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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작품(시)/임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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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임효
새로운 타법
틱, 틱, 틱 계산대에선 새로운 타법이 시작되었다 내 찍을 때마다 먹이의 살점이 박혀 오차 없이 인쇄된다 링에서 훅 한 방에 틱, 넘어간 골리앗의 포효, 한 컷으로 쏟아질까 두렵다 다채널 프로그램이 믹싱되어 누락되었다 나의 코드를 꽂아 열고 싶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날아오기까지 독수리, 그녀의 깃털을 뽑고 발톱을 물들였다 수식어에 현혹된 거추장스러운 살인의 추억, 계산되지 않은 인질극은 자작극으로 끝나버리곤 하였다 알리바이를 하나씩 추가해야 했다 틱, 틱 작성한 진술서를 전한다 전문의는 의식 없이 반복하는 행위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밤의 문을 밀고 들어가 쇼를 할 것이다 큐 사인만 주면 펑! 하며 독수리들이 튀어나올 것 같다 입을 열게 하고 싶어 리모컨을 틱, 눌러댄다 거꾸로 로꾸거 질펀한 관계 후 피투성이 혼혈을 생산할 것이다 이벤트 실시 - 금일 이용한 VIP고객에 초대권 지급 예정- 틱, 틱, 틱 진술을 마쳤다
오래된 정원
1
누덕누덕 새고 있는 기억을 재생하며
구멍을 막는 노파, 절대 안정
수액을 맞고 있는 늙은 단풍나무의 수피가 까칠하다
새고 있는 건 기억만이 아니어서
하릴없이 냉장고 문을 여러 차례 여닫거나
TV 리모컨을 들고 여보세요, 하던 그녀의 눈
문득 보이지 않는 구멍이 난 걸 나는 안다
눈물이 새고 콧물이 새고
급기야 오줌 줄기까지도 샌다.
기실 막아야 할 구멍들 투성이다
2
카운트다운은 계속 진행된다
가슴 졸여하거나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 따위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내일의 오늘이 포인트로 쌓여가고 있어
잔고는 늘 누적된다
나의 패가 맘에 들지 않아, reset!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ll
리셋증후군*에 다져진 정원에 구멍이 보인다
재생과 연결된 수십 가닥의 뿌리로
이미 만성이 된 중독의 핏줄
병사의 손에서 죽은 시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생장의 부름켜를 정지한
3
오래된 정원이 된 그녀의 몸에서는
잡풀 하나 키워내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구멍을 닫지 않으려는 듯
삽짝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누구라도 심심하지 않도록
구석구석 숨은 그림 열어보면
노을처럼 몸부림치던 단풍나무와 만나게 되리라
그러나 명심할 일은
그렇게 만난 그녀에 대해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툭 떨어진 얘기 속 어떤 모습의 그녀라도
오래된 정원을 열어준 그녀에 대한 예의다
수액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오래된 정원에 가득하다
*리셋증후군(reset syndrome):게임중독으로 인한 정신적 장애. 게임에서 불리하면 종료 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혼돈을 일으킴.
현상수배
바른손이 바벨을 움켜쥐자 외약손이 성경을 집어 던졌다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했는지 후루루룩 마른 낱장이 떨어진다 첫 남자를 떠나보낸 이브의 집에 당신은 허락도 없이 불쑥 들어섰다 가택침입과 불법주거점유를 그는 모른다 당신과의 동거 후 불협화음은 일상의 음계였다 당신에게 전부를 걸어 재테크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탕진하고 말았다 열린 하루치는 물론 이브의 25시까지 감시를 늦추지 않던 당신, 무거운 돌 내리려 당신을 찾으면 안면몰수하며 수수방관하였다 풀린 오라 하나 매듭지을 줄을 몰랐으며 왼손이 한 일을 옳은 손이 모르도록 당신은 책임을 묻기도 전 떠나 버렸다 당신은 어느 아담의 등 뒤로 숨어 버렸는가 당신의 마스크를 쓴 이들이 도처에 나타났다 국적 없는 사생아들은 날마다 태어나 바벨의 가위에 눌려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번듯한 명함을 돌리며 믿음의 눈빛을 남발하는 당신을 현상수배한다
포상금- 이브의 갈비뼈. 인상착의 및 특징- 자칭 하느님이라고 함. 변신술의 귀재라서 누구도 정확히 본 적이 없으니 각별한 주의 요망.
오리들의 다비식
경문 펼치듯 연잎들이 가지런히 귀를 맞춘다
난만한 구절 하나 유실되지 않도록,
18번이 108번 되지 않도록 술술 꿰어야 한다
구업口業은 거세된 머리로 벌써 소멸된 채
터럭마다 번뇌 내려놓았다
탈피입망脫皮入亡에 든 오리 한 마리
척, 연잎에 십자로 싸여 엄숙한 찜식에 든다
캄캄한 토굴 같은 울타리를 빠져나와
비로소 안거에 드는 것이다
미처 받아 적지 못한 게송 받들어
뜨거운 찜 솥에 속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유황불인들 마다할 리 있겠는가
지글지글 한없이 자유로운 승천의식
압력의 추를 내리자 자지러질 듯 환호성을 지른다
무간지옥의 고통을 평정한
불보살이 숨을 돌리는 것이다
세 첩 반상 위 적멸보궁에 이른 듯
파리대왕조차 성스러운 광채에 눈이 멀었다
한 배 가득 은행과 대추, 헛개나무 등을 품어
백녹적황 영롱한 진실 사리를 남겼다
불목하니가 부젓가락을 들고
허물어 버린 육신을 헤집으며 사리를 수습한다
찜찜한 내색도 없이 간판 불 켜들자
오리집 뒷마당에서 꽥꽥 경 읽는 소리 터져나온다
佛母, 아들을 키우다
― 마야 부인은 봄날 꽃길을 거닐다 옆구리로 석가모니를 낳았다
사내는 40년 생 佛母다
날마다 몇 명의 부처를 낳는다
더러 손끝에 피를 묻히기도 한다
태를 자르기보다 더 힘겹게
자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내는 개안을 한다
아들이 게슴츠레 눈을 뜬다
사내가 그려준 창을 열어 제치는 것이다
한 번도 치켜 떠보지 못한 눈
아들은 기도를 한다
번쩍 눈을 떠 세상에 들고 싶다
不母들은 아들을 키우지 않는다
모텔 주차장 구석에서
갓 낳은 아들이 발견되었다
CCTV에 아들을 유기한 불모가 찍혔다
사내가 破佛된 아들을 수습한다
매출이 떨어지자 사내는
시리디 시린 옆구리를 더듬어댔다
아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온다
아직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당선 소감
백지의 공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스토커보다도 더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시에서 도망친 적이 있다. 탈주의 자유가 그러할까? 그러나 그렇게 훨훨 시의 미련을 벗어 던지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탈주의 명분으로 뒤늦게 시작한 커리어우먼의 거리낄 것 없는 생활을 최대한 즐기며 2년여의 세월을 소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적 공황과도 같은 무기력증이 엄습해왔다. 정열적으로 몰입하던 일은 시들해졌고, 오히려 내게서 정열의 누수 현상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거역할 수 없는 무병보다 더한 것이 시마詩魔의 덫이리라. 시에서 깨끗이 벗어났다고 버티며 오만과 오기를 부리던 시간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접고 다시 시마의 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갔다. 시의 힘은 종교보다도 강력한 흡인력으로 나를 세워 주었다.
백지의 공포가 그리워 다시 돌아온 어리석은 제자를 아무 말 없이 받아주신 배재대 강희안 교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큰 가르침에 이르지 못하는 게 늘 면구스러울 뿐이다. 오랜 시간 지독한 시마에 들려 있는 문우들과 탁주 한 배라도 나누고 싶다. 규행과 은재에게도 늘 빛나는 모습으로 걸려 있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있어준 따뜻한 풀잎과 꽃들에게도 감사한다. -당선자 임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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