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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시/이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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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
물소 뿔 밀다
몸 안 독소를 끌어올리는 서각
비스듬히 날 누여 온몸 문지르자
살갗에 팥알 같은 피멍울 비친다
물소가 옆구리, 등줄기, 척추
한 가운데 들이받는 것만 같아
한바탕 숨 멎고, 레드옥스에게
쫓기고 쫓기는 투우장 붉은 망토
내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
연마기로 문질러 돌 속 꽃을 찾는
화문석 바로 나인가 생각했다
손 내밀어 이마 짚고, 누군가를
자란자란 쓰다듬어준 일 있었던가
불티처럼 날아와 세간에 붙은 딱지
떼어내고 닦아내도 연비처럼 남는데
얼마만큼 더, 내가 나 아니어야
한 피륙의 삶 붉은 찔레꽃 필까
향기롭게 이지러지는 생물이 될까
눈물조차 붉은 저녁 방파제에 서서
독기 고인 한숨 곤두뱉을 때
새파란 파도가 곧 죽으며 하는 말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몸 누인다
25시 김밥천국
집을 버려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중심을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헛헛한 세간에도 간단없는 김밥말이는
제 손으로 외투 한 벌 지어 입는 일
무미無味의 속 빈 김밥 같은, 수척한
젓가락 한 벌 같은 불 꺼진 전봇대쯤은
허기진 골목에 남겨두고 돌아섰으리
어제 만난 그녀에게도 갯내가 났던가
심양瀋陽 떠나오기 전 한 번도
김이란 걸 본 적 없다던 심양沈孃
생쌀 씻어 물기 닦아 김 위에 펴고
당근, 지단, 오뎅, 우엉 살뜰히 놓아
한소끔 쪄내자 죽이 됐더라는 말, 맹추
하고 놀렸지만, 고두밥처럼 목이 메었다
별 지도록 가게 문 드나드는 손님 늘어
120만 원, 수표 석 장으로 포근한
천국의 한 달 고향에 송금하며, 고마워요,
돈 줘서 고마워요, 단무지 같은 반달눈
웃는 심양, 그녀만의 천국에, 어머니
당신도 한 걸음 들여놓으시려 지금
김밥 한 줄 들고 문 밖 서성이는데,
죽처럼 한 데 얽고 녹아들었으면 싶은
곡진함이 밥물처럼 식당으로 밀려들 때
구인광고 눈물로 읽고 와 만드는 김밥
야무지게 김발에 말아 썬 여덟 동가리를
검은 접시에 북두칠성으로 띄워놓는 밤
잘라놓은 김밥 꽁지 하나는 마침표 같아
한 입에 우적우적 씹어 삼킨, 긴 침묵
찰진 김밥, 못 다한 독백 양 볼 부풀고
지상에 내려놓은 별빛 긴 밤 내내 환한데,
이민아
200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동아일보>,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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