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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특집/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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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13회 작성일 08-03-01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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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진리를 찾아 나선 영혼의 모험

― 우리 소설과 형이상학

임영봉|문학평론가



1. 형이상학, 길을 묻는 영혼의 형식

소설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야기’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라는 형식은 소설의 기원이자 미학적 원리의 근거로서 장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딧세우스>와 같은 서사시적 영웅담에서 시작되어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를 거듭해오는 과정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물론 과거의 전통적 이야기 문학에 대하여 근대 이후 출현한 오늘날의 소설형식은 자신의 본질을 달리한다. 그 이야기들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의미에 있어 근대 이후의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 형식들과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과거의 그 무엇과도 ‘다른 말’을 들려주고자 하는 ‘특별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의 특수한 성격과 의미를 강조할 때, 소설형식의 본질은 ‘고독한 개인’의 이야기이거나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벤야민에 의하면, 소설이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개인”의 입을 빌어 ‘살아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이다.(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루카치는 소설적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이 고독한 주인공의 성격을 일층 강조하여 문제적 개인으로 규정했다. 루카치의 정의에 따르자면, 그 자체로 완결된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하는 서사시에 대하여 소설이란 숨겨진 삶의 총체성을 찾아내어 이를 구성하고자 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소설의 주인공이 가진 문제성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총체성의 상실이라는 세계의 현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미궁과도 같은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소설의 주인공 앞에는 ‘존재하는 현실과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적 이상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펼쳐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보증해줄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찾는 자’이고 이렇게 찾는 자로서의 문제적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행’에 비유될 수 있다. “소설은 내면성이 지니는 고유한 가치를 알아보려는 모험의 형식이다. 소설의 내용은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서는 영혼의 이야기이다, 모험을 통해 자신을 시험하고 또 자신을 견디어내면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발견하려는 영혼의 이야기이다.”(루카치, <소설의 이론>)


벤야민과 루카치의 통찰은 소설장르와 형이상학이 맺고 있는 관련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소설이란 근대 이후의 인류가 직면한 정신적 국면의 표현수단으로서 이때의 소설이 다루고 있는, 절대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는 개인과 사회 혹은 자아와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총체적 의식기반의 상실을 그리고 있는 경우이다. 루카치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설은 근대 이전의 인류사를 지탱했던 형이상학의 붕괴 국면을 ‘선험적 고향 상실성’이라는 의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문학형식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선험적 고향 상실의식 혹은 형이상학적 질병의 표현을 의미한다는 루카치의 주장 가운데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은 철학에 접근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소설에 등장하는 문제적 개인의 이야기, 찾는 자로서의 주인공의 행위가 자신을 에워싼 세계에 대한 전면적 질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적 개인으로서 소설의 주인공이 던지고 있는 이 물음은 철학적인 의미의 절대적 차원을 겨냥하고 있다.

철학적 의식은 자신이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경험이나 지식의 근원에서 질문을 던지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과학이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 지평에서 세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한다. 물질의 차원을 초월하여 존재의 절대적 의미를 추구하는 이런 철학적 물음을 두고 우리는 형이상학이라 부르고 있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세계가 있는 것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인가 아니면 우주적인 섭리의 결과인가, 불멸하는 영혼은 있는가, 인간의 운명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식의 물음들이 그러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런 절대적 물음의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다. 철학적 정신을 뒷받침하는 반성행위가 그러한 것처럼, 소설의 형이상학은 이 고독한 주인공이 벌여나가는 집요한 자기의식의 탐구과정으로 나타난다.


2. 운명으로서의 삶과 인간에 대한 발견

세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시공을 초월하여 늘 반복되는 문제인 것처럼 우리 소설의 형이상학적 성격 또한 문학사의 지평에서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 소설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대한 질문은 한국 근대사의 특수성을 염두에 둘 때 명료하게 처리될 수 없는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루카치의 경우, 그가 <소설의 이론>에서 거론하고 있는 소설의 형이상학이란 서구 근대의 역사철학적․정신사적 단계에 대응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소설을 포함한 한국 근대문학의 발생사는 그 기원에 있어 계몽의 수단이라는 실용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보편적 의미의 서구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이 서구 사회의 장구한 정신문화-형이상학적 전통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우리 근대소설의 출발점은 그런 형이상학적 토대와는 무관한 자리였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 소설의 형이상학적 성격은, 개화기 이후의 한국사회가 정신문화적 의미에서 개인주의의 대두로 요약되는 보편적 의미의 근대성을 관철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차츰 획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소설사 전반에서 소설형식과 형이상학이 밀접한 관련성 아래 하나의 전통으로 대두하게 된 것은 어디서부터인가. 소설형식을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소설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작가로는 김동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김동리 문학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철학적 물음들이다. 김동리 문학의 형이상학적 성격은 그의 초기 대표작 「황토기」(1935)와 「무녀도」(1936)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황토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장사 억쇠와 득보는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무모한 힘겨루기를 계속해나가며, 「무녀도」의 무녀 모화 또한 어떤 힘에 이끌리어 아들을 죽이고 자신 또한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인 억쇠와 득보, 그리고 모화가 보여주고 있는 비극적 삶의 의미는 ‘운명적인 것’으로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황토기」와 「무녀도」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의식, 인간과 운명에 대한 물음을 작가 김동리는 철저하게 추구해나갔다. 김동리가 추구했던 이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의 문학은 해방기에 씌어진 가작 「역마」(1948)에 이르러 독자성을 갖춘 완전한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역마」의 공간적 배경은 여러 갈래의 길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리산 자락의 ‘화개장터’. 그 길목의 어디쯤에 옥화네 주막이 자리 잡고 있다. 이야기는 늙은 체장수가 딸 계연과 함께 옥화네 주막을 찾아드는 데서 시작된다. 이튿날 체장수는 옥화네 주막에 딸을 맡겨놓고 장사길을 떠나고, 그동안 옥화의 아들 성기와 계연은 서로 정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화는 계연의 머리를 땋아주다가 왼쪽 귓바퀴의 조그만 사마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계연의 사마귀를 통해 체장수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 옥화는 성기와의 관계를 염려하여 계연을 떠나보낸다. 계연이 떠나자 성기는 자리에 눕게 되고, 옥화는 그동안 간직해온 비밀을 아들에게 들려준다. 「역마」의 마지막 대목은 옥화의 아들 성기가 엿판을 매고 기약 없는 유랑길에 오르는 장면이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화갯골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동남으로 난 길은 하동, 서남으로 난 길이 구례, 작년 이맘때도 지나 그녀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롱이를 고갯길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환히 장터 위를 굽이 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하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 김동리, 「驛馬」, <김동리 대표작 선집(1권)>, 삼성출판사, 1967, 231쪽


거부할 수 없는 ‘알지 못할 힘’에 이끌리어 유랑길에 나서는 성기의 모습은 인간의 유한함과 이런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자연의 질서, ‘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우주적 섭리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각각 합쳐지고 다시 갈라지는 ‘길’이 상징하는 바처럼 운명이란 그 자체로 미지이면서 불가항력적인 힘의 유전流轉을 의미한다. 「역마」에서 이 운명은 역마살을 타고난 성기뿐만 아니라 남사당패와의 하룻밤 인연으로 옥화를 낳은 할머니, 구름처럼 떠도는 중으로부터 성기를 얻게 된 옥화, 그리고 늙은 떠돌이 체장수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에 매여 있는 존재들인 셈이다. 「역마」가 형이상학적 물음으로서의 김동리 문학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는 판단은 바로 그런 운명론의 성격과 깊이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역마살로 표상되고 있는 운명관은 한국인의 내면에 가라앉아있는 보편적 무의식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역마」는 전설과 민담, 샤머니즘 따위를 배경으로 삼았던 「황토기」와 「무녀도」의 세계와 구별된다. 역마살로 표상되는 전통적 운명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역마」의 대두는 형이상학의 표현으로서의 한국소설이 마침내 세계와 자아의 대립이라는 근대소설의 보편적 리얼리티와 의식기반 위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에 근거하고 있는 김동리 문학은 차츰 종교의 차원에 접근해갔는데 이는 그가 애초부터 견지해온 문학적 신념을 떠올린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것은 어떤 究竟的인 生의 形式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라는 자신의 명쾌한 대답을 내놓은 바 있다. 김동리가 주장하고 있는 바, ‘구경적 생’은 ‘神明’을 찾아나가거나 자기 자신 속에서 ‘天地의 分身’을 찾아나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의 ‘구경적 생의 형식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추구란 “각자가 자기 자신 속에 혹은 자기 자신들을 통하여 영원히 새로운 神을 찾고 구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김동리, 「文學하는 것에 대한 私考-나의 文學精神의 志向에 對하여」) 장편 <사반의 십자가>(1955-57)와 「등신불」(1961)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김동리 문학이 철학의 경계를 넘어서서 ‘신’이라는 절대 진리의 탐구, 종교적 차원의 ‘구원’의 문제를 향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를 각각 소재로 삼고 있는 이 두 작품에서 김동리는 허무주의를 뛰어넘는 절대 진리의 탐구, 인간의 구원이라는 심원한 주제를 펼쳐 보였다.

전후 문학사의 흐름을 놓고 볼 때 「황토기」로부터 「역마」에 이르는 과정에서 작가 김동리가 추구해나간 한국소설의 형이상학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직면하여 다시 원점에 놓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소설을 지탱하는 정신 자체를 폭파시켜버렸고 그런 상황 속에서 소설의 형이상학 또한 공중분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손창섭이나 장용학 같은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국전쟁은 이 두 작가에게 있어 세계의 존재를 일순에 무너뜨리고 무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손창섭의 아나키스틱한 허무주의와 장용학의 형해와 같은 추상적 관념의 세계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작가들의 의식 기반이었던 전후 실존주의는 ‘뿌리 없는 형이상학’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외부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현실의식의 상실과 정신적 전통의 단절 상황은 한국소설을 무중력 상태에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설을 뒷받침하는 통일된 의식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후 한국소설이 자신을 지탱하는 진정한 의미의 형이상학을 다시 수립해나가는 작업은 다음 연대를 기약해야만 했다.

1960년대 문학사를 대표하는 최인훈의 <광장>과 김승옥의 단편들은 엄밀한 의미의 근대적 ‘개인’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 개인들은 자신을 에워싼 외부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서서히 회복해나가면서 세계의 존재를 정면에서 마주 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전후 작가들의 추상적인 관념적 세계인식에서 벗어나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차츰 세계의 근본적 존재의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나가기 시작한다. <광장>(1960)의 이명준이나 「환상수첩」(1962)의 대학생 주인공이 그러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이 깃들어있는 세계에 대해 스스로 물음을 던지면서 대답을 추구해나가는 ‘찾는 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문제적 개인의 출현에 의해 한국소설은 세계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전망을 회수하게 된다.


3.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과 마성적 존재의 시대

형이상학적 전통의 수립과정이라는 측면을 강조할 때 우리 소설사에서 1970년대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한국소설사에서 1970년대는 ‘소설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작가와 문제작들이 대거 출현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와 같은 70년대 소설사의 축제적 양상은 전후로부터 60년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가 질서를 회복해나가면서 안정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과 나란히 놓이는 성질의 것이다. 한국사회와 개인이 하나의 질서, ‘보편적 이념’의 중재 아래 놓이게 되는 70년대는 정신사적 측면에서 세계(사회)와 자아(개인)의 대립을 일층 선명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당대 한국소설의 형이상학 추구는 바로 그러한 소설장르의 대두 국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70년대 한국소설의 형이상학 추구와 그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 김성동의 <曼陀羅>(1979),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을 각각 거론할 수 있는데 이들 작품은 모두 장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曼陀羅>와 <사람의 아들>은 처음에 중편으로 발표되었다가 1979년 장편으로 개작 발표된 경우이다) 70년대 소설장르의 성행은 소설형식 자체의 심화와 확대과정이자 소설형식을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적 추구의 깊이와 넓이의 확대를 의미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의 형이상학이란 장편의 형식을 통해서만 온전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세 편의 작품이 제기하고 있는 의미는 더욱 중요해진다.

소록도에 유폐된 나환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인간은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가’라는 심원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경우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병원장 조백헌은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백헌의 생각과 의지는 나환자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면서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당신들의 천국>을 지탱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조백헌과 나환자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 천국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과연 그런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놓여있다. 나환자들에게 있어 조백헌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자신들의 것이 될 수 없는 ‘당신들의 천국’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보건과장 이상욱과 장로 황희백은 이 질문에 대해 ‘자유’와 ‘사랑’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천국 건설에 있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유와 사랑이다. 이 자유와 사랑이 결여된 유토피아에의 의지는 당신들의 천국, ‘가짜 천국’을 만들어낼 뿐이다. 문제는 진정한 유토피아 건설의 바탕을 이루는 이 자유와 사랑이 또 다른 어떤 힘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병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섬주민의 위치에 서게 된 조백헌은 이야기의 끝에서 이렇게 역설하고 있다.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차이가 큰 일이었지요. 섬사람들과의 한 운명 단위 속에서 서로 믿음을 얻고 나면 일단 그 자유나 사랑을 함께 행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사랑은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절대로 힘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자유나 사랑은 듣기 좋은 허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유나 사랑으로 이룩해나감은 그 자유나 사랑의 속에 깃들인 힘으로 해서일 겝니다. 사랑이나 자유의 원리가 바로 힘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이 행해지고 그것들이 이룩해져나가는 실현성이나 실천성의 근거는 그 힘이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자유나 사랑이나 다 같이 그 실천적인 힘에 근거하여 비로소 제 값을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두 가지가 다 같은 차원의 가치 개념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들이겠구요.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 운명 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를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 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현해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사, 1993, 414-415쪽


조백헌이 주장하고 있는 바,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상호 간의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공동 운명’을 추구해나가는 행위, 자생적 공동운명체로서의 유토피아 건설은 어떤 ‘힘’에 의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이 힘의 요구에 의해 <당신들의 천국>이 제시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궁극적 의미는 낙관적이기보다는 비관적인 색채의 ‘유보된 희망’으로 남게 된다. 그것은 조백헌이 거론하고 있는 ‘실천적인 힘의 질서’가 현실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힘이란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의미의 권력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으며 이때 지배자의 권력으로서 이 유토피아에의 의지는 타율에 의한 가짜 천국을 사람들에게 강요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자유와 사랑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힘이란 ‘권력적이지 않은 권력’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당신들의 천국>이 제시하고 있는 유토피아는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불가능한 꿈이자 전인류가 오랫동안 갈망해온 세계사적 차원의 과제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분명해지거니와 <당신들의 천국>의 형이상학적 성격은 인간 자신에 대한 물음에 놓여있다. <당신들의 천국>이 제시하고 있는 최종적인 인간상은 자생적으로 공동의 운명을 추구해나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건설이라는 당위적 맥락 속에서 파악된 이런 인간상은 인간 자신과 인간사회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가로 막혀 ‘미지’의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그 존재적 본질 또한 미지의 영역에 속하는 운명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천국>이 그리고 있는 이 운명으로서의 인간 존재가 가진 궁극적 의미가 이성과 논리의 차원을 초월하는 비밀스런 불가사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김성동의 <만다라>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그런 불가사의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경우이다. 문제적인 것은 이 두 작품을 뒷받침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물음의 형식이 철학의 범위를 뛰어넘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70년대 소설의 형이상학 추구가 <당신들의 천국>으로부터 <만다라>와 <사람의 아들>을 향해 나아가는 이 장면은 작가 김동리의 경우를 떠올리게 만든다. 「역마」에서 「사반의 십자가」에 이르는 김동리의 여정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란 언제든지 종교적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도약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들의 천국>에서 <만다라>와 <사람의 아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김동리가 「역마」에서 「사반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그대로 대응되는 성질의 것으로 볼 수 있다. 70년대 소설사의 이러한 전개 과정은 작가 김동리의 경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의 심화를 의미한다.

불교를 소재로 삼고 있는 김성동의 <만다라>는 두 명의 수행승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지산’과 ‘법운’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간절하게 찾아 헤매는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야기 속에서 ‘찾는 자’로서 이 두 인물이 가진 문제성은 입산 과정과 구도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불문에 입도하게 된 것은 삶에 대한 회의와 의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물음들을 안고 불문에 입도하여 수행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구도행위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내 마음 속에 있다’는 불교적 진리관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구도행위는 자기 자신 속에서 들끓고 있는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산과 법운의 이런 구도행각이 자기 존재와의 대면을 통한 자기 탐구의 과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만다라>는 자연스럽게 내면의 여행이자 영혼의 모험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구도의 길이 방황과 혼돈의 과정으로 대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행길에서 법운이 우연히 만나게 된 지산은 이 방황과 혼돈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지산은 승적을 박탈당하고 스스로 땡땡이 중이라고 자처하는 파계승이다. 그도 처음에는 무자無子 화두를 내걸고 참선에 열중하던 선방의 수행승이었지만 삶에 대한 회의와 집착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인간 세계는 기만성과 허위의식에 지배되는 거대한 어둠의 광장이다. 불국토의 건설은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지산이 나아간 곳은 “인간은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이면체二面體”라는 회색빛 세계이다. 지산의 이 회색빛 의식의 세계는 도저한 허무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것의 끝으로 가고 싶다. 고독의 끝, 번뇌의 끝, 욕망의 끝, 허무의 끝……’

만날 것이라고 했다. 모든 끝의 끝에서 모든 것의 처음을. 그리고 또 이길 것이며 삼킬 것이라고 했다. 고독과 번뇌와 욕망과 절망과 허무와 그리고 나를 삼키고 너를 삼키고 삼계를 삼켜서 드디어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이 하늘을 비상飛翔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이 지구 최후의 인간이 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허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허무의 실체를 규명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허무는 자기에게 있어 바로 삶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숨쉬고 있는 이 삶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불타에게도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삶이요 허무라고 했다.

―김성동, <만다라>, 한국문학사, 1979, 160쪽


<만다라>에서 지산의 구도행위는 죽음에서 막을 내리는 처절한 방황의 과정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신(진리)이 사라져버린 회색빛 세계 속에서 절대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이 절망적인 몸부림으로부터 지산은 마성적인 존재(Demon)로 대두한다. 루카치에 의하며 이 마성의 주인공은 자신의 왕국에서 쫓겨나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추방된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건설했던 왕국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이 깃들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하고 무한히 떠도는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지산이 가진 이런 마성적 성격은 그의 도우 법운의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법운은 스승 지암으로부터 하나의 화두를 내려 받았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 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동안 커서 나오질 않는구먼……. 병을 깨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재간이 없어. 그러나 병을 깨선 안돼. 새를 다치게 해서두 물론 안되구.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이 화두 앞에서 법운의 구도행위 또한 혼란과 방황의 늪에 빠지고 만다. <만다라>에서 법운이 받아든 화두는 신이 자취를 감춰버리자 수수께끼로 변해버린 세계의 비의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병 속에 갇혀 있는 새의 이미지가 법운 자신에 대한 비유라면 그 새의 절망적 울음소리는 마성적 존재로서의 법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다라>의 마성적 성격이 시적인 충동과 연결되어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만다라>의 신(진리)에 대한 열망이 시적인 비유의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이 작품은 마성적인 영혼에 의해 씌어진 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진리관에 바탕을 둔 <만다라>에 대하여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기독교를 소재로 삼아 절대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경우이다. <사람의 아들>에서 이 물음은 반기독교적인 의미의 새로운 신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 신학도 민요섭의 소설체 수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새로운 신의 이름은 아하스 페르츠이다. 새로운 신으로서의 아하스 페르츠는 심각한 문제성을 띠고 있는 존재인데 그 이유는 그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인간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는 신의 아들 예수 앞에서 절대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을 옹호해나간다. 그의 신념에 따르자면, 신이 우리(인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아하스 페르츠에게 있어 신은 곧 인간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인간 자신이 신성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신뢰하는 ‘신’이자 이런 신성스런 존재로서의 ‘인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인류를 절망과 불행의 늪에서 구해낼 수 있는 새로운 신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반신반인半神半人 혹은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존재는 <만다라>의 지산과 유사한 마성적 성격을 띠고 있다. 아하스 페르츠의 형상은 님은 떠났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신(진리)이 떠나버린 사태에 대한 인간의 역설에 다름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세계와 자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 형이상학의 왕국을 종교가 아니라 인간 자신 속에서 다시 발견 재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영원한 방황’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그의 운명은 <만다라>의 지산이나 법운처럼 ‘미지’이자 떠돎 속의 추구라는 악마성을 띨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이 그리고 있는 아하스 페르츠라는 신인동형의 존재는 <당신들의 천국>의 자생적 운명공동체와 <만다라>의 자기초극적 존재들과 대화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70년대 소설사에 있어 형이상학적 추구의 성격과 방향을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4. 디스토피아, 이신異神들의 왕국

형이상학적 전통의 수립과 발전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80년대 이후의 우리 소설사는 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7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질적 양적 성취를 떠올릴 때 이 판단은 더욱 분명해진다. 80년대의 경우, 일단 시대정신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80년대 소설은 <만다라>의 결론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경우이다. <만다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려 법운은 화두를 내려놓고 거리의 사람들 속으로 힘껏 달려간다. 80년대 소설은 <만다라>의 주인공 법운이 세속 세계의 한복판에 서게 되는 이 장면, 그러니까 거리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의 발현이 ‘방황의 종결’을 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상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긍정을 의미하는 이 거리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정신은 신의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지향한다. 80년대 인간의 자기 발견과 자신에 대한 믿음의 견고함은 민중주의 혹은 노동자주의라는 이념의 형식을 수립했다. 그러나 당대의 이념형 소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닫혀있는’ 세계였다. 자신이 신봉하는 믿음의 체계 가운데서 그 유토피아는 이미 완결되어있는 성질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유일의 ‘과학’임을 주장하는 80년대 이념의 목소리 앞에서 인간과 세계의 존재를 의문의 대상으로 삼는 형이상학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80년대가 요구했던 것은 존재에 대한 회의나 절망이 아니라 이념이 제시하는 정해진 길을 따라 나갈 수 있는 ‘의지’였다. 방황하는 영혼과 마성적 존재의 시대는 그렇게 가버렸다. 그렇지만 80년대에 기독교를 소재로 한 다수의 작품이 씌어졌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승우의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1981)과 조성기의 장편 <라하트하헤렙>(1985), <야훼의 밤>(1986) 등이 그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에 대한 반정립으로 볼 수 있다. 이승우와 조성기가 다루고 있는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비판과 신에 대한 믿음의 확인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넓게 본다면 80년대의 기독교 소재 작품들은 당대의 인간중심적 ‘이념’에 대한 대응이자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전통의 수립과 추구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소설사 가운데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의 한 명은 박상륭이다. 박상륭의 경우, 먼저 그가 보여주고 있는 문제의식의 강렬함을 거론할 수 있다. 단편 「아겔다마」(1963)에서 출발하여 <죽음의 한 연구>(1975), <열명길>(1986), <칠조어론>(1994)을 거쳐 최근의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2003)에 이르기까지 작가 박상륭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줄기차게 추구해왔다. 박상륭 문학의 전면적 주제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물음들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박상륭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뿌리와 스케일 또한 문제적이다. 박상륭 소설의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은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유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동서양의 철학․종교․신화․전설 등의 요소가 기묘하게 결합된 전혀 새로운 의미의 소설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경우이다. 소설의 형이상학이라는 측면에서 박상륭의 이러한 추구는 시공을 초월하는 신비적 체험의 순간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박상륭 소설의 신비성은 개인과 외부세계 사이의 심각한 균열에 대한 증거이자 신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박상륭 소설에서 이 신비적 각성은 인간적 존재의 유한함과 우연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거의 종교에 육박하는 구도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박상륭 소설의 독자성은 여전히 모호한 차원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그의 소설을 지탱하는 사유의 근거와 소설형식적 측면의 ‘새로움’의 정체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90년대 이후 ‘오늘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형이상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일단, 80년대 후반 이념의 붕괴 국면에서 시작된 일련의 상황 변화는 우리 소설의 형이상학을 완전히 소진시켜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념의 소멸과 함께 자신의 근거를 잃어버린 존재들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앞에는 나아가야 할 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존재의 절대적 근거를 찾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선언이었다. 후기근대주의 혹은 해체주의의 등장이 그러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과 세계의 존재를 근원에서 탐구해나가는 우리 소설의 형이상학적 정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우리 소설의 형이상학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식의 아포리아에 직면하여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90년대 이후의 우리 소설이 나아간 곳은 일상의 자리였다. 90년대 이후 오늘의 우리 소설이 추구하고 있는 이 일상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물신성의 세계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멋진 신세계가 펼쳐져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은 넘쳐흐르기에 존재는 더 이상의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진실로 그러한 것인가. 물론 이 멋진 신세계가 물신의 은하수에 불과한 디스토피아임을 예감하는 영혼은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부정의 정신은 윤대녕의 경우가 그러한 것처럼 희미하고 순간적인 환상의 형식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신들이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 속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편집증과 분열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형서의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같은 이야기는 이 사태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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