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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계간평(시)/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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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13회 작성일 08-03-0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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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아름다움에 관한 소유

조하혜|시인

∙문정희, 「숨쉬는 시」(≪현대시학≫, 2007, 7월호)

∙백인덕, 「시집을 품은 암살자」(≪시인시각≫, 2007 여름호)

∙우대식, 「탈출」(≪문학 선≫, 2007, 여름호)

∙최준, 「호텔 그랜 멜리아」(≪시와 세계≫, 2007 여름호)

∙신정민, 「노새」(≪리토피아≫, 2007, 여름호)

∙정끝별, 「끝없는 나무」(≪시와사상≫, 2007, 여름호)

∙조용미, 「기억의 행성」(≪문학사상≫, 2007, 5월호)

∙이언빈, 「어느 문학시간에」(≪미네르바≫, 2007, 여름호)



1. 열정의 기원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그림 「배심원 앞의 프리네」라는 작품에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수많은 남성들 앞에서 옷이 벗겨진 채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서 있다. 이 작품 속의 모델은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 아테네에서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모델이기도 했던 ‘프리네’라는 여인이다. 그런데 프리네는 직업적인 매춘부였지만 쉽게 소유할 수 없는 여성이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지만 프리네로부터 거절당한 귀족 에우티아스는 그녀에게 신성모독죄라는 죄명으로 그녀를 법정에 기소한다. 당시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최고형벌의 죄였는데 그녀의 죄를 판결하기 위해 법정에 모인 배심원들은 옷이 벗겨진 채 나체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녀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아름다움에 대한 오래된 법정 공방 앞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들여다본다. 굳이 숭고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경관이 뛰어난 장소 앞에서 바위 위에 자신의 이름을 음각하는 행위나 카메라 렌즈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필름에 담아두려는 행위, 그리고 위의 그림처럼 여성에 대한 세속적 소유 욕망 역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에 근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소유에 관한 근원적 욕망이 시인들의 백일몽과 지칠 줄 모르는 피로한 열정의 기원에 관계된 것이라 생각한다. 영혼의 순례자들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며 현실에서 소유할 수 없는 또 다른 생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는 일, 인류가 진화한 이래 그들은 아름다움의 사제로서 고대인에서 지금의 인류로 진화했거나 퇴행했을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그려진 들소의 뿔처럼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제 운명을 향해 돌진하였던 오래된 종족의 흔적들. 어쩌면 이들에겐 원시인류였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과학적 사고와 혁명을 추구했던 근대적 인간과는 다른 그들 종족만의 미학적 학명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2. “언어가 나의 탯줄이다”


대학 입학 선물로 미당이 준 영어성경에는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끝없이 누가 누구를 낳아

아직 젊기 만한 나는

누가 누구를 낳기 만한 그 산맥이

멀고 지루하기만 해서

그만 덮어두었다가

귀밑에 은실 같은 머리칼 하나 둘 날리는 날

아직도 마음 어둡고 여전히 무릎 꺾이어

책상 위에 놓인 그 책

바람이 제 멋대로 펼쳐놓은 곳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어보니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미당은 가고

나 그때의 미당 나이가 되었지만

겨자씨보다도 못한 시

대학에 갓 입학한 그때 그대로

떨리는 손으로 아직도 붙들고 있다가

문득 곁에 펼쳐진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끝없이 낳고를 읽는다

이 일 말고 더 좋은 일 없다는 듯이

언어의 탯줄을 따라 흘러가는 것 말고

더 크고 좋은 일 없다는 듯이

진종일 그걸 따라 흘러가본다

― 문정희 「숨쉬는 시」(≪현대시학≫, 2007, 7월호)


이 시에서 시인은 전도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 때 시인이 반복하여 사용하는 구절은 종교적 경전의 성격과는 다르다. 전도서의 기자가 세속적 덧없음을 노래하는 데 반해, 시인은 전도서의 기자가 추구하는 신에 대한 절대적 귀의마저 초월해 종교적 덧없음을 노래한다.

따라서 시인은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또 누가 누구를 끝없이 낳았다’고 하는 인류의 계보와는 달리 ‘겨자씨만한 시’를 통해 종교적 믿음과는 다른 믿음, 즉 시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는 언어의 사제이며 후예이다. 시에 등장하는 ‘미당’은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호처럼 인류의 계보 위에 집을 짓지 않았던 시의 제사장인 셈이다. 이러한 미당의 계보를 이어 시인은 이 땅에서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목적인 시, 즉 ‘숨쉬는 시’를 쓰며 ‘흘러간다’. 육상생물에서 수중생물로 고생대의 저 끝없는 미물로 거듭해서 세속적 아름다움과는 달리 인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찾아 시인들은 경계를 초월해 떠돌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세속적 아름다움과는 달리 인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이때 날선 부정의 정신이 시인들의 오래된 경전이며 혁명이었음을 보는 것은 새롭진 않지만 늘 처연해지는 대목이 아닌가.


혁명을 하고 싶다

아니, 그 물결에 흠씬 얻어맞고 싶다.

심리적 앙상레짐을 산산히 깨부수고

숭고한 평등과 박애의...

-또 베었다

숙취에 휩싸여 일회용 면도기를 무성한

의지의 역방향으로 밀어대는 새벽,

촌티나는 혁명을 하고 싶다.

내 생의 바스티유를 습격하고

콩코도르 광장에서 미친 듯 환호한 뒤

몽마르뜨*언덕에서 질펀하게, 쿨하게 취해

무연고 사체로 겨울 한때만 출몰한다는 거룩한

동사자凍死者 명단에 오르고 싶다

거룩함이란 지나치게 사소한 믿음 탓에

미정형未定型의 형상形象

가여운 거룩함이여!

그나저나 이렇게 날이 안 섰거나 빡빡했다면

당통, 피에르는 얼마나 따가웠을까?

-찌릿, 또 베었다

간절히 혁명을 바라는 새벽마다

구겨진 전단지처럼 잔주름만 느는

헤헤, 요즘의 나.

*몽마르뜨: 파리의 사창가. 절대 예술의 거리가 아님.

― 백인덕, 「시집을 품은 암살자」(≪시인시각≫, 2007, 여름호)


이 시에서 늙어가는 시인은 ‘내 생의 바스티유’를 목도하고 있다. ‘생의 바스티유’는 어떤 곳인가? 그곳은 세속적 의미의 ‘앙상레짐’을 초월해 ‘의지의 역방향’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곳, 자아의 부정을 통해서만 전복할 수 있는 곳이다. ‘무연고 사체’가 발견되는 것은 자아가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고 ‘의지의 역방향’을 통해 ‘생의 바스티유’를 ‘습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바스티유’는 그에게 생의 영예를 보장했던 세속적 의미의 궁전(아름다움)이며, 아울러 감옥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세속적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아를 초월하는 ‘가여운 거룩함’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그의 시에서 이 ‘가여운 거룩함’을 들여다보는 것은 처연하지만 희극적이다. ‘구겨진 전단지처럼 잔주름만 느는 헤헤, 요즘의 나’라고 하는 시인의 자화상은 스스로를 조소하면서 ‘가여운 거룩함’, 즉 ‘혁명’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한 부정의 방법을 통해 시인은 세속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벗어나 자아를 초월하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 ‘가여운 거룩함’이 빚어내는 절박함은 또 다른 시인에겐 종교적 허무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내 영혼을 끌고 자꾸만 깜깜한 동굴로 간다. 감옥을 명상한다. 가슴

을 쥐어뜯다, 빨리 콘크리트로 된 지상이 끝나기를 기원하였다. 이 땅에 살

면서 무명無明에도 울고 무명의 다함이 없음에도 울었다. 나는 평생 영원이

라는 집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언제나 지상의 삶을 그리워할 것이다. 어두워

진 유월의 저녁, 뒤란에서 담배를 피다가 어스름 속에 피어난 양귀비꽃을

보았다. 저 혼자 황홀하게 타오르는 우주의 거웃. 나는 가만히 입을 맞추다

가 다시 사막을 걸어가는 대상大商이 되어 머리에 터번을 얹고 있었다. 신

은 자꾸 내게 명상을 권한다. 어느 날 나는 지상에서 탈출할지도 모른다.

― 우대식, 「탈출」(≪문학 선≫, 2007, 여름호)


이 시에서 시인은 종교적 명상을 통해 ‘무명’의 세계를 발견하였으나, ‘무명의 다함이 없음’에 절망한다. 그에게 ‘영원’은 ‘무명’이기에 신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에서 ‘탈출’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그에게 허락된 ‘무명’의 삶과는 달리 ‘황홀하게 타오르는 우주의 거웃’처럼 핀 ‘양귀비꽃’의 세계는 고독한 시인에게 ‘무명’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게 하는 대상이다. 즉 시인은 ‘무명’으로부터 자아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통해 자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탈출은 위치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에서 공간 이동을 보여주는 여행 서사는 이런 의미에서 세속적 자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현실에서 소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통해 훼손되고 피폐해진 자아의 세계를 치유하려는 것이다. 이때 시에서 아름다움의 대상이 상상적 타자로 나타나는 것은 자아가 자신의 현실을 벗어나기 힘든 ‘감옥’과 ‘무명’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상상적 타자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종교적 허무와 관계된 시인 개인의 일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속적 자아에 대한 부정은 시인에게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소음과 폭염의 거리에서

춤추는 나무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요

일렁이는 외로움을 박수치지 않지요

호텔 2층 커피숍

거대한 출입문과 에스컬레이터를 등지고 서서

팝송을 부르고 있는 저들은

저녁의 사간을 노래하는 저들은

거리의 나무들 어두워질 때

나뭇잎 그림자 지워져 추억 없을 때

추억을 입맞춤하는 저들은

우리가 너무 멀리 와 있는 거 아니냐고

빨간 비로드로 감싼 몸을 흔드네

시거 연기 자욱한 아바나 해변 까페

해안선 바라보며 춤추던 재즈 영웅들

뉴욕 뒷골목 노인들로 쓸쓸히 묻혀 간 그들의 전설을

기억하지요 우리들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답니다 떠나 온 곳이 아름다웠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아 아 당신도 언젠가는

당신에게 버려질 운명

생의 그 아득함에 길들여지면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버거워지는가요

피아노와 첼로가 파도치는 보트 위에서

저들은 남녀가 아닌 한쌍의 어둠으로

낯선 실내의 공허를 노래하고 있네

― 최준, 「호텔 그랜 멜리아」(≪시와 세계≫, 2007, 여름호)


‘소음과 폭염의 거리’에서 시인에게 미적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춤추는 나무’와 ‘일렁이는 외로움’은 소외되어 있다. ‘호텔’이라는 현대적 공간에서 ‘추억을 입맞춤’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추억’을 상실한 곳에서 스스로에게 ‘버려질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의 아득함’인 ‘추억’과 ‘고향’의 존재는 그들에게 ‘버거워’진 것이기에 그들은 그러한 존재를 상실한 채, ‘첼로와 피아노’가 있지만 ‘소음’의 거리에서 ‘공허’를 노래한다.

그런데 추억=고향=아름다움, 소음=공허=상실의 이분법은 루카치 미학의 서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더구나 이 시에서 ‘추억’을 잃고 ‘공허’를 노래하는 것은 ‘소음’에 불과하다. ‘노래’와 ‘소음’의 이분법에 대해 이 시는 과거와 현재라고 하는 시간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 ‘추억’하는 방법은 이러한 이분법만이 전부일 수 없다. 때로 과거란 악몽처럼 현재의 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시인들의 시에서 과거와의 고투가 벌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미적 대상에 대한 시간과 공간의 사투야말로 현대예술의 고단한 주제가 아닌가.


3. 노새를 그리는 데는 죽은 고야가 필요하다?


―노새를 그리는 데는 고야가 필요하다 고야는 죽은 고야 한 사람 뿐이며, 노새

가 그를 요구한다 해도 자기 몸의 고생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

다. 노새들이 만약 입을 열수 있다면, 그 苦境을 덜어 줄 누군가를 찾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를 보러 사상터미널에 갔다

도착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차에서 내린 사상들이 이내 흩어졌다

모든 출입구가 잠시 북적거렸다

그는 손수레 옆에 서서 무거운 짐을 기다렸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는 자의 짐을 수레에 실었다

평생 타인의 짐을 실어 나른 그가 운다면

분명 나귀의 울음소리일 것이다

그도 한 때는 무거운 짐이었다

늙은 그를 터미널에 부려놓고 떠나버린 시간

검은 모자 밑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커다란 가방을 옮기고 있다

지금도 그를 그리는 데 죽은 고야가 필요할까

무거운 회색조의 하늘에 그어진 수많은 빗금들

고독을 달래기 위한 자화상이

사상터미널에 걸려있다

*헤밍웨이의 「死者의 自然史」에서.

― 신정민, 「노새」(≪리토피아≫, 2007, 여름호)


‘노새’를 그리는 방법을 찾다가 시인은 ‘헤밍웨이’의 글을 발견한다. 그는 ‘노새’를 그리는 데는 ‘고야’가 최고지만, 죽은 ‘고야’ 대신 ‘노새’가 자신을 그려줄 누군가를 찾을 것이라는 헤밍웨이의 글을 인용하여 대상을 그리는 방법에 대한 다양성을 ‘사상터미널’에 비유한다. 즉 ‘터미널’이라고 하는 각각의 채널이야말로 각각의 ‘사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노새에 대하여 시인은 ‘지금도 그를 그리는 데 죽은 고야갸 필요할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적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늙은 그’를 바라보며 ‘무거운 짐’을 진 고야의 ‘노새’를 떠올린다. 미적 대상의 차이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자화상’처럼 시에서 시적 화자의 고단한 삶을 울리는 것은 고야였거나 고야가 아니거나 고야라는 이름의 고단한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4. 갸륵나무로 가는 그렁그렁한 노래

물에 빠진 생쥐소리를 내며 떨어졌어요

한 방울! 저런

연두 이파리 끝에서 길을 잃었으니

이 계절을 지나려면 천년은 걸어야 해요

두 발이 닳을 때까지

두 눈이 마를 때까지

끝이겠지 하면 차올라 온몸에 출렁거려요

나무 껍질에 배어나는 말간 노래들

밤바다를 통째로 삼킨 초록의 아가미처럼

밤하늘을 떼메고 가는 흰 별떼처럼

축축한 마음 그렁그렁 내걸어놓고

반 배부른 초열흘 눈물이 뭉클

한 계절 흠씬 젖어,

강물 같은 한 소절을 완창하려면

걷고 걷고 또 걸어야 해요

두 발이 다 닳을 때까지

두 눈마저 다 마를 때까지

― 정끝별, 「끝없는 나무」(≪시와사상≫, 2007, 여름호)


천 년 전 나무에서 떨어진 시인의 노래는 ‘천년동안’ 애절하다. ‘두 발이 다 닳을 때까지/두 눈이 다 마를 때까지//―강물 같은 한 소절을 완창’하면서 시인은 ‘끝없는 나무’ 끝에서 끝없는 절망에도 계속해서 노래를 이어갈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그녀의 노래를 나는 ‘갸륵나무로 가는 그렁그렁한 노래’라고 불러본다.

그것은 ‘강물 같은 한 소절을 완창’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나아가 ‘두 발’과 ‘두 눈’이라는 자아의 한계마저 초월할 것이다. 이 고단한 여행에서 그녀의 시는 ‘밤바다를 통째로 삼킨 초록의 아가미’와 ‘밤하늘을 떼메고 가는 흰 별떼’의 호흡과 춤을 그렁그렁한 노래 위에 새겨 넣을 것이리라.

그녀의 그렁그렁한 노래 속에서 천치 가득 핀 환한 복사꽃을 보는 것은 시인이 갸륵한 노래 때문이리라. 아름다움은 저만치 있어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제 갸륵으로 꽃피워가는 것, 그러나 그 꽃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두 발’이 다 닳아 없어지고 ‘두 눈마저’ 다 마른 시인의 유산이 아닐 지도 모른다. 다 닳아 없어진 몽땅 연필처럼 누군가의 절망 앞에서 다 닳아 없어진 시의 몸은 어디로 갔을까? 통통통 튀는 구르는 공처럼 구르는 시의 몸은 절망에 일찍이 절망한 그대에게로 가서 털썩 주저앉은 그대의 발을 향해 지구여행자로서 그대를 안내할 것이다. 고독의 학명 속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길고도 오랜 여정과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5. 고독의 유전자 對 기억의 유전


기억이라는 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 대리석 같고 절벽 같은 견고함을

아시는지요 기억은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속에 녹아

사라지고 신성한 모든 것은 모욕당한다 했던가요 기억은 물이 되어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우리가 양육해온 별들은 결국 부수어지고 말겠지요

기억은 지구를 반 넘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구는 기억의 출렁거리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입니다 빙산

이 녹아 해마다 기억의 수위가 높아집니다 기억이 뛰어올라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에는 얼음이 덮이지요

수증기가 끓임없이 대기권 밖으로 뼈져나가도 지구의 기억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다나 육지에서 증발한 기억은 구름이 되고

비와 눈이 되어 내리고 또 구름이 되고 바다로 가 다시 빗물이 되어 지상으

로 스며듭니다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대기 중에 흐르고 있는지요

기억은 영상 4도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온전히 기억의 파편

들은 굳어버리지 않고 얼음장 밑에서 헤엄쳐 다니며 살 수 있습니다 기억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입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기억의 행성이라 부르

지요

그러나 지구 전체의 기억은 많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억은 극히 적다

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억의 행성 지구는 사실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

지요 그 견고한 기억도 대기 속에 사라지고 신성한 지구만 우주의 기억 속

에 남게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지구는 결국 변형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아주 모르고 싶은지요

― 조용미, 「기억의 행성」(≪문학사상≫, 2007, 5월호)


빙하기의 공룡은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거대한 것은 사라지고 공룡발자국도 사라지고, ‘신성한 것’은 별의 속눈썹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시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공룡이 사라지고 개미의 힘만이 더 가치있다거나 지구 반대편의 고통도 더 이상 돈과 권력, 이해관계의 교환 조건 아래서 통용될 때, 그대의 나약한 시는 무엇을 쓸 것인가?

거짓 연대감을 부추기는 견고한 힘의 권력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지만, 생의 조건이 예를 들어 물이라는 것의 존재감이 H2O라고 할 때 산소가 수소 둘의 결합에 대해, 혹은 수소가 산소의 단독 결합에 대해 불평등함을 논할 때, 내가 그대라는 것의 고독의 학명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할 때, 그대가 나라는 고독의 원소기호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할 때 산소와 수소, 그대와 나는 이 고독의 학명 속에서 빙하기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

깔깔거리는 마녀의 얼음 땡― 놀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 얼어죽을 수밖에 없다면,

빙하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추운 지하의 시체 놀이를 즐기거나 해부학을 통해 고생대의 사체를 발굴해 사인을 해명하거나 빙하기 안심보험에 든다고 할지라도 고독의 유전자 속에서 그대가 빙하기처럼 지독하게 고독하다면? 이때 고독의 유전자 속에서 시인은 단순히 과거가 아닌 우주적 ‘기억’의 유전을 통해 ‘추억’을 발굴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는 기억의 출렁거리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설령 악몽에 가까운 기억일지라도 시인은 아름다움은 죽지 않는다는 불멸의 유전을 기억 속에서 발굴해낼 것이다.

그런데 고독의 유전자 對 기억 유전의 치열한 오랜 전투 속에서 이 시의 시인은 ‘변형된 기억’에 대해 염려하는 목소리로 다가선다. ‘기억’의 유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굴해내는 작업, 그러나 그것은 ‘변형된 기억’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독이라는 존재의 학명을 통해서 가능하리라.

터널 속에서 실컷 그대의 이름이나 제 이름을 소리쳐 불렀던 사람의 고독이 아니라, 터널 밖에서 터널의 고독과 고독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시인에게 지구는 오래된 ‘기억’의 유전이다.


6. 고래들의 귀환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가르치기 전

아이들 머릿속에 수평선 띠워놓고

파도의 푸른 귓밥도 풀어주면서

의자에 묶여있는 너희들의 날개를 생각한다

분필 잠시 접고

바다로 통하는 시간의 문고리 열어젖히자

일제히 의자 들고

우루루 우루루 썰물 소리로

한 줄 파아란 휘파람 해변

저마다 밝은 주둥이 물새가 되는

즐거운 상상의 문학시간

삐걱거리며 몇몇은 아직도 의자에 등 묻고

교실 안쪽을 기웃거리는 햇살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며

잠 속에 온몸 집어넣는 동안

교정의 나무들은 한 평씩 그늘 넓히며

삶의 질량을 확인하고 있다

목련이 화안히 피어서

제 걸어온 발소리 다 들릴 듯한 오후

무거운 안경테 잠꺼풀 너머

고래떼 등푸른 음표가

내 눈썹 위에 앉아 은물결치는 동안은

얘들아,

오오래 귀환하지 않아도 좋다

― 이언빈, 「어느 문학시간에」, (≪미네르바≫, 2007, 여름호)


문학의 전망이 부재한다고 하지만, 이 시에서 시인은 ‘문학’ 수업시간을 통해 일상의 시간을 예언의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혹자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가 과연 감동을 주는 시인가에 대해서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환상이 절실해지는 것은 전망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상상, 나아가 타자에 대한 상상이 그만큼 희박해졌기 때문이리라.

문학 시간을 통해 ‘의자에 묶여있는 너희들의 날개’를 풀어주면서 시인은 학생들이 ‘물새’가 되는 시간, 일상의 시간 속에 묶여 있었던 아름다운 ‘삶의 질량’을 확인하면서 ‘고래’의 귀환을 예언한다.

기원으로서 문학의 즐거움이 ‘즐거운 상상의 시간’이 될 때, 타자에 대한 상상은 시적 자아가 투영된 대상이 아니라 풍요로운 상상적 타자로서 귀환한다. ‘삶의 질량’이 회복되는 것은 문학의 시간이 환기하는 이러한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그리고 시가 추구하는 진정한 연대한 바로 이 아름다움의 귀환인지도 모른다.



조하혜

1972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와 <울지 말아요, 비둘기>가 있다. 성신여대, 한양여대, 백석대 등 강사.

추천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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