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7호 계간평(소설)/이정석
페이지 정보

본문
계간평/소설
집착, 혹은 그로부터의 벗어남
이정석|문학평론가
∙방현희, 「드빌 초콜릿, 그 남자의 손목시계」(≪리토피아≫, 2007, 여름호)
∙백가흠, 「사랑의 후방낙법」(≪문학동네≫, 2007, 여름호)
∙김애란, 「칼자국」(≪세계의문학≫, 2007, 여름호)
1.
이제 진부한 상식이 되어버린 명제. 서구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의하면, 인간은 어머니와 밀착된 상상계적 시기를 지나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ㆍ문화적 총체인 상징계의 영역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온전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그러나 방현희의 인물들은 독립적인 사회의 주체로 서기 위해 반드시 수용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끔찍할 정도로 과도하게 어머니에 집착한다. 이는 그녀의 인물들이 성년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하고 유아적 세계에 병적으로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드빌 초콜릿, 그 남자의 손목시계」에서도 방현희의 인물은 그 특유의 모성 집착을 드러낸다.
한 병을 비워갈 무렵 우리는 어두컴컴한 바 아래에 어깨를 붙이고 쭈그려앉아 바야흐로 오크통 속의 보리알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독 이 자리를 좋아하는 건 바로, 단 한 번도 햇빛과 신선한 바람이 닿아본 적이 없는 지하 중에서도 지하, 마치 좁디좁은 오크통 속 같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이 아래에서는 술을 마시면 고스란히 내 술이 된다. 나와 어머니의 과거도 미래도 쉬지 않고 똑딱이는 그 자의 시계도 잊을 수 있다. 나는 술을 입안 그득 물었다. 목울대가 꽉 조여오도록 단숨에 삼켜버렸다. 누군가 아무리 위스키와 남양분유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해도 한입 가득 넘겼을 때 목이 메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 「드빌 초콜릿, 그 남자의 손목시계」, 93쪽
“단 한 번도 햇빛과 신선한 바람이 닿아본 적이 없는 지하 중에서도 지하”. 그건 타자의 개입을 조금도 허용치 않은 인물의 자폐적 내면공간과도 같다. 거기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뚜렷한 경계 없이 몸을 뒤섞는다. 그러므로 방현희의 서사공간은 손쉽게 신화적 공간으로 전화轉化되기도 한다. 이 무시간적 신화의 공간 속에서, 방현희의 인물은 어머니를 향한 병적인 집착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이때, 그가 집착하는 어머니가 물리적으로는 이미 생명의 물기가 다 빠져나가 빈 껍데기뿐인 존재여도 하등의 상관이 없다. 비록 그 어머니가 현실적으로는 생명을 다한 죽음의 존재라 할지라도, 인물의 심리적 현실에서만큼은 생생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그를 잡아끈다.
「드빌 초콜릿, 그 남자의 손목시계」가 눈길을 끄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아버지를 향한 이끌림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줄곧 ‘그 자’로 지칭되는 아버지의 뒤를 밟아 나간다. 그 자는 여자를 제공한 대가로 얻은 손목시계에 “또박또박 시간을 맞추며 제 할 일을 정확히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자를 미행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는 그의 행위를 모방하는데, 이는 상징계의 영역에 다가서고자 하는 욕망이 가시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시계를 볼 때마다 나도 반사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77쪽)
교환의 대가로 얻은 손목시계는 그 자가 내적 결핍을 메우고 “엄숙한 표정과 걸음걸이, 중후한 음성, 절도 있는 동작들”(96쪽)로 무장한 채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제공한다. “파일럿의 시계를 차면 하늘을 장악한 기분이 들 테고, 미군용 특수시계를 차면 치열한 전장에서 아주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성싶겠지. 극지 등반용 시계를 차면 자신이 악천후와 악조건을 능히 이겨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한정판으로 발매된 고가의 오메가 시계를 차면 그만한 부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바로 그들과 같은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걸까.”(95~96쪽) 그런 그에게 ‘나’는 연민과 동경의 감정을 품는 동시에, “오래 차곡차곡 쌓인 분노”(88쪽)를 무기 삼아 “가뿐한 마음으로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수”(96쪽) 있음은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줄곤 어머니에 대한 집착과 아버지를 향한 증오와 연민의 양가감정 사이에서 머뭇거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사의 말미에 이르러, ‘나’는 ‘소월길’을 거닐다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의 그것처럼, 돌연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를 보고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죽은 누군가는 이처럼 가벼운 영혼이 되어 퐁퐁 날아다닐 것이”(97쪽)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서 이 순간적인 깨달음의 몸짓이 병적 집착의 진창에서 벗어나 조금씩 세상으로 나아가려 방현희 인물의 힘겨운 움직임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과도한 해석만은 아닐 것이다.
2.
그동안 백가흠 인물이 보여준 집착은 방현희의 그것 못지 않게 퇴행적이고, 그로테스크했다. 그에 비한다면, 「사랑의 후방낙법」에 보여지는 집착은 그다지 퇴행적이지도 음습하지도 않다.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그래서 “본인이 입으로 유도를 한다고 하긴 전까지는, 그녀가 남자들도 버티기 힘들어하는 엄청난 훈련을 소화하는 유도선수일 거라고는 짐작하기 어”(209쪽)려운 몸을 지닌 유진. 그리고 “좁은 어깨와 벌어진 젖가슴, 두툼하게 허리를 두르고 있는 뱃살까지 영락없는 유도선수의 몸”을 한 민숙. 그렇게, 아름다운 육체와 다소 괴이한 육체가 나란히 병치되지만 특별히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유진과 민숙은 외양만큼이나 상반된 성향의 존재다. 유진은 자기 학대에 가까운 혹독한 훈련을 통해 국가대표 선발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고자 한다. 물론 그녀에게 운동은 자기 목표의 성취를 위한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숨이 서서히 차오르고 열이 오르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은 상태”(221쪽)에 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비로소 그녀가 “밤마다 치근대던 새아버지의 손길도,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돌아눕던 엄마의 야윈 등도”(221쪽) 기억 밖으로 날려보내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진에 비한다면, 민숙은 “성적에 대한 욕심도, 운동으로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도”(213쪽) 없이 만사태평인 인물이다. 그런 유진에게도 민숙에게도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221쪽) 내지 “불가능에 가까운 일”(220쪽)이다. 그러나 유진을 향한 민숙의 집착은 불가능에 가까운 그 일을 대단히 손쉽게 달성하도록 만든다.
도복 잡을 때 쥐는 힘이 아주 좋던데 주로 어떤 훈련을 하셨습니까?
……
민숙은 유진의 경기에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다. 바짝 들이민 마이크를 멍하니 바라본다. 민숙은 잔뜩 얼어서 어안이 벙벙하고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쥐는 힘이 좋은데 어떤 훈련을 했냐고……
민숙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연신 유진의 경기를 힐끔거리며 한참 뜸을 들인다.
……제가 빨래를 좀. 유진이 언니 거랑 제 거랑 엄청나거든요. 하루에.
……하하하. 재밌는 대답이시네요. 이제 올림픽이 이백여 일 앞으로 다가왔는데요. 앞으로 각오와 계획, 바라는 게 있다면 한 말씀 해주세요.
……바라는 거요? ……울 아부지가 군인이었는데, 죽었거든요. 자살 안했는데 계속 자살했다 카고, 할무이는 맨날 데모하거든요. 아부지 죽음이 진실로 밝혀졌음 바라구요. 유진이 언니와……
민숙은 유진의 건승을 기원하려는 말을 하려다 멈춘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매트를 바라본다. 유진은 난생처음 가장 아름답게 허공을 날고 있다. 착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므로 그 아름다움을 더욱 빛이 난다.
― 「사랑의 후방낙법」, 227~228쪽
“호리호리한 유진에게 안긴 덩치 큰 민숙이 아주 작은 어린아이”(223쪽)라면, 민숙에게 유진은 한없이 매달리고 싶은 엄마와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떨어지고 싶지 않은 모체를 향한 민숙의 원초적 충동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괴력의 발휘하게 만든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열망이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현실과 조우하면서, 그것을 교란하고 그것이 은폐하려는 현실의 모순을 폭로케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열망이 좌초되는 백가흠 소설 특유의 숙명론이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의 후방낙법」은 한정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충동의 난장亂場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냉철하게 그려내던 이전의 소설적 경향에서 탈피해, 조금은 밝은 톤의 낭만적 색채를 가미하고 있을 뿐이다.
3.
개체발생의 차원에서든 계통발생의 차원에서든, 인간이라는 존재는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인 숙명으로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어머니와의 분리를 저토록 저어하는 방현희의 인물들이 잘 증거한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김애란의 인물만큼 집착에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김애란의 그들은 어머니 때문에 애달파 하지 않으며, 자신을 떠난 아비도 넉넉하게 품을 줄 안다.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다.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을 때 처음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내겐 어머니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내게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이 더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118쪽)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 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 「칼자국」, 103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애란의 그들이 가족을 속박으로 치부하는 자유주의자인 것도 타인에 무심한 냉혹한 이기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가령, 「칼자국」의 ‘나’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이 아픈 건 아니지만, “대신 심장이, 창자가, 콩팥이 쓰렸다.”(124쪽)고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나’에게 어미의 흔적은 머리가 아니라 몸 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나’에게 어머니는 짐승의 ‘어미’고, ‘나’는 그 ‘새끼’일 뿐이다. 이는 대단히 원초적이어서, 거기에 의식적 무의식적 집착이 들어서지 못한다. 게다가, ‘나’에게 어머니는 주관적 감각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이해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의 칼질에서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 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106쪽)음을 감지하지만, 거기에 “사랑이나 희생”(105쪽)의 관념을 덧씌우지 않는다. 사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과잉 덧칠이 없으니, 원한이 들러붙지도 않는다. 그렇게, 김애란은 한평생 무능한 가장을 대신해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부양한 어머니를 그리면서도, 거기에 이전 세대와 다른 서사적 질감을 부여한다.
4.
어떤 문학은 통념과 상식에 안주하지 않는다. 문명체제를 떠받치는 상징적 질서를 지키는 데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문화의 경계, 혹은 규범적 질서의 체계 내부에 도사린 균열을 파고들려 한다. 문화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는 인간 내부의 원초적 자연에 몰두한다. 그 어떤 의미체계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움직임, 그 미묘한 떨림과 머뭇거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문학이 ‘도덕을 넘어선 도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기이한 도덕으로서의 문학은 문명세계 내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불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 자연과 문명의 영원한 갈등과 화해의 문제들에 대한 탐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정석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숭실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 이전글27호 계간평(시)/조하혜 08.03.01
- 다음글27호 리토피아 신인상 심사평/이가림 08.03.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