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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특집/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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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72회 작성일 08-03-01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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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아래에는 무엇이 있나?

― 정신주의 시의 성과와 과제

백인덕|시인



1. 두터운 먼지를 털어내며

금세기가 화려한 의장과 내면의 불안감과 함께 개막되었을 때, 나는 ‘정신주의 시’에 관한 짧은 논문을 기획하고 있었다. 천성인 게으름 탓에 끝내 원고를 마무리 짓지 못했고, 다시 그때의 자료들을 복사물 더미에서 찾아보니 누렇게 색이 바래고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그 먼지만큼이나 이 원고의 내용은 낡았고, 의미는 무의미하다시피 보잘 것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한때 제기되었던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정신精神’이라는 말은 그 뉘앙스가 실로 다채롭다. 이정우는, “이 말들이 과거의 의미를 일정 정도 보존하면서도 그 뉘앙스를 달리 해서 쓰이고 있기도 합니다. 즉 (보다 일반적인 말인) ‘마음’ 가운데에서 ‘靈妙’한 부분, ‘神妙’한 부분을 뜻하기 위해서 사용되죠. 예컨대 ‘예술혼藝術魂’, ‘고귀한 영혼’, ‘민족정신民族精神’ 같은 표현들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전혀 반대의 뉘앙스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상혼商魂’ 같은 개념이 그 예.”라고 소개하고 있다. 덧붙여 신체적 가치와 대립하는 뉘앙스로 ‘정신적 가치’와 같은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개념-뿌리들 2>, 철학아카데미)

그렇다면 ‘정신주의 시’에서 ‘정신’은 어떤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된 내용 중에서는 ‘신체적 가치’와 대척점에 서게 될 것이다. 또한 물질문명과 현실의 대척점에 자리매김 될 것이다.( 특히 ‘정신주의 시 논의’의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최동호의 ‘정현종론’이나 김주연의 ‘조정권론’ 등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처럼 ‘정신주의 시’는 ‘신체적 가치’와 대립함으로써 ‘해체시’와 물질문명과 대립함으로써 ‘도시시’와 ‘현실’과 대립함으로써 ‘일상시’와 갈등관계에 있음을 표방하며 동시에 자기 지향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신서정, 초월, 자연 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정신주의 시의 미학적 전략’을 다루는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박덕규는 한 책에서 정신주의 시 논의가 담보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젯거리를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현실을 몰각하고 자연 현상에 탐닉하는 초시대적 서정시가 정신주의 시의 범주 안으로 편입되기 쉽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앞으로 시대의 주역이 될 젊은 세대들의 세대적 감수성과의 연대감이 거의 피력되고 있지 않다는 점. 특히나 물질문명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이던 급진적인 산업화 시대의 아들딸에게 과연 자연 속에서의 깨달음이라는 정신주의의 특질이 어떤 식으로 전승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앞으로 교환가치가 두드러질 사회구조로 보면 아주 심각한 숙제로 떠오를 공산이 크다. 더욱이 그것은 시가 과연 인간의 정신성을 고양시킬 그 무엇일 수 있는가라는 장르의 존폐 문제와도 결부되는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서정시가 있는 21세기 문학강의실>, 청동거울)


2. 정신주의 시의 성과

정신주의 시에 대한 논의가 잦아들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들 시가 일정한 성과를 이룩했으며, 하나의 경향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나 ‘정신주의 시의 미학적 전략’을 논하고 있는 최동호의 글을 보면 그 성과는 기대치에 비해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정신주의 시가 극복해야 할 대상을 네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 ‘세속성-일상성과 물신주의’, 둘째 ‘주관성-배타성과 독존주의’, 셋째 ‘정체성-보수성과 편의주의’, 마지막으로 ‘해체성-파괴성과 허무주의’ 등을 열거하고 있다. 좀 확대해석하면, 현대 문명 전부와 인간성의 편협한 부분까지 모두 극복하자는 것인데 그것의 당위성에는 수긍이 가지만 실현가능성에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입술의 노래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스스로의 영혼을 입술로 불어서

불씨를 일으키는 데 사용했던 입은

흙으로 되돌아가도,

입술의 노래는

大地에 묻히지 않으리.

내가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은

고뇌를 담기 위해 태어난 두 손,

방황을 하기 위해 태어난 두 다리,

그리고 땅의 住民임을 표시하는 살,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이 형벌의 뼈

아, 아, 암흑의 관을 쓰고 땅을 기어가는 흉한 짐승처럼

고뇌하는 이마와 방황하는 긴 막대기를 지닌

이 형벌받은 살.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혀.

허나 혀로서 부른 입술의 노래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하나의 나약한 나뭇잎조차 소리 없이 떨어지는 데도

힘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도

스스로의 영혼을 불어 끄기 위한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오, 밤이 오고 있다.

大地여! 우리들이 달려가고 있다.

아직은 관뚜껑을 닫지 말아다오.

아직은 관뚜껑을 닫지 말아다오.

우리들 모두는

바람 속을 뛰어가는 촛불이다.

― 「山頂墓地․11」 전문


조정권의 「산정묘지」 연작은 ‘정신주의 시’라는 용어의 탄생과 그 논의의 신호탄이 되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긴 호흡과 장중한 어조로 삶의 유한성과 운명의 엄숙함, 세속으로부터의 강렬한 초월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다시 박덕규로 돌아가 보자. “주지하다시피 근자에 정신주의 시 논의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목되는 시인은 황동규, 정현종, 김지하, 조정권, 황지우, 최승호, 이성복 등이다. 이들은 사실 어떤가 하면 대부분 정신주의가 표면적인 관심으로 떠오르지 않을 시기에 그 시기를 대표하는 다른 논의의 표적이 되어 이미 웬만큼 명망을 쌓아올린 시인들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는 민중주의적 관점에서, 황동규와 정현종은 시대적 양심과 자유정신과의 관련하에서, 이성복과 황지우는 정치문화적 억압과 그 방법론적 해방 사이에서, 최승호는 후기 산업사회의 병폐에 대한 시적 양식화라는 측면에서 각각 시사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던 시인들이었다. 이들이 왜 이즈음 와서 정신주의 시를 논하는 자리의 선두주자로 부각되고 있는가. 물론 그들 시의 성취도가 밑받침되는 까닭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시가 주도적으로 삶에 대한 어떤 뚜렷한 정신적 각성 또는 지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박덕규의 논지에 따르면 ‘정신주의 시’는 어떤 미학적 전략내지는 기획에 의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개별 시인들의 시적 성취를 한데 아울러 이름 지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언급된 시인들은 각기 그 형이상학적 태도에 있어서도 불교적, 노장적, 기독교적 성찰 등으로 갈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신서정’이라는 이름보다는 ‘정신주의’라는 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불리게 된 것은 ‘세계’와 맞서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방법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최동호가 밝힌 네 가기 극복대상은 이들 시인들에게서는 일정 부분 극복된 것들이며 그의 ‘전략’은 보다 젊은 시인들을 위한 ‘지침서’의 역할을 자처할 뿐이다. 또 하나의 성과는 전통적인 ‘서정’의 개념을 일신했다는 데서 ‘신서정’이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願往生 願往生, 배고픈 물총새는 어디를 향해 나는가

天上을 드나들자면 죽음을 드나들자면 허공 벼랑을 차고 오르는 힘 그만한 높이가

필수다 날개가 비로소 날개가 된다 願往生 願往生, 사람들도 곳곳마다 높은 자리마

다 하늘다락을 올려지었다. 대둔산 대흥사엘 가보면 허공을 가마 태우는 집 駕虛樓

도 있다 나도 사랑의 벼랑 끝에 누각 한 채 지어놓고 서성이다 세월만 탕진했다 天

上에 계신 어머니께서 다녀가신 흔적만 겨우 몇 번 짚었다 교활한 해동청 보라매는

결코 거기까진 가지 않는다 허공 벼랑이 일순 땅으로 내리깔리는 하늘 그물이여,

해동청 보라매여, 먹이 사냥이여, 낭자한 피여, 피여, 날아오를 땐 허공 주름 아득히

접어올리고 내려앉을 땐 급강으로 허공주름 들판 가득 만 이랑 펼치며 꽂히는 피젖

은 맨발이여, 차라리 그리로 갈까 배고픈 내 한 마리 물총새는 물가 조팝나무 야윈

가지 끝에 앉아서 낭창거린다 어림도 없지 위기의 그네타기가 실로 위기답다

― 「새들은 왜 발 아래 허공 벼랑을 두는가」 전문


정진규는 1994년 시집 <몸詩>를 발간한 이후 지금까지 독특한 방법론과 시적 지향을 통해 ‘정신주의 시’의 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아와 대상의 동일화과정, 즉 전통적 서정의 주요한 방법인 ‘감정의 투사投射와 동화同化’를 과감하게 거부하고(이는 일인칭 ‘나’의 포기에서 두드러진다) 새로운 ‘자연시’를 선보였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기서의 ‘몸’은 ‘정신’과 대립되는 ‘신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정신’과 ‘신체’가 분화되지 않은,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지 않는 원초적 상태로서의 몸, 다시 말해 ‘원융圓融’의 이미지로서의 ‘몸’이다. 따라서 그는 최동호가 밝힌 ‘미학적 전략’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3. 정신주의 시의 과제

이 초유의 유물론적 시대에 ‘정신주의 시’가 하나의 형이상학으로서 인간과 우주에 대한 갈급한 질문과 대답으로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한 보다 심도 있고 치열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주제’는 이미 앞에서 박덕규가 문젯거리로 삼은 데에서, 그리고 최동호가 밝힌 극복대상 속에 함축되어 있다. 조정권은 이미 그 문제를 한 시선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게 있어서 순수시란 개인의 내면 속에 착색되거나, 발생되는 사회적 인자들이 불러일으키는 고정관념과 맞서는 정신의 작용이요 그 총체이다. 굳어버린 현실의 껍질 그것과 맞부딪치는 방법론적 추진이다. 그것은 자각된 방법론이란 점에서 극가라는 뜻과 상통한다. 극기란 어떤 대항할 대상을 벽으로 삼는다. 벽은 물론 내 안에 있다. 그것은 고통과 정직을 가장하는 양심의 형식이 아니라, 애써 가장하지 않으려는 정신이다. 순수시는 현실을 관조하는 적당한 거리를 떼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순수시는 그 거리를 제거하고, 역으로 그 거리를 이 현실 속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순수시란 ‘현실’을 어디로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오늘’이 강화된 ‘현실’을 향해 있는 투영의식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정신주의 시’ 이전에 ‘시 정신’의 강렬도가 문제이고, 그것은 ‘현실’과의 거리 설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즘은

바람 불면 뼈가

살 속에서 한쪽으로 눕는다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친다

나는 안 보이는 나라를 편애하는 것이 틀림없어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만큼 멀까

― 「진흙별에서」 전문

이제 나는 날개 밑에 그 추억의 비행을 접어두어야 한다

나의 발톱은 낡고 날개는 이 공기를 저항할 수 없다

우뚝 선 건물들

입을 쫙쫙 벌리고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창문들

질주하는 냄새들 아 눈빛들

시력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부리는 그것을 가늠하지 못한다

― 「솔개는 없다」 부분


상대적으로 젊은 장석남, 권대웅 두 시인은 작품에는 자연친화적 전통과 맥이 닿아있으면서도 변화된 ‘서정’에의 인식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자의식’이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강호가도나 음풍농월의 전통 서정에서는 자아가 세계에 혼융되어 버림으로 인해서 세계와의 거리를 가늠하고 세계를 변형할 여지가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정조를 제어할 지성, 또는 이성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세계 파악의 색인’으로서의 ‘서정’이 잘 조율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작은 불씨들이 모여서 ‘시’라는, 또는 ‘서정’이라는 장르를 이 활달하고 유쾌한 위기에서 구해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4. 다시, 자료를 거두며

근대의 아버지 데카르트 철학의 정신은 무엇이든 이성의 관점에 서서 사태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상상력은 이성의 진리에 일치할 때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도 청년 시절의 한 메모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철학자들의 글에서보다는 오히려 시인들의 글에서 심오한 사상을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로 비칠 수 있다. 그 이유는 시인들이 격정과 상상력의 지배 아래 글을 썼다는 데 있다. 우리들 안에는 마치 부싯돌 안에 불의 씨앗들이 있는 것처럼 학문의 씨앗들이 들어 있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이성을 통하여 추출한다. 시인은 그것들을 상상을 통하여 끄집어내고 그래서 그 불의 씨앗들은 더욱더 찬연히 빛나고 있다.”(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민음사)

그래도 남겨지는 질문, 초월할 것인가, 침잠할 것인가?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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