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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특집/최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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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58회 작성일 08-03-01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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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스펙터클이 아니다
최강민|문학평론가



1. 시몬과 스펙터클 환상의 양면성
여러분, 시몬을 아시나요? 모르신다고요. 어허, 이런 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 시몬을 모르시다니. 당신은 분명 세상사에 둔감한 존재가 분명하오. 지금 즉시 시몬이 누군지 네이버로 검색하기 바라오.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 '시몬(simone)'(2002)에서 ‘시몬’은 컴퓨터가 창조한 사이버 여배우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인 ‘시뮬레이션 원(simulation one)’의 약어이자 사이버 여배우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인 영화감독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 분)는 유명한 여배우를 섭외하지 못하자 사이버 프로그램을 통해 완벽한 미모의 여성 ‘시몬’(레이첼 로버츠 분)을 창조해 영화를 제작한다. 시몬은 실재가 아닌 빅터 타란스키의 욕망이 주입되어 탄생한 가공의 이미지인 것이다. 사이버 여배우 시몬이 주연한 영화가 대박이 나면서 시몬은 더 이상 상상적, 환상적 존재가 아닌 시뮬라크르한 실재가 된다. 가상의 존재인 시몬을 실재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감독은 더 많은 연출된 거짓말을 생산하고, 이 거짓말은 시몬을 더욱 더 확실한 실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타란스키의 욕망에 의해 탄생한 스타 시몬은 점차 타란스키를 배제한 채 홀로 존재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쭉쭉빵빵의 시몬은 영화만이 아니라 스펙터클 환상이 번성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한다. 스펙터클한 시몬은 단순히 시각성의 이미지만을 말하지 않는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시몬은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적 논리가 압도적인 현실 세계를 반영한 상징적 기호인 것이다.
스펙터클(spectacle)은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은 거대한 장관을 보통 의미한다. 스펙터클이 창조해 내는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거대한 볼거리로서의 환상이다. 인간의 결핍된 욕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볼거리라면 스펙터클 환상(또는 이미지)이 생성되는 최적지이다. 근대 이후 스펙터클의 환상을 주도적으로 창조한 것은 ‘계몽주의, 합리적 이성, 근대성,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문명화’ 등의 항목이었다. 이것에서 보듯 스펙터클의 환상이 반드시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스펙터클 환상은 세계에 대한 진보적 낙관 속에 인류 역사를 발전시킨 면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20세기 후반 들어 스펙터클 환상은 거대담론보다 상품성과 관련되면서 부정적 의미로 많이 유통된다. 근대가 꿈꾼 스펙터클 환상으로서의 유토피아는 사라진 채 환멸에 가득 찬 디스토피아의 현실이 우울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스펙터클이라는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분열한 채 상품 소비적, 일시적 관계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은 기의가 아닌 기표라는 이미지이다. 기표는 20세기 들어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불안정한 새로운 기의를 낳고, 그것은 스펙터클 이미지의 원더랜드(wonderland)로 초대하는 중요 통로이다. 이미지가 대량생산 되고 대량소비 되는 스펙터클 사회는 실제적 체험이 아닌 추상적 이미지가 지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펙터클과 소설은 궁합이 잘 맞는 천생연분보다 불편한 관계를 형성한다. 스펙터클의 이미지는 순차적이 아니라 영화에서 보듯 동시적으로 일순간 존재에게 압도적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문자매체의 특성상 문학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소설은 묘사나 서술을 통해 거대한 볼거리를 표현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시간을 소요하게 만든다. 스펙터클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빠른 속공인데 비해, 소설에서 보여주는 스펙터클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느린 지공이다. 더욱이 영상매체는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만, 문자매체인 문학은 영상에 비해 추상적이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스펙터클의 이미지 표현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소설은 영상매체와 다른 방식으로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소설은 영상매체에 비해 일시적 재현 능력은 뒤떨어지지만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의 틈을 상상력으로 메워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영화만큼 이미지를 구체화 할 수 없다는 소설의 한계성은 오히려 스펙터클의 환상을 만드는 데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또한 소설은 영상매체보다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지닌 다양한 층위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특히 (본격)소설은 스펙터클의 상처와 그늘을 드러내는 성찰의 서사에 있어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자매체와 영상매체는 각기 고유의 영역을 바탕으로 상호 보완적인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200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소설에 나타난 스펙터클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탐색이다.
이제, 시몬을 아시겠다고요. 다행입니다. 그럼, 시몬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죠. 카운트다운 돌입.

2.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과 근대성
봉건주의 시대가 종료되고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꿈의 실현을 위해 도시로 몰려갔다. 대규모 인구의 유입은 대량생산과 거대 소비시장의 생성을 의미한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은 수공업시대를 마감하고 공장의 기계제공업을 도입해 상품의 대량생산 시대를 연다. 대지 위에 수직으로 우뚝 선 공장의 굴뚝은 신(또는 자연)과 귀족에게 종속된 질곡의 삶을 끝내고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표상했다. 밋밋했던 평원에 우뚝 선 기계식 공장과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가는 고층건물은 근대성이라는 환상을 대규모로 유포했던 것이다. 서구의 근대는 계몽적 이성에 대한 무한 신뢰 속에 인류의 장밋빛 발전을 낙관한다. 문명의 이기인 사진기, 전신 · 전화기, 기차, 비행선, 비행기, 항공모함 등도 위대한 인간을 표상하는 객관적 상징물로서 거대한 스펙터클의 환상을 만든 주역들이었다. 스펙터클한 근대성의 환상에 도취된 서구인들은 아직 근대화에 이르지 못했던 비서구인들을 ‘문명/야만’이라는 이분법적 틀 속에서 야만으로 규정했다. 서구인들은 문명화의 사명을 빙자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했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막강한 군사력과 근대의 문명 이기를 앞세운 서구인의 공세 속에 비서구인들은 근대에 대한 매혹과 불안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갖게 된다. 구한말 조선도 1876년 반강제의 개항 속에 서구적 근대와 조우하게 된다. 
신경숙의 장편 '리진'은 19세기말 조선 궁중의 무희로서 주한공사의 아내가 되어 프랑스 파리로 간 리진의 일생을 통해 근대성의 다양한 측면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방점은 구한말 조선보다 거대한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프랑스 파리에 찍혀 있다. 프랑스 주한공사 콜랭은 조선 궁중에서 아름답게 춤추는 무희 리진의 이미지에 매혹된다. 콜랭이 리진에게 매혹된 것은 시각적 스펙터클의 이미지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콜랭은 왕의 여자인 궁녀 리진과 일정한 거리로 분리되어 있고, 이 거리는 스펙터클적 환상을 키우는 조건이 된다. 조선에서 리진은 무희로서, 콜랭은 이방인으로서 이국적인 엑조티시즘을 통해 조선인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당시 조선에는 콜랭과 같은 서구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납치해 간다는 괴소문이 돌았는데, 이것은 서구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안의식이 낳은 산물이다.
조선에서 볼거리로서 공통점을 지녔던 리진과 콜랭은 함께 파리로 떠난다. 아시아의 변방인 조선 출신의 리진은 파리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당시 프랑스 파리는 거리를 중심으로 봉마르셰백화점, 루브르 박물관, 대성당, 모르그, 오페라 극장 등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넘실거렸다. 특히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죽은 시체마저도 유리 진열장에 전시해 볼거리로 만드는 ‘모르그’를 선보인다. 거리에 넘실거리는 볼거리는 이것을 천천히 구경하는 만보객을 등장시켰고, 리진도 이 만보객이 되어 파리의 거리를 감상한다. 만보객은 근대적 볼거리를 통해 근대적 문명이 제공하는 환상에 도취된 존재이다. 파리의 근대적 볼거리는 문명화 되지 못한 조선의 현실과 비교되어 리진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파리는 볼거리라면 모두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포식성을 드러낸다. 볼거리는 곧 돈인 것이다. 봉마르셰 백화점의 사장 부인은 리진이 제작한 이국취향의 부채를 백화점의 상품으로 탈바꿈시킨다. 리진은 파리에 와 근대적 풍경에 매혹되었지만 점차 자신은 파리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자괴감에 휩싸인다.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리진은 보는 주체인 구경꾼이라기보다 보여지는 타자인 볼거리로 취급된다. 특히 서구보다 열등한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도시는 구경꾼들로 이루어졌다.
문만 열고 나가면 볼거리투성이였다. 리진도 파리의 구경꾼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건축물이나 전시물이나 출판물, 사람들까지도. 물론 파리 사람들에게 자신이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는 것도 리진은 알았다. 어딜 가나 뭇 시선의 대상이라는 것을. 조선에서 춤을 익히기 시작한 다음부터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리진이었다. 춤추는 리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탄이 함께 했다. 그러나 대도시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엿봄만 있었다. 리진은 자신이 영원히 파리 시민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엿보는 그 시선에서 어렴풋이 알아차렸다.(중략) 구경하길 좋아하는 도시 사람들에게, 파리 거리에 단 한 사람밖에 없는 조선 여인 리진은 새로운 구경거리였다. 
― '리진', 2권, 68-69쪽

조선에서 리진은 다양한 이름인 애기야, 은방울, 진진, 서나인, 이화로 불려진다. ‘리진’이라는 이름은 조선에서 파리로 떠나기 전 왕이 자신의 성을 하사해 만든 이름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이름이었던 ‘리진’은 근대성의 도시 속에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간다. 서구적 근대성의 세계를 알아가면 갈수록 그것에 미달한 열등한 자신을 자각했던 것이다. 서구적인 미의 기준으로 보면 리진의 육체는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프랑스에 와서 성대한 결혼식을 열겠다는 콜랭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다. 리진은 프랑스에서 법적으로 콜랭의 부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파리에서 살지만 프랑스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선인도 아닌 경계선의 리진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 몽유병에 걸린다. 리진의 몽유병은 파리에서 주체로 서지 못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서글픈 퇴행의 전략이자 이전 세계인 고향으로 차라리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분출이다. 운 좋게 조선에 돌아온 리진은 콜랭과 강제로 헤어져 궁녀의 위치로 원대복귀 된다. 근대의 자유로운 세계를 맛본 리진에게 가부장적, 봉건적 굴레에 다시 종속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다. 조선 최초의 신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리진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왕비의 비극적 타살 앞에 절망한 채 자살함으로써 ‘근대/전근대, 보는 주체/보여지는 타자, 구경꾼/볼거리, 우월/열등, 지배자/피지배자’ 사이의 갈등과 분열에서 도피한다. 리진은 구한말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했던 것처럼 스펙터클의 주체로 서지 못한 채 타자로 짧은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근대는 매혹적인 스펙터클 환상을 만들었지만 그 혜택을 보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서구 백인, 남성, 부르주아가 시선의 권력을 쥔 응시자였다면 동양인, 여성, 프롤레타리아는 볼거리인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가 편혜영은 계몽적 합리성을 내세운 근대가 지닌 문제점을 「만국 박람회」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박람회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성취한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진보, 그리고 장밋빛 미래를 볼 수 있는 거대한 볼거리의 축제이다. 각 나라들은 박람회에 전시되는 일상용품이나 문화용품을 통해 자국이 지닌 권력, 경제력, 문화적 우수성, 문명화 정도를 알리는 계기로 활용한다. ‘만국 박람회’는 자국의 근대성을 세계에 알려 인정받는 우승열패의 경연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편혜영의 소설 속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리는 장소는 수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저주의 땅이자, 꿈과 미래를 제시하기보다 사기술에 가까운 마술만이 존재하는 디스토피아의 땅이다. 돈을 벌기 위해 소년을 개와 싸우게 만드는 만국 박람회의 풍경은 목적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 풍경을 드러낸다. 인간을 위한다는 근대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상품화시켰던 것이다. 소년 주인공이 투견을 피해 검은 상자 속에 원숭이 대신 들어가는 장면은 인간의 사물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편혜영이 형상화한 만국 박람회는 자국의 위세를 선전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이라는 가짜의 마술이 조장한 환상의 상처를 알리는 폭로의 현장이다. 

3. 교환가치적 이미지와 괴물의 출현
스펙터클 사회는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주체의 본질보다 외부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더욱 중요하다.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다. 그러나 눈에 보여지는 것만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앤디 워쇼스키와 래리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1999-2003)에서 보듯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진실일 수가 있다. 김중혁의 「멍청한 유비쿼터스」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정보 시스템을 지향하는 U사의 컴퓨터 보안을 점검하는 해커를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해커인 ‘나’는 본사의 인사관리팀장이라고 속여 U사의 네트워크에 쉽게 접속해 해킹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고정된 이미지를 믿음으로, 사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돈 많을 것이라는, 소설가는 담배를 많이 피울 것이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믿는 것은 바깥으로 드러난 기표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스펙터클 사회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해커인 ‘나’는 본사의 인사관리 팀장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여 손쉽게 보안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스펙터클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는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전면화 된다. 진정성의 기의보다 상품성의 기표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미지의 자본을 소유한 것은 소수이고 다수는 이미지의 프롤레타리아는 점이다. 스펙터클 사회는 정글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면서 상품성 있는 이미지를 소유한 20% 대 소유하지 못한 다수인 80%로 대변되는 양극화 사회이다. 이것은 다수가 스펙터클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미지의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다수는 이미지의 자본을 소유한 소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작가 정이현은 남녀간의 성 풍속도를 통해 스펙터클 사회의 단면을 그려낸다. 그녀의 출세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중산층 집안의 대학생 여주인공인 ‘나(유리)’는 남자친구를 고를 때 학벌이나 경제적 능력을 따져 선별한다. 서울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의대생인 상우, 지방대생이지만 은색 투스카니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민석도 이런 기준에 충족되어 선택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유리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스펙터클한 결혼 대상이 아니다. 유리는 구질구질한 중산층이라는 틀을 벗어나기 위해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하는 신데델라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처녀성이라는 상품성의 극대화를 통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고자 한다. 이것을 위해 유리는 남성의 시선의 대상인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철저하다. ‘유리’가 흡연을 하지 않는 것도 건강상의 이유가 아닌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유리는 구강성교와 같은 자유분방한 애정 행각을 보이지만 성기를 통한 성적 결합은 단연코 거부한다. 이것은 처녀성이라는 상품성을 유지해 괜찮은 남자를 사로잡으려는 고도의 치밀한 안배에서 나온 것이다. 유리는 부유한 집 막내아들이자 미국의 로스클 학생인 일등 신랑감 남자를 만난다. 유리는 그 남자가 좋아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청순함이라는 것을 알고 은방울꽃으로 대변되는 청순한 이미지로 카멜레온처럼 재빨리 변신한다. 여기서 이미지는 유리의 본질과 무관한 포장지로서의 기표일 뿐이다. 

다음날부터 나의 컨셉트는 청순함이었다.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흰색이나 파스텔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정성껏 드라이하여 어깨쯤에서 찰랑이게 하고,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 되었다. 스킨십에 있어서도 조신하려고 애썼다. 그렇다.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 '낭만적 사랑과 사회', 27쪽

어느 남자의 손길에도 닿지 않았다는 처녀의 순결함은 유일판본의 원본임을 말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고유한 특성을 아우라(aura)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유일무이한 아우라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스펙터클 사회에서 아우라는 끊임없이 복제되고 모방된다. 이런 아우라의 희소성은 아우라의 상품성을 더욱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빵빵한 집안의 남자가 중산층 출신의 유리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바로 ‘순결한 처녀성’이라는 아우라에서 기인한다. 유리는 ‘순결성=아우라=값비싼 상품’이라는 도식 속에 순결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첫날밤 지켜야 할 십계명의 매뉴얼을 철저하게 따른다. 샤워는 혼자서, 남자보다 먼저 해라. 속옷 선택에 신중해라. 머리를 촉촉하게 적셔라. 배뇨감을 없애라. 은은한 화장을 해라. 적당한 시점에 타월을 깔아라. 조금 머뭇거려라. 엉덩이를 들지 마라.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라. 혈흔은 함께 확인해라. 유리는 성행위를 끝내고 남자와 함께 처녀성의 확인인 혈흔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부재하다. 이것은 형식적인 기표만으로서 처녀의 순결성을 유지한 유리에게 아우라는 부재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성행위 후 유리는 남자에게 명품 루이뷔통 가방을 선물 받지만 이것이 짝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리의 연애담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으로는 제대로 믿을 수 없는 스펙터클 사회의 단면을, 아우라 부재의 현실을 확인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사용가치의 아우라로 존재하지 못하고 교환가치의 상품이다. 사랑하고 있다는 자기기만의 기표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드러난 스펙터클의 이미지에 대한 현대인의 집착은 이문환의 「럭셔리 걸」에서도 등장한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스펙터클 사회에서 주인공 혜정은 경제적 능력이 없음에도 명품 브랜드와 명품 화장품을 욕망하는 짝퉁 럭셔리걸이다. 럭셔리걸(luxury girl)은 보기에 값비싸고 호화로운 명품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여성으로서 스펙터클 사회의 주역이다.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럭셔리걸이 될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은 뛰어난 외모이다. 이것을 위해 성형수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혜정은 탤런트를 지망하다가 떨어지자 술집 여성으로 변신하고, 마담은 탤런트 김남주와 비슷한 외모로 성형수술을 시켜줘 손님들에게 인기를 끈다. 혜정은 뒷돈을 대주는 남성 스폰서도 얻게 되어 짝퉁 럭셔리걸이 아닌 진짜 럭셔리걸로 신분상승한다. 이렇게 잘 나가던 혜정의 삶은 갑자기 그녀의 손에 알레르기 피부병이 도지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녀의 늘씬한 외모라는 이미지의 자본이 폭락하면서 남성 스폰서와 룸살롱에서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군림한다. 돈이 있다면 빨리 성형외과를 찾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인 것이다.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2006)에서 뚱녀인 한나(김아중 분)는 목숨을 걸고 전신 성형을 해 인기가수로 성공하고 멋진 남자 애인도 얻는다.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적으로 풍자하고 있지만, 역으로 성형수술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대박의 신화를 은연중에 생산한다.
스펙터클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운 육체를 갖지 못한 존재들은 열등한 괴물로 규정된다. 괴물은 스펙터클 사회가 숭배하는 아름답고 늘씬한 인간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기괴한 형체의 소유자이다. 그들은 밝은 대로가 아닌 어두컴컴한 골목이나 어둠 속으로 추방된다. 공포문학의 장르문법을 차용한 편혜영의 창작집 '아오이가든'은 스펙터클의 중심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 채 괴물인 타자로 명명된 존재들에 대한 하드고어(hardgore)의 서사이다. 이 창작집에 실린 단편 「저수지」는 엄마에게 버려진 채 시 외곽 저수지의 방갈로에 살고 있는 세 아이의 이야기이다. 세 명의 아이들은 스펙터클 이미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태어났을 때부터 함량미달의 외모를 지닌 열등한 자들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이들과 썩은 저수지는 스펙터클 사회가 버린 주변부의 타자인 괴물을 상징한다. 괴물은 이미지를 중시하는 스펙터클 사회에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용도폐기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죽음이나 불행은 스펙터클 도시인들에게 흥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괴물은 배제되거나 살해당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의 안정성과 정체성을 입증하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4. 스펙터클의 환상과 전유
한국은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근대화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성장개발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공장 · 아파트 ·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압축적 근대화에 성공한다. 이러한 조국의 근대화는 거대한 볼거리를 창조하는 스펙타클의 환상이 실현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기본적 인권은 스펙터클의 환상을 위해 유보되었고, 노동자들의 희생은 조국 근대화의 전사라는 이름 앞에 은폐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뒤잇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사정권에서도 근대화는 절대절명의 지상명제였다.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존재들은 반미주의자, 빨갱이, 좌파세력 등 다양한 이름의 괴물로 취급되었다. 1988년 올림픽 축제는 그 동안 추진해온 근대화의 성과와 국가주의의 위대함이라는 거대한 볼거리를 자국과 세계 만방에 보여주는 전시장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와 한국팀의 4강신화는 이러한 스펙터클 환상의 절정이었다. 국가주의가 근대화라는 스펙터클적 환상을 추구했다면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비판적 저항세력은 민주화라는 스펙터클적 환상을 추구했다. 이들 민주화 세력은 4·19혁명, 5·18민주항쟁, 6·10민주항쟁을 통해 거리의 문화를 통해 대규모적인 스펙터클 환상을 생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990년을 전후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거대담론의 위축, IMF구제금융의 위기, 연이은 민주화세력의 집권 속에 매너리즘에 빠져 오그라든다. 1990년대 후일담문학은 스펙터클적 환상을 다시 되살리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스펙터클 환상은 위축된 채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스펙터클 환상은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 체제의 후기자본주의이다. 이것은 적자생존이라는 무한경쟁의 시스템을 요구한다.
거대담론적 스펙터클 환상을 활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작가들은 대중문화, 영상매체, 인터넷 등의 새로운 영역에서 스펙터클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특히 ‘문학/대중문화(음악, 만화, 미술 등), 문학/영화(또는 텔레비전), 문학/인터넷’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면서 다른 매체나 분야의 기법을 끌어와 문학적으로 전유하는 서사 전략이 2000년대 소설 문학의 주류가 된다. 이것은 진지하고 무거운 거대담론적 스펙터클을 싫어하는 당대의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눈높이 전략이다. 특히 만화적 상상력을 소설에 적용하는 박민규의 파격적 행보는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현재의 소설가들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박민규의 등단작인 장편 '지구영웅전설'(2003)은 현실과 공상, 소설과 만화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위선과 기만을 유쾌하게 비틀어 풍자한다. 12살의 외로운 소년이었던 주인공인 ‘나’는 도색잡지를 보다가 초등학교 담임에게 굴욕적인 체벌을 경험하고 빌딩 아래로 몸을 내던진다. 그때 거짓말처럼 ‘나’를 구해준 것은 슈퍼맨이다. 슈퍼맨이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이라면, 재벌가인 배트맨 부르스 웨인은 냉전이 종식된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이다. 군사력에 의존한 슈퍼맨에서 경제력에 의존하는 배트맨으로의 권력 이동은 달라진 시대의 환경을 말해준다. 배트맨은 미국 이외의 세계를 후배위 자세로 강간하는 듯한 폭력적 이미지로 자신의 권력을 증명한다. 미국에서 ‘나’는 바나나맨으로서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과 함께 슈퍼특공대의 일원으로 함께 일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인물인 짝퉁 영웅에 불과하다. 지구를 지키는 영웅은 백인 미국인만 될 수 있다. 바나나맨의 노란 표면은 동양 한국의 외모를, 흰 속은 백인의 마인드로 바뀐 식민지적 상태를 상징한다. 바나나맨은 내가 처음이 아니라 초대 바나나맨은 일본이었고, 최근에 중국이 새로운 바나나맨의 후보로 떠오른다. 이처럼 작가 박민규는 ‘미국 영웅 대 바나나맨’이라는 이원적 구도를 통해 ‘지배/피지배, 우월/열등’이라는 알레고리의 풍자를 유쾌하게 던진다. 바나나맨이 할 수 있는 것은 슈퍼맨과 배트맨이 좋아하는 애완용의 포즈이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황당무계한 만화적 상상력은 최초의 반미소설로 평가되는 남정현의 「분지」(1965)와도 일맥상통한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활용하는 것은 오현종의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2007)에서도 보인다. 뉴질랜드에서 007을 만나 본드걸이 되었던 미미. 본드걸은 007의 남성성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비자립적 기표이다. 한 달간 본드와 사랑하는 관계였던 본드걸 미미는 본드가 새로운 임무를 위해 떠나자 혼자가 된다. 새로운 임무는 새로운 본드걸이라는 기표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미 구닥다리 이미지가 된 본드걸 미미양의 유통기한은 용도 폐기된 것이다. 하지만 본드걸 미미는 이러한 남성위주의 일방적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드에 복수하기 위해 지독한 훈련을 통해 살인면허를 받은 013 스파이로 변신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이안 플레밍의 원작 '007 영화' 시리즈에서 007과 멋진 연애를 하는 일회용 콘돔인 본드걸의 운명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적 저항을 보여준다. 이것은 남성적 스펙터클 환상에 대한 패러디라는 딴죽걸기이다. 이밖에도 박현욱은 장편 '아내가 결혼했다'(2006)에서 대중적 인기 스포츠인 축구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 방정식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작가는 축구라는 볼거리를 활용해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의 결혼관을 주장하면서 이중결혼의 일처다부제(한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를 도발적으로 가볍게 보여준다. 반면에 이홍의 '걸프렌즈'(2007)는 한 명의 남성과 세 명의 여성이 평화롭게 사랑을 공유하는 연애담이다. 사회적 논란거리의 문제를 가볍게 형상화하는 이들의 서사 전략은 사회적 금기를 우회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자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수단이다. 거대담론에 기반한 스펙터클의 환상이 위축된 시대에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나 도발적 문제를 활용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전유의 서사 전략은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스펙터클적 아이콘을 활용하는 서사 전략이 미학적인 결실로 이어지지 못할 때 키치적 문화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배낭여행을 통한 세계 각국 체험의 확대와 세계화의 진행은 1990년대부터 탈국가적 상상력의 소설을 등장하게 만든다. 지구화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모순은 특정 지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공유하는 문제라는 인식은 탈국가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다양한 이국적 이미지의 등장은 자국의 익숙한 볼거리에서 벗어나 낯선 문화를, 지역을 간접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탈국가적 상상력은 2000년대 중반 들어 한국소설의 주류가 된다. 독자들은 낯선 시공간에 펼쳐진 이국 취향의 풍경을 통해 다양한 볼거리를 체험하거나 자신이 체험한 이국적 풍경과 비교하며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 박범신의 '나마스테', 김재영의 '코끼리'(이상 2005), 김윤영의 '타잔', 강영숙의 '리나'(이상 2006), 황석영의 '바리데기', 서진의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2007) 등은 대표적인 탈국가적 상상력의 소설이다. 이때 작가의 탈국가적 시선이 단지 이색적 볼거리를 등장시키는 관광용 목적이라면 타국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 또한 탈국가적 상상력은 서사적 개연성의 범주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탈북자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강영숙의 '리나'와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미학적 완결성이 떨어지는 것도 서사적 개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낯선 타국에 대한 표피적 접근은 필연적으로 타국의 풍경을 타자화 한다. 타국이 스펙터클적 기표의 이미지로 전락한다면 소설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발견하거나 전달하겠다는 작가의 의도도 상당 부분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고 타국을 그리는 서사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위험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국의 원주민을 등장시켜 대항적 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유효하다. 최근 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서진의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는 뉴욕 지하철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미국 이민자가 겪어야 했던 다양한 문제를 심도 있게 보여준 문제작이다. 특히 이 소설은 구경꾼이나 여행객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초강대국 미국의 이면에 감춰진 어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5.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2007년 10월에 박철 옥소리 부부의 파경 소식이 들려왔다. 행복한 잉꼬부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부부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행복한 부부의 이미지는 연출된 쇼윈도우의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불행한데 바깥에 비춰진 이미지는 이와 정반대였다는 박철 옥소리 부부의 모습은 스펙터클 사회가 지닌 위기의 실체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을 통해 파이프 그림은 실체가 아니라 재현된 이미지임을 드러낸 바 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는 밖으로 드러난 이미지에 의해 지배받는 세계이지만,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스펙터클의 이중성은 시각 중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정적일 뿐 영원하거나 오래 가는 것은 찾기 힘들다. 기표는 끝없는 방랑의 여행을 떠난다. 기표의 미끄러지는 여행은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해 우리를 도취시키지만 그 환상에서 깨어나면 깊은 공허와 소외감을 안겨준다. 스펙터클 환상은 과거에 현실 변혁적 희망의 상징으로 많이 인식되었지만 현재에 생산되는 스펙터클 환상은 상품화된 환각제에 가깝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주체는 대상과의 분리, 소외감, 수동적 관조의 상태로 빠질 가능성이 많다.
전통적으로 소설에서 볼거리를 제공했던 것은 섹스와 폭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이미 식상해 있거나 영상매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도 힘들다. 결국 섹스와 폭력만으로는 다양한 볼거리를 원하는 독자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이 위축된 시대에 스펙터클 환상이 지닌 긍정적 성격도 상당 부분 위축되어 있다. 이러한 시기에 신경숙, 편혜영, 정이현, 박민규, 오현종, 서진 등은 기표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스펙터클 사회의 문제점과 양상을 드러내거나, 전유의 서사 전략과 이국취향의 탈국가적 상상력 등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박민규처럼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소설에 끌어들이는 서사 전략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이때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활용한 전유의 서사가 깊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 때 그것은 스펙터클 사회의 키치적 욕망을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탈국가적 상상력도 단지 이색 볼거리에 대한 탐방이라면 영상매체에 비해 소설만의 강점을 찾기란 어렵다. 진정한 탈국가적 상상력은 나와 다른, 그러나 나와 같은 인간을 탐방하는 여정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 상호 연대하고 교류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모색이다.
스펙터클이 지배적인 사회는 푸코가 말한 원형감옥 시스템인 파놉티콘 같은 감시의 시선이 작동한다. 이때 감시의 시선은 감시의 대상인 타자보다 권력을 지닌 주체이다. 일상에 스며든 미시적 파놉티콘의 시선은 개별 주체들에게 무의식적 동일화 속에 스펙터클 이미지의 관음증 환자가 될 것을 주문한다. 이전보다 위력은 상실했지만 거대담론에 기초한 국가주의와 근대주의는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고, 특히 후기자본주의의 물신주의는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 속에서 개별 주체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스펙터클 이미지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소비적 삶을 살아가도록 핍박받는다. 이것에 대한 개별적 저항은 가능하지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스펙터클의 이미지 공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은 스펙터클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영상매체보다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비판할 수 있는 불온한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 소설의 이러한 기능이 포기되거나 약화될 때 상품화된 스펙터클 이미지를 많이 생산하는 영상매체와의 차별성은 상실될 것이다. 그것은 문학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자살골이다. 스펙터클 환상에 대한 매혹과 불안 사이에서 소설은, 문학은 삶의 진정성을 찾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그것은 획일적이고 소비적인 스펙터클 환상을 퇴치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진정한 스펙터클 환상을 성장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최강민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주요 평론 「팜므파탈과 공주병의 화려한 만남」, 「세기초 문학주의의 파탄과 비평의 위기」 등. 반 연간 ≪작가와 비평≫ 편집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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