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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서평/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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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65회 작성일 08-03-01 02:41

본문

|서평|


■길상호, <모르는 척>(천년의 시작)

■김중일, <국경꽃집>(창작과 비평)



불안의 창에 비친 흔들리는 생
강경희|문학평론가


1. 불안한 생을 다독이며 걸어가다

길상호 시의 밑바탕에는 생의 ‘상처’와 ‘불안’이 존재한다. 「물의 집을 허물 때」는 이러한 상처와 불안의식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몇 개 상처 정강이에 새기며” “오래오래” 걸어가면 어느덧 상처에는 “굳은살”이 자리잡는다. 상처에 굳은살이 잡히면 그것은 아물게 된다. 하지만 길상호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거기에 “아픈 물방울의 집 한 채”를 짓게 한다. 그의 상처는, 상처의 굳은살은 생을 단단하게 떠받쳐주는 힘이기보다는 “주루룩 눈물 흘러내리는”, “한 순간에 꺼져버”리는 “불안한” 존재의 집이 된다. 상처는 상처로 치유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처는 상처로 치유 될”수 있다고 믿는다. 상처의 치유책이 상처일 때 그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일 수밖에 없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것, 고통 속에서 삶의 “뜨거운 방”을 찾으려하는 것이 길상호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찬란하게 빛나는 사물과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기보다는 “어두운 저수지”(「물고기는 모두 꽃을 피운다」)나 “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 “씻겨도 씻겨도 어두운 사람”(「그림자에게도 우산을」)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열매 떨어진 자리」, 「어떤 노숙자」, 「버려진 손」, 「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와 같은 작품은 이러한 그의 시각을 반영하는 작품들이다. 이처럼 그가 생의 상처와 고통에 민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뿌리에 대한 기억’과 관련되는 듯하다.


몸은 기억하지, 할아버지 주름의 행간마다 삐뚤삐뚤 써놓았던 글씨들을,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머리카락 검은 잉크 뽑아내던 그 밤을, 결국 말줄임표로 줄이고 흙으로 덮어버린 유언을, 산자락에 푸른 눈물방울로 남은 그의 얼굴을

나의 몸은 재활용품, 어머니 뱃속 따뜻한 공장에서 꼬박 열 달 새 얼굴을 갖기 위해 양수로 씻고 또 씻고,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울음을 매달고 세상에 왔지, 탯줄을 잘라내고도 배꼽의 상처는 상표처럼 떨어지지 않고, 그들의 기록을 이어가야 하는 몸 속에서 자음과 모음이 꿈틀거리지, 어떤 문장도 만들지 못하는 밤엔 텅 빈 캔처럼 망치를 맞기도 하지

거름이나 되자고 퇴비 속 뜨거운 방에 들어앉아도 썩지 않는 몸, 나는 또 상처의 자리마다 머리칼 하나씩 뽑아 아픈 가계도를 그리지

― 「유전 혹은 재활용」 전문


그의 상처의 뿌리는 원형적이다. 상처는 자신이 경험한 세계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보다는 이미 탄생과 더불어, 아니 탄생 이전에 존재한다. 길상호의 상처의 기원은 먼 과거의 혈족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게 존재의 탄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시작은 그에게 “몸”의 “재활용품”으로 인식된다. 몸이 재활용품으로 인식되는 까닭은 그것이 “유전”되기 때문이다. 몸의 유전은 닮음에서 비롯된다. 즉 자신의 몸은 “할아버지”의 몸과 닮아있다. 몸의 닮음은 고통의 닮음으로 대물림된다. “할아버지 주름 행간마다” 새겨져 있는 고통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나의 몸”에 이식되어 있다. 때문에 할아버지가 써놓았던 “삐뚤삐뚤 써놓았던 글씨들”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머리카락 검은 잉크 뽑아내던 그 밤”의 “유서”는 다시금 유전되어 나 또한 “그들의 기록을 이어가야 하는 몸”이 되는 것이다. 반복된 몸과 마찬가지로 고통도 반복된다. 재활용된 몸처럼 고통도 재활용된다고 인식할 때 이러한 의식의 근저에는 저주받은 존재의 비극이 놓인다.

길상호에게 슬픔은 생의 경험으로부터 초래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형식 속에 이미 내재되어있는 근원적 싹이다. 따라서 “어머니 뱃속 따뜻한 공장에서 꼬박 열 달 새 얼굴을 갖기 위해 양수로 씻고 또 씻”어도 “어쩔 수 없어 울음을 매달고 세상에” 온 것이며, “탯줄을 잘라내고도 배꼽의 상처는 상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슬픔’과 ‘상처’는 존재의 원형질로 각인되어 있다. 때문에 할아버지의 상처는 자신의 상처로 유전되고, 그가 완성하지 못했던 “말줄임표”의 유언은 “어떤 문장도 만들지 못하는 밤” 나의 고통스러운 시가 된다. 고통과 슬픔이 “아픈 가계도”로부터 유전된 것이라면 그것은 숙명이다. 따라서 고통과 슬픔은 극복의 대상일 수 없다. 때문에 그는 슬픔에 맞서기보다는 슬픔과 하나되는, 고통과 한 몸 되는 자기 연민의 방식을 선택한다.


인터넷 화면 속 떠다니는 사진

길상호를 만났지

어느 바다에서 밀려왔는지 개펄에

닻을 내린 배 한 척

마냥 신기해서 스크랩을 해두고

보다가, 보다가, 눈물이 났지

물을 떠나서 다리 잃은 배

기우뚱, 일어서지 못했지

펄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지

바다로 이어진 물길 마르면

허연 소금 묻히고 녹슬어갈

길상호는 튜브를 몇 개 부레처럼 달고

헐떡이고 있었지

밀물이 들지 않는 모니터 속에서

힘차게 힘차게 노를 저어도

너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었지

바다가 없어도 물고기 건져야 하는

그 밤 나는 가여운 어부가 됐지

― 「길상號를 보았네」 전문


이 시는 인터넷 화면 속에서 자신의 이름과 같은 “길상號”라는 배를 본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배는 바다를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개펄에/닻을 내린 배 한 척”이다. 그는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해서 스크랩을 해”두었는데, 한참을 보면서 그 배가 자신의 처지와 닮아서 “보다가, 보다가, 눈물이 났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배가 “물을 떠나서 다리 잃은 배”로 보였기 때문이다. 배의 본질과 역할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길상號”는 개펄에 묶여 있다. “펄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다. 자유를 억압당한 것이다. 배에게 바다로의 항해가 허락되지 않듯, 자신 또한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허연 소금 묻히고 녹슬어갈” 배의 운명처럼 자신의 존재도 “기우뚱, 일어서지 못”한 채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배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은 동일화된다.

길상호의 시적 특징 중 하나는 사물에 자아의 정서를 투사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투사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그는 자아와 사물이 일체가 되는 동질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방법은 세계와 내가 단절되지 않고 연속적 실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와 자아의 연대감과 동질성은 그의 많은 시에서 확인된다. “지팡이”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할머니의 연대성을 확인하는 「허공 지팡이」, “발자국”에서 풀의 종족의 뿌리를 발견하는 「너의 발자국엔 뿌리가 있다」, 「어미를 먹은 기억」에서 “고구마 싹”이 “썩은 내 풍기는” “자루”에서 “어미”를 기억하는 “나”의 발견은 모두 대상과의 동질성을 꾀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길상호의 시는 세계와의 동일화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본령의 시작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서정의 형상화는 시적 공감대를 확보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또한 길상호의 시작 방식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비유의 탁월성을 들 수 있다. 앞선 시 「길상號를 보았네」 뿐만 아니라 길들여진 들개에 자신을 비유하는 「손을 타다」, 싹을 올리는 양파를 통해 자신의 비애와 고통을 은유한 「양파야 싹을 올리지 마라」, “수족관에 엎드린 廣魚”를 통해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내면을 형상화한 「수족관의 겨울」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길상호는 사물의 고유한 측면을 자신의 내면 의식으로 반영함으로써 전통적 서정의 형식 속에 자신만의 개성적인 정서를 녹아낸다. 이는 폭넓은 공감대를 확보하는 동시에, 그 만이 지니고 독특한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데 효과적이다.

길상호의 두 번째 시집 『모르는 척』은 무엇보다 사물성의 요소를 자신의 내적 상상력으로 끌어들이는 농익은 시작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데 능란함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요란하거나 복잡한 내용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러우면서도 평범한 언어로 감동을 자아낼 줄 아는 능력은 그의 시를 돋보이게 만드는 핵심이다. 이 시집은 우울하고도 불안한 현대인의 실존과 그 내면 풍경을 차분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서정의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기존 서정의 정형화되고 상투화된 양식을 답습하지 않기에 그의 시는 신선하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수사에 치중하지 않고 순간의 형식 속에 인생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그의 서정의 전략은 메마른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킨다.

생은 언제나 상처이며 고통이며 불안일 수밖에 없다. 길상호는 그 생의 상처와 고통과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들과 하나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저 뜨거운 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나방의 날갯짓”(「나방의 날개」)처럼 뜨거운 생의 고통 속으로 두려움 없이 돌진하는 것이 그가 불안한 생을 다독이는 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푸른 비늘 하나씩 뜯으며/부딪쳐야 할 세월”을 기꺼이 감내할 때 “불완전한 생”은 조금씩 “승천”(「탁족濯足은 뜨거워라」)할 수 있지 않을까.


2. 꿈의 궤도에서 방황하기

김중일의 시는 일상적이며 친숙한 사실화를 그리지 않는다. 그의 시는 환상과 몽상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또는 상상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낯설다. 낯설기에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그러나 낯설기에 새롭고 신선하다. 그렇다면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움과 신선함을 주는 것이 그의 시쓰기의 전략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환상이 만들어낸 초현실의 공간, 새로운 풍경과 기이한 시간의 배열, 고대와 미래와 현재가 한데 뒤엉킨 겹쳐진 시공간은 시를 모호하게 만들고 의미를 혼란시킨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시는 잘 읽히는 편이다. 그것은 첫째로는 그의 시가 정확한 문법의 방식을 전달하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형상화 방식의 난해성이 적기 때문이다. 이는 은유와 알레고리와 같은 언어적 층위의 해석에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그의 많은 시가 서사의 형식과 이야기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공룡」은 설화적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옴으로써 시적 알레고리를 적절히 활용하는 동시에 내용의 집중도를 높이고 있다.


공룡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룡의 발자국은 모두 문밖으로 나 있어다,라고 마을 회의중에 누군가 술잔을 탁 놓으면 말했다, 고대의, 모든 사냥의 기억들은 어두운 밤으로 와서…… 그 밤은 길고 검고 윤기나는 털을 휘날리며 가르릉거리며, 마을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달빛은 사냥감을 먹어치우는 거대하고 백태가 낀 혓바닥처럼 지붕을, 창문을, 도살장 안의 가축을 핥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물기 무섭게 허술한 문을 걸어잠그고, 침대 위에서 검은 창문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매일……

매일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갔다. 그것이 공룡의 야습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공룡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모아 공룡을 사냥하러 다니는 동안 시나브로 공룡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것이 공룡의 힘이었다,

공룡의 멸종은 권태 때문이다,라고 마을회의에서 누군가 술잔을 탁자 위에 소리나게 놓으며 말했다, 원탁에 앉은 덥수룩한 수염들은, 붉은 양탄자처럼 긴 혀를 둘둘 말고 굳게 입을 닫았다, 나날이 회의는 계속되었다 매일,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으며 몰려오는 저녁의 정체가 공룡이란 것을 깨닫고 경악할 때까지

― 「공룡」 전문


「공룡」은 공룡에 대한 한 편의 전설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공룡이 출몰한다는 소문”, ‘공룡의 무시무시한 위력’, ‘공룡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노력’, ‘공룡을 사냥하러 다니는 사람들’ ‘공룡을 쫓다 공룡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공룡의 멸종’에 이르기까지 공포의 대상인 공룡의 출현과 멸종, 또한 그러한 공룡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이는 마치 한편이 대서사시를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김중일의 시는 이야기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에 줄거리를 갖는다. 그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줄거리를 따라가게 만들고 이는 연속적 과정을 거쳐 독자에게 상상적 재현의 시공간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한다. 즉 시인이 직조해낸 상상의 그림은 독자의 주체적 상상으로 전이됨으로써 독자는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낸 재현과 형상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독되기 이전에 독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상의 그림들을 맞추어 가면서 정신적 유희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시적 의미는 유보된다. 의미적 차원에 앞서 상상적 광경을 그려보게 함으로써 그의 시는 열린 텍스트가 된다. 바로 이 부분이 김중일 시의 독특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공룡」은 시인의 상상이 엮어놓은 이야기를 유추함으로써 독자들만의 상상적 공간을 재구성한다. 작가의 그림과 독자의 그림이 상호 침투함으로써 시읽기는 적극성을 유도한다. 이는 일견 난해한 환상시에서 느끼는 이질성, 소외감, 단절의 심리를 해소시켜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환상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이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공포와 그리움의 대상인 공룡의 정체가 바로 “저녁”임이 밝혀진다. 상상의 공룡, 신화적 공룡은 그 베일을 벗는다. 즉 공룡은 실존의 불안과 허무, 그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인 것이다. ‘어둠’ 혹은 ‘저녁’은 인간 존재의 ‘불안 의식’을 가속화하며, 이 불안의 심리는 공포를 증대시키고 또한 공포는 거부할 수 없는 원천적 애증의 대상이 된다. 이때 독자가 재구성해놓은 상상적 그림은 일순간 작가의 의도에 의해 와해되어 버린다. 김중일은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에 제동을 가함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환상의 질서를 강요한다. 그의 환상은 이렇듯 기존의 환상시의 형식에 대한 위반과 그 위반을 통한 새로운 환상적 규범을 만들어 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준다. 환상시는 끊임없이 실험적이며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할 때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중일의 환상은 개성화된 새로운 환상시의 영역을 제공하는 새로움을 안겨준다.

또한 김중일의 환상시의 특이성은 이중적인 복합성을 지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두 겹의 저녁으로 보는 테라스」는 이러한 특성을 반영한다.


나는 그날 저녁

너의 저녁을 훔쳤지

너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중략)

내 등에 솟은 두 개의 깊은 혹 사이, 해와 달 사이

그 사이에 낀 엉덩이는 도무지 빠지지 않고, 욱신거린다

너와 내가 아주 오랜만에 마주앉은 저녁

자전하는 거대한 테이블

그 위에서 너나 나나 어지간히도 지독해지는

두 겹의 저녁, 그렇군 여긴

우리의 궁지였군!

― 「두 겹의 저녁으로 보는 테라스」 부분


너와 나는 완전한 소통의 관계를 지향하기 못한다. “나”는 “너의 저녁을 훔”쳤지만, 너는 자신의 저녁이 훔쳐진 것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을 너는 모른다. 내가 가져간 것을 너는 깨닫지 못한다. 너와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마주앉”아 있지만, 그 마주앉은 “거대한 테라스”의 “저녁”은 서로가 서로를 궁지로 모는 ‘겹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겹은 시간”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중의 시간이다. 겹의 시간에는 “사이”가 존재한다. 겹은 ‘틈’을 발생시키며, 이 틈은 끊임없이 다른 상상과 다른 세계로 서로를 몰고 간다. 시간은 “조금씩, 점점, 길어지고 넓어지고” 벌어진다.

김중일에게 시간은 계기적이며 순차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의 시간은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떠돈다. 그것은 “도무지 빠지지 않고, 욱신거”리는 감각의 시간으로 인식되기도 하다가, “어지간히도 지독해지는” 의식의 시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두 겹의 시간은 감성과 이성을 오고 가며, 육체와 정신을 오고 가며,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며, 사랑과 거짓을 오고간다. 겹의 시간은 이처럼 끊임없이 불일치하는 이중적 상황 속으로 존재를 떠돌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이중화된 시간은 “궁지”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궁지는 헤어나오기 힘든 곳이다. “씹어도씹어도 삼킬 수가 없”는(「창문 한 접시가 놓인 식탁」) 음식은 충족되지 않는 식욕의 궁지이며, “두 눈 뜨고도 읽을 수 없는”(「두근거리는 신전」) 세계는 눈뜬 자에게 존재하는 암흑의 궁지이다. 이처럼 궁지에 빠지게 되는 것은 지상의 “대열 속에” 있지만 서로가 “담장”일 수밖에 없는, “모두가 내 반대쪽으로만 허물어져가는” “울음벽돌” (「담 장 속으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의 불일치, 단절의 심연, “꿈과 꿈”이 “서로를 거울처럼 되비추”(「슬픈 모자를 쓰고 잠들다」)기만 하는 합치되지 못하는 간극은 현대인의 내적 불안과 고통을 암시한다.

김중일은 말한다. “먹어도먹어도 배고픈 시간으로 연명”하는 것이 삶이라고. 그렇지만 또한 “각자의 ‘신비한 꿈’ 속에서 목격한”(「새」) 자신의 새를 찾는 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그 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슬퍼하지 않고 우는 법, 기뻐하지 않고 웃는 법을 연습”(「해바라기 전쟁」)하는 것이라고.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욕망과, 영원히 이룰 수 존재의 허망한 꿈은 모순과 부조리한 현실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슬프고 아픈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꿈과 이상의 불협화음, 나와 타자의 끊임없는 미끄러짐, 서로 만날 수 없는 궤도를 돌고 있는 고독한 존재의 형상은 그의 시 곳곳에 우울한 자의식의 풍경을 그려 놓는다. 김중일은 “거대한 눈물 한 방울” 머금고 “어둑하고 투명하고 딱딱하고 아름다운 저녁”(「위험한 거리」)의 거리를 바라본다. 어둡고 투명한 세상, 딱딱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무엇일까? 그의 눈에 비친 저녁은 지상의 풍경과 내면의 풍경이 두 겹으로 겹쳐지는 곳이며, 현실과 꿈과 동경의 꿈이 중첩되고 어긋나는 이상한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의 풍경은 슬프고 아프지만 또한 아름답기도 하다. 사막의 대지에서 꽃을 피우려는 “국경꽃집”은 그의 경계의 사유가 빚어낸 환상의 현실이 아닐까.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 문예로 등단. 저서 <타자의 언어학>,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 숭실대 강사.

추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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