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8호 신작시/김유석
페이지 정보

본문
김유석
직선으로 된 곡선
숨는 것보다 달아남을 선택한 순간
들쥐는 필사적이다.
세습적인 본능 가운데 들어있는 천적 중
맨 먼저 불안이 뛰쳐나와 들쥐를 몬다.
보리가 베어지기도 전에 들쥐는 스스로 노출 당한다.
태양과 콤바인의 굉음으로
은밀하게 드나들던 통로를 틀어막고
제 것이 아닌 생각을 빌려 오는 미망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막다른 골목을 치닫듯이 들쥐를 달리게 한다.
들쥐는 뛴다. 몸에 배인 듯한 자세가
사지에 붙어 속력을 낸다.
태양이 뛰고 콤바인이 뛰고
뱃속에서 튀는 보리알 소리에도 꼬리를 밟히며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꺾어 달리는,
뒷다리 사이 갓 난 새끼들이 달려 있다.
새끼들은 어미보다 훨씬 필사적으로 어미를 물고 뛰며
어미로부터 공포를 물려받는다. 어미는
극에 이르기 직전에 새끼들을 투두둑 털어낸다.
그 순간 뜨이는 새끼들의 눈 속으로 사라지는 어미가
용케 살아남아 어미가 되는 들쥐들의
공포 속에서 익숙하게 뛰쳐나온다
미늘․2
내가 삼킨 건 바늘이 아니다.
내가 삼킨 건 한줌의 미끼, 나는 늘 배가 고파
줄이 없는 미망을 물었다.
내가 삼킨 건 전율, 고통 속에 들어있는
비명 같은 희열에 꿰였다.
내가 삼킨 건 물 위에 뜬 찌, 삼킬 때마다
쑤욱 달려들어 안이 되는 겉.
내가 삼킨 건 모두 첫사랑, 모든 사랑이
그 자리를 꿰었다 나를 놓쳤다. 필경
나를 삼킨 건……, 새빨간 나
나는 걸려드는 법을 알고
버팅기는 법을 알고 있고
빠지는 법도 알고 있다. 나는
그게 슬프다.
한참 후에나 오는 따끔거림이
다시 바늘을 물게 하지만
지금 나는, 처음처럼 혹은
마지막인 것처럼
물 속 같은 세상에서,
한 여자 곁에서 바늘을 삼킨다.
줄이 없다
김유석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
- 이전글28호 신작시/변종태 08.03.01
- 다음글28호 신작시/조현석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