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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시/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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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
奇跡의 형식적 층위에 관한 사례
맨날마다 애인은 진심을 말해 달라고 애원하지 그건 너무나 쉬운 일 난 내 진심을 금방 말해 주곤 하지 그까짓 거 뭐가 어렵겠어 달마는 오죽이나 속상했으면 가랑잎 타고 양자강까지 건넜을까 애인이 애원하는데 진심 정도야 그러나 애인은 죽어라 애원하고 애원하지 제발 부탁이니 제발 한 번만이라도 진심을 말해 달라고 그럴 때마다 난 친절하게 진심을 다해 진심을 말해 주지 정말이지 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말한 적이 없어 그런데도 애인은 믿으려 들지 않지 어떤 말을 해도 나 죽어 거적때기 바깥으로 맨발을 비쭉 내민다 해도 안 믿지 절대 안 믿어 예컨대 늘 이런 식이지 오늘 아침 내가 사용한 치약은 애경에서 만든 동의생금 치약이었어 진심이야라고 말해 줘도 안 믿지 안 믿어 정말이냐고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심지어는 니가 인간이냐고 그러지 그러면 난 말하지 글쎄 그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이라고 그랬더니 애인은 그냥 막
울기만 하지 울다가 그게 진심이냐고 좀 진심을 말해 보라고 다시 재촉하지 그러면 난 그래 진심이 아니면서도 이렇게 말해 버리지 사랑해 아 이런 말을 듣고도 내 애인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지 그럴 때면 아주 대놓고 욕을 하지 진심을 말해 보라는데 웬 사랑 타령이냐고 사랑이 그렇게도 중요하냐고 사실 나도 사랑이 살아가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더 나아가 사랑은 역사적이고 계급적이고 담론적이고 수행적이고 훈육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주 자알 알고 있다고 원한다면 참고자료 목록을 작성해 줄 수도 있다고 공손하게 두 손 모아 말해 주지 말해 줘도 정성을 다해 말해 줘도 이제는 소용없는 일 그걸 아는 놈이 사랑한다고 씨부리냐고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생난리지 미안하지만 어렵다고 도대체 진심이 뭔지 네가 요구하는 진심이 뭔지 모르겠다고 진심으로 말하면 또 울지 울기만 하지 지도 어렵다고 도대체 진심을 말해 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길래 말해 주질 않느냐고 그러면서 막 울지 급기야 나도 괜히 짠해지고 그래서 눈물도 한 방울 두 방울 나고 그러지 그래서 울면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사내새끼가 말도 못하고 질질 짜기만 한다고 진심도 없고 울기만 하
고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개그 하냐고 차라리 개-그나 하라고 나는 애인이 개그를 개-그라고 발음하자 급진적으로 서러워지지 서러워질 수밖에 서러워져서 울기만 하지 진심이 뭐길래 도대체 진심이 뭐길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를 이렇게 쓱싹 갈라놓는 건지 아니 도대체 우리 언제 사랑하기나 했었는지 아리송해지고 그래도 우리 사랑하지 않았었느냐고 이건 진심이라고 아 그러냐고 나도 진심이라고 자꾸 진심이라고 말하고 진심이라고 말하다 보니까 지금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도 같고 그러니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는 언제나 비극적인 거라고 비극은 운명이라고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거라고 그래도 한 번만 더 사랑하면 안 될까 싶기도 하고 운명을 뛰어넘는 게 사랑이라고 우리 그렇게 서로 사랑하자 응 그러자 인생 그거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아닐까 그러다 낄낄낄 웃고 웃다 보니 진심인 것도 같고 똥구멍에 털도 안 나는 걸 보면 모르겠냐고 아니 아니 아까까진 우리 울었었는데 그때가 진심이었지 않았느냐고 왜 웃냐고 도대체 진심을 말해 달라고 아까보다 더 심하게 울면서 애인은 진심을 말해 달라고 이젠 협박까지 하고 나는 또 하염없이 진심으로 진심을 다해 말하지 말하지만 맨날맨날 우리 지칠 새도 없이 말하지 오로지 사랑의 奇跡으로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불타는 인내심으로 진심을 말하지, 말하지……만
奇跡의 조건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거나 6천 년이거나 아니면 그 사이 어디쯤 도무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터 졸기 시작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누런 개 한 마리 원당교회 뒤편 장군식당 평상 아래 말복 땡볕에도 끄떡없이 저 졸고 싶은 대로 졸고 있는 똥개 한 마리 식당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침을 흘려도 침을 흘리면서 그 장대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아도 참으로 무심타 닭다리 뼈를 던져 줘도 심드렁 닭다리 뼈에 파리가 앉아도 뚱하니 수수방관하는 저 견고한 명상 Ob-la-di Ob-la-da life goes on 우울도 권태도 슬픔도 실망도 분노도 저주도 하물며 한가함도 들어설 틈 없는 저 완벽한 망각의 자세 한 생이 흐르는 강물처럼 深深한 오후 미루나무 잎잎마다 부산히 안부를 전하고 가는 바람 그마저도 부질없는 일이라는 듯 정녕, 그럴까? 45억 년이거나 6천 년이거나 아니면 그사이 어디쯤 도무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一心으로 침을 흘리고 있는 개 한 마리 지구를 통째로 당겼다 풀어놓았다 당겼다 풀어놓았다 一心으로 Ob-la-di Ob-la-da life goes on la-la-la-la-la-la-la
채은
2003년 ≪시작≫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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