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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문화산책/김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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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77회 작성일 08-03-0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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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거짓말의 중력을 넘기 위한 법

― <밀양>(이창동, 2007)

김필남|영화평론가



1. 일상, 흔들리는

<밀양>의 카메라는 도둑처럼 움직인다. 요란한 발걸음을 최대한 자제하고 가급적 응시하지 않는 듯 응시한다. 이 때문에 카메라는 수다스러움을 경계하며 무심하게 바라 볼 뿐이다. 그래서 이 무심한 카메라는 일상을 붙잡는데 매우 유용하다. 말하자면 카메라가 뒤쫓기보다 카메라 속으로 이미지가 쏟아져 들어오는 양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역설적으로 카메라의 성실함이 이 순간 발휘된다고 해야 할 터이다. 요컨대 카메라는 끊임없이, 탈색되어 버린 일상에 거주하는 한 여자를 뒤쫓는 데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여자(전도연 扮)는 카메라를 의식할 수 없고, 오직 카메라 앞에서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에 따른 죄의식도 가지지 않는다. 죄의식이 엄습하기 전에 그것이 마치 진실인 듯, 그게 바로 삶의 올바른 양식인 듯 카메라는 매우 자연스럽게 그 거짓을 용인하는 여유로움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이 혼돈되는 지점이 발생하게 된다.

진실과 거짓이 혼돈되는 카메라는 과부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밀양으로 온 한 여자를 비추고 있다. 여자의 일상을 쫓고 있는 카메라는 성실한 시선으로 여자를 비추지만 여자에게서는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다. 여자의 곁에는 늘 카메라와는 대조되는 ‘빛’이 카메라보다 먼저 그녀의 삶 언저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빛은 마치 여자의 비밀에 관하여 낱낱이 캐내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여자를 따라다니는데 이로 인해 여자에게 어떤 비밀이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 빛으로 인해 여자의 일상이 흔들릴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카메라가 도둑처럼 조용히 여자를 뒤쫓는다면, 빛은 여자의 곁이 제 자리라도 되는 냥 의기양양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며 쫓고 있는 것이다. 마치 여자의 일상이 허위라는 것을 까발리도록 제작된 도구처럼 말이다.

눈을 떠 똑바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경건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빛은 일상 속에서 광채를 내뿜으며 존재한다. 또한 그것은 일상에서 늘 보는 익숙함이면서도 어느 순간 낯설게 나타난다. <밀양>에서 내뿜는 빛 또한 비루한 일상으로 개입해 들어와 여자의 삶을 낱낱이 폭로하는 낯설면서도 폭력적인 시선으로 여자를 비추고 있다. 여자의 사정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내리 쬐는 빛, 나의 고통을 무시한 채 그저 눈부시게 빛나는 빛. 그래서 여자의 비루한 일상(혹은 진실)은 고통스럽게 와 닿는다. 일상이 고통이 된 여자는 이제 불안하기 마련이다. <밀양>의 빛이 공포스럽게 스멀스멀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 뒤에 있던 빛이 언젠가는 여자와 만나, 여자의 일상을 곧 덮쳐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이제 평범을 가장한 여자의 일상에 관한 영화는, 결코 영화가 평범하지 않는 고통을 감지하도록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밀양>의 ‘빛’은 비밀스럽게 작동한다. 또한 비밀스런 빛을 발견한 순간 비로소 카메라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이 자각 된다. 이때, 흔들리는 카메라는 불안한 일상(혹은 여자의 내면세계)을 전달한다. 그리고 여자의 일상은 진짜로 흔들리게 된다.


2. 살기 위한, 방법들

― 삶의 방식으로서의 거짓말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을 한다. 신애 또한 선택의 문제에 봉착했고, 결정을 내린다. 신애가 내린 첫 번째 결정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애의 남편도 신애처럼 거짓말쟁이었다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믿었던 남편이 신애를 속이고 외도를 했다는 사실은 평범했던 신애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밀양으로 올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신애에게 거짓말을 했던 남편은 그녀에게 죽음으로 속죄해 용서를 받는다. 다만 외도의 사실까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처음 밀양으로 와 신애가 하는 거짓말은 생존을 위한 것으로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또한 거짓말을 해야만 밀양에 사는 토박이들에게 이방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진짜로 아내(신애)를 사랑했던 남편의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외도를 저질렀고 그 여자와 함께 죽은 것이다. 신애는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만 주위에서는 끊임없이 그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 밀양으로 이사를 오지만 신애의 남동생은 불쑥불쑥 나타나 그녀의 상처를 헤집어 진실을 보여준다. 그렇게 신애의 거짓말은 타인에 의해서 거짓으로 판명되고 응징 받기 일쑤다. 그래서 거짓말은 망각을 불러오게 되고, 부셔졌던 일상을 망각을 통해 회복하고자 한다.

신애가 완벽한 거짓말쟁이었다면 일상은 흔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애는 거짓말을 하고 나면 그 거짓은 곧 밝혀진다. 이방인이 아니기를 부정하면서도 밀양사람과는 다른 서울에서 온 세련된 여자이고 싶은 욕망, 종찬을 속물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늘 함께 어울려 다니고, 인테리어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양장점 주인에게 인테리어에 대해 충고하고, 수중에 돈은 없지만 땅을 보러 다니고, 상을 받지 않았지만 상장을 걸어둔다. 신애는 이렇게 밀양에 살면서도 자신에게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진실이 누군가들을 통해 들춰내지면 신애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거짓말은 금세 들통 나거나 응징받기 마련이다. 신애에게 땅을 살만큼의 돈이 없음이 들통 나고, 양장점의 인테리어에 대해 떠들었던 것은 미용실에서 동네여자들의 뒷담화로 전락해 버리고, 받지 않은 상장이 걸린 것을 본 남동생은 상을 받은 적이 있냐는 말로 거짓임을 확인시킨다. 거짓말로 만들어낸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 한 것이다. 거짓말임이 들통 나기 전까지는 거짓말로 만든 일상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거짓말이 거짓말임이 확인 되면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신애 또한 거짓말의 대가로 아들 준이가 죽게 되는 응징을 받게 된다. 신애의 아들은 사라진 척, 죽은 척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거짓행동을 못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가짜로만 사라지고 죽은 척 하던 준이가 진짜 사라지고 진짜 죽은 채(살해) 발견 된다. 준이가 죽자 신애에게 거짓말은 의미가 없어진다. 도리어 아들을 죽게 만들었던 거짓말은 족쇄가 되어 신애를 괴롭히고, 아들을 죽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현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현실의 고통스런 일상을 외면하게 된 그녀는 절대적인 존재, 신을 불러오게 된다.


― 삶의 폐기로서의 거짓말

신애가 신을 불러온 계기는 비록 속물적인 여자의 처세술이었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신을 만났다고 주장했고, 준이의 죽음은 잊었고 자신의 거짓말은 용서 받았으며 자신을 지켜주는 하느님으로 인해 살아갈 의지가 생겼다고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망각하며 사는 것이,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신애는 망각하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자신마저 속이는 ‘거짓말’을 시작하게 된다.

신애의 거짓말은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었으나, 그 거짓말 때문에 응징 받게 되자 절대적 존재를 불러 오게 되고 거짓말을 하던 삶은 폐기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거짓말의 시작을 뜻한다. 다시 말해 신애가 하는 거짓말은 응징과 대가를 치르는 거짓말이 아닌, 함부로 부정하거나 긍정될 수 없는 (절대적)존재를 내세워 타인을 속이고 또 나를 속이는 거짓말을 행하는 것이다. 절대적 존재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진실이라고 우기면 된다. 혹시나 믿음이 무너질 때쯤에는 그때마다 기도문과 찬송가를 불러 더 튼튼하게 봉인하면 된다. 절대적 존재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들켜 응징 받지만 않는다면 이 거짓말은 영원히 끝나지 않은 채 신애의 일상은 평온하고 고요하게 흘러 갈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던,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신애는 준이를 죽인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해야 한다. 원장을 용서해야만 자신(거짓말)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옥 안에 갇힌 원장은 신께 벌써 용서받았다고 한다. 신애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제야 신애는 신이 있다면 신이 그녀를 농락했음을 알게 되고,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망각(자신이 만든 거짓말) 속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내가 한 거짓말은 용서할 구실을 만들 수 있지만, 누군가의 거짓말로 인해 나 자신이 상처를 받는다면 용서할 수 없기 마련이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잘못(거짓말)에서 비롯되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신애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의 완전무결한 권위에 대항하고 도전하게 된다. 신은 구원의 존재가 아닌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무능력의 존재였고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것이다. 그렇게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자 신애의 평온했던 일상은 파괴되고 점점 ‘미친 여자’가 되어 간다. 정상인처럼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애는 신에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걸게 된다. 하지만 신은 대답이 없다. 신애를 따라다니던 빛처럼 그녀를 지켜만 볼 뿐이다. 대답 없이 지켜만 보는 신에게 신애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다. 다과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 방법으로. 그러나 그녀는 곧 살려달라고, 외친다.

자신의 죽음으로 신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신애는 그것을 실패하고 정신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미 그녀는 정상(이라고 규정받는 존재)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이다. 절대자인 신의 믿음 속에 살았던 여자는 정상인들이 보기에 약간 이상해 보일 정도지만, 신과 싸우는 여자는 미쳐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신애는 정신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받게 된다.


3. 거짓말쟁이로 다시, 살기

정신병원으로 간 신애는 곧 퇴원한다. 정신병원에서 세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세상과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신애는 양장점 주인의 미친 여자라는 말에도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으며, 신애의 곁에서 맴돌기만 하던 종찬과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듯(마지막 씬에서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과 신애를 비춘다. 이것은 신애에 의해 늘 거부당하기만 하던 종찬이 신애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첫 번째 일이기도 하다)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신애는 정신병원을 나온 직후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듯 촌스러운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들른다. 그런데 미용실에서 만난 사람이 아들을 죽인 원장의 딸이었다. 신애는 정상인이 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에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맡기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왜, 하필 오늘이냐고, 왜’. 신애는 비정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정상인인 척 보이려 했던 것이다. 신애는 신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만 교묘하게 의도를 숨기고 일상 속에 편입해 ‘완벽한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 거짓말을 함으로 인간과 더불어 세계에서 살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존재(신)에게 모욕을 가하는 최고의 복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거짓말로 인해 아들마저 잃는 고통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애는 또, 다시 거짓말을 하면서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창동은 세계(국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 혹은 타자의 문제(오아시스), 한 개인을 통해 이질적인 사회(박하사탕)를 보여주면서 나의 곁에 있음직한 이야기. 차라리 눈감고 싶어질 만큼 사실적인 인간의 이미지에 집착해 왔다. 이창동 영화 속의 개인은 국가/세계/집단에서 아무것도 할(볼) 수 없었다. 단지 세계(국가/사회)에서 넘버3이거나, 자살 할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이거나, 장애인이거나, 깡패인 개인(타자)일 뿐이었다. 국가라는 이름하에 보호받고 살고 있지만, 현재의 그들(타자)은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국가가 정해 놓은 보편적인 진리 안에서 조용히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자유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폭력이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감독은 이제껏 영화 속에서 종찬과 같은 인물을 내세워, 절대적인 존재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는 개인을 보여 왔다.

그래서 <밀양>의 카메라는 이제 변화한다. 신애의 정신병원 탈출로 말이다. 그녀는 탈출하는 방법을 쉽게 알아냈다. 신을 잊은 척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신애는 신을 잊을 수가 없다. 신을 잊으면 그녀는 ‘무엇’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거짓말로 인해 아들을 죽게 만든 자신을 떠올리며 고통의 일상을 끔찍하게 살아가야 할 게 뻔하다. 그래서 신애는 세계 속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말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개인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소통은 종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신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 교회에 나가고, 신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종찬은 달(신애야 말로 절대적 존재이다. 신과 대립할 수 있으니, 무수한 개인이 아닌 세계의 중심일 수 있다)같은 신애의 곁에서 별이 되어 바라보고 있는 존재이다. 그의 존재는 절대적 존재를 빛나게 해주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별이 없으면 달은 돋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종찬과 있음으로 해서 정상인이라고 규정받을 수 있으며 신과 마음껏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반대로 말하면 종찬이야말로 절대적 존재이다). 영원히 발화하지 못해도 괜찮다. 이 싸움은 처음부터 신과 신애 둘만의 싸움이었으니깐. 그래서 신애는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을 통해 머리를 자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신애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끌어안고, 신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망각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의식하면서 절대적인 모든 것을 부정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면서 대항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신애의 뒤에서 신애를 집요하게 뒤따르던 빛이 그녀를 떠나 다른 곳을 응시하게 된다. 카메라의 미세함 떨림도 잦아들어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된지 오래이다. 아마도, <밀양>은 한 개인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대항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김필남

2007년 <부산일보> 평론(영화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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