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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권두칼럼/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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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13회 작성일 08-03-01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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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스펙터클 사회에서 살아남기
프랑스의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다. 그가 독특하게 개념화 한 스펙터클은 직접적으로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이 표상으로 물러나는, 거꾸로 뒤집혀져 있는, 더 이상 직접 파악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미지들을 바라봄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는 세계이다. 삶의 질이 빈곤하면 빈곤할수록 스펙터클에 대한 열망은 커져간다. 스펙터클에 의해 자신의 빈곤한 실제 삶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스펙터클에 의해 포섭되어 자신의 직접적 삶을 잊고 온갖 표상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사회가 스펙터클의 사회일 터, 1960년대 말에 제기한 드보르의 테제는 어쩌면 디지털 시대라고 호명되는 현재 상황에 더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스펙터클에 대한 열망에 발맞추어 자본은 성대한 스펙터클을 마련해 왔다. 영화나 온갖 공연 예술의 블록버스터화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상품 역시 풍성한 볼거리를 동반한 광고를 통해 판매된다. 자본은 미세한 스펙터클도 역시 만들어낸다. 인터넷을 통해 보급되곤 하는 스펙터클이 그 예다. 우리는 골방이나 PC방에서 넷 상에 깔린 스펙터클을 이리저리 찾아보며 가끔 마음에 드는 이미지의 상품을 구매하면서 소일하고 있지 않는가? 
자본은 스펙터클을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흡수하고 화폐를 획득한다. 이렇듯 자본이 스펙터클을 통해 사람들의 삶과 욕망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상황을 맑스가 일찍이 개념화 한 ‘자본의 실질적인 포섭’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자본이 풀어놓은 스펙터클 속에서 우리는 그것에 끌리고 그것을 선택하여 구매하고 그리하여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삶을 잃어간다. 이렇듯 자본이 생산하는 스펙터클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삶을 되찾기 위한 방도는 영영 찾기 힘든 일일까? 
기 드보르와 르페브르라는 동일한 스승을 둔 보들리야르 같은 사람은 “그렇다”라고 답하고 특유의 허무주의로 나아간다. 기 드보르가 가담하고 있었던 상황주의자 그룹은 68혁명을 거치면서 스펙터클 자체를 파괴하는 아방가르드적인 정치 행동으로 나아갔으나 곧 해산되고 만다. 사실,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스펙터클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일지 모른다. 스펙터클 역시 공기와 같아서,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주의자들이 요구한 스펙터클의 철폐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 모른다. 스펙터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 권력이 사람들의 삶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통제하기 위해 스펙터클을 조작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조작된 스펙터클을 해체하고 삶의 능동성을 끌어낼 수 있는 스펙터클의 생산이 자본의 스펙터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제국시대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다중들의 시간」(≪자율평론 22호≫, 2007년 번역 수록)에서, 제노바의 반G8 시위 동안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해 시위대를 테러집단으로 매도한 경찰에 맞서, 다중이 더 많은 카메라를 이용해 ‘경찰-암살자’라는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언급한다. 그는 이에 대해 “다중은 자신들의 이미지 생산 능력으로 기호들의 추상을 반항적이게 만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문학과 예술이 여전히 저항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이러한 대안적 스펙터클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 한국 문화는 스펙터클화가 더욱 넓고 깊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에 ≪리토피아≫ 2007 겨울호는 문학, 영화, 연극 분야의 스펙터클화에 대해 조사하고 진단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최강민은 요즈음 발표되는 소설이 어떻게 스펙터클화된 문화를 비판하고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 근대성과 스펙터클의 관련성 및 스펙터클의 특성을 제시한 후, 한국 소설이 그러한 스펙터클의 특성들을 어떻게 낯설게 하여 문제화하고 있는가를 그는 이 글에서 풍성하게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스펙터클을 비판하는 스펙터클한 소설들이 도리어 스펙터클에 포섭될 위험에 대해서도 그는 지적하고 있어서 비평적 균형을 잃지 않는 미덕을 보여준다.  
송효정의 글은 디지털 영화의 등장으로 영화의 스펙터클성이 더욱 현저하게 되었고 영화 기능에 있어서 질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논증하고 있다. 디지털 영화는 ‘찍는 영화’라기 보다는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그리는 영화’이며, 그래서 자유자재로 화면을 구성해낼 수 있기에 서사보다는 스펙터클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디지털 영화는 19세기 말의 만화경과 같이 일종의 환각 체험으로 관객을 이끈다고 한다. 하지만 만화경은 관객들에게 심령적 체험을 가져왔다면, 디지털 영화는 표면적인 이미지들이 주는 쾌락만 제공할 뿐이라고 그는 부연한다. 유인경의 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 공연 예술-특히 뮤지컬-의 스펙터클화에 대한 현장 보고서이다. 이 글을 통해, 독자는 한국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의 스펙터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또 증대되어 왔는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펙터클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이 스펙터클의 환경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대면하며 더 나아가 대안적인 스펙터클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본에 삶을 포획당하지 않기 위한 창작자 및 수용자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이 특집의 글들이 그러한 수용 및 창작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 이성혁(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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