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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김지유 작품해설/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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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95회 작성일 08-03-01 03:08

본문

|작품해설|
내 안의 마녀, 그리고 남자들
김남석|문학평론가


1. 박제된 자아에 대한 절규
김지유의 신작시들을 읽다가, 유난히 눈길이 머무는 시를 만났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시는 김지유의 다른 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품은 시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김지유 시들을 관류하는 일정한 패턴을 알려주는 시라고 생각된다. 천천히 읽어보자.

잠이 깨면, 나는
그녀의 여자가 아니다, 더 이상
그녀의 뜨개질에 내 치수는 필요치 않다

눈을 감으면 일상의 낮은 숨소리가 톤을 바꾼다 까슬까슬한 털실을 한 코씩 잡아 빼내며 그녀, 침대에 내 머리를 고정시킨 채 깊숙한 박음질을 한다 그녀에게서 도망친 대가, 날카로운 고음의 털실이 자꾸만 귓바퀴에 감겨들고 그녀가 운다, 훌쩍임이 팽팽한 혈관을 관통해 끊임없이 소음을 만들어낸다, 나는 통곡하는 그녀 몰래 자아놓은 악몽을 한올, 한올 당겨 풀고 있다

눈을 뜨면, 나는
그녀의 착한 여자가 아니다, 더 이상
그녀의 뜨개질에 망자의 치수는 필요치 않다
―「가위」 전문

이 시는 3연으로 되어 있는데, 1연과 3연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1연의 1행과 3연의 1행은 거의 같다. ‘잠이 깨면’이 ‘눈을 뜨면’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변화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잠을 깬다’는 표현이 ‘눈을 뜬다’는 표현과 비록 의미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하다고 간주할 수 있겠다. 
1연의 2행과 3연의 2행도 거의 같은 구조이다. 전체적으로 문장 구조가 동일한데, 다만 ‘그녀의 여자’가 ‘그녀의 착한 여자’로 변한 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이 시의 인물 구도를 보면, ‘내’가 핵심인물이다. ‘나’는 ‘그녀의 여자’였는데, 눈을 뜨기 이전의 ‘나’는 ‘그녀의 착한 여자’였다. 하지만 눈을 뜨면서, ‘나’는 ‘그녀의 착한 여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더 이상, 그녀의 착한 분신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따라서 ‘눈을 뜨면’에 물리적 잠을 깬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각성한다는 뜻도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 시에서 잠의 공간, 즉 2연은 각성 이전의 공간을 뜻한다고 하겠다. 3연의 3행은 ‘각성’의 의미를 알려준다. 역시 1연의 3행과 거의 같은 구조인데, ‘내 치수’를 ‘망자의 치수’로 바꾸어 놓은 것이 유일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이 각성하면, 즉 망각의 공간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치수는 망자의 치수가 된다고 말하는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망자’는 의미상의 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일단 ‘망자’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자’일 것이다. 화자는 ‘내’가 눈을 뜨면 더 이상 그녀의 착한 여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덧붙여서 ‘망자의 치수’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망자의 치수가 필요치 않다’는 두 가지 갈래로 해석된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면 내가 망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잠에서 나는 망자였다는 것이다. 전자에 따르면 ‘나’는 잠에서 깨어나면, 즉 각성하면 그녀에게 망자가 된다는 뜻이 된다. 더 풀어 말하면 ‘나’는 잠에서 ‘그녀’의 착한 분신 역할을 수행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면 그 역할을 포기할 것이기 때문에, 착한 분신을 기대했던 ‘그녀’에게는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된다. 
후자의 해석을 풀어보면, ‘나’는 잠에서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일종의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잠에서 ‘나’는 그녀의 뜨개질에 놀아나는 허수아비였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동면에서 일어나는 사람처럼, ‘나’는 더 이상 ‘그녀’의 허수아비인 ‘망자'가 아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은 텍스트 내에서 공존하고 있어,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 어렵도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생각은 구문 착오이다. 시인이 ‘망자의 치수’에 대해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 속 상황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겠다. 다음은 고의적인 혼란이다. 시가 하나의 해석으로 완결되지 못하도록 고의적으로 혼선을 가하고 시어의 의미를 애매하게 배치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두 가지 의견 모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시가 갖는 근본적인 모순이자 한계의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시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혼란이 상당하다는 가정은 세워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 잠 속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내가 평온한 자아인지, 아니면 잠에서 깨어나 그녀의 뜨개질을 거부하는 나를 추구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혼란은 다른 시를 볼 때에도 일정부분 관련성 있게 나타난다.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해 보자. 이 시에서 화자는 ‘그녀’의 뜨개질에 의해 착한 여자도 되었다가, 허수아비도 되었다고 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 망각에서 깨어나면서, 더 이상 착한 여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더 이상 허수아비처럼 시키는 대로 살지도 않을 것이라고 각성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망각의 공간은 어디인가. 시에서 찾으면 2연이다. 2연은 ‘그녀’에 의해 ‘내’가 ‘착한 여자’로 뜨개질 되는 공간이다. 2연의 시어로 환원하면 ‘내’가 ‘그녀’에 의해 ‘깊숙한 박음질’을 당하는 공간이다. 일상의 숨소리가 낮아지고 삶의 물리적 환경들이 멀어지면, ‘나’는 ‘그녀’에게 세뇌 당한다. 그녀는 ‘까슬까슬한 털실을 한 코씩 잡아 빼내’며, ‘나’를 얌전한 침대에 박음질한다. 마치 그녀는 ‘나’에게 훈계를 하는 것 같은데, 그 훈계를 ‘나’는 소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적 설정은 일단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시인이자 화자는 두 개의 자아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망각의 공간에서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하는 ‘나’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망각의 공간에서 ‘나’를 착한 여자로 만드는 ‘그녀’가 그것이다. ‘그녀’는 ‘현실원칙’에 의거하고 있고, ‘나’는 본래적으로 ‘쾌락원칙’에 의거하고 있다. 
‘그녀’는 본래적 품성을 거느리고 살고 싶어 하는 ‘나’를 어떻게 해서든 박제하려고 한다. 반면 ‘나’는 ‘그녀’의 힘에 눌려 일시적으로 착한 여자가 되지만, 그렇게 착한 여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를 죽이는 수치스러운 행위로 파악한다. 두 자아 사이의 긴장감이 결국 2연에서는 그녀의 우세로, 3연에서는 나의 반발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구절을 풀어보자. 2연의 “나는 통곡하는 그녀 몰래 자아놓은 악몽을 한올, 한올 당겨 풀고 있다”가 그것이다. 생각보다 이 구절은 해석이 용이하지 않다. 일단 주어와 술어 사이의 복합적 겹침 때문이다. 일단 악몽을 풀고 있는 주체는 ‘나’이다. ‘나’는 능동적으로 악몽이라는 망각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렇다면 악몽은 누가 자아놓은 것인가. 언뜻 읽으면 ‘그녀 몰래’ 때문에 ‘그녀’가 자아놓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내가, 그녀가 몰래 자아놓은, 악몽을 푼다, 라는 식으로 이 구문은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더 깊게 생각하면, 그녀가 통곡하는 사이에,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내가 자아놓은 악몽을 (내가) 푼다,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문장의 의미로 보면 그녀가 박음질 했으니까, 악몽을 자아낸 사람은, 그녀에 가깝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으며, 현재의 문장 구조로 보면, 그 어느 쪽이든 해석에는 지장이 없다. 이러한 혼란은 왜 발생했을까. 그것은 시인, 혹은 화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와 ‘그녀’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눈을 감으면 ‘그녀’가 찾아와, 또 다른 그녀인 ‘나’를 ‘착한 여자’로 만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가 가공의 주체이고, ‘나’가 가공의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위 구절의 혼란은 실은, ‘나’와 ‘그녀’ 사이의 관계가 혼란스러움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한 여자의 내면에 도사린 두 주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에서 제기했던 ‘망자’의 혼란까지 겹쳐 놓으면 더욱 복잡하게 얽힌 자아와 화자와 시인의 내면 풍경이 된다. 언어로 이러한 풍경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개성이다. 그 내면의 그물을 쉽게 풀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시가 독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정신분석의 원리와 용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한 인물 내의 두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통념이 많은 시인들에게 상식 아닌 상식이 되었으며, 그러한 상식에 의거해서 쓰여진 시가 차고 넘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자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 이 시만의 독특한 차별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순화된 영혼에 대한 간결하지만 도발적인 저항이 인상 깊고, ‘나’와 ‘그녀’ 사이의 모호한 혼란 역시 시어로 다스릴 줄 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일상의 그렇고 그런 시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얌전한 어투로 내면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혼란과 반발 사이에서 격전을 치루고 있는 인상이며, 핏대를 세워 자신에게 그러한 아픔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인상이다. 갓 데뷔한 시인이 쓴 시 치고는 대담무쌍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도발적인 어투로
90년대 이후 우리 시가 보이는 난맥상 중 하나가 밋밋해진 어투이다. 80년대 정치권력이라는 거대 서사와의 전쟁 이후, 우리 시는 일상의 영역으로 급격하게 침잠했다. 이러한 침잠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 자체로는 나무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란 원래 정치나 이념의 소산물이 아니었으며, 시인 이상의 주체가 되기를 꿈꾸는 자들을 위한 언어도 아니었다. 따라서 일상으로의 귀환을 두고, 패퇴니 후퇴니 타락이니 하고 말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상으로 관심을 돌린 우리 시가 밋밋해진 것은 큰 문제이다. 시는 본래 격정적인 마음의 정화된 표현이어야 했다. 여기서 정화는 언어의 순화가 아니라, 형식의 정화이다. 시어가 현실과 긴장감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상의 언어가 지니지 못한 에너지를 시어가 어떻게 해서든 담지 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는 과감하고, 대담하고, 흉내 내기 어려우면서도, 상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어투에서, 그 에너지를 본다.
김지유의 「헤어디자이너 강」은 도발적인 어투가 돋보이는 시이다. 이 시 역시 일상의 한 부분을 언어로 조립했다는 점에서 90년대 이후 흔히 생산되는 일상시의 영역에 속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지유가 시의 속살 깊이 숨겨둔 여자의 도발적인 욕망이 꿈틀거린다는 점이다. 일단 이 시를 정리해 보자.
여자는 ‘일 년이면 서너 번씩 원형탈모’ 자리를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흔히 원형탈모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생겨난다고 알려져 있다. 일시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두피가 드러나는 현상인데, 이 시에서는 일 년에 서너 번씩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편의 폭행 때문이다. 여자는 그 때마다 핸드폰만 챙겨 나올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남편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채곤 했던 것 같다. 당연히 여자는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남편의 폭력이 계속되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 상수였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도망친 여자가 찾아가는 곳이 ‘헤어디자이너 강’의 집이라는 것이다. 헤어디자이너 강은 뜯긴 머리카락을 감추어주는 미용사로 보인다. 그런데 여자는 오히려 헤어디자이너 강의 집에 가는 것을 반기는 기색이다. 그 집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고 할까. 
여자가 뭉텅이 채 빠진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서 헤어디자이너를 찾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다시피 하여 남편이 아닌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는 설정은 대단히 도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가정과 남편과 폭력에 길들여진 여자들의 내면에 은밀하게 도사린 발칙한 꿈이자, 세상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반항적 욕망인 셈이다. 폐쇄된 세상 속에 감금당한 영혼의 처참한 바람일 수밖에 없다. 
시적 상상력을 더 가미하면, 「헤어디자이너 강」의 ‘여인’은 「꽃뱀」의 ‘꽃뱀’이 된다. 먼저 시를 인용하겠다. 

이봐, 우리 오늘 만나지 않을래
굽실거리는 머릿결이 어디라도 감쌀 텐데
잠시만 마주쳐 안겨보지 않을래
걱정 마, 어디 비밀 아닌 게 있겠니
들키고 싶어 안달하게 해줄게
올이 나간 스타킹은 벗어버리고
잠시 동면에서 깨어나 배꼽 위로
똬리를 틀어 칭칭 감아줄게, 만나주지 않을래
수십 개의 혀를 감춘 채 밤마다
이곳저곳 탐하려는 혓바닥에 독은 없으니
봉인 풀려 벌어지려는 도톰한 입술의
여자를, 혼자 두지 말래
탱글탱글한 머릿결이 자연스레 풀리고
얼굴에 분가루도 곱게 먹었는데
하루뿐인 오늘이 끝나기 전에
방금 따른 포도주를 입에 대기 전에
새로 산 코트가 구겨지기 전에
심장에 독을 품고 기지개 켜는 꽃뱀
오늘 미치도록 고운데
이봐, 지금 만나지 않을래
― 「꽃뱀」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이른바 ‘꽃뱀’이다. 하루 밤의 인연을 빌미로 남자로부터 거액의 돈을 뜯어내는 이른바 음지의 여인들이다. 이 여인들에 대한 소문은 입소문을 타고, 혹은 신문의 사회란을 통해 이 사회에 알려지곤 한다. 하지만 그녀들을 여염집 규수와 구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 시는 익히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꽃뱀의 내면 심리를 투영했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첫 행과 8행과 마지막 행은 일정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만나(주)지 않을래’가 반복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전체 내용을 일관해 보면, 꽃뱀은 지금 남자로 보이는 상대를 유혹하고 있다. 꽃뱀의 유혹은 노골적이다. 잠시만 마주쳐도 안길 것이라고 말하고, 올이 나간 스타킹을 거론하면서 성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노골적으로 자신이 남자를 뱀처럼 휘감아 줄 것이라고 유혹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골적인 유혹은 8행을 지나면서 바유적인 표현들로 바뀐다. 꽃뱀답지 않게 자신이 독이 없는 여인이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탱글탱글한 머릿결과 분가루를 바른 얼굴과 분위기를 돋울 요량이었던 포도주와 잘 보이기 위해서 새로 산 코트를 언급하면서 오히려 솔직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외로움을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미사여구는 달콤한 유혹이 되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겠지만, 그래서 화자 자신도 심장에 독을 품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쓸쓸한 심회가 배어나오는 것마저 부인하기는 힘들다. 꽃뱀도 외롭고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맡기고 싶어 하는 여자인 점은 다를 바 없다. 
꽃뱀이라고 하면 남(남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악한 여인으로 취급당한다.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머릿결이 온통 뱀으로 되어 있는 메두사의 외모 같은 사악한 속마음을 지닌 여인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러한 ‘메두사의 후예’에게도 진정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그래서 본래적인 욕망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외로운 여인의 마음속에 도사린 남자에 대한 욕망과 파괴 욕구를 터부시하지 않고, 보편적 여인과 동일하게 살펴 볼 여지가 있음을 이 시를 통해 강조한 셈이다. 
「헤어디자이너 강」에서도 그러했지만, 남성에 대한 여성의 솔직한 욕망은 서정시의 아름다운 감정의 결에 길들인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이른바 ‘착한 시’나 ‘얌전한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시란 일상적 정서의 아름다운 표출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아니 믿어왔던 이들에게, 이러한 정서는 기형적 정서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지유는 이러한 보편적 정서, 일상적 감각을 물리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데에 머뭇거리지 않는다. 이 도발적인 어투는 밋밋해진 우리 시의 현재 상황에서는 적지 않은 신선함이다. 조금 앞선 세대의 김선우가 그러한 역할을 했고,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김혜순이 그러한 역할을 해 온 바 있지만, 이제 다시 김지유가 ‘착한 시’를 넘어 ‘마녀의 어법’에 들어서고 있음은 밋밋해진 우리 시단에 적지 않은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대담하게 써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3. 고개 숙인 남자들
김지유 시에서 여인의 대척점에 선 사람들은 남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고개 숙인 모습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걸음마 하는 사내」이다.

펭귄걸음의 한 사내가
온몸을 흔들며 출입구를 향해
길을 오른다, 쏟아지는 눈을
피하려는데, 손에 걸린
지팡이마저 사내의 걸음을
지탱시켜주지 못한 채
공중의 추처럼 흔들거린다
몸으로도 말하기조차 힘겨운 사내
눈송이가 텅 빈 목덜미로 감아드는데
종종거리는 걸음이 애처로워
길이 끙끙대며 온몸을 끌어당긴다
눈이 지나온 길을 다 덮고서야
아파트 입구에 다다른 사내
열아홉의 첫 경험도 잊고
중년에 찾아든 젊은 애인도 잊고
처음으로 돌아와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사내의 머리며 어깨며 목덜미에
희디흰 가제 손수건이
어머니의 손길로 덮여있다
쌕쌕거리며 잠시 숨을 몰아쉬는 동안
차가운 눈송이가 천천히 녹아내리며
사내의 등줄기를 쓰다듬는다
― 「걸음마 하는 사내」 전문

쉽게 이해되는 시이다. 화자는 사내를 보고 있다. 사내는 눈이 덮인 비탈길을 오르려고 애쓰고 있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다. 길은 미끄럽고 정신은 몽롱해서, 늘 다니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 전진하는데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된다. 아마 남자는 술을 먹었을 것이고, 그가 가려는 길은 저 멀리 보이는 자신의 아파트(집)가 아닐까 싶다.
남자는 가뜩이나 미끄러운 길에서 취기로 흐트러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느린 걸음마를 하고 있다. 길이 온몸을 끌어당긴다는 표현을 보면,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간신히 아파트 입구에 도달했을 때는, 내린 눈(눈 위를 뒹굴어서)과 쌓인 눈에 온몸 여기저기에 눈 자국이 흥건하다. 마치 어린 날 국민학교(옛날에는 초등학교가 아니었다) 입학식에 매달고 갔던 하얀 가제 수건처럼 옷 여기저기에 ‘나는 초보입니다’라는 눈雪 딱지를 붙이고 있다.
이 시가 흥미로운 것은 비틀거리는 남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에서 이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흥미롭다. 가정을 해보자. 남편이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자, 아내가 남편을 마중 나왔다고. 저 멀리 택시에서 내린 남편이 언덕길을 오르며 아파트로 접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 눈에도 술에 취한 모습이다. 아내는 걱정한다. 하지만 쉽사리 마중 나가지 못한다. 무언가 사연 많은 사람처럼 남편이 기필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오르려고 하는 모습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김지유의 시에서 남자들은 힘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그대를」 같은 시를 보면, 여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여자를 기다린다고 힘없는 남자라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주어진 상황에 기다림으로 밖에 일관할 수 없는 것은 외부의 상황에 대해 대처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표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출장 중」의 남편도 비슷하다. 그 역시 아내가 설계한 삶에 종속되는 것밖에,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들 모두는 마치 무가치한 동전처럼 버려진 존재로 그려진다. 그나마 「걸음마 하는 사내」의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갈 힘이라도 남아 있는 상태여서, 뒤에 언급한 두 시의 남자들보다는 덜 무기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자.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 어쩌면 이 남자를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아내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남자를 왜 부축하지 않았을까. 혹 혼자서 걷도록 응원하는 것은 아닐까. 제목도 걸음마 하는 사내이고, 후반부에서도 어머니의 손길을 운운하며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는 시선도 감지되고 있지 않은가. 
시인 김지유의 시에서 남자들은 힘을 잃고 스러지기 일보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남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이 시에서는 꾹 참고 그가 그의 길을 오르도록 참고 있었지는 않을까. 김지유는 시인의 말에서 시는 상처와 소외를 치유하기 위한 방안이고, 혼자되어 외로운 이들이 원하는 결합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마 김지유는 시 속에 남편을 말없이 응원하는 여인이 되어, 외롭게 스러질지도 모르는 이 세상의 소외된 자와 연약한 자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시는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통로이고, 타인들을 가족으로 결합하는 끈이며, 자신의 내밀한 도움을 세상에 보내고 세상으로부터 역시 내밀한 후원을 받는 도움의 장이 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4. ‘내’안을 찢고 나오는 마녀의 절규로
시 「커티 삭」은 현란한 이미지가 압축되어 있는 시이다. 그 현란함은 약간의 도발적인 유혹과, 약간의 답답함과, 약간의 일탈, 그리고 약간은 ‘나’가 아닌 것들에 대한 선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마녀의 주문에 필요한 마법의 재료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언제나 시작엔 걸리는 것이 없어
바라는 것도 없어 어디로 가든 좋아

처음 마신 술 한 잔에 취해 속이 울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건드려
잠을 자던 마녀가 저 속에서 꿈틀거려

클레이지 인 러브, 비욘세의 음악에 홀려
귓불을 간질이는 입김에도 쉽게 흔들리고
색색의 불빛이 환하게 쏟아내는 어지러움도 좋아

누구든 머무르지 않아 설레는, 도곡동 클럽 노노스

마주 앉아 채워지는 술 한 잔 따라 마셨을 뿐
늘 새로이 시작되는 마음에 에돌 것은 없어

닿지도 붙잡지도 않은 손가락들, 마녀의 발목을 간질이고

끝이 아니기에 더 빠르게, 서로를 향해
스텝을 밟으면서도 닿자마자 멀어지는 클럽 노노스.
― 「커티 삭」 전문

시에 대한 분석을 하기 전에 밝혀두어야 할 것은, 나는 클럽 ‘노노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 클럽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따라서 이 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나의 시각은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화자는 클럽 노노스에 있다. 1연은 화자가 클럽 노노스에 들어서는 순간의 마음가짐으로 보인다. 화자는 약간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다시 말하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노노스에 가지 않았나 싶다. 앞의 시들을 통해 드러나는 화자의 정서를 볼 때,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노노스에 들른 것이라고도 가정할 수도 있다.
2연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착하지 않고 얌전하지 않은’ 또 하나의 자신을 인지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앞의 시 중에서 「꽃뱀」처럼 화자는 유혹의 정서를 느끼기 시작한다. 「가위」로 표현하면, 망각의 늪에서 깨어나 그녀의 착한 여자로 박제되었던 순간을 거부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착한 여자이기를 바랐던 현실원칙 ‘그녀’에게는, 쾌락원칙으로 접어드는 반항의 자아 ‘나’는, 잠을 자던 마녀의 기지개에 다름 아니다. 이제 착한 여자는 죽고, 잠자던 마녀가 깨어난다.
3연은 음악과 함께 더욱 현란해지는 술집 내부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 상황은 내면의 상황과도 일치한다. 내면의 심리도 현란해진다. 비욘세라는 육감적인 몸매와 목소리를 지닌 가수의 끈적끈적한 노래가, 마녀로 변한 여자의 현기증을 북돋운다. 어디선가 귓불을 간질이는 입김들이 쏟아지고, 불빛과 취기가 어우러진 어지럼증으로 인해, 현실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의지는 더욱 깊숙이 사라진다. 음악, 촉감, 불빛, 취기, 그리고 내면의 열기로 화자는 물론 클럽 노노스의 내부도 몽롱해진다.
4연에서 화자는 클럽 노노스를 떠날 것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노노스를 떠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일까. 현실의 상황에서는 일탈과 방황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내면의 마녀를 풀어놓고 싶어 하는 화자에게는 더 큰 자유와 영혼의 해방을 뜻하는 것일 게다. 이제 화자는 대담해졌다.
문제는 5연이다. 화자는 떠나지 못한다. 화자는 다시 차분해진 마음으로 테이블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귓불을 간질이던 촉감은 테이블 너머로 마주 앉아 버렸고, 그토록 대담하게 마셨던 술도 이제 그냥 마신 것으로 의식은 변화되었다. 게다가 마지막이 되어야 할 시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6연에서는 더욱 차분해진 마녀가 말한다. ‘닿지도 붙잡지도 않은 손가락들’이라고. 차분해진 마녀는 본성을 해방시켜야 하는 여자답지 않게, 그 앞의 남자들과의 거리를 스스로 늘리고 있다. 그 거리만큼 본성은 줄어들고, 줄어든 본성만큼 마녀는 약해진다.
그리고 7연의 이별이다. 마녀는 오늘의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하고 있다. 하룻밤의 인연이 끝이 되지 못하기에, 서로를 마음속으로 갈구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멀어져야 한다고. 시적 상황으로 정리하면, 화자는 클럽 노노스를 떠나는 남녀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떠날 준비를 한다. 하지만 화자는 아마도 혼자일 것이다. 
이 시를 상상력을 가미해서 재구성해 보았다. 클럽 노노스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현실원칙에 속박 당했던 쾌락원칙이 풀려나는 순간이자 지점이다. 이 순간을 시인은 잠자던 마녀가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했다. 즉 클럽 노노스는 마녀가 부활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마녀는 현실에서는 일탈이자 방황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던 어지러운 상상과 현란한 이야기를 경험한다.
문제는 그 마녀의 상상과 이야기가 결국에는 클럽 노노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공간 내에서도 화자의 본래적 자아는 자유롭지 만은 않다. 각종 제약을 상기하고 타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결국에는 마녀의 해방에 실패하고 만다.
하긴 상상은 상상으로 있을 때 아름다우며, 일탈의 이야기는 이야기로 머물 때 품위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김지유의 「커티 삭」은 복잡한 심경을 지닌 화자의 멋진 상상력이자 대담하게 꾸며진 이야기일 때 더욱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충고를 하나 하면서 그녀의 시에 대한 평론을 줄이도록 하자. 마녀는 마녀답게 풀려나야 한다는 충고이다. 시인으로서 김지유는 지금 초짜 마녀의 등급에 올라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착하고 얌전한 서정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녀의 등장과 본색은 반가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위」나 「꽃뱀」을 관류하던 혼란도, 마녀를 꿈꾸는 그녀의 시적 새로움이 아니었으면, 그저 그런 넋두리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까지 보여준 그녀의 시적 생명력은 ‘마녀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녀성의 극한에 도전해 볼 필요도 있다. 
김지유 시의 화자가 마녀의 극한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은 ‘마녀’가 되려는 그녀 옆을 둘러싼 남자들이다. 화자의 눈에 비치는 ‘남자들’은 연민의 대상이다. 무기력하고 소심하고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결국 김지유의 시는 마녀가 되고 싶어 하는 원심력과 그 남자들이 끌어당기는 구심력 사이의 긴장으로 인해 지금의 자리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이러한 팽팽한 힘의 균형은 김지유의 시를 안정된 궤도 위에서 움직이도록 붙잡아 매줄 것이다. 지구와 달이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을 때 가장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듯이, 김지유 시의 마녀와 남자들도 그 거리를 조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 거리를 파괴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녀 안의 마녀가 풀려나오는 순간에는, 그 마녀들이 세상의 남자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그 남자들을 걱정하는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쳐도 괜찮지 않을까. 마녀가 되고 싶은 ‘작은 자아들’에게, 감시자인 ‘그녀’나 보호 대상인 ‘남자들’은 잠시 잊혀도 되지 않을까.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부경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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