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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2007년 가을호) 서평/오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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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44회 작성일 08-03-01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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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서령,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실천문학사)

■권여선, <분홍 리본의 시절>(창작과 비평)


가부장제를 낙후시키는 여성적 글쓰기
오창은|문학평론가


1.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성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애국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 보다 더 급진적이다. ‘애국적 민족주의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불화하면서도 공모관계에 있지만,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 비판’은 기성의 남성적 질서와 화해 없이 갈등한다. 체제의 근본을 회의하는 것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에서 ‘미시적 변혁의 핵심적 사안’일 수 있다.

문화권에 따라 일부다처제, 혹은 모계적 전통이 지속되는 곳이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일부일처제는 가족 질서의 합리화를 상징하는 문명화적 표징이었고, 가부장제의 순화로 간주되어 우월한 지위를 획득했다. 성적인 방종보다는 일부일처가 보다 더 고상한 계약관계로 보였기에 근대적 대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평생 독신을 유지한 성직자들이 고귀한 존재로 인정받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족 구성을 대안으로 생각하면서도, 가족을 거부하는 것에 ‘성스러움’을 부여했던 것이다. 성적 순결에 대한 관념은 특히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성의 정절을 유독 옹호했던 역사적 국면의 이면에는 남성 지배권력의 억압적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그 힘은 아직도 강고하다. ‘성적 순결’과 ‘성의 합리화’라는 이중적 가치가 가족 이데올로기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인문학이나 사회학은 ‘가족’ 자체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영역에서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이다.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은 인간의 보편적 성정性情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결혼한 남녀가 다른 이성과 성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혼이 초래한 모순인가, 아니면 사랑이 변하는 것일까? 학자들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결합은 근대성의 한 특징으로써 ‘중산층의 발생’과 더불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낭만적 사랑이 성적 매력에 기반하고 있다면, 각자가 가진 매력의 정도에 따라 사랑의 성공 가능성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 개인의 불행은 사랑의 실패로 인한 고립과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혼과 사랑이 일대일의 관계로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이성간에 해결 불가능한 곤란과 위험이 발생한다. 지금도 ‘낭만적 사랑의 환상’이 초래한 비극은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다. 이렇듯, 사랑은 이성간의 평등을 기초로 하고, 결혼은 사회체제의 기초단위에 편입되는 것을 전제한다. 연애관계에서는 평등이 지속될 수 있지만, 결혼 제도 속에서는 남편과 부인 사이에는 사회문화적 타협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남편의 권위를 용인하고 마는 아내의 선택은 사회문화맥락 속에서 의식․무의식적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되었던 것이다. 이는 ‘가부장적 권력’이 단지 남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의 작동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자기 경험과 지배 언어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했다.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 관계를 분열적으로 인식하는데서, ‘자기언어’의 탄생이 이뤄진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통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주류적 삶의 형식’에 끼워 맞춰지기를 거부한 이들의 고뇌이기도 하다.

김서령의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실천문학사, 2007)와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창작과 비평, 2007)은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성’을 드러낸다. 김서령의 소설은 외부로 향해 튕겨 나감으로써 다시 돌아와 성찰의 근거를 마련하고, 권여선의 소설은 내면을 집요하게 파헤침으로써 외부를 부정적으로 그려낸다. 이 두 개성적인 작가가 여성성을 발현하는 방식을 통해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의미화할 수 있으리라.


2. 부도덕한 관계에 대한 상상

김서령의 소설은 풍부한 이야기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은 단선적인 서사로 구성되는 경우가 드물다.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속 깊은 사연을 갖고 있으며, 소설 속 화자는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스스로의 아픔을 되새긴다. 그의 소설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가 하면, 각각 다른 두 이야기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얽히기도 한다. 이러한 다채로운 이야기성이 김서령 특유의 깔끔한 문장과 반죽되어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독특한 것은 그의 소설이 한국 소설의 최신 유행인 경쾌 발랄함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릿한 슬픔’으로 독자의 감성을 후비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한 평자는 김서령 소설이 의도된 ‘신파성’을 고집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서령 소설 속에 담긴 ‘아릿한 슬픔’은 감정의 과잉이나 과장된 포즈와는 다르기에 ‘신파’로 호명할 수는 없다. 그의 소설에는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그래서 삶의 진실이 담긴 ‘실재적 슬픔’이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슬픔의 정조를 여성성의 맥락에서 훑어 읽으면 그 심연에 도달할 수 있다.

단편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에 수록된 소설들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대부분 상처로 짓물러 있다. 어머니들은 구차한 현실에서 한발 물러서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 간절한 열망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안쓰러운 형상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야매’로 뜨내기 미용일을 하다가, ‘꽃너울 머리방’이라는 초라한 가게를 차리자마자 망하는가 하면(「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판장 고기 짜개는 일만은 죽어도 못하”(100)겠다고 우긴 끝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내지만, 이 때문에 결국 가출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무화과잼 한 숟갈」) 가족을 버리고 사라진 어머니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방학이니 이모 집에 가서 며칠 놀다 오라”(48)고 해 놓고는 사라지기도 하고(「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커다란 루비가 박힌 만 오천 원짜리 반지만을 남긴 채 가출하기도 한다.(「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그리고 유부남을 사랑해 ‘나’를 낳은 후 나에게 “나처럼 살게 하느니 너를 죽여버릴 거야”(250)라고 절규하는 어머니(「사과와 적포도주가 있는 테이블」)의 모습도 신산辛酸스럽다.

김서령 소설 속 어머니는 가난 때문에 가족을 버린 일그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이들은 현모양처도 아니고, 고난을 감내하면 꿋꿋이 자식들을 키워낸 장한 어머니도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부도덕한 여성들은 ‘모성애’를 배반한다.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와 욕망에 충실한 창녀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머니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게다가 그들의 가출이 상쾌한 해방이기보다는 구질구질한 선택이라는데서 소설은 사회적 의미망과 연결된다. 작가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어머니로 한정하려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저항한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가족을 사수하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어머니의 가출로 무력한 명제가 되고 만다. 가출하는 어머니가 저항의 역할 모델일 수는 없지만, 사라진 어머니의 자리에 새로운 여성상을 구성할 수 있다. 소설 속 화자는 ‘떠나버린 어머니’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의 선택을 안쓰러워하고, 그렇게 촉발된 모순된 감정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떠남으로 해서 오히려 위태로워졌을 어머니에게서 여성의 삶이 감당하고 있는 애잔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머니의 가출을 개별적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연대의식을 배면에 깔고 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김서령의 고투는 다시 시작된다.

김서령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국 사회를 떠나있거나,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비껴서 있다. 그래서 배경 또한 호주의 브리즈번, 필리핀의 마닐라, 그도 아니면 지방 소도시나 변두리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소설 속 화자들은 과거의 상처를 기억 속에서 지우거나 치유하기 위해 멀리 떠났다가 되돌아온다. 사 년만에 브리즈번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만나려 했던 옛 애인들은 이미 세상을 뜬 다음이고(「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이혼녀로 한국사회에서는 버티기 힘들어 영주권을 얻기 위해 호주에서 고투하지만 상처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무화과잼 한 숟갈」) 황폐화된 해수욕장 횟집 부부는 대리모가 되어 쌍둥이를 임신하지만 아이들은 유산 위기에 처하고(「쌍둥이들의 방」), 지방 소도시 다방 레지와 현역 군인의 사랑은 가족의 반대로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역전다방」) 산부인과 수련의이자 재래시장의 부잣집 둘째 아들인 남자와 가게의 점원이자 고아인 여자의 사랑도 예고된 파국으로 이어진다.(「작은 토기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경제적 계급이나 사회적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지 못해 사랑에 실패한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와 「역전다방」도 인상적이다. 특히,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의 결말부에 천애고아가 된 ‘나’를 감싸안은 태원이 가족의 따뜻한 위로의 정서는 계급적 연대를 연상시키는 진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들의 심연에는 어떤 사회적 관계가 작용하고 있을까? 여기에 김서령 소설이 자아내는 ‘아릿한 슬픔’의 비밀이 있다. 때로는 신파나 통속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이 슬픈 정조는 ‘관계의 파탄’에 기반해 있다. 흔히, 남성은 사회적 성취를 위해 관계망을 형성하지만, 여성은 ‘관계 자체’를 중시한다고 한다. 남성은 독립적 자아로 성장하도록 교육받은 반면, 여성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도록 사회화되어 있다. 여성은 애인으로서,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호명되어야 자기 충족의 경험을 하게 된다. 김서령의 소설은 이러한 제도적으로 규정된 관계를 일탈한다. 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안정적 관계를 여성 스스로 이혼․혼외 성관계․불임 등을 통해 교란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 화자가 등장하는 두 소설에서만 부부관계가 서사의 중심으로 형성하지만, 그 또한 강한 불안감을 내장하고 있어 정상적 관계로 비춰지지 않는다.(「고양이와 나」․「연가」) 젠더적 입장에서 볼 때,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의 태도는 본성이라기보다는 사회화의 결과물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약소자일 뿐이다. 보통, 남성이 남녀관계의 주도권을 지니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노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그 관계는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여성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를 고스란이 감내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김서령이 강고한 여성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여성의 입장에서 서사가 전개되기에 ‘계급성’과 ‘여성성’이 자연스럽게 버무려져 있다.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노동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족 관계 내에서 규정된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한 여성에게 가하는 사회적 보복은 가혹하다. 소설 속에서 여성들이 이민을 가려하거나, 힘겨운 감성 노동을 감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서령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직업은 케이블 방송의 홈쇼핑 프로그램의 쇼 호스트, 호주 유학전문 커뮤니티 게시판 관리자, 헤어 디자이너, 현대판 씨받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리모, 다방 레지, 호텔리어 등이다. 이들 직업군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노동 시장 내부의 위계화된 질서 속에서 감성노동을 착취당한다. 가족 내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성역할’을 사회에서 대행함으로써, 임노동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가족 이데올로기로 벗어나려고 위험한 결단을 내린 여성들이 오히려 사회의 하층부에서 더 험한 감성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에게 가하는 역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서령의 소설은 여성의 적으로 가상되는 대상에 대해 쏘아대는 직격탄이 아니라, 오발탄인 듯 곡선으로 날아가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의 중심을 파열하는 곡사포탄이다. 그의 소설은 여성주의적 입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여성을 둘러싼 복합적 관계를 은근히 내비친다. 더불어, 소설 속 여성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한국 사회 곳곳에 포복해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파헤치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소설이 ‘슬픔의 정조’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적 상처의 근원과 구조적 원인,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그의 소설은 오히려 여성주의의 입장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제 그의 소설은 여성이 어떻게 계급과 민족, 그리고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얽혀 있는가를 보여줄 때이다. 개별성을 보다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오히려 보편성이 더 명료해지는 경지에 김서령의 소설이 가 닿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3. 불온한 혀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은 진물을 흘리며 농익어 가는 복숭아처럼 아찔한 향기를 발산한다. 스스로의 충만함을 못 견디고, 표피를 짓뭉개며 뿜어져 나오는 진물은 얼마나 무용한가? 적절한 해소의 시기를 놓친 후, 뒤늦게 제 흥에 겨워 분출하는 향기는 얼마나 아찔한가? 이러한 무용함과 아찔함이 권여선의 소설 속에서 위태로운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를 매혹시킨다. 김서령의 소설이 외부의 이야기를 안으로 갈무리하며 서사적 밀도를 높이는 형식이라면, 권여선의 소설은 내부의 격정이 폭발해 외부로 비어져 나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작가는 모두 여성성을 발현하며 서사의 소용돌이를 깊게 파고든다.

권여선은 ‘불편한 여성’, 혹은 ‘불온한 여성’을 개성적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소설 속 화자나 중심인물은 대부분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독신 여성이다. 로라는 시장통 근처의 4층 옥탑방에서 혼자 기거하며 면접만으로 신입생을 뽑는 K전문대 아동학과에 다니고(「가을이 오면」), 서른에 혼자 사는 연희는 신도시로 이사와 철수선배 부부를 만나 일상의 낭비를 경험하는가 하면(「분홍 리본의 시절」), 대식증으로 고통받는 미혼여성인 ‘나’는 거식증을 앓는 친구 N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친다.(「반죽의 형상」) 서영은 반신불수가 된 김교수의 아파트에 들려 의미없는 실갱이 속에서 논문 지도를 받고(「약콩이 끓는 동안」), 혼자 사는 우정미도 ‘괴물’과 같은 집요함으로 주변 사람을 질리게 한다.(「문상」) 「위험한 산책」에 등장하는 ‘그녀’만 결혼한 여성으로 나오지만, ‘그녀’ 또한 위태로운 혼외 성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독신 여성’을 위험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들은 혼자 산다는 자체로 비정상적인 반가족주의자이고, 자발적 독신인 경우는 반체제적인 인물로 규정되기까지 한다. 그 스스로 자유롭고 발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회 시스템은 이들을 ‘유혹하는 존재’로 이단시한다. 단편 「분홍 리본의 시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오연희는 선배인 철수 부부와 허물없이 교재하며, 맛집들을 순례하고, 요리 경연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다 오연희는 의도하지 않게 그들 부부가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선배인 철수는 연희와 만나면서도 동시에 수림이라는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알게 된 철수 선배의 부인은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이라는 독한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에 반응하는 작가의 태도가 충격적이다. 철수 선배의 부인에게서 터져 나온 말인지 오연희에게서 터져 나온 말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다음과 같은 거침없는 말의 핏덩이들이 낭자하게 퍼져 나간다. 그것은 불온한 혀에서 누설된 무의식의 언어이기도 하다.


나쁜 것. 천한 년. 밤이나 낮이나 그짓 생각밖에 안하는 새대가리. 남자하고는 그짓밖에 할 줄 모르고 여자하고는 그짓 얘기 밖에 할 줄 모르는, 위아래 입이 죄다 싸기 짝이 없는 파렴치한 계집. 네가 진정 가슴을 치고 울어본 적이 있느냐. 남자나 실연 때문이 아니라 네 하찮음, 네 우열함, 네 교정되지 않는 악마성 때문에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삶을 저주해본 적이 있느냐.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죽음밖에, 그 무서운 백지의 차원밖에 남지 않았음을 절감해본 적이 있느냐. 하루하루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지옥인 시체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느냐.

― 75쪽


원색적인 언어 사용에도 불구하고, 인용문은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문제제기를 해내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생물학적 본질로 규정할 때, 여성은 출산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마샬(B.L. Marshall)은 이와 관련해 여성을 ‘재생산(출산) 기능에 매여 있는 영원한 타자’라고 명명한 바 있다. 작가는 이러한 성기 중심의 태도에 대해 직접적 비판을 가하면서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진 ‘자율적 자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성에게 특별히 각인되기 위해”(76) 추억과 취향까지도 구성하려드는 여성은 ‘영원한 타자가 아니라 절대적 노예’일 뿐이다. 남녀를 떠나 주체성은 존재의 극단을 생각할 때, 절대 고독의 상태에 자신을 내던질 때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그래서 권여선은 ‘우아한 것들’에 대해 공격적이다.

여기서 다시 권여선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그녀들을 대부분은 ‘다른 그녀들’과 갈등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을이 오면」에서 로라는 여름이면 이마와 뺨에서 진물이 흐르는 알레르기에 고통받고 있으며, 이는 일종의 신경증으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로라가 대결하려고 하는 세계는 “변함없는 애교나 새침, 우아 같은 것”(32)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세계’다. 로라는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태도를 가식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어머니의 가식은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형성된 것이기에 어머니는 ‘타율적 주체’일 뿐이다. 주체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면 ‘텅 빈 정체성’만 남게 된다. 「반죽의 형상」에서 ‘나’와 대립하는 N의 형상도 마찬가지다. N은 ‘나의 타자이면서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N은 “불안을 장신구처럼 매달고” 사는 스타일로, “남자들과 사소하게 다툰 일을 심각하게 과장하거나 그들의 전화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체크”(171)하며 일상을 견딘다. N 또한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반응하는 주체’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문상」에 등장하는 우정미가 문제적 인간이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머릿속에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고 은밀한 접촉을 당한 듯 불쾌해지는 질감”(179)을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그런데도, 우정미는 소설 속 ‘그’에게 ‘안온한 사형대’ 혹은 ‘가장 끔찍한 보물’ 같은 형용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아버지를 둔 우정미는 ‘우리들의 죄가 만들어낸 괴물’이며,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을 배반하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들의 죄’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모 속에서 우정미 같은 여성을 분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분열적 인식이 ‘여성들 간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첫걸음일는지 모른다.

초기의 여성주의 이론은 지배자로서의 남성과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을 대립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주의자들은 견고한 남성 지배체제를 가시화하기 위해 모든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여성들이 착취당해 왔으며, 그 시스템 또한 정교하게 다듬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여성을 ‘우리’로 묶음으로써 공통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이에 대응해 남성을 ‘공동의 적’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전투적 시도는 ‘여성들간의 차이’를 간과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성의 정체성은 국민국가, 민족 정체성, 계급,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형성하며 구성된다. 여성들간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우리’라는 보편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서도, 보편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남성을 타자화해 발화하는 것보다도, 남성성이 발견하지 못하는 차이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권여선은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의 텅 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형상을 비판한다. 그들은 어머니이기도 하고, 짝패와 같은 친구 N인가 하면, 수림이 같은 연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갈등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이데올로기적 비판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데올로기는 감염의 효과를 갖는다. 권여선의 소설이 ‘감염의 서사’와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가을이 오면」에서 로라는 어머니의 우아한 태도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히스테리를 부리고, 「문상」에서 화자인 ‘그’는 우정미가 내뱉었던 “썩을”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곤 한다. 「반죽의 형상」에서 ‘나’와 N은 “한덩어리의 반죽으로 두 형상을 빚은” 것처럼 서로에게 방어적이다. 「위험한 산책」의 그녀는 술이 취하면 남편의 기이한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는 무의식적 감염자들이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보편의 해체에 도달 할 수 없다는 태도가 이러한 ‘감염의 서사’ 속에는 자리하고 있다. 권여선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통해 스스로를 살피라고 조언한다. 이러한 권여선의 담화는 삶의 자기 결정권을 지닌 ‘자율적 자아’에 대한 열망에 기반해 있다.


4. “공략하기 보다 낙후시켜라”

여성학자 조한혜정은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것은 순화시켜 이해하자면, 가부장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이 아니라 감성’으로 저항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가부장적 가족이데올로기의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훈육된 성역할로 인해 감성적 표현을 억제해야하는 남성은 얼마나 불행한가. 오로지 노동 속에서만 삶의 가치를 구현하려다, 노동시장에서 퇴출 당한 남성의 절망감은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게다가, 이른바 정상적인 가족 구성을 통해서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견고한 가족주의’는 얼마나 무책임한가.

김서령과 권여선의 소설은 상처와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현실을 내파하려 한다. 김서령이 약소자로서 여성의 위치를 감지하고 고통과 슬픔을 버무려 감동적 서사를 구성하려 했다면, 권여선의 중산층 여성의 내면을 독하게 파헤침으로써 ‘자율적 자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김서령과 권여선의 소설은 1990년대 여성작가들이 ‘혼외 성관계를 충격적으로 서사화’ 함으로써 남성들의 세계를 공략했던 것과 대비된다. 신경숙․전경린․김형경 등은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혼외 성관계’를 충격적으로 서사화했다. 이들은 가족 제도 바깥에서 이뤄지는 성애의 행위가 오히려 ‘해방적 열정’과 맞닿아 있다고 표현했다. 이에 비해 김서령은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한 여성의 상처를 애절한 감성으로 표현한다. 김서령의 소설에는 여성성과 더불어 계급성도 버무려져 있어 실재적이다. 그는 한국 사회를 이탈해 나간 여성들, 중심에서 벗어난 소도시 여성들의 삶을 통해 여성의 약소자적 위치를 포착해 냈다. 이는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여성의 삶의 왜곡하는가에 대한 문화적 드러내기로 이어져 있기에 가치가 있다. 권여선은 1990년대 여성작가들의 작업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그의 소설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의 소설처럼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의 내적 고민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성들 사이의 구체적 차이를 통해 ‘젠더 질서’(남녀의 이분법적 우열관계로 구성된 질서)를 성찰하게 한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성관계를 벗어난 ‘자율적 자아’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이다.

김서령과 권여선의 작업은 여성성의 외부와 내부를 표현함으로써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낙후시키는 방법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그 고통 속에서 분열된 주체는 관계 속에서 다른 ‘나의 가능성’(존재의 전이)을 감지한다. 분열된 주체 속에는 ‘소통 가능한 타자’가 자리할 수 있다. 여성적 글쓰기는 차이를 일반화하기보다는 차이의 분열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래서 정체성이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는 것이리라.

문제는 감성의 적극적 표현이 어떻게 소통과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느냐이다. 거대한 적을 남성 일반으로 환원하지 않고, 보편적이라고 규정된 기성관념을 내파시키는 ‘절실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통해 유지되는 가부장적 일상에 균열이 가해질 때, 행복의 조건은 다원화될 수 있다. 보다 덜 위계적이고, 보다 덜 경쟁적인, 그래서 남성과 여성이 보살핌의 윤리를 구현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훨씬 더 남성적 권력이 낙후되어야 한다. 이는 경쟁의 논리에 대한 저항이며, 이른바 반생태주의적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 자아의 주체성을 향한 투쟁을 지속하면서도 공동체의 윤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여성적 글쓰기’의 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창은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평론집 <비평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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