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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신작시/조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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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석
책 읽는 법
1.
꾸물꾸물 기는 듯한 활판인쇄를 보기 위해
기억 저편에 뒹구는 퀴퀴한 책의 냄새를 맡기 위해
그리운 책을 보러 가는 길
보석상점의 보석들이 제 몸 뽐내듯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 너덜너덜한 책도 두꺼운 방탄유리 밑에 놓여 있다
2.
검은 곰팡이가 슨
작고 투명한 좀벌레가
설설 기어다니는
책을 들고 읽는 자
엄벌에 처하리라
눈에 핏발서게 하고
짓무르게 하고
곧 멀게 하리라
더 거역한다면
그 두 눈 뽑아버리라
3.
노트북으로 핸드폰으로 가벼운 스침의 화면 터치로도 페이지 잘도 넘
어간다 눈은 작게 끊기듯 이어진 글자를 따라가고 입은 중얼거리며 계속 읊조리지만 머릿속엔 텅 빈 광장 같아, 눈으로 보고 또 보며 읽은 내용들 머리에 저장되지 않는다
삭제 버튼 하나로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이미 눈에서 떠나고 손끝에서 멀어져버린
마음 한 구석에도 남아 있지 않을
요즘 책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늦가을 회심곡
가느다랗고 여린 늦가을 햇빛 아래
어스름 내리기 전 하늘 끝에
초점 흐린 시선을 두고
전동 휠체어에 앉은 귀머거리 할머니
그 곁에 구부정하게 선 늙수그레한 아들
듣는지 마는지
쉬지 않고 중얼중얼 똑같은 이야기
― 나이 들기 전 재웠어야 할 바람이야, 바람의 꼬리는 계속 자라는 것이야, 빨리 끊었어야 해, 이리 뼛속까지 구멍 숭숭 나고 바람까지 들어 밤마다 눈 뜨고 잉잉거리는 걸
갑자기 더 흐리게 풀어지는 햇빛
붉디붉어지는 구름 한 점
서녘 산 끝에 걸리고
두 사람 곁 스쳐가는
천 년 전의 바람
귀 밑을 스쳐갈 때
어디선가 들리는
목탁소리에 얹혀진 회심곡
할머니 붉어진 눈에 눈물 떨어지고
― 나이 들기 전 재웠어야 할 거인데 바람의 꼬리는 꼬리를 물고 무는 게야, 지금도 늦지 않아 빨리 끊어, 이리 뼛속 구멍에 숭숭 들고나는 바람, 그 마음은 밤에도 자지 않는 걸
조현석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불법, …체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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