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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연재|김영식의 하이쿠 에세이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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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 긴 울림
1.
さよならと梅雨の車窓に指で書く(素逝)
안녕이라고
비 내리는 차창에
손가락으로 쓰다
비 또한 사랑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비는 세상을 적셔 만물이 자라나게 한다. 또 비는 마른 땅만이 아니라 마른 가슴도 촉촉이 적신다. 비는 사랑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비오는 날은 하늘과 땅, 음과 양이 물로써 통하는 날이니 비오는 날은 시내 모텔 방이 꽉 차는 날이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은 빗속에서 다가와 빗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비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에 반응하는 자는 아직도 사랑하기에 늦지 않다.
그녀와 헤어진 후 떠나가는 비행기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창에 부딪혀 맺히고 이내 흘러내린다. 비는 세상에 내리고 두 사람의 마음에도 흘러내린다. 그녀가 날 부르는 소리의 입자가 빗방울로 유리창에 부딪히며 눈물로 흘러내린다. 내 마음에도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이내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차가운 얼굴과 손을 어루만진다. 뿌옇게 된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안녕이라고 쓴다.
‘사요나라(さよなら)’는 우리말로 헤어짐의 안녕이지만, 원래 어원은 ‘그럼’, ‘그렇다면(さようなら、それなら)’의 의미가 있다. 즉, 사요나라는 ‘그럼, 안녕’이 줄어서 된 것인데, 그냥 안녕이라는 말로 자르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 마치고 떠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럼, 내일 또…….’가 될 수도 있으리라. 또 생각해보면 우리의 안녕安寧도 부디 편안히 잘 지내라는 인사말이고, 중국어의 안녕인 짜이쩬(再見)도 다시 보자이다. 굿바이(good bye)도 ‘신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god be with you)’이 줄어서 된 말이고, 다시 보자(see you again)도 많이 쓴다.
헤어지는 마당에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원망의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사요나라’를 ‘사고나라’로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한 때 사랑한 사람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더 클 것이다. 미련 없는 사랑, 후회 없는 이별은 없다. 이별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안녕이라는 글을 창에 쓰지만, 그 안녕이란 말이 관계의 단절이 아닌 희망과 기원의 말이기에, 그 마음 하나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요나라……
2.
かきくえば鐘がなるなり法隆寺(子規)
감을 먹는데
종이 울리는구나
나라의 호류지
나라(奈良)의 여관에서 시키가 빨갛게 익은 감(紅柿)를 입에 넣고 먹는데, 호류지(法隆寺)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A :
어떻습니까. 너무 단순하여 웃음이 나오지 않는지요. 시키라는 사람이 나라에 있는 호류지 가까이 있는 여관에 체재하고 있을 때, 저녁 무렵 여관의 여종이 빨갛게 익은 감을 가져왔습니다. 마침 배가 고픈 시키가 그 감을 덥석 물고 먹는데, 호류지의 종이 뎅~하고 울립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기분, 감개를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B :
마사오카 시키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장편,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 중심인물의 한 사람으로 나와,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하이쿠를 읽으니,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저는 이 시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맛있는 감을 허겁지겁 먹고 있을 때, 호류지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옵니다. 오로지 먹는 것에 정신 팔려 있는 내게, 먼 옛날로부터, 심원深遠으로부터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잊고 있던 그 무언가가 종소리로 인해 나의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또, 종소리는 내게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고 힐문하는 듯합니다. 피와 살이, 생명이 붉게 타오르고, 그 생명을 한껏 즐기고 있는 순간의 나는, 문득 종소리를 듣습니다. 그 종소리가 호류지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자, 역사가, 불교가, 인간과 인생이, 세계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또, 일본의 고전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의 첫 문장 ‘기원정사의 종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다(祇園精舍の鐘の聲諸行無常の響きあり)’ 가 너무도 유명하니, 시키를 포함한 일본인은 은연중에 종소리에서 제행무상을 떠오르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A :
운영자님 비평 감사합니다. 시키는 몸이 약하여 항상 죽음의 예감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생명의 연소감燃燒感을 적막함과 함께 표현한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즉, 생명의 충실이라는 것은 죽음의 예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의 시는 젊은이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는 생명을 구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촛불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흔들리며 확 타오르는 죽음의 무도라고 생각합니다.
3.
荒海や佐渡に横たふ天河(芭蕉)
거친 바다여
사도섬에 가로놓인
은하수여
눈앞에 펼쳐진 밤의 바다, 저편으로 검은 사도 섬이 떠올라 있고, 머리 위 하늘에는 은하수가 사도 섬을 향해 걸쳐있다.
모리오가이(森鴎外)의 단편 ‘다카세부네(高瀬舟)’를 읽어보면, 옛날에는 큰 죄를 지은 죄수를 섬으로 추방하는 벌이 있었다. 엔토(遠島)라 하였다. 흉악한 죄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본의 아닌 과실치사나 정상이 참작되는 죄인들이 주로 이 추방의 벌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다리도 없고 변변한 배도 없던 그 시절에, 섬에 보내진 사람들은 내륙에 대한 꿈을 저버리고 그곳에서 삶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사도(佐渡) 또한 유형지였다. 한때 그곳에는 큰 광산이 있어 필요한 인력을 죄인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유형지로써의 섬을 생각할 때, 내게는 영화 ‘빠삐용’이 자주 떠오른다. 탈출의 성공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섬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바로 섬이 가진 처절한 고립과 단절에 의한 것이었음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가요 ‘바다가 육지라면’ ‘공항의 이별’ ‘흑산도 아가씨’처럼, 섬과 바다는 심하게는 유형流刑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별이며 고립과 단절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바다에 파도가 거칠게 요동친다. 몰려왔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몰려오는 거친 파도를 본다. 까만 밤이지만 파도의 흰색 자태는 선명하기만 하다. 멀리 사도가 검게 보인다. 그곳에 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그들의 처절한 고독이 검은 섬 하나로 외롭게 떠 있다. 그러나 문득 하늘을 보니, 여기의 소란한 파도 소리, 파도의 몸부림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까만 밤을 바탕으로 하얀 은하수가 빛나고 있다. 바다의 파도는 순간을 싸우듯이 그리도 끝없이 변화무쌍한 소리와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하늘의 은하수는 까마득한 오랜 세월에 걸쳐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바다의 파도와 같이 수없이 태어났다 사라지는 생명,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름, 그 짧은 순간의 원한과 분노와 고독의 외침들이 덧없이 사라져 가는 듯한데, 하늘의 은하수는 인간의 찰나적인 삶을 비웃듯, 고고하게 밤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나 또한 파도 속의 하나가 되어 정신없이 일어났다 소리치고 사라질 존재. 하늘을 쳐다보며 파도의 덧없음과 우주의 영원한 생명을 느낀다.
시각적으로 파도의 동動과 은하수의 정靜이, 청각적으로도 파도소리(騷)와 은하수의 침묵이 대비를 이루는데, 그것은 바로 순간과 영원의 대비이며 공존이다.
김영식
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번역서 모리오가이의 기러기.
‘일본문학취미’ 사이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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