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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김태형 작품론/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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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12회 작성일 08-07-09 17:39

본문

|해설|
놀이의 미학
― 문자의 비극과 문자소멸의 비극 사이
노철|문학평론가



1. 비극의 탄생
김태형 시 8편은 현대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이 얽히거나 엇갈리면서 여러 형태와 울림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수다와 메타포, 여러 책의 흔적들, 공상과학물의 공간(space), 오래된 신화적 모티브들이 뒤섞여 있다. 8편의 시는 이러한 여러 무엇들이 안정적인 언어로 쓰여 있다. 이것이 문제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대상과 주체가 분명하게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주체는 대상에 대해 아주 명징하고 단정하게 발언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름 一家」는  주체가 빨래를 빌어서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발언하는 사태라 할 수 있다. ‘한 아름, 이맛머리, 두 팔, 손바닥’ 등의 신체기관을 가리키는 낱말과 ‘맑은, 흐른다, 둥둥 떠다니는, 젖어’ 등의 술어는 모두 ‘구름’을 서술하는 낱말들로 맑고 상쾌한 감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점이 단아하기 그지없다. 빨래가 구름이 되고 오줌이 비가 되고, 오줌싸개 아이가 햇빛 속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 되고, 그 햇살과 구름이 온몸을 적시는 자연의 순환이 안정적이고 아름답다. 여기에는 비극이 없다.
김태형은 자연의 비극 혹은 잔혹이 슬쩍 드러날 때도 그 비극을 안정화시킨다. 「귀」에서 안정화의 진원지를 찾아 볼 수 있다. ‘한쪽 어깨를 잃은 포도나무’는 ‘말라붙고, 매달리고, 시리다’, 주체는 이 대상을 ‘안쓰러워, 덮어주었다’. 사건은 종결되고 완성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사건의 진행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포도나무 넝쿨을 ‘걸쳐주고, 자르고’, 그래서 포도나무의 ‘귀’가 드러나고, ‘찬바람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뒤집어 보면, 이전에는 귀가 드러나지 않았고, 찬바람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포도나무가 주체가 투여된 대상이라 할 때, 시인의 귀가 열리고 찬바람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질적 전환이다. 그러나 찬바람 소리는 아직 ‘매달린 구름, 빈 하늘’과 ‘시린’에 갇혀 제 목소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시각과 촉각으로 구축한 유기적 통일체로서 몸은 찬바람 소리가 어디서 태어나는 지, 그리고 그 소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려 하기보다는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찬바람의 비극 혹은 잔혹은 자라고 있었으며, 「주술사와 차가운 돌에 관한 두 개의 노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허공에서 ‘새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빈틈없이’, ‘자기 걸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걷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빙판 위의 돌덩이’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이 일련의 행위들에 대해 주체는 이제 「귀」에서처럼 자기 연민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이 행위가 ‘왜가리 한 마리가 바닥에 돌을 던져 놓고 바라보는 행위’와 닮아 있으며, 그것이 ‘시베리아 주술사’의 행위와 닮아 있다는 사실만 진술할 뿐이다. 여기서 비극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자연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그 자체로 인간적인 것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시인은 지금까지 ‘인간적인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연의 목적 없는 사태를 은폐하였는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던 시베리아의 주술이 비극으로부터 눈감으려는 전략이었던가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누가 저만치 힘겹게 얼음 위에 던져놓았을까
좁은 길을 따라 담장을 세우고 그늘을 드리우던 것들
비바람과 괜한 발길질에 조금씩 금이 가서는
속으로만 속으로만 썩어들었던 게 분명하다
제 안에 허물어진 벽돌을 주어다
누군가 던져놓았을 게다
가라앉지도 않고 내굴려진 저것은
얼음장 위에 더욱 안쓰럽게 멈추어 있다
가직이 나가 서서 나도 벽돌 하나 허물어 던지려 했다
그늘을 한 조각 떼어내서는
이윽토록 들여다보려 했다 그런데 어딘지 좀 이상했다
돌이 아니었다 해질녘을 기다리던 새들이
어깨를 웅크려 앉아 있는 것이었다
좁은 하늘을 허물어 내려앉은 암갈색 물오리들
아무도 자기를 허물지 않았던 거다
그 누구도 제 상처를 드러내지 않았던 거다
먼 북방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새들만이
대신 그 자리를 끌어안고 있다 차디찬 바닥이 되어 있다
― 「주술사와 차가운 돌에 관한 두 개의 노트」 부분

‘금이 가는 것’이고 ‘속으로만 썩어드는 것’이자 ‘안에서 허물어지는 것’이란 발언에는 그것은 본래 완전한 것이며, 살아 있는 싱싱한 것이자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주체는 얼음바닥 위의 돌들은 그 완전한 생명의 체계에서 부스러진 조각들이라고 믿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돌은 그 완전한 것의 부스러기가 아니다. 허물어진 상처의 편린이 아니라 ‘암갈색 오리들이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오리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고’, ‘그 자리를 끌어안고’ 있으며, ‘차디찬 바닥’ 그 자체였다. 상처니 허물어지니 라는 발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사태, 그것은 인간의 형이상학의 그물로 규정할 수 없는 비극 그 자체였던 것이다.

2. 문자의 소멸과 소리의 탄생
주체 혹은 시인은 이제 형이상학을 구축한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코쿤-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여행자들을 위해 빈손으로 쓴 세 단락의 잠언」(이후 「코쿤」이라 칭함)은 이 여행의 기록이자 형이상학을 기록한 문자의 해독 혹은 해체의 과정이며, ‘빈손으로 쓴 세 단락의 잠언’은 그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잠언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구석진 상가 위층, 주택가 허름한 한 쪽 귀퉁이, 학원가의 골목 끝’을 지난 ‘한 평 조금 넘는 허방들’에 모인 사람들이다. 앞의 낱말들은 아마도 ‘주유소 뒷골목, 음식점의 옥탑’이라 해도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좀 세련된 말로 기표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기표’라는 고급스러운 문자는 폐기되어야 할 것도 같다. 다만 주체가 ‘학교, 교회, 인수위원회’ 같은 낱말을 지나는 모험을 감행했으면 더 멋진 아이러니가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잠’과 ‘악몽’과 ‘기억하지 못할 잠언’들이다. 여기서 이상李箱의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와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가 떠오른 것은 독자의 탓도 있지만 이상의 ‘잠’과 닮아 있는 까닭이 더 클 것이다.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늘 작은 거울이 걸려 있다
십오 인치 낡은 창문을 떼어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가끔씩 오딧물 까맣게 입가에 묻은
너른 뽕밭이 펼쳐져 있다
직사각형의 작은 방을 관장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뿐이다
빈 손바닥에 틀어쥔 더 작은 창문을 귀에 대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지만 않는다면
몰래 들어온 검정고양이를 쓰다듬지만 않는다면
이곳은 유일한 소리의 감옥일 뿐
― 「코쿤」 부분

창문의 자리에 ‘거울’이 있다는 모티브부터 이상을 닮아 있다. ‘직사각형의 방 속에 작은 거울, 창문 속에 뽕밭, 손바닥에 더 작은 창문’은 끊임없이 차이나박스 같은 사각형의 연속이다. 코쿤 속에 코쿤이, 그 코쿤 속에 또 코쿤이 무한순열처럼 펼쳐지는 세계는 모든 것이 고정화되지 않는다. 확정적인 것이 없는 끝없는 불연속이자 연속인 세계는 오직 과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거울은 그 코쿤을 비추고 비추어 끝없이 증식시키는 무엇, 그것이 주체인지 혹은 신인지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의 표상처럼 보인다. ‘몰래 들어온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은 잠에서, 악몽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손의 기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그곳은 ‘소리의 감옥’이라는 것이다. 또, 이곳이 「귀」에서 들리던 ‘찬바람의 소리’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드물게도 검은 책을 이마에 붙인 채 봉인문자를 달달달 외우거나
또 어떤 이들은 머릿속에 빈손으로 수기를 쓰기도 하지만
허구한 날 석 잠이나 자는 동안
꿈속까지 들어온 원숭이들에게 책과 지도를 다 빼앗길 뿐
옆방에서 옆방으로 온갖 자질구레한 소리들
텅 빈 화면 속을 바글거리는 먼지 벌레들이 벽을 갉아대고
점점 소음의 은하계만 무한증식한다
성단을 횡단하는 동안 캡슐 속에 잠든 이들은 시간을 멈추어놓는다
더 큰 별의 감옥으로 이송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 「코쿤」 부분

코쿤 속에서는 이미 새로운 문자가 탄생하지 못한다. 오직 기억 혹은 잠 속에서 문자는 존재한다. 문자는 이미 봉인되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혹은 잠 속에서 ‘봉인문자를 달달달 외우거나 머릿속에 빈손으로 수기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기억일 뿐이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꿈속까지 들어온 원숭이들에게 책과 지도를 다 빼앗길 뿐’이다. 여기서 문자는 소멸된 사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화면도 텅 비어버린다.’ 화면을 구성하는 원형질이었던 문자가 없기 때문이다. 문자에 대한 기억조차 소멸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자가 구성한 체계였던 시간조차 사라진다. 그곳은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이 장소-시간(어떤 말로 불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쓴 말이다.)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시인이 상상한 것을 윤곽이나마 그려볼 수는 있겠다. 소음들이 탄생하고 소음만이 무한히 증식하는 세계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종말을 고하고 소음의 은하계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소음의 감옥으로서 코쿤일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은 여기서 또 하나의 형이상학을 구축한다. 

누런 짚 냄새 밴 막잠을 자고 지늙기 시작하면
머리가 허옇게 맑아진다고 한다 실실 헛웃음까지 흘리면서
밥통을 끌어안고 살던 입맛도 싹 사라져버린다고
빈손으로 투명한 시간을 한 가닥 뽑아내어 제 몸을 칭칭 감으면서
― 「코쿤」 부분

그곳은 ‘머리가 맑아지고’, ‘웃음이 나오면서’, ‘입맛도 사라지고’, ‘빈손으로 투명한 시간을 뽑아내는’ 장소-시간이다. 문자의 흔적으로 말하자면 장자莊子의 도道 혹은 허정虛靜, 니체의 허무虛無, 하이데거의 존재存在, 아니면 불교의 선禪이라 해야 할지 아닐지 모르겠다. 낡은 종족인 독자로서는 이 또한 형이상학의 비극처럼 보인다.

3. 놀이의 미학과 상상력
21세기 초의 종족이 문자의 소멸과 소리의 증식 앞에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견디는 방법은 무엇일까. 시인은 아직 그 견디는 방법을 선명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그 징후들을 보여준다. 사실 낡은 종족의 언어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압박감을 벗어나려는 방법을 모색한다고 써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수정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문자의 소멸과 소리의 증식의 사이를 지나가는 과정을 기록할 아니 보여줄 뿐이라고, 혹은 그것을 향유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것을 놀이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팩토리 엠」, 「은귀고리에 갇힌 뱀과 함께」, 「물고기」, 「얼음 경전」은 그 화법이나 모티브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은하계의 별처럼 흩어져 있는 시들의 친연성은 놀이의 미학으로 수렴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팩토리 엠」의 인스턴트식품을 파는 가게의 장식, 커피, 감자칩, 여직원 그리고 노동자인 나의 조합은 수학적이다. 물론 ‘구 제곱미터의 열대 우림이 유리상자 안에 잘 포장되어 있다.’, ‘일회용 컵을 밀어 넣기만 하면 노예들의 입 냄새가 배어 있는 신선한 검은 피가 쏟아져 내린다.’, ‘감자칩은 지루한 시간을 대신 씹어 넘긴다.’, ‘다 먹고 남은 것들을 다시 들고 일어선다. 의자를 정돈하고 분리수거함에 쓰레기를 버린다 나는 비로소 나를 증명한다.’는 일련의 것들은 잘 체계화된 공식이자, 그것들이 이 공간에서 이 순간 조합되는 것은 우연적이다. 체계화된 공식으로서 필연과 소재로서 우연의 만남은 현대수학의 원리를 너무도 충실하게 보여준다. 아니 현대세계를 읽는 방법으로서 현대수학을 증명한다. 이 항목들에 다른 변수와 상수를 주면 그 해解는 무한히 증식할 수 있다. 멋진 놀이라 할 수 있다.
「은귀고리에 갇힌 뱀과 함께」에서 은귀고리에 장식된 뱀을 보고, 신화적 모티브로 뱀이 ‘내가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악한 말들을 내가 나로부터 지워지고 있다는 말들을’ 들려주고, 다시 그 신화적으로 살아난 뱀을 은귀고리에 가두고, 은귀고리의 장식과 신화 사이에서 뱀을 만나는 의식을 기록하는 것은 사물과 의식의 경계에 붙잡힌 형이상학을 위반하는 놀이라 할 수 있다. 그 상상력은 다시 동떨어진 일상의 장면을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놀이로 변환되기도 한다. 또는 「물고기」처럼 일상의 장면을 낯설게 편집하는 놀이가 되기도 한다.

매끄러운 잿빛 숫돌에 연신 물을 끼얹는다
한 뼘 목판에 쭈그리고 앉아
스윽 슥 숫돌 위에 허연 날끝을 간다
마른 물고기들은 입에서 뱃속까지
허공을 물질한다
들끓는 유황불의 지옥에서
제 딱딱한 살을 풀어 비린내를 우려내지는 않지만
몇은 문지방 옆에 매달려
떨그렁 한 가닥 굳은 창자를 뱃속에 늘어뜨린 채
드나드는 이의 발걸음을 간섭한다
주렁주렁 아무 데고 매달려서는
그예 허공에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움푹 파인 숫돌 위에 연신
반 줌 물을 끼얹는다
목구멍이며 죄다 썩어 들어가는 내장까지
구불구불 천길 저 질긴 생의 창자들을
세 치 혓바닥이 완강히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뭇결 허옇게 시퍼런 물살을 못내 기억하는지
간혹 갓 내어걸린 낯선 몸들이 뒤척인다
칼날을 스친 마른 비늘들이 한 장씩 떨어져나가고
그 자리에 진흙바닥을 숨긴 구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어깨인 듯 자꾸 허공이 결린다
그까짓 남은 가시 한 점 때문에 목이 멘다
― 「물고기」 전문

회집의 장면을 계속해서 촬영해 보여준다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몇 장면을 클로즈업 시키고, 연속적인 장면을 단절하여 장면들을 끼워 넣으면 전체 동영상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이 작품은 이런 놀이를 하고 있다. ‘숫돌에 연신 칼을 가는 장면’과 ‘문지방에 말려 매달아 놓은 물고기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물고기의 회를 뜨는 장면’을 결합하고, 이어서 ‘회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는 장면’을 붙여 놓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숫돌에 연신 칼을 가는 장면’과 ‘문지방에 말려 매달아 놓은 물고기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줄 때, 독자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길이 없다. 회집의 모든 다른 정보를 삭제하고 오직 두 장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숫돌에 연신 칼을 가는 장면’의 섬뜩함은 ‘문지방에 말려 매달아 놓은 물고기의 모습’의 세밀한 묘사와 결합되어 긴장과 공포를 유발한다. 서스펜스가 기막히다. 그러므로 이어서 ‘회를 뜨는 장면에서 물고기의 비늘을 떨치고 머리를 자르는 장면 정도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생략한다면 그 서스펜스가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회를 먹는 장면에서 일그러지고 약간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몸짓을 보여준다면 그 공포와 불안은 극적으로 고조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에서 가시를 빼내고 회 접시를 보여준다면 긴장의 해소와 더불어 폭소를 자아낼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메시지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과정 속에서 물고기의 육체가 찢어 발겨지는 장면을 극대화시킨다. 
그런데 물고기의 육체가 찢어 발겨지는 잔혹은 목에 가시가 걸려 일그러진 얼굴과 몸짓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의 육체가 아니 독자의 육체가 찢어 발겨지는 고통을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창자를 드러내고, 시퍼런 칼날 앞에 몸을 뒤척이는 물고기, 그것은 고통과 공포를 자아내지만 마지막 반전은 모든 고통과 공포를 향유하도록 만든다. 독자에게는 아르또의 잔혹극까지는 아니더라도 꽉 짜인 질서 혹은 도덕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욕망을 부지불식간에 되살리려는 전략이 먹힐 것이다. 
또, 지금의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시공간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얼음 경전」은 과거 공룡시대의 화석코끼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화면을 보는 것 같다. 21세기의 인간을 전혀 다른 시공간에 내려놓고, 그 세계를 즐기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놀이는 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세계, 혹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를 형상화할 것이다. 사후의 세계, 미래의 세계, 우주의 세계 등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혹은 즐기고 싶어 하는 세계를 그려낼 것이다. 이때 그 세계를 보여주는 방법 역시 서스펜스의 과정을 코드화할 것이다. 해리포터처럼 긴장과 반전의 연속은 인간의 욕망을 끌고 갈 것이다. ‘덩치 큰 코끼리가 누런 덧니를 치켜든다.’ 당신의 앞에서 지금, 당신은 지금 벼랑 끝에서 손과 발로 기어오르려고 바동거릴 것이다. 스릴 만점이다. 원시적 육체를 되찾도록 하지 않는가, 원시적 본능을 일깨우지 않는가. 놀이로서 최고다.
현대시와 광고 혹은 영화, SF, 애니메이션과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것이 21세기 에 일어난 시의 진화일지도 모른다. 지금 인간은 이러한 매체언어를 즐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몇 십 년 후에는 이러한 놀이시가 독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 이전의 시들은 낡은 역사적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또 다른 서정시의 비극일지 모른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백팔번뇌를 삭제하는 놀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놀이의 미학은 반드시 매체언어만 닮지는 않을 것이다.


노  철
1999년 ≪시안≫으로 등단. 평론집 문명의 저울. 연구서 시교육의 방법과 실제, 현대시 창작방법 연구, 시 연구방법과 시교육론 등. 현재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재직.
추천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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