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9호 기획/하종오
페이지 정보

본문
하종오 시인의 장시 마트
한국의 자본주의와 계약을 체결한 세대의 시
마트를 찾아오는 남녀노소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일상으로 살아내는 나이고 너이다. 나와 너는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유통자이고 관리자여서 마트를 통하지 않고서는 밥을 먹을 수도 옷을 입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다. 마트에 평생을 맡겨 버리는 생활에 대하여 나와 너는 출생과 동시에 한국의 자본주의와 계약을 체결해 버린 세대다. 그래서 마트에 오면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2007년 12월 하종오
프롤로그
남과 여는
오늘 마트에 와서
쌀과 야채를 사고
옷과 세탁기를 사고
거울과 화장품을 산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남과 여는
타인으로 지내다가
마트가 생긴 어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어
논밭에서 분무기로 제초제를 뿌렸고
아내와 남편이 되어
공장에서 박스로 제품을 포장했고
딸과 아들이 되어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남과 여는
내일 마트에 와서
밥과 반찬으로 놓이게 되고
세제와 빨래건조대로 놓이게 되고
브러시와 향수로 놓이게 된다
모레면 누군가 마트에 와서
남과 여를 사갈 것이다
1.
옥상 주차장에 승용차 대고
카트에 어린 딸을 태우고
무빙워크에 올라선 젊은 여자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위로 위로 올라가는 무빙워크에 탄
남녀노소들을 서로 못 본 척한다
어머니 손을 잡고
동네 시장에 따라갔던 시절에는
길을 바꾸어 걸을 때마다
사람들을 쳐다보며 방긋방긋 웃었고
어머니가 흥정하여 장바구니에 담은
생선 채소 따위를 살펴보며
바다와 들판을 상상하곤 했지만
지금은 포장지에 박힌
무게나 부피나 가격을 살펴보며
젊은 여자는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고
어린 딸은 카트에 앉아 두리번거린다
남녀노소들은 끝까지 못 본 척하며
저마다 카트에 상품들을 싣는데
판매대에는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상행 무빙워크는 위로 위로 올라가고 올라가고
하행 무빙워크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내려온다
2.
과일 판매대를 둘러보는 젊은 여자 뒤를
중년 남자가 카트를 밀며 따라붙고
젊은 여자가 사과를 들고 만지작거리면
중년 남자가 사과를 들고 만지작거린다
제각각 카트에 상품들을 채운 남녀노소들이
과일 판매대에 모여들어 사과를 들고 만지작거리니
다른 과일들이 갑자기 싱싱해진다
산자락에서 과수원을 해보는 게
평생 꿈이었던 가난한 아버지를
중년 남자는 떠올리며 가만 있는다
마당 귀퉁이 두엄더미 옆에나
앵두나무 감나무 살구나무를 심어놓던 아버지였다
식구들에게 제철에 양껏 따먹게 놔두고
논에서 피 뽑고 밭에서 풀 매던 아버지였다
밥상에서 먼저 수저 놓고 물러 나와
낙과를 주워 옷섶에 닦아 베어 물던 아버지였다
해질녘이면 산자락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며
시장기 달래던 가난한 아버지가 생각나
중년 남자는 그만 입맛을 잃는다
아버지는 지금 중년 사내의 아파트에서 노망 중이다
젊은 여자가 사과를 카트에 싣고 떠나고
남녀노소들이 사과를 카트에 싣고 떠나자
중년 남자는 판매대에 사과를 내려놓고 떠난다
3.
중년 남자가 앞서가는 동선대로
중년 여자가 우연히 뒤쳐져 간다
이미 카트에 실은 물건에는 관심 없는
중년 여자는 다른 물건들을 훑어보다가
중년 남자가 무심히 지나쳐간
인형 앞에 멈춰 서서 라벨을 본다
처녀 적에 그 공장에 다니다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아 기를 적에도
한 번도 사주지 않았던 인형이다
이제는 사줄 어린 자식도 없이
혼자 쓸쓸하게 살아가는 중년 여자는
침대 머리맡에 눕혀둘 인형 하나를
카트에 실으며 싱긋이 웃는다
노조 활동하다 눈 맞아 결혼한
남편은 이혼하면서 아이를 데려갔는데
그 공장도 살아남았고
자신도 살아남았다는 게
중년 여자는 대견스럽다
그 공장 담벼락 구석에 동료들과 같이 심었던
느티나무도 살아남아 그늘을 내려놓고 있을까
이십 수 년 동안 동료들도 저마다 살아남아
어디선가 인형을 만져보며 감회에 젖을까
중년 여자는 되작거리며 카트를 잡고
계산대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간다
4.
제 회사 제품을 사려고 카트를 밀며
판매대 사이를 다니는 키 큰 청년은
카트에 인형을 싣고 가는 중년 여자와 부딪쳐도
눈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친다
아무 상품이나 보며 걷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서
키 큰 청년이 제 회사 제품을 찾아 허둥거릴수록
마트는 확장되어서 더 커다란 마트가 되고
타 회사 제품들이 더 많이 진열된다
집에서 제 회사 제품만 사용하는
키 큰 청년이 통로를 잃고 멈춰 설 때
사람들이 재빠르게 빠져나간
판매대 사이가 점점 좁아지고
키 큰 청년이 제 회사 제품 타 회사 제품 구별 않고
제품들을 카트에 실을 때
판매대 사이가 점점 넓어지고
사람들이 통로를 만들며 들어온다
마트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출입구가
사람들이 카트를 밀고 가는 쪽마다 없자,
키 큰 청년은 집으로도 회사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카트에 제품들을 실었다 내렸다 되풀이한다
5.
키 큰 청년이 제품을 살지 말지 망설이고
신혼부부는 메모해온 물건을 찾으러
판매대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처음으로 신혼부부는
상대의 입맛에 맞는 부식을 고르고
같이 쓸 수 있는 식기를 고르고
각자 필요한 속옷을 고른다
며칠 후에는 다시 와서 조리도구를 사고
식기세척기를 사고 세탁기를 살 테지만
처음 살림을 시작한 신혼부부는
마트에서 마침내 오래 살아야 할 이유를 안다
더 갖추고 더 쓰고 더 누리기 위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했다
자식을 낳으면 더 많이 필요하여
더 자주 마트를 찾아올 것이다
물건이 가득가득 쌓인 판매대 사이에서
무척 편안해지는 신혼부부는
마트에서 신혼집마저 구하고 싶다
아내가 한 손으로 카트를 잡고 앞서고
남편이 두 손으로 밀면서 뒤따른다
6.
신혼부부가 카트를 당기고 밀다가
판매대 앞에 선 중년부인과 부딪친다
신혼부부는 고개 돌리고 지나가고
중년부인은 본체만체하고 지나간다
마트에선 반드시 봐야 할 것이
사람들이 아니라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몸에 걸친 옷과 발에 신은 구두와
손에 든 지갑을 마음대로 버리고
옷에 맞는 몸과 구두에 맞는 발과
지갑에 맞는 손을 골라서 살 수 있다
중년부인은 느닷없이 생각한다
조금 전 신혼부부는 신접살림이라서
집안에 내다버릴 게 없고
사서 가져가도 놓을 빈자리가 많겠다
첫아이를 마트에서 낳으면
육아용품이 풍족하게 준비돼 있어 편하겠다
그런 건 인생에서 허물이 안 될 거야
중년부인은 물건들 골라 담아놓은 카트를
어디다 세워 뒀는지 잊고 허둥거린다
7.
옷 판매대를 훑어보던 중년 여인이
카트를 찾아 허둥거리는 중년부인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 돌린다
중년 여인은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고
중년부인은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도
자신들의 몸을 감추지 못한다
가졌던가 가지지 못했던가
떠났던가 떠나보냈던가
무언가 아쉽고 누군가 그리워
그녀들은 오늘 마트에 와 있다
배란이 없어진 지 벌써 여러 해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 자식만이 아니란 걸
그녀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중년 여인은 옷을 골랐는지
중년부인은 카트를 찾았는지
서로에게 여전히 무관심한 채
각기 다른 상품 판매대로 옮겨간다
8.
중년 여인과 중년부인이 나간
판매대 사이로 젊은 엄마가 들어온다
카트에 어린 딸아이를 태우고
상품을 구매하는 게 대단히 흡족하다
또 가르쳐준 적 없는 어린 딸아이가
포장지의 글자를 읽는 걸 신통해하며
패키지 디자인과 디스플레이에도
금방 눈 트일 것 같아 아주 만족스럽다
어린 딸아이가 자기 나이만큼 자라면
마트에서 살며 상품을 만들어
자급자족할 지도 모른다 싶고
곧 어린 딸도 신상품이 되어
판매대에 진열될 지도 모른다 싶다
그렇다면 아예 지금부터
마트에 눌러앉아 딸아이를 키워놓으면
어른이 되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풀냄새를 가져오고
바람소리를 몰고 오고
벌레울음을 안아 오고
햇빛을 쥐고 와서
고객들에게 팔지 않을까
마침내 젊은 엄마는 카트에 탄 딸아이를
가장 비싼 상품으로 여기고는
그만 쇼핑을 끝낸다
9.
카트를 타고 가는 딸아이를 보며
다른 카트를 탄 계집아이가 웃고는
판매대로 팔을 뻗어
상품을 잡으려고 한다
그때 모든 판매대들이 몰려와서
계집아이를 둘러서고
계집아이가 카트에서 내려
손에 잡히는 대로 담고는
다른 판매대로 옮겨가려고 하니
나잇살 먹은 엄마가 카트에 올라 탄다
계집아이가 나잇살 먹은 엄마가 되고
나잇살 먹은 엄마가 계집아이가 되는 동안
고객이 무제한으로 늘어나고
서로의 관계를 잊어버려도 즐겁기만 한
나잇살 먹은 엄마와 계집아이,
이를 본 고객들 중
혼자 온 여자는 혼자서 카트를 타고
둘이서 온 여자들은 둘이서 카트를 타자
마침내 카트들이 스스로 장을 보기 시작하고
모든 판매대들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선다
10.
먹을거리 입을 거리를
짐칸에 싣는 손님들에 대해
카트는 하나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손잡이 잡는 악력에 따라
부유한지 가난한지
한 번도 따져본 적 없다
손잡이 잡는 손바닥에 따라
늙은이인지 젊은이인지
한 번도 구분해본 적 없다
바퀴 굴러가는 방향에 따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 번도 확인해 본 적 없다
바퀴 굴러가는 속도에 따라
혼자인지 여럿인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
부유한 늙은이인지 부유한 젊은이인지
가난한 늙은이인지 가난한 젊은이인지
젊은 남자인지 젊은 여자인지
늙은 남자인지 늙은 여자인지
남자 혼자인지 여자 혼자인지
남자 여럿인지 여자 여럿인지
카트는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자주 짐칸이 가득 채워졌다가
텅 비워지기를 원한다 그래야
손님들한테 버려지지 않는다는 걸
카트는 너무 잘 안다
11.
마트에 혼자 온 여자는
채소 판매대 앞에서
친정을 떠올린다
검정비닐 덮인 두둑에서
배추씨가 싹 내고
고랑에 잡초 돋아나면
분무기 메고 나가
제초제 뿌리던 친정어머니는
두렁에 엎어져 죽었고
이후 친정아버지는
배추가 속잎 생겨나 겉잎 벌어지면
밭에 나가 묶어주기 싫어서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술 동냥하다가 취하여
두렁에 엎어져 죽었다
그때부터 혼자 된 여자는
다 커서 친정을 떠난 뒤로 늘 잊고 지내던 밭을
마트에 와서 채소 판매대 앞에 설 때마다 떠올린다
친정부모 엎어져 죽은 두렁에는 풀이 우거졌을까
혼자 온 여자가 멍하니 바라보는 배추를
채소 판매대에 다가온 모녀가 가져간다
12.
모녀는 같이 쓸 생리대를 고른다
어머니는 쉰 살 딸은 스무 살
같이 살 물건이 있는 동안에는
같이 어머니이고 같이 딸이다
체격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고
구름과 바람과 비를 보는 눈빛이 다르지만
같은 주기로 생리를 한다
어머니는 아직 딸을 낳을 수 있는 나이
딸은 벌써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나이
수없이 생리대를 썼지만
오늘 새로 나온 생리대를 살피면서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고
언제까지 같이 버릴 수 있는지
모녀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아직 같이 쓸 물건이 줄어들지 않은 것과
앞날에는 더 많은 물건이 같이 필요해질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더 자식을 낳아도 아예 낳지 않아도
같이 살 물건과 같이 셈할 돈도 남아돈다는 걸
절대로 의심치 않고
모녀는 종류대로 생리대를 챙긴다
13.
생리대를 사가는 모녀를
몸이 말 잘 듣지 않는
겉늙은 여자가 부러워한다
십대 후반부터 공장 다녔고
이십대 중반에 결혼하였고
사십 전반부터 생리가 끊긴
겉늙은 여자에게 병명을 대며
의사는 오래 된 산업재해라고 진단했다
가족에게 늘 마지막 찬거리를
장봐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마트에 올 적마다 여기는 겉늙은 여자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여공 시절에 그것들을 만들기도 했는데
석면공장 동료들은 죽었을까
레이온공장 동료들은 앓고 있을까
염색공장 동료들은 무사할까
봉급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공장들을 전전하면서도
끝내 사지 못했던 물건들보다
더 질 좋은 물건들을
이제 양껏 살 수 있게 되자
그만 사라져야 하는 몸이라니
아무 것도 사지 못하는
겉늙은 여자는 씁쓸하게 웃고 만다
14.
젊은 부부는 분유와 젖병을 들고
번갈아 꼼꼼하게 살펴보며 소곤거린다
빈 플라스틱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겉늙은 여자는 젊은 부부를 곁눈질하지만
젊은 부부는 겉늙은 여자를 보지 않고
영양가는 분유가 모유보다 나은지
젖꼭지는 젖병이 젖통보다 나은지
면밀하게 검토해 본다
남편은 빨아봤던 아내의 젖꼭지를 떠올리고
아내는 빨아대던 남편의 혓바닥을 떠올리며
아기에게 분유와 젖병이 좋을지
불룩한 배를 내려다 본다
젊은 부부 둘 다 태어나서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에
순서대로 이제 아기를 낳아서
모유를 먹여야 한다 생각하진 않고
잘 가공된 분유가 영양가를 더 함유하고
잘 제조된 젖병이 인체에 더 적합하다 생각한다
언젠가는 마트에 와서
아기도 골라서 구입할 수도 있겠다고
아기가 맘에 들지 않으면 반환도 할 수 있겠다고
젊은 부부는 즐거워하며 분유와 젖병을 산다
15.
쉰 줄 남자는 카트에 소주 한 상자를 싣고
정육 판매대 앞에서 어슬렁거린다
제각각 맛있는 부위를
자신 있게 내놓은 소와 돼지가
조명등 아래에서 일어나
쉰 줄 남자 곁으로 다가온다
한국산인지 외국산인지
육안으론 알 수 없는 소와 돼지는
자기들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분유와 젖병을 사들고 지나가는
젊은 부부를 곁눈질하지 않은 채
쉰 줄 남자가 안줏감으로
제 부위를 고르는 사이
짐짓 카트에 올라타려고 한다
비육우가 되기까지 잊어버렸던
들길 한가운데로 소는 가고 싶어 하고
비육돈이 되기까지 잊어버렸던
마당 한구석으로 돼지는 가고 싶어 하지만
입맛에 맞는 부위가 없는지
카트를 밀며 정육 판매대 앞을 떠나는
쉰 줄 남자는 쇠죽 돼지죽 쑤느라
아궁이에 장작불 지폈던 어린 날을 떠올렸으나
다른 마른안주를 집어드는 순간 그만 잊는다
소와 돼지는 조명등 아래로 돌아가 얌전히 눕는다
16.
모자를 하나 골라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겉늙은 사내는
상자 째로 소주를 사가는
쉰 줄 사내를 흘깃거리다가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인가
다른 모자를 골라 써본다
두 눈이 깊었던
스물 몇 살 무렵
얼굴이 되살아날 때까지
자꾸 모자를 바꿔 써본다
그때 앳된 청년이
거울에 비친
겉늙은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지나가는데
그의 두 눈이 깊다
겉늙은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에 흡족하여
모자를 사기로 작정한다
길거리에 나가면 이미 젊어져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챙을 눌러 쓰겠다며
17.
앳된 청년은 외모와는 달리
입성이 허름하다
빈 카트를 밀고 다닐 뿐
의류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조금 전 모자 판매대 위
거울 속에 보이던 겉늙은 사내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배고프지 않을까
빚에 쪼들려 집 나간 지 벌써 일 년
식료품 판매대 앞으로 온
앳된 청년은 시식을 한다
이쑤시개로 한우 등심 몇 점
안심 몇 점 양념 불고기 몇 점
무얼 살까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자리를 옮겨
수입산 소고기를 먹어보곤
수입산 돼지고기를 먹어보곤
맛이 그저 그렇다는 표정을 짓다가 자리를 옮겨
마지막으로 바나나 파인애플
몇 조각을 후식으로 먹는다
허기를 면한 앳된 청년은
빈 카트를 밀고 다니며
잠시 아버지를 잊는다
18.
식료품으로 가득 채운 카트에
노인은 생수 한 병을 얹으며
문득 우물을 떠올린다
고향에선 물지게를 지고
새벽마다 물 길러 다니다가
제일 먼저 챙겨야 하는 게
물이라는 것을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프면 마시며
소년 시절에 터득했다
카트에 생수 한 병을 더 얹은 노인은
앳된 청년이 곁에 와서 생수 한 병을 들고
살까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무심하게 보다가
더 살 찬거리가 없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함석 물통을 물지게에 진 낯익은 소년이
마트 안으로 걸어 들어와서
돈 받고 우물물을 팔려다가 마주치자
물 한 바가지 건네며 웃는다
노인이 손사래치고 나오다가 돌아보니
소년이 보이지 않는다
19.
초로의 남편은 카트를 밀고
초로의 부인 뒤를 따르면서
오늘부터 식사 때마다
식탁에 올려질 반찬을 짐작한다
초로의 남편이 입맛을 잃지 않도록
식단을 짠 대로 싱싱한 재료를 사려고
초로의 부인은 서두른다
파릇한 야채와 맛좋은 고기를 산 뒤
후식으로 먹을 싱싱한 과일을 고르러
초로의 부인이 주부들 틈으로 들어가서
모습이 보이지 않자
초로의 남편은 고개 쳐들고 찾다가
카트들에게 떠밀려서
판매대와 판매대 사이
똑같은 미로에 갇혀 버린다
초로의 부인은 과일 봉지를 들고
초로의 남편을 고개 쳐들고 찾다가
주부들에게 떠밀려서
판매대와 판매대 사이
똑같은 미로에 갇혀 버린다
초로의 남편과 초로의 부인은
저녁내 서로를 찾다가 밥을 굶고 만다
20.
이쪽 판매대와 저쪽 판매대는
서로 다가간 적이 없다
둘 사이엔 고객들과 상품들이
유통하는 통로가 틔어 있어
거길 내디디면 함께 휩쓸려가므로
판매대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고객들과 상품들을 위하여
제 위치를 지키려고
저쪽 판매대와 이쪽 판매대는
항상 모른 척하며 서 있는다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똑같이 종대 횡대를 이루지만
고객들이 편하게 상품들을 구매할 때
비로소 제 모습이 갖추어진다는 걸 알고
판매대들은 간격을 유지한다
저쪽 판매대와 이쪽 판매대가
자리를 바꾸려는 기색만 보이면
고객들이 찾아오는 데 불편하다며
상품들이 스스로 쌓여서 부동하게 한다
21.
카트를 함께 밀고 계산대로 가는
초로의 남편과 초로의 부인을
반백의 노인이 바라본다
저 안사람이 먼저 집 나서고
저 바깥사람이 따라 나섰을까
아내가 여태 살아 있다면
마트에 자신을 데려왔을까
반백의 노파로 늙기 전에 죽은
생전의 아내를 생각하며
반백의 노인은 뒤숭숭해진다
좌판 즐비한 시장바닥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나물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던
아내는 같이 장보러 다니지 않았으므로
오늘 며칠 분 끼니를 장만하기 위해
혼자 마트에 온 게
반백의 노인은 몹시 낯설다
동부인한 초로의 남편과 초로의 부인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고
총총 계산대를 빠져나간다
22.
눈이 흐린 반백의 노인이 무언가를 들고
설명서를 살펴보려고 애쓸 때
지나가던 젊은이가 대신 읽어주고 간다
젊은이가 밀고 다니는 카트에는
소음이 잔뜩 실려 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더 입을 데도 없는 여자가
더 입고 싶다고 투덜거리는 말소리는
공중으로 팔팔 날아다니고
더 먹을 수 없는 남자가
더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말소리는
바닥에 질질 끌린다
아까 젊은이가 반백의 노인에게 읽어준 내용이
그 말소리들에 섞여 퍼지니
사람들은 두 귀를 세우고서
반백의 노인이 들고 있던 무언가를
사려고 우왕좌왕한다
젊은이가 밀고 다니는 카트에는
새로운 소음이 더욱 쌓인다
23.
귀에 이어폰을 꽂은 앳된 처녀는
삼겹살을 담은 카트를 밀고 가다가
젊은이가 밀고 가는 빈 카트와
옆을 부딪쳐도 알지 못한다
이따가 친구들과 야외에 나가서
숯불에 맛있게 구워 먹고
수다를 떨면서 은근하게 취하여
산줄기와 강줄기에 한눈을 팔 것이다
한 시간 후에나 두 시간 후에
그렇게 산수를 즐길지
앳된 처녀는 제 시간을 모르지만
남의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고민 없이 자기의 것이게 할 수 있는
마트에만 오면 퍽 즐겁다
엠피쓰리에 가득 저장된 노래를 들으며
단 십분 후에 발목을 삐끗하여
카트가 굴러가는 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될 건 모른다
24.
노처녀는 절뚝거리는 앳된 처녀를 흘깃하고는
화장품 판매대로 곧바로 걸어간다
낯선 동네에 이사오면
마트 있는 곳을 알아두어야
살림이 줄지 않는 것으로 믿는
노처녀는 마트에 오면
무슨 판매대가 어디 있는지 알아두어야
인생이 풍족해지는 것으로 믿고
맨 먼저 실천했다
집에서 마트까지
승용차로 올 때 지나야 하는 신호등의 수와
도보로 올 때 걸어야 하는 걸음의 수를 계산했고
마트에선 품목별 판매대가 놓여 있는 위치와
각 판매대에 진열된 품목을 기억해 두었다
노처녀가 화장품 판매대를 향하여
판매대 모서리를 돌 때마다
이미 화장한 여자들이
노처녀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서 노처녀가 되고
노처녀는 화장한 여자들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서
화장한 여자들이 된다
25.
노처녀가 떠나간 화장품 판매대를 지나
약혼녀와 약혼남이 두리번거린다
마트에 와 있으면
살림살이 장만해놓은 신혼집을
미리 살펴보는 기분이 된다
약혼녀는 싱크대와 식탁을 만지고
약혼남은 침대와 소파에 앉는다
약혼녀는 식기 판매대 앞으로 가고
약혼남은 가전제품 판매대 앞으로 간다
한꺼번에 써볼 수는 없어도
평생 동안에는 다 써볼 수 있겠지
그럴 수 있도록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양가 부모 일찍 여읜 가난한 처지에
단 둘이서 언약한 약혼녀와 약혼남이
마트에서 소곤거리고 낄낄거린다
저것들을 마음껏 사려고 해야
대우받는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약혼녀와 약혼남은 어슬렁거린다
26.
약혼녀와 약혼남이 살피고 간
침구 판매대 앞으로
동거녀와 동거남이 와서 살핀다
두 달 후에 태어날 아기를 재울
이부자리를 들추다가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어젯밤에
각자 꾼 꿈을 떠올리며
베개를 만지작거리다가
동거녀와 동거남은 서로 눈치를 본다
정말로 사고 싶은 것은
둘이 덮을 원앙금침
중소기업체 임시직 월급으로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해서
그냥 살림을 차린 지 일 년
잠자리가 누추하기는 해도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는 생각에
동거녀와 동거남은 자리를 뜬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임신한 후로 마트에 올 적마다
침구 판매대 앞에서 되풀이하며
가재도구보다 현금을 더 가지고 있어야
상대를 아끼게 된다고 확신한다
27.
과일 판매대 앞을 지나던 동거녀와 동거남이
멈춰 서서 사과를 사려고 만지작거리자
사과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져
사방팔방 데구르르 구른다
청춘의 동거녀와 동거남이 같이 떠나고
중년의 홀아비와 홀어미가 따로따로 다가와
한 알씩 주워 사과 무더기를 쌓아보지만
다시 와르르 무너져 데구르르 구른다
사과들은 멀리 흩어지면서
사과나무들에 달려 있었던 적에
그늘을 찾던 면면을 떠올려 본다
철 따라 거름 주고 농약 치고 수확하러 와서
같이 그늘을 만들어 쉬던 남녀 인부들 중에
홀아비와 홀어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각자 낙과나 겨우 주워 먹었던가
서로 바지자락에 닦아서 건네주었던가
사과들은 원래 달려 있던 사과나무들에게 돌아가
나뭇가지마다 꼭지를 대고
더 오래 햇볕을 쬐고 싶어 하는데
마트에서 우연히 재회한
가난한 홀아비와 가난한 홀어미는
과수원에서 품 팔고 받은 일당으로
무엇을 사러 왔다가 왜 왔는지 잠시 잊는다
28.
어깨 닿을락 말락 나란히
중년의 홀어미와 홀아비가 걸어 나가지만
눈여겨보는 이가 마트에는 없다
어깨 닿을락 말락 나란히
중년의 내연녀와 내연남이 마주 들어오면서도
아예 쳐다보지 않고 지나친다
내연남은 오래 벼르고 별러서
지금 내연녀에게 옷을 사주러
일부러 먼 동네 마트를 찾아왔다
팔고 사는 일과 주고받는 일을
부담스럽게 하진 않지만
사람들의 진을 다 뽑아버리는 마트
피차 연애를 그 정도로만 하고
그 정도로 표현하는 선물만 살 수 있는 마트
나중에 헤어져도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한두 번 입다 버려도 아쉽지 않을 옷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는 걸
내연남이 알고 내연녀가 안다
29.
내연남과 내연녀가 옷을 골라 카트에 싣고
당당하게 가도록 켜져 있는 조명등 아래로
이혼녀와 이혼남은 각자 카트를 밀고 와서
특별할인 남녀의류 판매대 앞에서 옷들을 살핀다
생면부지인 이혼녀와 이혼남은 피차 이혼한지 모른다
이혼녀가 바지 한 벌 들고서 살지 말지 망설이는 건
야외에 입고 나가면 풀숲에 어울릴지 생각중이라는 걸
이혼남이 알 리 없다고 추측하고
이혼남이 웃옷 한 벌 들고서 살지 말지 망설이는 건
야밤에 입고 나가면 불빛에 어울릴지 생각중이라는 걸
이혼녀가 알 리 없다고 추측한다
나란히 선 이혼녀와 이혼남은 피차 고객이라고 여긴다
이혼녀가 속옷 여러 벌 챙겨서 카트에 넣고
새로운 속옷을 더 사려고 뒤적거려도
이혼남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이혼남이 겉옷 여러 벌 챙겨서 카트에 넣고
새로운 겉옷을 더 사려고 뒤적거려도
이혼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트에 온 사람들은 동성에게든 이성에게든
남에겐 말 걸지 않도록 조명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
이혼녀와 이혼남은 마음에 안 드는 물건도 산다
30.
천장에 달린 조명등들은
일제히 켜져서 주야로 밝다
방문한 고객의 얼굴과
진열된 상품의 포장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조명등들은 조바심치며 빛을 낸다
조명등 하나에 전구가 꺼지면
몹시 수치스럽게 여기고
전공이 사다리를 들고 와서
전구를 갈아 끼워줄 때까지
조명등들은 초조하게 빛을 낸다
그 빛들이 마트에서 넘쳐나
낮에는 길거리로 나가
햇빛에 섞여 반짝거리다가 돌아오고
밤에는 공중으로 나가
달빛에 섞여 반짝거리다가 돌아와
판매대들 사이로 내린다
종횡으로 규칙적으로 달린 조명등들은
제 아래를 지나는 고객이
남녀든 노소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똑같이 잘 보도록 비추고
제 아래에 놓인 상품이
소형이든 대형이든 저가든 고가든
똑같이 잘 보이도록 비춘다
31.
이혼녀와 이혼남은 각자 돌아다니다가
쌀 판매대 앞에서 마주쳐도 여전히 모르고
그들과 전혀 모르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와서
고향 지명을 박은 브랜드 쌀을 찾는다
앞쪽으로 가도 십리 벌판 뒤쪽으로 가도 십리 벌판
떠난 지 삼십여 년, 쌀 맛은 그대로라니
늙수그레한 아저씨는 가슴이 툭 트인다
여름날 미역을 감으러 강가로 나갈 적에
벼 한 포기 훑으면 한 주먹 잡히던 메뚜기와
겨울날 이삭 주우러 논고랑을 살필 적에
허리 한 번 숙였다가 펴면 놀라 날아가던 까마귀와
아버지가 쌀가마니를 고방에 들여놓으면
어머니가 바가지로 퍼내어서 짓던 쌀밥을
늙수그레한 아저씨는 한꺼번에 떠올린다
떠난 지 삼십여 년, 대처에서 먹고사는 동안에
메뚜기도 사라지고 까마귀도 사라지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시지만
오른쪽으로 가도 십리 벌판 왼쪽으로 가도 십리 벌판
아직도 누군가 논바닥 갈고 논물을 대고 있다니
늙수그레한 아저씨는 브랜드 쌀을 한 포대 든다
32.
브랜드 쌀 한 포대를 안아드는
늙수그레한 아저씨 뒤를 지나
늙은 아주머니가 콩을 사러 와서
흰콩 한 봉지를 들고 들여다보다가 놓고
검정콩 한 봉지를 들고 들여다보다가 놓으며
원산지를 확인해 나가다가 반색한다
늙은 아주머니의 출생지가 박힌
비닐포장 속에 콩들이 복작거린다
아버지가 낫으로 베어 온 줄기를
어머니는 지게작대기로 패어 콩을 털고
계집아이는 콩깍지를 깠다
이듬해 아버지가 두둑을 고르면
어머니는 콩을 세 알씩 놓고
계집아이는 흙을 덮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콩으로
콩나물 된장 두부를 만들어 상에 올리고
콩잎을 삭혀 밥을 싸먹게 했던
계집 아잇적이 그립지만
이제는 콩을 불려서 쌀을 안칠 때 넣고
별미로 콩밥밖에 해먹을 줄 모르는
늙은 아주머니가 흰콩 검정콩 한 봉지씩 산다
33.
늙은 아주머니가 흰콩 검정콩을 산 뒤
이어서 한 봉지씩 산 곱게 늙은 여인은
보리쌀 한 봉지 더 찹쌀 한 봉지 더
판매대에서 가볍게 들어 카트에 가볍게 놓으며
장날 싸전거리 길가에서 가마니때기에 쏟아놓고
되로 팔고 말로 팔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곡식 장사는 가꾸는 사람과 먹는 사람을
똑같이 여기고 사서 팔아야 한다며
어머니가 돈을 받아 세었던가
장사꾼이었던 어머니는 곡식과 돈을
똑같이 생각해서 맞바꾸어야 한다며
한 알 한 알 내주고 한 푼 한 푼 챙겼던가
곱게 늙은 여인은 마트 안을 둘러보며
장터를 떠돌던 어머니를 찾으려다가
문득 놀라 카트를 밀고 가면서도
자주 뒤돌아보며 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평생 곡식을 팔지 않고 사면서 잘 살았구나
평생 곡식을 가꾸지 않고 먹으면서 잘 살았구나
34.
나깨 먹은 여자는
카트를 밀고 가니
걸음걸이가 편안하고
곱게 늙은 여자를 바라보니
그만한 나이에 죽은
어머니가 떠오른다
카트가 굴러가면서
몸을 인도해 주는 게
나깨 먹은 여자는 고맙지만
어머니가 생전에 마트에서
장을 한 번이라도 보았더라면
허리가 굽지는 않았겠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짐을 이고
많은 자식을 늘리기 위해
적은 살림을 아끼기 위해
장을 봐와야 해서
곱게 늙지 못하였다
나깨 먹은 여자는
카트에 상체를 의지하며 걷다가
자신이 늙었다는 걸 실감하는 사이
많은 카트들이 앞뒤로 몰려오는 바람에
곱게 늙은 여인을 놓쳐버린다
35.
노부부는 나깨 먹은 여자를
어릴 때 많이 보았다고 느낀다
고향이 다른 노부부
남편은 자신의 고향에서
부인은 자신의 고향에서
오일장마다 장사하러 오던 여자가
마트를 찾아왔는가 싶다가
신제품을 보곤 금세 잊는다
장날 각각 다른 장터에서
아잇적부터 점방 앞에 물건이 새로 놓이면
몹시 가지고 싶어 했던 가난한 집 자식들
사내아이 계집아이는 뒷날 우연히
젊은 부부로 만나 자수성가하여
평생 신제품을 사 쓰고
남으면 내다버리는 재미로 백년해로한다
오늘도 쇼핑하러 온 노부부
여생을 마트에서 마치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신제품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36.
노부부가 비닐봉지에 한 마리 담아 떠난
육계 판매대 앞에서
노파는 통통한 놈 고른다
모가지 잘리고 털 뽑히고 내장 도려내진 닭은
노파에게 잡힐 때 몸통 뻣뻣해진다
이른 아침에 아버지가 닭장에 팔 뻗어
살찐 놈 골라내어 모가지 탁 쳐 피 빼내면
어머니가 뜨거운 물에 담아놓고는 털 뽑아낸 뒤
가슴 쩍 갈라 내장 모조리 도려냈고
어린 딸은 검지로 몸통 쿡쿡 찔러보곤 했다
일생 동안 닭고기를 먹을 때마다
맛이 좋던 그 닭이었는데
홰를 치기 위해서
벼슬 곧추세우고 부리 내밀고 모가지 쳐들었을 것이고
날개 퍼덕거리고 꽁지 흔들며 털 세웠을 것이고
똥집 주물럭거리고 알 키우며 내장 꿈틀거렸을 것이다
그 푸들거리는 한 때를 내놓아야 했던 닭은
병아리들 많이 깐 늙은 암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노파는 오늘 역시 그 닭이 골라진 거라고 여기고
한 마리 들어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는
육계 판매대 앞에서 떠난다
37.
닭 한 마리 비닐봉지에 담아 든 노파가 지나가고
평생 농사짓다가 생전 처음 마트에 온
칠순 노인은 두리번거린다
시골 살 적에 밭에 나가 캐다 먹다가
도시 나와 마트에 와서 사다 먹는
처지 된 게 못내 서글프다
논둑밭둑이 따라 다니며
시골로 데려가려 해서 휘청거리는데
야채 판매대 앞에 오니 스르르 사라진다
어리둥절해진 칠순 노인은 갑자기
무얼 사러 왔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배추 들었다 놓고 무 들었다 놓는다
논밭뙈기 팔아서 아파트 장만해주고
자식에게 더부살이하게 된 이후
농업을 끝낸 걸 다행으로 여기다가
마트에 와서 후회하지만
칠순 노인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집안에서 후손을 위하여
자신이 마지막 농사꾼 된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싶어
야채 판매대 앞에서 단번에
속 꽉 찬 배추와 바람 안 든 무를 골라낸다
38.
종이상자 속에 놓인 달걀들은
자신들을 알아볼 칠순 노인이
무심히 지나가도 가만히 있는다
암탉이 혼자 지내다가 낳은 달걀과
암탉이 수탉과 교미하여 낳은 달걀이
왜 다른지 아는 등 굽은 노인이
이내 와서 골라 가져가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암탉이 달걀을 낳는다 해도
그걸 안 믿으면 살아가기에 힘들다는 것도
아는 등 굽은 노인이 오면
달걀들은 부화하고 싶어진다
마트에선 달걀을
병아리로 까서 팔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면
육계로도 키워서 팔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달걀을 사러 올지도 모를 일이다
암탉이 달걀 낳는 모양을 볼 수 없는
도시서만 살아온 등 굽은 노인이 이윽고 와서
종이상자를 열고는 한 알 만져본다
달걀들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껍질을 둥글게 오므린다
39.
폐쇄회로 카메라에 다 노출되는
등 굽은 노인이 선 통로로
노부인이 제사상에 올릴 과일을 사러
카트를 밀고 가며 편안해한다
예전에 농사짓던 부모님은
마당과 뒤란에 키우던 과수에서
첫물을 따서 조상님 전에 바치고
중간에 따서 장에 내다 팔고
끝물을 따서 식구들을 먹였던가
과일 판매대 앞까지 온 노부인은
평생 우아하게 음식물을 구한
마트에다 무덤자리도 장만해 놓으면
마지막까지 품위를 다한 인생이겠다 싶다
임종도 폐쇄회로 카메라 앞에서 해서
인간다운 모습을 남길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싶다
폐쇄회로 카메라에 노출되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을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노부인은
카트에 실은 제수용품을 다 노출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편안해서
폐쇄회로 카메라가 잘 쳐다보이는 통로로만 지나간다
40.
폐쇄회로 카메라는 일부러
누군가를 포착하진 않는다
목표로 삼아 포착하는 건
인간들이나 하는 짓거리
폐쇄회로 카메라는 그저
시야로 들어온 누구든
눈치 채지 못하고 나갈 때까지
몸짓이나 손짓이나 표정을
기념으로 촬영해 놓는다
폐쇄회로 카메라는 어째서
누구는 카트를 밀고 가다가
누구에게 반가운 몸짓을 하고
누구는 상품을 들고 살펴보다가
누구에게 즐거운 손짓을 하고
누구는 마트에 오기만 하면
누구에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지
일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표적을 정하지 않는
폐쇄회로 카메라는 일부러
누군가를 감시하진 않는다
목표로 삼아 감시하는 건
인간들이나 하는 짓거리
41.
제수용품을 구입한 노부인이 떠난 통로로
남녀노소들이 제각각 카트를 밀며 몰려온다
카트에 가득 싣고도 더 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왁자지껄하다가
저마다 무엇에 사로잡혀
한꺼번에 제자리에 선다
남녀노소들이 물건들을 우러러보고
물건들이 판매대에서
남녀노소들을 내려다보니
물건들은 물신들이 된다
남자들은 아내들을 여자들은 남편들을
늙은이들은 청년들을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골라 사서 저마다 카트에 모시고 싶어 한다
남녀노소들이 더 오래 마트에 머물면서
그들을 잠재우고 밥 먹이며
함께 감사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날
마트는 신전이 되지만
거기 구석에는 물건을 들다가
도로 놓는 남녀노소들도 있고
거기 모서리에는 물건에 손을 뻗다가
거두고는 생각하는 남녀노소들도 있고
거기 가장자리에는 물건을 안고 돌아서다가
떨어뜨리는 남녀노소들도 있고
거기 한복판에는 물건을 쥐고 나가다가
사용하는 남녀노소들도 있어
신전은 다시 마트가 된다
42.
여자는 마트에서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상품들을 만지작거리면
상품들이 여자를 더듬는다
둘이 아주 황홀한 동안
몸속으로 들어와서
가슴이 되는 상품도 있고
자궁이 되는 상품도 있고
난자가 되는 상품도 있어
여자는 접신의 상태가 된다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다면
출산 준비물이 갖추어진
마트에서 태어나게 해서
가재도구와 먹을거리가 풍부한
마트에서 살게 하면 걱정거리 없을 테니
여자는 임신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임신 중에 입맛에 맞게 골라 먹은
사과를 얼굴이 닮는다고 해도
바다가재를 팔다리가 닮는다고 해도
아이에게 마트가 능력 있는 아버지가 되어 준다면
여자는 상품들과 언제든지 애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3.
여자가 상품들을 만지작거리는
그 옆을 덤덤하게 지나치는 남자는
자신만 마트와 결혼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마트는 얼마나 여자 같은가
풍족하게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날까지
날마다 찾아오겠다고 남자는 다짐한다
마트는 얼마나 여자 같은가
다 가져가서 비워놓으면
또 가져와서 채워주니
날마다 사가겠다고 남자는 다짐한다
누군가 마트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면
많은 마트를 낳을 것이고
나중엔 마트와 마트가 성혼하여
그 후손들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자
조급해진 남자는 마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조건 상품들을 카트에 담는다
그러자 마트가 생기에 차서
남자를 품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역시 마트는 여자 같다고 남자가 여긴다
44.
카트에 상품들을 싣는 남자를 보면서
노인도 카트에 상품들을 실을수록
조금씩 젊어지는 몸을 느낀다
마트에 오기만 하면 식욕이 생겨서
날마다 와서 음식물을 사고
마트에 다녀가기만 하면 물욕이 생겨서
날마다 가서 물품들을 사고
마트에 와서 무엇이든 사기만 하면
기운이 나서 자꾸 와서 사게 되는 노인은
그저 마트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마트가 없다면 노년에 어디서 무얼 할 것인가
아무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때에
자신을 위하여 마트가 생겨났으니
자신도 마트를 위하여 살아야겠다고
노인은 카트를 밀고 가며 작정한다
마트는 더 많은 상품들을 내놓고
노인은 더욱 장시간 머문다
45.
마트에 머무는 동안에는
부유해 보이는 노인과
똑같이 대우받는 게
가난한 청년은 만족스럽다
똑같은 카트와 똑같은 판매대와
똑같은 상품이 주어져 있으므로
계산대를 통과하지 않는 이상
빈부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트에
청년은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사고 싶은 상품을 다 못 사는 날에는
젊기 때문에 가난하므로
부유해질 수 있다면 늙을 수도 있다고
청년은 생각하고,
만약 마트에서도
봄에 보슬비가 내리고
여름에 장마가 닥치고
가을에 태풍이 몰려오고
겨울에 눈이 몰아쳐서
노인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아예 마트를 위해
자신이 빨리 노인이 되어서
상품을 많이 사겠다고 마음 먹는다
46.
상품들이 가득 찬 카트를 앞세우고 줄을 선
남녀노소들은 천천히 나가려고 하고
마트 밖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내보내려고
계산대는 가격을 빠르게 합산한다
마트 안으로 빈 카트를 밀고 들어와서
남자들이 의자에 앉아 명상을 했어도
여자들이 침대에 뒹굴며 한잠 잤어도
노인이 무료 시식으로 한 끼를 대신했어도
청년이 처음 만난 처녀와 소곤거렸어도
계산대는 산출할 수 없는 내역엔 모른 척한다
마트 안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수록
남녀노소들은 마음이 풍성해지는데도
계산대는 순서대로 마트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마트 안에서 계속하고픈 일들이 아주 많은
남녀노소들은 계산대를 지나가고 나면
속절없이 꿈이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고
마트 밖에서 실컷 사지 못하는 나날이 두려워
일시에 카트를 되돌려 깊숙이 돌아가
상품들을 내려놓고 다시 구매하기 시작한다
계산대는 하염없이 남녀노소들을 기다린다
47.
남녀노소들이 제각각
상품들을 내려놓은 카트를 밀고
판매대와 판매대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 상품들이 되어
판매대를 채운다
새로운 남녀노소들이 찾아와서
빈 카트를 밀고 다니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언제부터 자신들이 마트에 와 있었지
어찌하여 자신들이 상품들이 되어 있지
새로운 남녀노소들이 두 눈 껌뻑거리자
빈 카트들이 제각각
새로운 남녀노소들을 끌고
판매대와 판매대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상품들을 싣는다
더 이상 상품들이 없자
새로운 남녀노소들이
스스로 신상품들이 되어
판매대를 채운다
48.
장보러 간 남녀노소들이 돌아오지 않자
한 도시가 마트 안으로 들어와서
개들이 어슬렁거리는 골목과
낡은 아파트를 뭉갠 뒤
반듯하게 택지를 정리하고
새롭게 집 짓고 넓게 도로를 닦는다
판매대를 채우고 있던 상품들이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며
남녀노소들로 일어나 술렁거리자
마트 안으로 한 국가가 들어와서
판매하고 구매하는 방법과
옷 입고 밥 먹고 잠자는 장소와
외출하고 귀가하는 시각을 정한 뒤
생산자와 관리자와 소비자를 조직하고
공장들을 신축하고 회사들을 신설하여
다른 도시를 더 만들어서 놓는다
남녀노소들이 국민이 되어
판매대와 판매대 사이마다 거주하니
마침내 마트가 권력이 되어 마트 밖으로 나가
온 강에서 물도 퍼와
온 들에서 햇빛도 가져와
온 산에서 바람도 몰아와
그들에게 적당하게 내어준다
49.
물을 마시려는 낯선 남녀노소들도
햇빛을 쬐려는 낯선 남녀노소들도
바람을 쐬려는 낯선 남녀노소들도
제각각 승용차를 타고 마트로 온다
이제는 마트 안에서
강산이 굽이를 틀고
나무들이 그늘을 내리고
새들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입구에서 옥상 주차장까지는
승용차들로 빼곡하다
마트 안으로 입국하는 순간부터
낯선 남녀노소들은 서로 낯이 익어서
마트 밖으로 아무도 출국하지 않는다
나날이 물이 맑아지고
나날이 햇빛이 따스해지고
나날이 바람이 깨끗해지는 가운데서
새로이 출생하고 임종하는 남녀노소들을 위하여
위로는 천국까지 아래로는 지옥까지
마트가 제 영토를 넓히려 한다
더 많은 낯선 남녀노소들이
제각각 승용차를 몰고 와서 줄지어 선다
에필로그
마트에 와서
남은 아버지가 되고
여는 어머니가 된다
남과 여는
자식을 생각하여
팔 수 있다면 결국
아버지를 팔아서
어머니를 팔아서
먹을거리를 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을 생각하여
팔 수 있다면 결국
남을 팔아서
여를 팔아서
입을 거리를 산다
마트에 오면
아버지는 남이 되고
어머니는 여가 된다
하종오∙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외.
추천54
- 이전글29호 젊은시인 집중조명/김태형 08.07.09
- 다음글29호 신작단편/최옥정 08.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