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7호 서평/김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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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대흠, <물속의 불>(천년의 시작)
■박영근,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작과 비평)
1. 이대흠의 소통 문법
이대흠의 시집 <물속의 불>에 나타난 주조음은 물과 불로 표상된 여성과 남성의 파괴적인 에로티시즘이다. 연작시 「물속의 불」은 온통 새디즘으로 가득하다. 그는 왜 파탄적인 성애의 모티브에 매달려 있는 걸까? 그는 ‘물속의 불’을 통해 성적 욕망을 매개로 한 양성간 투쟁의 기나긴 역사를 그려 보이려는 것일까? 그럴수도 있겠다. 작품 속에서 남성은 여성의 육체를 꿈틀대는 구더기가 가득한 부패와 혐오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동시에 혐오의 대상인 여성과의 소통 수단을 ‘만지며 핥으며 때리고 잡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행위의 대상인 여성이 ‘누이이자 아내이며 어머니’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여성의 육체를 학대하고 공격하는 행위의 주체는 오라비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남성’이 된다. 남성은 여성에게 ‘접시의 밥을 혀로 핥아 먹게 하거나 발가락을 빨도록’ 강요하고 이유없이 폭력을 가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간주한다.
성스러운 밥 누이의 육신은 논바닥에 눕혀졌다.
얼어있는 보리의 이파리가 누이의 몸을 찔렀다.
나를 물어뜯어 우우
그녀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긴 후
흐르는 피를 빨아먹었다. “사랑해!”
― 「오래된 경전」
시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주체들 사이에 내재한 폭력을 주목하고 있다. 이 도착적 사랑은 혈거시대의 전설과 대비된다. 동굴시대의 “나는 누이인 그녀를 모셨고 그녀는 나의 발바닥을 빨았다”는 구절처럼 수평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나와 누이의 온전한 관계는 ‘내’가 ‘아버지/군인’으로 변신하면서 결정적으로 훼손되고 만다. 군인은 아버지의 다른 모습이다. 군인이 된 ‘나’는 누이를 보호한다는 빌미로 그의 노동과 성을 착취한다. ‘아버지’ 는 여성을 훈육한다. “여자는 자고로 여자는 자고로”라는 아버지의 말은 여성을 협박하고 포획하는 경전으로 작동한다. 남성지배와 여성종속이 일반화되는 것, 이른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는 문명사적으로 아버지가 권력으로 기능하는 가부장적 가족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대흠의 시편은 이러한 인류사적 전환을 가족내에서의 반복을 재현하고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압축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생물학자 헤켈의 주장처럼 누이의 젖을 먹고 자란 ‘나’는 어느 순간 ‘아버지’가 되어 누이와 어머니와 아내를 협박하는 존재가 된다. 이대흠은 문명적 차원의 폭력과 개인적 차원의 폭력 사이의 상호관련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리라.
「위대한 탄생」은 사회적 폭력 혹은 폭력의 문명을 다루고 있다. 남자, 장군, 군인은 여자를 폭력으로 억압하고 살육한다. 혁명군을 자처하는 장군과 군인은 ‘새와 토끼와 풀잎’으로 표상된 민중을 ‘사기꾼, 폭도, 간접’으로 간주하여 살해한다. 시인에게 이 시간은 ‘여성이 난자당하고 어머니가 처형’된 시대이다. 장군이 여자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는 “어머니가 아니라 창녀”이기 때문이다. 「붉은 심장을 가진 나무」는 광주민중항쟁을 키치적 수법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대흠은 역사를 남성적 폭력이 극한에 이른 상황으로 해석한다. ‘어머니의 무르팍은 깨졌고’ ‘사람과 짐승은 모두 조그맣게 되었으며’, ‘풀과 나락은 온통 쓰러져 있다’는 묘사를 통해 80년대가 사회의 모든 주체들에게 위기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군용단검에 얼굴이 깨어진 노인, 병사들이 휘두른 대검에 난도질당하는 군중과 어머니의 자궁은 참혹한 학살의 광경은 ‘상상 속의 비극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세계를 성적 주체의 관계로 파악할 때, 섹스는 가장 유일한 소통의 형식이자 매개가 된다. 「물」과 같은 작품에서는 물과 불로 표상된 남녀의 강렬한 성애의 판타지와 그것을 요구하는 절규를 제시하고 있다.
어여뻐라 검은 몸의 사내여
능수버들같이 흐늘거리는 내 몸을
세발까마귀처럼 쪼아라 사내여
굳어버린 내 껍질에 구멍을 내라
한없이 넓어지는 구멍, 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무엇이든 낳을 수 있다
검은 몸의 사내여 삼족오여
― 「물」에서
여성은 생명을 기르는 물인 호수와 바다로 혹은 부드러운 감촉을 지닌 능수버들로,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낳는 구멍(자궁)과 같은 성적 이미지로 변주된다. 남성은 물을 덥히고 태우는 에너지인 태양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검은 몸의 사내’는 세발까마귀의 화신이며 태양신을 의미한다. 물은 태양신 세발까마귀의 화신 ‘검은 몸의 사내’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와 그와 하나가 되어 활활 불타오르기를 갈구한다. 시인은 태양빛으로 ‘온몸이 숯처럼 검어진 사내’와 ‘고로쇠 수액처럼 아무리 먹어도 탈이 없는 물이 벌이는 섹스의 향연을 꿈꾸는 것이다.
이쯤해서 <물속의 불>을 통해 이대흠이 제기하려는 ‘달’이 무엇인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파탄에 가까운 에로티시즘을 환각적 언어로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 그런 환각적 이미지를 통해 꿈꾸는 세상 말이다. 아마도 주체와 타자가 튼실하게 화해하는 평화의 세상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넘치고 있는 폭력성 혹은 파시즘을 극복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여성성의 복원이다. 시인은 그것을 어머니의 언어와 몸에서 찾고 있다.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시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발이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 「동그라미」에서
‘아버지와 군인’으로 표상된 남성이 요구하고 명령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존재라면, 어머니는 가진 것을 ‘퍼주고’ ‘열린 구멍으로 다른 존재를 살리는 것을 쏟아내는’ 존재이다. 그런 어머니의 언어는 둥근 ‘ㅇ’처럼 ‘다른 것을 떠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남녀간의 진정한 교통을 넘어 사회적 의미를 지향하고 있다. 무등산 봉우리가 대구분지와 섹스하는 환상을 제시한 「철푸덕 철푸덕」이라든가, ’빨갱이 새끼와 반동 새끼가 등을 꼭 붙이고 잠을 자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연리지․3」에서 그 태도는 분명해진다. 그런 세상을 시인은 ‘꽃구슬 햇살이 쏟아지는 눈부신 배추밭‘으로 비유했던가. 태양은 빛과 에너지로 만물에 기운을 불어 넣는 존재일 때 온전한 아버지가 되며, 물은 존재를 감싸 안는 부드러움으로 만물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대흠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물과 불, 여자와 남성, 어머니와 아버지로 표상되는 세계가 상호 회통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그 극복을 위한 언어적 탐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현실을 음과 양의 코드로 단순화하는 이대흠의 방법론이 과연 유효한지를 묻는 질문을 잠시 유보하고, 그 격렬한 발화 속에 담긴 진정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박영근 혹은 ‘절벽’의 시-공간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는 지난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박영근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유고시집에는 시인이 생전에 펴낸 마지막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이후 잡지에 발표한 시들과 미발표작 「절규」를 포함한 4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에는 세상과의 지독한 불화가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안간힘의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 또한 그의 시적 주체는 자본의 미로를 걸으며 끝없이 절망하는 존재로 나타나지만, 그는 신산한 일탈의 삶 속에서 미학적 고투를 결코 멈춘 적이 없다. 그의 초기시는 노동 현실과 노동자의 실존적 삶을 다루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냉소와 체념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절망과 아픔을 체화하고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유고시집에 수록된 작품에는 좌절과 위기의 징후가 뚜렷하다. 이러한 정서는 대체로 겨울과 바람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허공」과 같은 작품에서 겨울은 일체를 얼어붙게 만들고, 바람은 ‘시간도 형체도 일순간에 소멸시키는 힘으로 묘사되고 있다. 차가운 겨울 하늘과 바람의 위력 앞에서 그는 “내안에 살아 흘러다니는/불티 몇점마저/놓아버리고 싶구나”라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은 보이지 않는다. 시적 주체는 물결이나 바람의 힘에 몸을 내맡긴다.
「폐사지에서․1」의 경우 뜨거운 재생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절망의 깊이를 내보인 것이다. 더구나 재생의 시간은 오늘이 아닌 먼 뒷날의 일이며, 재생의 주체는 나와 무관한 새로운 생명(‘젖먹이’)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그가 맞닥뜨린 좌절감을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보는 건 사금파리가 된 나의 문자들이다
절벽에 서 있던 시간들이 붙잡고 있던
그리움 하나
반쪼가리 몸뚱이로 비에 젖고
그리고 웬 주검이 저를 보내지 못하고 옛길에서 저렇게 완강하다
돌아가고 싶었다
이 폐사지를 건너
뜨거운 해와 바람과 물소리마저 사라진 뒤
밝아올 어둠의 자리
― 「폐사지에서․1」에서
시인이 폐사지에서 본 것은 유적도 역사도 아닌 폐허가 된 자신의 정신(문자)이며, 절망적 상황으로 내몰린 ‘반쪼가리’ 육체였다. 이윽고 그는 완강하게 절망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존재는 생명이 아니 ‘주검’이었으며, 그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자리는 이미 빛이 아닌 어둠의 공간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거기엔 뜨거운 해도 바람도 물소리마저 사라지고 없는 곳이다. 겨울 하늘을 형상화한 「허공」 역시 삶의 끝을 응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새들이 날아간 자리에/울음소리가 뜨겁게 얼어붙는다//내안에 살아 흘러다니는
불티 몇점마저/놓아버리고 싶구나/……/시간도 형체도 사라지고 없는 자리/바람이
허공을 뚫고 간다
겨울의 허공은 높이도 넓이도 없는 또다른 절벽이다. 그래서 화자는 겨울 하늘을 ‘가파른 절벽’으로 인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새들의 뜨거운 울음소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곳, 생의 의지를 얼어붙게 만드는 공간 앞에서 삶의 지속을 멈추고 바람의 생존방식을 모방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시인이 본 바람은 비록 ‘시간도 형체도 없지만’ 절망적인 공간인 ‘허공’을 관통하는 힘이었다. 위기와 절망 앞에서 허무와 대면하려는 심경의 절정은 몽골초원의 풍경을 담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너를 돌아보지 마라/다비/다비/돌아갈 곳을 찾던 슬픈 마음이/불꽃 한점 없이 저를 사르고/까마득한 허공의 새를 부른다”(「몽골초원에서․3」) 라든가, “형체도 슬픔도 없다/때가 되면 산 것들은 바람 속으로 돌아간다”(「몽골초원에서․4」)와 같은 대목은 절절하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감내해야할 운명에 대한 아포리즘처럼 숙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위기와 절망을 견디는 하나의 방식이다. 과거의 지속적인 삶을 불연속적인 미래에 대응시키려는 것일까? 그것이 자서전의 심리학인지도 모른다. 박영근이 「그방」이나 「이사」같은 작품은 자신이 살던 집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가히 시적 자서전이라 할만하다. 「그 방」은 네 번째 시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부평 4동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았던 집으로 ‘불의 시대’인 80년대 삶이 개괄되어 있기에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 방 용접불꽃에 먹혀 뜨거운 모래알이 구르는,
벌겋게 달아오른 쇳조각 같은 눈으로
문건을 읽었다 이 빠진 받침들과
시커멓게 뭉개진 활자들은 바로 세우고
읽고 나선 서둘러 아궁잇불에 태우던
한밤중, 어둠속으로 피세일을 나갔다 달빛은
골목 어귀에 소식지 위에 날을 세우며 떨고
보안등 불빛에 쫓기며 한바퀴, 또 한바퀴…… 돌아와
새벽시장 봉지김치에 라면밥 말아먹던, 방
(……)
나는 천천히 그 방을 빠져나온다
돌아보면 환한 대낮인데
한 사내가
부엌 바닥에서 어린 파를 다듬다가
불쑥 솟구치는 눈물을 떨구고 있다
‘그 방’은 아마도 유난히 샛골목이 많은 인천 부평 산곡동의 월세 단칸방 시절에 대한 회상일 것이다. 그곳은 개인의 아늑한 거처가 아니라 조직 활동가에게 전달되는 활동지침이나 선전 문건을 읽고 토론하는 아지트이며, 공장이나 주택가에 유인물의 배포를 준비하는 장소였다. 문건을 읽는 눈이 온통 불기운으로 가득하다. 눈은 ‘용접불꽃’이거나 ‘벌겋게 달아오른 쇳조각’으로 비유되어 있다. 또한 ‘달빛’과 ‘보안등 불빛’으로 표상된 감시의 눈길을 피해 밤새 ‘피세일’을 하고 돌아와 ‘라면밥 말아먹던 방’이다. 공단거리에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의 자취방에 불과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자 시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부엌 바닥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비록 그 비애와 슬픔이 궁핍 때문인지 아니면 실존적 고독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말이다.
「이사」(≪리토피아≫, 2006년, 봄호)는 2005년 가을 부평에서 남구 용현동으로 이사한 뒤에 쓴 작품이다. 「그 房」이 ‘불의 시대’인 80년대를 압축한 것이라면 「이사」 90년 이후의 부평 4동 시대를 압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화자는 이사 뒤에도 ‘낡은 집’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그는 옛집에서 시집을 읽고 저녁밥을 먹고, 원고를 쓰고 있다. 시에 나타는 ‘나’는 의식적 주체로 ‘사내’는 무의식적 주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시적 배치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옛집에 대한 미련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옛집이 달콤한 추억의 장소라는 뜻을 아닙니다. 오히려 호된 물세례로 대파국을 맞이한 곳이기도 한다. ‘사내’가 가꾸던 정원은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에 휩쓸려 파괴되고 만다. 원추리 꽃은 빗물에 떠내려가고, 고춧대와 토마토 줄기는 허리가 꺾였다. ‘장마’는 노아의 홍수처럼 장마는 시인의 가꾸어온 낙토는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 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하늘이 잠기는 장마’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주方舟를 마련하지 못한 시인은 기껏 “마당에 신문을 깔고 앉아,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수난을 견디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물결’이란 대체 무엇일까? 실제로 그가 살던 부평집의 지붕은 오래 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 비가 새기도 했지만, 80년대와 다른 형태로 교묘한 존재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틈만 나면 지적하고 있는, 삶의 전 영역에 넘쳐나는 물신주의, 혹은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침윤한 상품의 유혹, 이런 교묘한 적들이라면 감각과 언어만 가지고 있는 시인이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 즉 그의 절망은 문명사회의 욕망이 다른 형태의 삶을 꿈꾸기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점에 다다랐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또한 ‘욕망의 바깥’에서 바로 그 욕망에 길들어진 자신과 현실세계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숲길>, 254쪽) 박영근의 비극성은 절망과 고통을 자신의 몸에다 전가하고 있는데서 기인한다.
그런데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이라는 「이사」의 마지막 몇 줄은 그 고투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밤거리는 ‘광고 불빛’과 ‘마네킹들’로 가득한 ‘시간도 기억도 없는’ 공간이다. 화자가 마지막 거처인 집을 버리고 거리로 나선 것은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 수 있지만 시적 주인공이 ‘그’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오직 우리가 확인한 것은 시적 주인공이 집을 버리고 겨울밤 황량한 도시를 가로 질러가는 비장한 뒷모습이었다. 이 대목을 이르면 ‘이사’는 단순한 육신의 거처를 변경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예감처럼 들린다.
김창수
1958년 출생. 1987년 ≪문학사상≫ 신춘문예로 등단.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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