐봉지에서 콜라와 음료수와 빵을 꺼내 식탁에 늘어놓고 집히는 대로 마구 입에 몰아넣는다. 나도 그들에 섞여 콜라 한 잔을 단숨에 비운다. 커다란 빵 두 개와 우유, 일 리터짜리 콜라 두 병이 순식간에 바닥났다.
사람들은 티셔츠와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각자 자기가 맡은 위치로 간다. 방 안은 금세 촬영 기자재와 카메라 장비로 어지럽혀진다. 그때 남자배우와 아역배우를 마중 나갔던 야구모자 쓴 남자가 들어선다. 카메라를 만지던 긴 생머리 여자가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아역배우의 옷가방을 받아든다. 둘은 아역배우를 뒤에 남겨둔 채 나란히 식탁으로 간다. 생머리는 따로 챙겨놓은 빵과 우유를 야구모자에게 건넨다.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의 눈빛과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둘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촬영일지를 쓰던 꽁지머리 남자가 그들을 힐끗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소품담당은 벽에 가족사진을 걸고 트리를 거실 중앙에 갖다놓는다. 나는 먼 눈빛으로 카메라를 점검하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연출 두 명을 불러 오늘 있을 재촬영 일정을 보고 받는 중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촬영 일정표를 훑어보던 그는 거실을 한번 둘러본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곧바로 종이 위로 돌아간다.
나는 텔레비전 옆에 있는 수족관을 들여다본다. 물고기는 쉬지 않고 몸 전체를 움직여 헤엄치지만 고작 삼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어항이 그들의 세계다. 자신의 한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며 다시 방향을 바꿔 헤엄친다. 나는 애무하듯 어항을 쓰다듬는다. 물고기는 놀라지 않고 그들의 궤도를 고요히 오간다. 언제고 자신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고함과 울분의 씨앗들이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는 듯 그들은 가끔 꼬리지느러미로 세찬 물질을 한다.
“먹이 주지 마세요.”
누군가 지나가면서 주의를 준다. 그것은 불필요한 말이다. 나는 새나 원숭이 같은 동물을 보면 먹이부터 던져주려고 덤벼드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그 사람은 또 덧붙인다. 주인이 절대로 먹이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요. 수시로 옆을 오가는 사람들한테 나는 거치적거리는, 콘티에 나와 있지 않는 소품 같은 존재다. 삼십오 평쯤 되는 아파트는 열 명의 성인이 움직이기에 좁은 공간이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조명을 체크하는 동안 나는 수족관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베란다로, 그러다 모두의 가방을 쌓아둔 건넌방으로 옮겨가 내 존재를 지운다. 아무런 기대도 숨죽이고 있지 않은 나의 심장은 어떤 행동도 부추기지 않는다. 단지 지향점을 잃은 시선이 이따금 한곳에 오래 머물다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나. 누구의 시선도 붙잡지 않는 침묵과 부동의 시간들. 그조차 나를 잊은 듯 헛되이라도 찾는 시늉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의도적으로 때론 노골적으로 나를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지금 그와 교외의 어디쯤을 달리고 있어야 한다. 골방을 떠나 소풍을 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파격적인 계획이었다. 더 이상 필요로 하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는 관계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그 정도였다.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에 맞춰 얇은 나들이옷 차림으로 아침 일찍 그를 찾아갔다. 그는 가야할 곳이 있다면서 다음에 보자고 했다. 미리 알려주지 그랬냐거나 우리 약속이 우선이지 않느냐는 따위의 다툼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돌아서는 대신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순간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그가 그렇게 뚜렷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들키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촬영현장으로 가는 길인데 종일 바쁠 거라고 말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나는 더욱 집요해져 고집을 피우기까지 했다. 옆에 있기가 여간 심심하지 않을 거라며 거듭 발을 뺐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완강하게 따라나서기를 고집했다. 거의 떼를 쓰는 아이처럼 굴었다. 그것 또한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남자배우는 소파에 앉아 허공에 대고 표정 연습을 한다. 소품담당이 비디오에 테이프를 넣고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렀다. 침팬지 두 마리가 짝짓기 하는 화면이 펼쳐진다.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암컷을 따라붙는 수컷은 기어이 암컷의 등에 올라탄다. 조명에 불이 들어오자 남자배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조명은 햇빛과 달리 탁하고 불투명했다. 연출이 ‘리허설’을 외치자 화면을 향해 있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더니 성기 쪽으로 손을 가져간다. 자위 장면은 클로즈업이 아니라 미디엄샷으로 실루엣만 표현하는 거라 바지를 벗지 않아도 되었다. 시선은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 손으로 성기를 붙잡고 단순히 밀었다 빼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는 자위에 몰두해 있다.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의 자세다. 나는 머리를 내젓는다. 실제로 자위를 하는 사람은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다.
석 장짜리 단편영화 시나리오의 제목은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딸과 엄마가 트리를 만드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퇴근해 들어온 남편과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따라잡는 것이 전체 줄거리였다. 화사하게 웃는 가족사진이 걸린 거실 한 켠에서 트리는 깜박거린다. 그들은 목사의 축복기도와 함께 조용한 성탄을 맞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저녁 약속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남편이 나가자마자 아내는 폰섹스를 하고 딸은 혼자서 그림을 그린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던 남편은 아내 몰래 일어나 거실로 나온다. 불도 켜지 않고 ‘동물의 왕국’을 보며 자위를 한다. 그 장면을 딸이 해맑은 얼굴로 훔쳐본다. 단순한 스토리라인이었다. 상당히 시니컬하고 극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외려 건조하게 보여주었다. 시나리오를 읽던 나는 낮은 신음소리를 뱉어낸다. 한사코 따라오지 말라고 한 이유가 이거였냐고 따지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살의! 모름지기 살의를 조심해야 한다. 타인을 향한 것이든, 자신을 향한 것이든. 관리대상 1호다.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그는 이곳까지 오는 좌석버스에서 평소와 달리 많은 말을 했다. 어떤 설명이 필요한 사안을 붙들고 늘어지는 태도에 가까웠다. 나는 그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거나 불만을 터뜨릴 처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의무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오늘 하루 벌어질 상황에 대해 다짐하듯 알려주었다. 그가 강사 노릇을 하고 있는 독립영화 워크숍 팀이 재촬영 현장에 와서 총점검을 해달라고 불렀다고 했다. 거기 출신인데다 시나리오까지 쓴 입장이니 마땅히 그러는 게 도리겠지. 아직 배우를 통솔하거나 전체 작업을 장악하는 일에 자신이 없는 후배들의 요청을 마다할 수 없었을 거라고 이해했다. 그런 일들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다.
카메라를 설치하는 데만도 한 시간이 더 걸리고 조명의 강도에 대해 이십 분도 넘게 논의했다. 게다가 주인공의 표정조차 아직 결론을 못 내렸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우왕좌왕하느라 허비한 시간은 또 얼마인지. 단 한 장면을 위해 한 무리의 사람이 매달려 하찮게 보이기까지 하는 번다한 과정을 치르는 그들의 표정은 대체로 진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어설퍼 보였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이 뿜어내는 거침없는 열기와 에너지만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연기에 몰두한 남자배우를 쳐다본다. 그 순간 그가 ‘컷’을 외친다.
“편집된 화면을 보니까 표정이 너무 굳어 있더라구요. 한밤중에 혼자 비디오 보면서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니까 좀 덤덤한 표정이었으면 좋겠는데……. 자위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남자배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것이 그의 화법이다. 상처가 될 말도 심상하게 내뱉는다. 나는 태연히 배우를 주시한다. 마치 연출이라도 되는 것처럼 골똘한 표정마저 짓는다. 최대한 교활해져야 한다는 암시를 스스로에게 건다. 나는 알고 있다. 자위할 때의 표정은 가능한 한 무표정해야 한다. 무표정도 또 하나의 표정이라면 무표정도 아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멀건 얼굴에다 손은 자동으로 움직여야 한다.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이 나타나는 순간은 마지막에 사정을 하고 나서다. 정액이 묻은 화장지 뭉치를 손에 든 채 넋 놓고 앉아 허공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하긴 꼭 사실적일 필요가 있을까. 빤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 왜 영화가 사실적이길 바라는 걸까. 나는 딴죽을 걸고 싶다.
남자배우는 야간 신을 찍느라 유리창마다 쳐놓은 그레이카드 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린다. 사방의 빛을 틀어막아 답답한 기분이 두 배는 더한다는 표정이다.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하며 감독의 말을 듣는다. 뭔가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하다. ‘동물의 왕국’ 화면은 남자배우의 얼굴로 빛을 되쏘고 있다. 그의 얼굴이 그 빛을 따라 밝았다가 어두워졌다. 텔레비전 위쪽 벽에는 놀이공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식구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시간이 넘게 똑같은 자세로 손을 움직이던 남자배우는 점점 피로를 드러냈다. 열두 시가 다 돼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그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나는 가슴이 몹시 차가워진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차가워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남자의 저런 습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자각과 그것이 누군가에게 들통 났을 때의 자괴감으로부터 마음을 단속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나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내 귀에 들리는 것은 확성기를 통과한 듯 크게 들리는 내 심장박동이었다. 아득한 시선으로 남자배우를 바라보지만 내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한 남자의 수그린 뒤통수였다.
남편은 신혼 때부터 발기가 안 되거나 사정을 못 하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그런 줄 알았다. 어느 날인가 끝내 사정이 안 되니까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너무 급한 나머지 문 닫는 것도 잊고 자위에 몰두한 그를 보고야 말았다. 같이는 안 되는데 혼자서는 잘 된다니 정말 희한한 일이다. 일 년쯤 지나 시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상담 의사는 남자가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다보면 더러 그러는 수가 있다고 위로했다. 결혼 전에 혹시 심하게 자위행위를 했거나 여자관계가 복잡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막상 결혼하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못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남편은 둘 다 아니라고 덤덤히 말했다. 어렵사리 딸 하나를 낳은 뒤로 그 점에 대해서는 서로 묵인한 채 살아왔다. 평소에 그가 보여주는 완벽주의는 어쩌면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와이셔츠도 세탁소에서 다린 것만 입고 얘기할 때도 말실수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빈틈을 보이면 그곳으로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들어갈까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필요 이상 점잔을 빼며 약점을 은폐하려는 남편과, 트집 잡아 봤자 득 될 일 없다고 지레 포기한 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집. 내 집에서는 이렇게 집안을 샅샅이 훑어보며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다. 주부의 손길이 구석구석 가지 않아 어딘가 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집. 실제로는 깨끗이 청소되어 있고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썼지만 벽지를 뜯어내면 벽 한 귀퉁이가 헐고 곰팡이 냄새가 온방에 퍼질 것 같은 집. 나는 그 집에 감사한다. 안전하게 나를 보호하는 집에서 그럭저럭 탈 없이 지냈다. 여태껏 살아온 곳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아무 때나 짖어대는 개. 골목길로 후닥닥 사라지는 낯선 발걸음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가 수시로 드리우는, 마당이 넓은 이전의 집과는 달랐다. 여름이면 갖가지 벌레로 들끓는 나무와 아무 때나 간식거리를 들고 불쑥 찾아오는 이웃들이나 잡상인들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을 수 있는, 그것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집. 누군가 목이 졸려 비명을 지른다 해도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완전한 방음이 되는 안락한 곳.
밤에는 물고기처럼 눈을 뜨고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손가락 신호를 보낼 수도 있다. 누구의 방해도 시비도 받지 않고. 그런데 이상한 건 밖에 나와서 집을 그리워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밝기만 해서 몸을 숨길 공간이 전혀 없어서일까.
촬영감독과 다음 신을 의논하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 그의 방을 떠올렸다. 한때는 나와 함께 살기도 했던 반지하 셋방. 우리의 연애는 예고된 결말이라는 듯이 끝이 났다. 나는 결혼을 해서 그곳을 떠났다. 마치 예정된 일처럼 이 년 뒤 그를 다시 찾아갔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낳았고 남편은 승진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똑같은 반지하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실은 나를 만족시켰다. 내 선택에 면죄부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 방에 찾아가 한 일이라곤 오로지 그와 세 시간에 걸쳐 두 번의 섹스를 한 것뿐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대한 설명도 현재 처지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낮에 집에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이 방의 어둠이 그립더라. 왜 그렇게 집이 환한지 현기증이 다 나더라니까. 그래서 왔어.”
밑도 끝도 없이 그 말만 했다. 그러고 나서 예전에 그랬듯이 서로 뒤엉켜 땅 밑 동물처럼 뒹굴었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우리는 처음으로 대화라는 것을 시도했다.
“너 남편하고 일주일에 섹스 몇 번이나 하냐?”
푸푸, 내 입에서 휘파람 같은 웃음이 새나왔다.
“왜 꼭 남편하고만 한다고 생각하니?”
“그럼 너 애인 있어?”
푸푸, 나는 또 한 번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 추측은 더 진부하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너 폰섹스 해본 적 있어? 왜 그렇게 놀라니. 이를테면 그렇다는 얘기야.”
이것이 그와 내가 나눈 대화의 전부다. 일 분도 채 안 되는 대화가 그로 하여금 이 시나리오를 쓰게 했을까. 나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다 안다는 짐작은 과연 정당한가.
절대로 취직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그의 장담은 아직 유효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지금의 남편에게 만족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대용품들이 있다. 수시로 호환이 가능한 건 컴퓨터만이 아니다. 술집에 외상 달고 카드 연체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 친구 저 친구한테 돈 빌리는 따위의 인생은 그와 사귀는 삼 년 동안 충분히 살아봤다. 아닐 것이다. 그게 이유의 전부라면 순 억지다.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다르게 살고 싶었다. 최소한 달라지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게 인생이라고 믿었다. 과연 나는 그를 그리워했던가. 그 누군가를 단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그리워해 본 적이 있었나. 몇 년이 흐르는 사이 그는 남편보다 더 질긴 일상의 남자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멀리 가지 않았다. 그를 만난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기운을 소진한 것처럼 피곤하다.
내가 앉아 있는 식탁을 지나 야구모자가 안방 문을 열고 여배우를 불렀다. 두 신이나 다시 찍어야 하는 여배우는 기다리는 일을 별 불평 없이 잘 해내고 있다. 무명배우인 만큼 경력을 쌓기 위해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독립영화 일이 보수도 없이 보름 이상씩 매달려야 하는 데 비해 보상은 보잘것없었다. 혹시라도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얼굴이 알려지면 좋지만 불가능에 가깝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여배우는 안방 침대에 누워 잡지를 뒤적이고 있다.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올리고 까닥거리며 누워 있는 자세는 제법 나를 닮아 있다. 내가 전화 걸 때 하는 버릇이다. 나는 지금 서영이라고 이름 붙여진 또 다른 나를 보고 있다. 서른세 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서른세 살의 나.
여배우가 손으로 머리 매무새를 고치며 거실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여배우를 예의 주시한다. 남편이 외출하면서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싫어! 남편은 다시 한 번 채근한다. 정말 안 갈 거야? 거실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무료한 얼굴로 치우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에는 말과 달리 아무런 절실함도 실려 있지 않다. 아내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십 년 가까이 함께 산 부부. 말보다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속내를 먼저 알아챈다. 그럼에도 나는 깜짝 놀란다. 저토록 무심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는 여배우의 얼굴은 섬뜩하도록 사실적이었다. 사실이기 때문에 섬뜩한 건가. 내 얼굴에서 저 표정을 찾아낸 그는 더 섬뜩하다. 아내는 구관조처럼 됐어, 그러고 만다.
남편이 나가자마자 지역정보지를 꺼내 폰팅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른다. 아내의 얼굴은 종이처럼 밋밋하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얼굴에서 배우 본래의 표정을 읽어낸다. 아무리 덤덤하려고 해도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홍조까지 감출 순 없었다. 그녀는 표정이 상당히 풍부한 축에 속하는 여자다. 얼굴이 아니라 표정과 말투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여자. 아직 그것을 잃지 않은 여자라고 해두자. 누구나 한때는 저런 표정을 가졌었다고 말해야 속편한 사람도 있으니까. 수화기를 든 여배우의 얼굴은 몽롱하게 풀어져 있다. 더 건조하게! 나는 여배우를 향해 속으로 외친다. 여배우에게 들릴 리 없는 그 소리는 고작 내 가슴을 조일 뿐이다.
그가 가까이 오더니 내 생각을 읽은 듯 거든다. 오디션을 받으러 처음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제작팀 여덟 명 모두 만장일치로 그녀를 캐스팅했다고 말한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별로 없는, 배우치고는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인물 분석이 정확했다. 놀라운 감각이었다. 제작팀은 역시 훈련받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그녀가 거쳐 온 연극무대와 뮤지컬 경력을 수긍했다. 제작회의 할 때부터 대사나 연기에 대한 토론보다 캐릭터 분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만큼, 스무 살을 겨우 넘긴 대학생들이 대부분인 제작팀은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 상상이나 짐작만으로 결혼 생활을 엮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직업적인 감각으로 간파하기에도 연륜이 너무 짧았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워크숍 선배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내가 보기에도 첫 작품에 대한 과도한 의욕과 열정을 빼면 그들이 가진 것은 삐걱거리는 장비와 엉성한 팀워크, 자칫 일을 그르칠 어설픈 장인정신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말할 때 코를 찡긋하거나 뺨을 손으로 문지르는 여배우의 버릇에 놀란다. 그가 그녀에게서 발견한 것은 연기경력도 캐릭터 분석능력도 아닐 것이다.
“이 부부 권태기 아니에요?”
남자배우의 말에 여배우가 고개를 젓는다.
“완전 무관심인데요. 서로 화를 내고 싸우지도 않을 정도로…….”
남자배우는 여배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 않다. 말할 때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집중해서 듣는 태도만은 쓸 만했다.
“이 여자 폰섹스 할 때 말고는 어느 것에도 집중을 못해요. 특히 남편하고의 대화는. 이거 봐요. 얘기하다 말고 아이방에 가보는 신. 남편 친구가 죽었다는데도 발톱 깎으면서 고개도 들지 않잖아.”
“그러면 뭐야? 애정이 전혀 없는 부분가?”
남자배우는 또 엉뚱한 말을 했다. 애정? 그 말이 너무나 생급스러워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얘네들 완전히 딴 데 가서 헤매는군. 나도 부부에게 애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그 생각이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무언가를 따지고 분석해본 지도 오래되었다. 정말 까마득한 일이다. 그러지 않고도 별 문제없이 잘 살아왔다. 그들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진지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원론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런 만큼 나이브할 수밖에 없다. 이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 일제히 떠오르는 것은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마음속에 뭔가 위험스럽고 석연치 않은 것이 끼어들었음 또한 감지한다. 구경거리를 접할 때 알지 못하는 사이 감수해야 할 것. 어떤 식으로든 자신도 연루될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이다. 감정을 소모하는 정도로 끝나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다시든 그것은 구경하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필수과정, 관람료인 셈이다. 지금은 내가 그들을 구경하는 건가, 그들이 나를 구경하는 건가. 나는 베란다 쪽에 서서 거실을 들여다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만들어낸 서영이라는 여자는 나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촉촉한 구석이 있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다. 혼자 전화도 걸지 않고 어린 남자와 폰섹스로 욕망을 달래지도 않고 청소 같은 집안일은 더더구나 하지 않는 잠깐 동안, 서영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거실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훨씬 비현실적이다. 수많은 생각이 담긴 얼굴, 또는 완전무결하게 비어 있는 얼굴로 깊은 숨을 쉰다. 그 순간 석양이 비끼기라도 하면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처연할 것이다.
베란다는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바깥 풍경과 통하는 공간이다. 시나리오 속의 그녀는 여간해서 베란다에 나서지 않는다. 허공을 볼지언정 절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집안에 있을 때 줄곧 베란다에 나가 밖을 내다보곤 하는 나와 달랐다. 서영은 고요히 앉아 있을 뿐이다. 지금의 나처럼 저 아래 까마득한 세상을 내려다보며 한발을 허공에 내딛고 싶은 충동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자주, 지나치게 자주 무엇인가가 끼어들어 내 뒤에 버티고 선 온전함이, 그럴듯한 거짓이 산산이 부서지길 바란다.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미미한 파문이라도 일으킨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욕망조차 이제 습관 이상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욕망하고 습관적으로 분노하고 습관적으로 생존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그저 깜깜한 절벽이었다. 허공을 걸으면 걸어질 것 같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나의 상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라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그저 사뿐히 허공을 몇 발자국 걷다가 다시 이곳으로 가볍게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고층건물 유리창을 닦는 남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남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성취감을 느끼지만, 유리창 닦는 일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땅에 가까워질수록 성취감을 느껴요.”
마침내 땅에 내려서서 반짝반짝 깨끗해진 건물을 올려다볼 때의 상쾌한 기분, 그 맛에 이 일을 한다며 그는 검게 탄 얼굴에 환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지상에서처럼 똑같이 커피도 마시고 동료와 얘기도 하고 담배도 피운다고 했다. 공중에서 말이다. 가끔 방귀가 나올 때도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본다고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허공을 디뎌본 사람은 높은 곳을 꿈꾸지 않아.
나의 공상은 누군가의 고함으로 거기서 그쳤다. 거실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야구모자가 연출을 맡은 생머리한테 모자를 벗어 던졌다. 그렇게 잘 하면 네가 한번 해봐. 말다툼이란 게 으레 그렇듯 별것도 아닌 일에서 시작되었다. 누가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상대가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나고 나중에는 분노의 속도에 밀려 점점 더 큰 싸움으로 치닫는다, 뭐 이런 식이다.
남편이 아내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찍던 중이었다. 남편은 친구가 죽었다며 음울한 표정을 짓지만 아내는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남편은 아내를 빤히 쳐다본다. 그 장면에서 아내 얼굴을 클로즈업하자는 의견을 낸 건 생머리였다. 카메라를 다루는 솜씨가 설익은 야구모자가 자꾸 실수를 했다. 급기야 생머리가 신경질을 냈고 두 시간째 무거운 장비를 들고 씨름하던 야구모자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생머리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소리부터 질러댔다. 야구모자를 노려보던 생머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야구모자는 그제야 실연당한 얼굴로 생머리의 뒷모습을 멍청히 쳐다본다. 말끝마다 ‘좇나’를 붙이며 섣불리 사내다움을 과시하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재채기와 가난과 연애는 숨길 수 없다더니.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살며시 어깨에 손을 얹는다. 괜찮아? 무슨 뜻일까. 그가 불안을 감추기 위해 말을 하는 사람이었나. 아마 내가 이 영화를 보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서 그의 손을 떼어냈다. 우리 사이에는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쓰라림만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야구모자한테 가서 나한테 했던 것과 똑같은 동작을 한다.
야구모자 입에서 시나리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까부터 나왔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중년 부부의 삶을 이해하기엔 자신의 인생이 너무 달콤하기만 할 것이다. 하물며 사귄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연인임에야. 워크숍 과정 석 달 동안의 연애는 그들에게 그 이상을 가르쳐주진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손 쓸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인생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왜 이렇게 살지, 헤어지면 되잖아. 생머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 그딴 회사를 다니니? 당장 집어치워. 이런 충고와 마찬가지로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게 바뀔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에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 나는 그들을 한심해하기보다 차라리 부러워하는 쪽에 속했다.
이 시나리오를 쓴 그는 달랐다. 그는 변화를 믿지 않았다. 그 점이 결혼해보지도 않고 나의 삶을 이렇게 본 것처럼 그려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새끼손가락만큼도 움직일 수 없다고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떠나는 애인을 붙잡지도 않고 돌아온 애인을 반기지도 않았다. 더 오래 함께 있어달라고 매달리는 일도 물론 없었다.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그저 때워야 하는 빈 시간, 써서 없애야 하는 소모품 정도였다. 인생의 무게란 말 자체를 가당치 않게 여겼다. 시나리오 속의 서영이를 보면서 내가 담담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따진다면 그는 뭐라고 할까.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라고 할 게 틀림없다.
반지하 셋방에서 몇 년째 실업자로 지내고 있는 서른세 살의 남자. 딱 잘라 실업자라고 단정하면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한시적인 실업자였다. 돈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든 했다. 포장이사 일도 하고 막노동도 하고 영화와 관련된 아르바이트 일도 했다. 알음알음으로 할 수 있는 꽤 많은 일자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가 세든 반지하방은 그의 숙주였다. 그곳은 그를 숨겨주고 창작열을 식힐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존재 또한 내게는 세상의 빛을 피해 숨을 수 있는 숙주였다.
반지하라는 말 앞에 붙은 ‘반’자는 알량하게 절반이 지상으로 올라와 있는 창문을 일컫는 말이다. 사식私食처럼 햇볕을 제공하는 책받침만 한 창문. 그의 방을 완전히 어둠에 내주기 아깝다는 듯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 그는 이따금 그 유리창을 통해 마당을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되게끔 조금씩만 먹으면서 창가에 서서 햇볕을 받았다. 양분을 섭취한 식물처럼 그는 금방 생기 있는 표정을 되찾았다. 나는 그나마 그 빛도 싫어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쳤다. 거기 있을 때는 어둠조차 지긋지긋했지만 그곳을 떠나면 곧 그 어둠이 그리웠다. 그 역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커튼을 내린 채 보냈다.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찾아왔다. 이제는 커피값을 아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방에 들어서면 다들 공기와도 같은 어둠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방이 너무 어둡다. 그런 당연한 말을 싱겁게 하는 친구에서부터 고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며 제법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친구까지 다양했다. 그러니 네 얼굴이 시체 같지, 인마, 라며 핀잔을 주는 친구도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그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완전히 딴사람처럼 군다는 것이다. 방안을 맘대로 어지르고 끼니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밤새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다 되지도 않는 핑계를 만들어 회사를 빼먹기도 했다. 그들은 적당한 이유가 생기면 아무 때고 찾아와서 한바탕 흔들다 떠나곤 했다. 상대가 누구든 그의 대응은 똑같았다. 내버려두기.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라면 방식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듯이 세상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좋을 테지만 그것만은 쉽지 않았다.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떠날 때면 하나같이 숙박비라도 지불하듯 충고를 잊지 않는다.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빨리 정신 차려야지. 그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것을 안 순간, 일시적인 우월감이 모멸감으로 바뀔 것을 두려워한 그들은 버럭 화를 냈다. 그 화는 딱히 그를 향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얼마나 명쾌한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는 법칙이라.
오후가 되면서 아역배우가 자꾸 짜증을 냈다. 아침부터 내내 기다린 데다 맨 처음 설정한 옷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하는 것도 지겹다고 했다.
“나 이 옷 싫은데…….”
“그래도 영화에 이 옷이 나오기 때문에 입고 있어야 돼.”
트리 신을 맡은 연출은 쌍꺼풀수술한 눈을 크게 뜨며 아이를 다그친다. 아이는 여전히 딴청을 부렸다. 거기다 몰래몰래 물고기한테 먹이를 주다가 스태프한테 야단을 맞은 게 결정적이었다. 제 차례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섰는데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지난번에 찍은 거 다시 한다고 했잖아. 똑같이 해야 한다니까. 잘 할 수 있지?”
계속되는 쌍꺼풀의 주문에 아이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웃어지지가 않아요. 아이가 포함된 신을 제일 먼저 찍었어야 했는데 문제가 많은 장면만 신경을 쓰다 일이 꼬이고 말았다. 모두 경험이 없다 보니까 아역배우를 배려하지 못했다. 트리에 장식을 걸면서 엄마와 다정하게 마주보는 장면인데 볼멘 얼굴이다. 미소 띤 행복한 표정이 안 나온다. 아이를 잠깐 쉬게 해줄 수밖에 없었다. 촬영은 잠시 중단되었다. 날짜는 임박해 오고 촬영장비도 빨리 반납해야 한다. 오늘 아파트를 비워줘야 하는 입장에서 스태프들은 또 그들대로 화가 나 있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일체의 언급을 포기한 채 내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다가왔다.
“쟤네들 며칠 전에 편집된 필름 보고서 안 그래도 잔뜩 의기소침해 있는데 애까지 속을 썩이네. 트리 주변에 그림자가 생긴 데다 포커스도 안 맞더라구.”
여배우도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 거든다. 저 다시는 여기 김포에 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남양주 우리집에서 여기까지 세 시간이 넘게 걸려요. 그녀는 뭐라고 더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간파하고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여배우도 지루한 기다림에 어지간히 지쳐 있는 눈치다. 생머리가 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야구모자가 머뭇거리다 뒤따라 나간다.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가슴을 문지른다.
아역배우와 달리 딸은 여간해서 입을 열지 않는다. 온종일 스케치북만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딸은 말없이 남편과 나 사이를 따로따로 왔다 갔다 한다. 대화라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걸 나는 아이를 통해서 알았다. 딸아이는 말 거는 법을 잘 모른다. 셋이 같이 얘기해본 지도 퍽 오래 되었다. 최소한 그렇게도 살아진다는 걸 배우겠지.
얼마 전부터 캠프 가서 배운 수화로 나한테 가끔 말을 건다. 왼손바닥에 오른손 주먹을 문지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손가락으로 말하는 데 재미를 붙여 며칠 동안 수화로 배운 동요를 흥얼거리며 다녔다. 손으로 말하는 것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글까지 다 손가락으로 표현했다. 덩달아 나도 신기한 생각이 들어 제대로 배워볼 요량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수화를 가르치는 곳이 꽤 있었다. 그 중에서 ‘아름다운 손짓’이라는 단체가 맘에 들었는데 거기엔 전화번호가 없었다. 연락처라고 적혀 있는 것은 달랑 팩스번호 하나였다. 들을 수 없는 그들이 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커다란 벽에 얼굴이 눌린 기분이었다. 문방구까지 가서 팩스를 보낼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생머리가 야구모자와 함께 아역배우를 앞세우고 현관문에 들어선다. 언제 싸웠냐는 듯 시시덕댔다. 그들이야말로 단란한 한 가족으로 보인다. 아역배우의 손에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다. 표정도 풀어져 어느새 웃고 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해치우고 트리 앞에 선 아이는 기분이 한결 좋아 보였다. 촬영이 시작된다는 신호로 꽁지머리가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닫았다. 밤 신을 찍느라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회색 부직포로 가려놓아서인지 갑갑했다.
나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빼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긴 터널을 벗어난 것처럼 안도감을 느끼며 허공을 바라본다. 비가 오려는지 살갗에 닿는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버릇처럼 맞은편 아파트를 건너다본다. 아무도 없다. 어느 집이었지. 아까 남자가 나와서 담배 피우던 베란다를 찾을 수가 없다. 위에서 네 번째의 중간쯤이었을 거야. 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어느 날 심술궂은 사람이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모조리 지워버린다면 그 숫자의 도움 없이도 다들 제 집을 잘 찾아갈까. 그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 베란다에 혹은 대문에 깃발이라도 꽂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처음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했던 걱정이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트리 신과 함께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촬영이 끝났다. 모두들 숨을 크게 내쉰다. 나는 왼손바닥에 오른손 끝을 갖다 댄다. 수화로 동사의 과거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했다, 또는 갔다, 라는 동사의 원형 다음에 ‘끝’이라는 뜻의 수화를 함께 사용하면 과거를 뜻한다. 장비는 원래대로 상자에 담겨졌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나는 창문을 뒤덮었던 시커먼 부직포 떼는 것을 거든다. 조명이 꺼진 방안으로 바깥으로부터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왔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진짜 밤이 되었는데.
나는 건너편 아파트를 내다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허공을 메운 어둠뿐이다. 아까 속옷 바람으로 서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오른손바닥을 펴서 가슴을 문지른다. 나는, 나예요, 내가……. 많은 문장이 이것으로 시작된다. 너를, 너는, 너한테……. 이것은 모두 오른손 검지로 상대를 가리키면 된다. 왼손은 아까부터 내 옆에 서서 창밖에 눈을 두고 있는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논과 밭을 지난 곳에서 시작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 덕분에 도로는 팔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다. 스태프가 부르는 소리에 그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그를 돌아본 잠깐 사이 마술을 부린 것처럼 건너편 베란다에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담뱃불이 모스 부호처럼 깜박, 까암박 신호를 보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화답하듯 손을 들어 몇 번 까닥인다. 의미가 있는 동작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그 손짓을 멈추지 않는다. ㄱ ㄴ ㄷ ㄹ 그저 몇 글자의 지문자指文字를 허공에다 대고 써 갈긴다. 남자가 입은 흰 러닝셔츠는 구조 요청을 하는 깃발처럼 어둠 속에서 뚜렷이 빛났다. 난간에 기대선 그의 손에서 담뱃불이 다시 느리게 깜박였다. 그가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을 양쪽으로 휘젓더니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거둬들이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베란다 유리문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차라리 손을 내리고 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 아파트 사람이 수군거리며 전부 창문을 열고 내다볼 만큼 요란한 소리로. 참, 그런데 수화로는 고함을 어떻게 치지? 음량 조절은 불가능한가. 허공을 바라보고 서서 난데없는 갈급증에 어쩔 줄을 모른다. 몇 달씩 대화라는 걸 거두고 살아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었다. 손가락을 펴서 허공을 휘젓는다. 베란다 창을 열어 고개를 빼고 더 큰 몸짓으로 외친다. 기껏해야 내 귀에 바람을 가르는 손놀림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 소리가 맞은편까지 닿을 리 없다. 마음이 다급해져 창을 더 활짝 열어젖힌다. 바람이 안으로 들이친다. 빗방울 몇 개가 뺨을 때린다. 내 몸은 가벼이 허공에 들어 올려진다. 가볍게 허공을 향해 날아가며 나는 팔을 길게 뻗는다. 나 떠나요. 손가락은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시선을 집중해서 표정을 읽어야 할 사람은 너무 멀리 있다.
최옥정∙1964년 전북 익산 출생.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소설집 식물의 내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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