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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단편/강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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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97회 작성일 08-03-01 02:15

본문

|신작단편|
아름다운 네 여자 이야기

강인봉


1. 어머니와 딸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대문을 나서자 하늘이 끝없이 찌뿌드드했다. 이미 11월로 접어든 지도 오래인데 바람 끝이 그리 맵지가 않은 걸 보면 어쩐지 첫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은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골목 끝에 납작 엎드려 있는 자기 집을 돌아다보았다. 비가 와도 지붕이 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올겨울 그 모진 눈보라를 어떻게 이겨내 줄지 실로 염려가 되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무 걱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네가 나를 일 년 동안이나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니?”
다만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었다.
“오늘 당장 학교에 가서 복학할 준비를 해라.”
그래서 은희는 더욱더 마음이 무겁고 우중충한 것이었다. 과연 이 발길을 학교로 돌리느냐, 아니면 다시 그냥 이대로 직장에 가느냐. 
물론 재작년까지만 해도 은희는 꽤 큰 집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의 빚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는 바람에 전 재산을 몽땅 다 날려버리고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할 수 없이 그 큰 집을 팔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나머지의 돈으로 시장에 가게를 하나 얻어 하필 그 냄새나는 생선장수를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말이 좋아 장사지, 한때는 그래도 잘 살던 사람이 막상 그 일을 하려니 얼마나 고충이 크겠는가. 그럼에도 자존심 때문일까.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오직 은희와 그 밑으로 하나 있는 은철이를 키우는 데만 온 정성을 다 쏟을 뿐이었다. 
본래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티 없이 곱게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가 화병을 앓다가 돌아가실 때도 몇몇 친구들이 찾아와 도와주겠다는 것도 한사코 사양하고 굳이 시장바닥에 나앉아 생선장수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덮어놓고 멸시하려고만 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어떤 여자 손님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자기의 불찰로 어머니를 모질게 닦아세운 일이 있었다. 어머니한테 생선을 사갔는데 조금 후에 되돌아와서는 돌연 만 원짜리를 주고 거스름돈을 안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분명히 고등어 값 3천 원밖에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여자는 아주 막무가내였고, 결국은 어머니가 할 수 없이 7천 원을 내줘버리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희의 눈에는 조금 돈푼깨나 있다든지, 하다못해 옷가지라도 하나 남달리 잘 입고 오는 손님들은 무조건 어머니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야 한다.”
한번은 어머니가 뼈아프게 한숨을 토해 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우리도 조금 잘 살 때 남들을 얼마나 깔보았는가. 그래서 지금 그 죄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그것을 뉘우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다시 복을 받을 게 아니겠니.”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당신의 고통을 은철이가 알까봐 조바심을 쳤다. 은철이는 어머니의 단 하나 기둥이었다. 부모의 잘못으로 더 이상 그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은철이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이제는 그 아이에게도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은희는 어머니보다도 동생 은철이를 위해 학교를 휴학한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영문과 2학년이었다. 물론 어머니를 감쪽같이 속이고서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 외삼촌이 운영을 하고 있는 출판사에 편집사원으로 입사를 했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많은 원고를 편집하고 교정보는 일도 충분히 보람 있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좋은 책을 만들어내다 보니 자연 은희도 어머니처럼 남을 위해 사는 2차원적인 인생을 배우게 되었고, 또한 실제로 어떤 시인은 다만 그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거기다가 사장님은 친구의 외삼촌이어서 가끔 가다 은희에게 수고한다고 따뜻이 격려하며 저녁까지 사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그 저녁을 얻어먹고 조금 늦게 돌아오니 까닭없이 어머니가 대뜸 노기등등한 얼굴이었다.   
“은희, 너 좀 거기 앉거라.” 
다짜고짜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 엄마 왜 그러세요?”
동생 은철이를 흘끗 바라보며 그녀는 다소곳이 어머니 앞에 앉았다. 여느 때 같지 않게 은철이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게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래, 그동안 그렇게 이 어밀 속이고 돈을 얼마나 벌었니?”
“엄마도 참, 엄마를 속이고 내가 무슨 돈을 벌어요.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내심 은희는 뜨끔했지만 그냥 픽 웃어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깊게 한숨을 토해 냈다.
“아까 인혜가 왔다갔다. 그러니 더 이상 엄마를 속일 것 없다.”
그제서야 은희는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에게 어머니한테만은 절대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하지 않은 것이었다. 은희는 슬그머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 은희에게 못을 박듯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아빠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이 집안 어른은 어디까지나 이 엄마다. 그러니 너희 두 남매는 내가 벌어다 주는 밥이나 먹고 공부만 하면 그뿐이다.”  
“그래도 엄마, 이제 은철이도 대학에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리고 겨울이 다 오기 전에 집수리도 해야 하고…….”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엄마의 행복이야. 그런데 네가 왜 내 행복을 빼앗으려 하니. 너는 당장 내일 복학이나 서둘러라.”
“하지만 엄마, 나도 이제는 이만큼 자랐어요. 엄마 혼자서 한 가정을 다 책임지기엔 너무 무리예요. 그래서 조금만이라도 엄마의 힘을 덜어드리고 싶단 말예요. 나보다 더 못 배우고, 나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거기에 비하면 나는 지금 아주 너무나 행복해요. 그리고 출판사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진정한 사람이 되게 하는 공부라구요. 그런데 엄마야말로 왜 내 행복을 빼앗으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의 고집은 끝내 완강했다.
“잔말 말고 너는 복학할 생각이나 해. 너는 하나밖에 없는 내 소중한 딸이야.”
거기다가 은철이까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해, 누나. 나는 대학에 안 가도 좋아.”
이윽고 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출판사가 있는 쪽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잽싸게 걷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우박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마침내 펑펑 함박눈으로 변하고 있었다.
“첫눈이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나오며 함성을 질러대었다. 어쨌든 첫눈은 좋은 것이다. 은희도 하늘을 향해 하얗게 웃으며 조그맣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나도 역시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너무도 소중한 엄마예요.”


2. 사람의 향기     

“미스 오, 벌써 퇴근시간이 삼십 분이나 더 지났는데 오늘은 왜 퇴근을 안 하고 있는 거지? 거, 참 아상하네?”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던 사장이 신애를 향해 자라처럼 목을 길게 내빼며 말했다. 다들 퇴근하고 이제 사무실에는 사장하고 그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신애는 사장이 눈치 안채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말하는 것도 영락없는 짠돌이 같네.
다시 석유 스토우브에서 물 끓는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콩장처럼 졸이고 있었다. 3월인데도 아직 밤에는 꽃샘추위가 매웠다. 하긴 뭐 맵기로 하자면야 저 짠돌이만 하려고. 신애는 다시 물끄러미 사장의 반들반들하게 벗겨진 이마를 향해 눈총을 쏘았다. 고향 친구의 오빠인 영업부장 서준석 씨의 소개로 그녀가 처음 이 출판사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사원이 고작 두 명밖에 안 되었었다. 그런데 운 좋게 해적판 하나를 적당히 번역해서 찍어낸 것이 그야말로 불티가 나게 팔렸고, 그 바람에 교정사원 겸 경리사원인 신애를 비롯하여 편집부장 하나와 영업부 사원 두 명을 과감하게 채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입사한 그날이었다.
“미스 오, 그 꽃 한번 이쁘다.”
시골에서 이제 갓 여고를 졸업하고 상경해서 처음 직장에 발을 디뎌놓은 그녀로서는 처음부터 사장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출근할 때 출판사 바로 코앞에 있는 꽃집에서 장미 몇 송이를 사다가 화병에 꽂아놓은 것이었다.
“이쁘죠?”
“이뻐. 미스 오만큼.”
하지만 그 짓도 한두 번이었다. 계속 사장의 눈을 즐겁게 해주자니 그러잖아도 쥐꼬리만한 월급이 다 날아가 버리게 생겼고, 그렇다고 꽃을 딱 중단해 버리자니 이제 곱빼기로 미움을 받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할 수 없이 회사 돈으로 표 안 나게 슬쩍슬쩍 꽃을 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아마 일 주일도 채 안 되었을 것이었다.
“미스 오, 그 꽃 어디서 사왔지?”
그녀는 기가 막혔다. 꽃가게가 바로 출판사 맞은편에 있다는 것은 사장이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신애가 아무 대답이 없자 사장이 다시 물었다.
“미스 오, 그 꽃 누구더러 보라고 사왔지?”
말 같지 않아서 이번에도 그냥 아무 소리도 안 하려다가, 그래도 사장님의 질문이라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야 사장님이 보시라고 사왔죠.”
“내가 대체 사무실에 몇 시간이나 앉아 있나? 출퇴근시간 외엔 노상 밖에서 살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라도 보죠 뭐.”
“그렇다면, 당연히 미스 오의 돈으로 사와야 할 게 아니냐구. 그 꽃값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 아냐. 이치가 안 그러느냐, 그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정말로 입을 딱 벌렸다. 정말로 짠돌이구나. 그녀의 입에서 ‘짠돌’이란 말이 침처럼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때부터 사장의 별명이 돌연 짠돌이가 되었다. 그녀는 그저 무심결에 한번 그렇게 해본 소리였을 뿐인데, ‘정말로 그거 사장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인데?’하고 사원들이 너나없이 희희낙락하며 사장이 없을 때는 그렇게 부르기로 작당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짠돌이가 월급 두 달 치가 더 넘는 돈을 선뜻 가불해 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역시 말을 안 꺼내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거 참, 이상하네. 다른 날 같으면 일분일초를 못 기다리고 발딱 일어나서 퇴근할 미스 오가 아닌가?”
사장이 다시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킥킥 웃었다. 그녀도 흥, 하고 맞받아 콧방귀를 날려주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짠돌이가 아니랄까봐 자기 멋대로 말을 내뱉고 있네. 그런데 어쩌다 저런 짠돌이와 함께 서 부장을 기다리게 되었지?
“그런데, 서 부장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사장이 이번에는 화살을 그쪽으로 돌려대었다.
“지금 우리 집에서는 눈 빠지게 손님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말을 듣자 신애는 더욱 마음이 콩장처럼 졸였다.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시골에서 어머니가 그녀의 자취방에 들이닥친 것은 오늘 새벽 4시였다. 객지에 나와 고생하는 딸자식이 보고 싶어 찾아온 줄 알고 처음에는 눈물이 나올 만큼 어머니가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차로 다시 내려가야 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때까지 돈 2백만 원을 만들어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냐? 느이 아버지가 지금도 그 모양으로 골롱골롱 누워 있으니 죽을 때 죽더라도 약 한 첩이라도 먹여드려야 안 쓰겠냐?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니 동생 신철이란 놈도 중학교에는 보내야 쓰겠고, 어떻게 헌다냐? 믿고 의지할 데라곤 너밖에 없으니…….”     
서울에 올라오면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까 서 부장한테서 전화 올 때 거기가 어디라고 그랬지?”
사장이 이번에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대전이라고 했어요.”
“그렇지? 대전이라고 했지? 그런데 이 친구가 왜 이리 늦는 거야?”
신애는 하루 종일 일손이 안 잡혔다. 아무리 쥐어짜야 짠돌이인 사장에게 부탁을 해보았자 뻔할 뻔짜고,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해야 할지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며칠 전에 지방으로 수금하러 내려간 서 부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이제 대전이라는 것이었다.
“근데, 오빠…….”
서 부장은 친구 오빠였고, 자기가 다니는 출판사에 좋은 자리가 있다기에 그를 따라서 상경을 한 것이었지만, 아직 직장에서는 한 번도 오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서 부장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처지가 처지인 만큼 오빠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 내가 오늘 밤 서울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서든 해줄 테니까 퇴근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녀의 사정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서 부장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미스 오, 서 부장이 수금을 얼마나 했다는 말은 없던가? 이 친구 이거 큰일인데! 지금 우리 집에서는 눈 빠지게…….”
전화벨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용수철처럼 안락의자에서 튀어나오더니 사장이 냉큼 송수화기를 들었다.
“서 부장이야? 응. 지금 거기가 어디야?”
사장이 송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신애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뭐라구? 아직도 대전이라구?”
사장이 송수화기를 불이 나게 덜컥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신애는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서야 의자에서 발딱 일어났다. 지금쯤 자취방에 우두커니 앉아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자 그녀는 정말 울고만 싶었다.
“미스 오, 나한테 뭔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냥 퇴근하지?”
마악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녀의 뒤꼭지에 뜻밖에도 사장의 손길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자, 이리 와서 이걸 가지고 가라구. 오늘 낮에 서 부장한테서 전화로 얘길 다 들었어. 미스 오는 미스 오가 할일이 있듯이 나도 다 내 할일이 있는 거야. 내가 절약을 하지 않고 마구 낭비를 해버리면 이 출판사가 결국은 어떻게 되겠어. 그렇게 해서 문 닫는 출판사가 어디 한둘인가. 이래도 내가 짠돌이야?”
“크크크, 큰돌이에요.”
신애가 이렇게 말을 더듬어 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사장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에 돈 봉투를 쥐어주며 말했다.
“크, 큰돌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장은 사장이지.”


3. 아름다운 인연    

“언니, 나야. 나 지금 시장 입구에 있는 목화다방에 있어.”
수화기를 귀에 대는 순간 저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인자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동생 금자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오늘따라 금자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풀기가 빳빳하게 묻어 있었다. 
“니가 이쪽엔 웬일이니?”
인자는 어물어물 그렇게 물었다.
“응. 언니랑 함께 어디를 좀 가려고.”
금자의 목소리는 잔뜩 달떠 있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집으로 오지 않고 왜 그곳에 있어?”
“언니 시어머니께서 자리에 누워 계시잖아. 그런데 친정 식구가 자꾸 들락거리면…….”
“알았어.”
인자는 아랫목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흘끗 바라보며 얼른 말을 끊었다. 벌써 6개월째 시어머니는 그렇게 누워 있는 것이었다. 별의별 좋다는 약도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집안은 언제나 어둠이 깊었다.
“언니, 나 오늘 혼수 준비하려고 나왔어.”
다시 저쪽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기어이 인자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핑글 돌았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벌써 호, 혼수를?”
인자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응. 그래서 언니랑 같이 나가 골라보려고……. 언니, 빨리 나와.”
인자는 다시 금세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금자와 그 남자가 자기 집에 한번 인사하러 왔을 때 ‘그렇다면 올해 안으로 결혼식을 올리라’고 한 건 바로 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것은 그 남자가 불성실하게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도 쉬이 달아오른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금자만큼은 자기 어머니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다짐이었다. 사실 금자는 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그녀를 낳게만 해놓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인자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을쯤에나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하긴 그때 가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두 부부가 피땀 나게 버는 족족 시어머니의 약값으로 다 들어가기 때문에 언제나 생활이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차마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겠는가. 
실은 2년 전 그녀가 결혼을 했을 때 금자의 적금을 탄 돈으로 혼수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금자가 다음 결혼을 할 때 그 돈을 갚기로 하고서 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혼수비 걱정은 이제 당연히 인자의 몫이었다. 그 외에는 이제 금자에게도 뾰족한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그동안 혼자서 인자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고 고마운 일인가.
그들 두 자매는 참으로 이상스런 인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인자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홀아버지만을 모시고 살았었다. 어머니는 그만 알 수 없는 병으로 그녀가 어릴 때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래서 인자는 그 슬픔 때문에 지금의 병든 시어머니를 그리 극진히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자가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이웃에 살고 있던 금자네와 살림을 합쳐버린 것이었다. 그때 금자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한 가족이 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금자네 어머니는 늦부부치고는 금실이 아주 좋았으며 그녀들도 친자매처럼 의지하고 자랐다.    
다행히 이름 끝 자도 같은 아들 자子여서 누가 봐도 그녀들은 친자매였는데, 같은 학교에 다닐 때는 어쩌다 성姓이 다른 이유로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인자는 김씨이고, 금자는 박씨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언제나 남부럽지 않게 떳떳하고 우애 좋은 두 자매였다. 
그랬는데, 인자가 여고 3학년 때 그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혼자 남은 아버지를 모시다가 그녀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동생 금자가 모시고 있는 것이었다.
“언니, 여기야.”
그녀가 막 목화다방에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금자가 얼른 일어서며 손짓을 했다. 언제 봐도 넉넉하게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조금 더 있다가 천천히 가을에나 하지, 왜 자꾸 너까지 그렇게 서두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금자 앞에 짜증스럽게 앉았다. 
“그러게 말야, 언니. 이제는 오히려 저쪽에서 그렇게 자꾸 서두는 거야.”
“그나저나 걱정이다.”
“걱정할 것 없어, 언니. 결혼을 하고서도 아버지는 내가 계속 모시기로 했으니까. 그래서 나도 이 결혼을 하는 거우.”
“고맙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인자의 몫이었다.
“언니도 참, 내가 남이우? 고맙긴. 언니는 그 대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잖우. 우리야 뭐 둘째니까…….”
“그나저나 혼숫감은 어떻게 한다니?”
인자는 다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포옥 토해 냈다. 그 생각만 하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이 멍청해지는 것이었다.
“아니, 언니. 형부가 아무 소리도 안 해?”
“안 그래도 지금 시어머니 약값 때문에 쩔쩔매는 형부한테 어떻게 그 얘길 하니.”
“그게 아니라, 언니. 형부가 언니한테 아무 소리도 안 하더냐고.”
“……?”
인자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 애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그러자 금자는 놀리듯이 실실 웃었다.
“형부가 아직 언니한테 아무 소리도 안 했구나. 언니, 형부가 누구요. 하나밖에 없는 처제인데 설마하니 빈 몸으로 시집가게 가만 놔 두겠수? ……언니가 하도 내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심하게 한다고 형부가 오늘 아침 찾아왔습디다.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어보기에, 아마 내 혼수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대답했더니, 그거라면 진작 다 준비해 놓았다며 오백만원을 내놓더라구. 그러니 언니, 어서 일어나.”
그러면서 금자가 먼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4. 여자의 마음       

“비응신! 세상에 저런 것도 × 달린 사낸가? 내가 어쩌다가 저런 사내를 만나 가지고…….”
냇가 빨래터에 앉아서 빨래에 턱턱 비누를 쳐대다 말고 덕희는 다시 복실이를 끌고 마을 앞 언덕을 넘어가는 남편의 뒤통수를 향해 화살처럼 욕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 자리에 꼬꾸라져 뒈져나 버렸으면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 독 같은 욕을 퍼부어대고 있는 그 순간에도 복실이를 끌고 겅중겅중 잘도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덕희는 가슴에 햇덩이를 품고 있는 듯 온몸이 더욱 지글지글 끓었다. 숨결이 턱에 확확거려서 욕마저도 더 이상 못할 지경이었다. 사실 그게 어떻게 살려서 키운 목숨인가. 복실이는 바로 지금 남편한테 끌려가고 있는 개의 이름이었다. 
덕희는 다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빨래에 턱턱 비누칠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난봄이었다. 시어머니의 약을 지으러 읍내에 갔다 오다가 옆집 새댁이 세 마리나 되는 강아지를, 그것도 산목숨 그대로 이 냇가에 내다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그녀가 물었다.
“왜, 이 어린 강아지들을……. 아직 눈도 안 떴구만이.”
얼마 전에 그 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말은 들었다.
새댁이 힘없이 뇌까렸다.
“도저히 못 키우겄시유”
며칠 전에 어미가 그만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생명이 중한 줄 알고 새끼라도 어떻게 한번 키워보려고 했지만…….”
“그것 참 아깝기는 아깝네이. 그럼, 어디 내가라도 한번 키워볼까. 죽을 때 죽더라도 아직은 산목숨이 아니여.”
이렇게 해서 덕희는 그 버린 강아지들을 모두 가슴에 안고 왔던 것이었다. 어쩌다 부모를 잘못 만나 어려서부터 남의 집으로만 떠돌다가 개차반 같은 남편을 만나 이렇게 살고 있는 자기의 신세만큼이나 그것들이 측은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자식을 키우듯이 정성스럽게 미음을 끓여 먹이며 세 목숨에 부채질을 해보았다. 남편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처음엔 픽 웃더니, 그래도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인지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그런데 다행히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간신히 살아난 것이었다. 그것을 보더니 남편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허, 고것 참 희한하네?”
그렇게 겨우 목숨을 건져낸 강아지는 잔병치레 한번 없이 무럭무럭 자랐고, 마치 그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만을 졸졸 따라다녔다. 심지어는 그녀가 읍내에 시어머니의 약을 지으러 다닐 때도 꼭꼭 뒤를 따랐다. 그것을 보더니 남편이 다시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것 참 희한하네?”
그런데 그 복실이를 팔아넘기기 위해 남편이 지금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머니의 약값이라도 하기 위해 돈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숫제 외상으로 퍼마신 그 술값 대신 주막에 넘겨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람 열불이 안 나게 생겼는가.
이제 그 복실이를 끌고 마을 앞 언덕을 넘어가던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덕희는 가슴에 열불이 나서 그대로 더 이상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중천 높이 솟아오른 햇덩이까지 자꾸 그녀의 눈 속에 떨어져 들어와서 괴로웠다. 덕희는 두 눈에 가득 괸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고 나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진작 보따리를 싸들고 야반도주라도 했어야 하는 건디…….”
덕희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걸핏하면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패는 짐승 같은 남편을 생각하자 부르르 치가 떨렸다. 그 남편은 지금쯤 주막에 복실이를 넘겨주고 퍼질러 앉아 공술이나 잔뜩 퍼마시고 있을 게 뻔했다. 오늘 아침에도 그 복실이 때문에 남편에게 즉사하게 얻어맞은 그녀였다. 
그러나 차마 병들어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그대로 버려두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자리에 드러누운 지도 벌써 여러 달째였다. 그래도 짐승 같은 아들놈은 어머니의 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맨날 빈둥빈둥 자빠져 술타령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더 시어머니를 가엾게 여겨 남의 집 품팔이로 약값을 근근이 대오고 있는 터였다.
덕희는 다시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빨래는 마저 다 해야 하지 않는가. 시어머니의 똥빨래였다. 두어 달 전부터는 그녀가 대소변까지 받아내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다 급하곤 하면 그대로 옷에다 싸버리는 것이었다. 정나미가 없기론 시어머니도 마찬가지고 정말이지, 이 짓도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그녀가 마악 냇가 빨래터에 내려섰을 때였다. 느닷없이 복실이가 머리에 철철 피를 흘리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멍청히 서버렸다. 행여 이것이 꿈이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차라리 이 모든 고단한 삶이 다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복실이는 사력을 다해 달려오더니 그녀의 치마폭 속으로 파고들었다. 복실이의 목에는 단단한 밧줄이 옥죄어져 있었다. 그것이 갑갑한지 복실이가 자꾸 캑캑거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일의 내막이 대충 짐작되었다. 그녀는 얼른 복실이의 목에 감긴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그때 언뜻 마을 앞 언덕길에 남편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복실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복실이는 된통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는지 머리를 땅에 끌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복실이의 앓는 소리를 옷소매로 틀어막고 한참을 숲 속에 숨어 있자 기어이 개보다도 못한 남편이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어이, 어디 있어? 나여. 얼른 나와. 그놈들이 개를 잡다가 놓쳐 버렸어. 그놈들이 오기 전에 어서 빨리 개를 숨겨야겠어.”
그녀는 그래도 숨을 죽이고 그대로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여보, 내가 정말 그동안 너무도 잘못했어. 그까짓 외상값이야 내가 벌어서 갚지 뭐. 그러니 얼른 나와. 그놈들이 오기 전에. 나보다도 더 무지막지하게 개를 패대는 걸 보니 술이 확 깨더구먼. 도저히 눈 뜨고 못 보겠더구먼. 그 개보다도 못할 놈들. 그때 나는 정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어. 여보, 그동안 내가 정말 너무 죽을죄를 지었어. 나를 용서해 줘. 이제 다시는 절대로 안 그럴게…….”


―그리고 또 하나의 이상한 인연 

그날 아침 나는 차창 너머 먼 도심을 바라보며 삥긋삥긋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전날 밤 전혀 이상한 인연으로 누이를 하나 얻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곱고 매력적인 천사 같은 누이를 말이다.
온양에서 급히 올라탄 그 통일호 열차가 영등포역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12시 20분이었다. 딱 40분을 연착한 것이었다. 그 시간 이미 인천행 전철은 끊어진 뒤였고, 암담한 심정으로 역사 앞에 나오니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입원한 도반道伴의 문병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얼마 전까지 산사山寺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그 도반이 끝내 혼자 남아 무리하게 정진을 한 탓으로 결국 몸에 병이 나서 119 구급대의 앰뷸런스에 실려 내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내 등 뒤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오빠, 놀다 가도 돼요?”
웬 아가씨였다. 한눈에 보기엔 예쁘장한 얼굴에 눈이 크고 순진하게 생겼는데, 놀다 가도 되냐니? 나는 멍청하게 선 채 시선을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공연히 그 소리를 듣자 마음이 더 울적하고 처량했다.
그녀는 이내 우산을 펴들고 또박또박 빗속으로 사라져 갔다.
만 원짜리 한 장만 있었으면 총알택시라도 타련만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봐도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밖에 없었다. 이거,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당분간 세 들어 있는 집주인 어른에게라도 전화를 해야 하나, 어쩌야 하나. 나는 산에서만 살다 내려온 사람이라 그 외엔 누구 하나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오빠, 잠깐 놀다 가면 안 되나요?”
흘끗 바라보니 아가씨는 눈으로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나이는 한 스무 살쯤이나 되었을까. 하얀 블라우스 차림이 꼭 여대생같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멀쩡한 생김새를 가지고 무슨 짓을 못해 먹고 살아서 하필 이 자정이 다 넘은 시간에 엉뚱한 사내를 붙들고 놀다 가란 말인가. 내가 그런 돈이 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나.
그런데 그 여자가 내게 세 번째 놀다 가라고 한 것은 내가 이윽고 마음을 굳히고 역 대합실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눈을 붙이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그 여자는 놈팡이 하나 제대로 못 물어 붙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빠, 여기서 주무시면 어떡해요.”
이번에는 아주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자 나도 문득 측은한 생각이 들어 건성으로 대꾸를 해주었다.
“나도 하룻밤 놀다 가고 싶기는 한데, 돈이 없어.”
“아주 싸게 해드릴 게요.”
“한 푼도 없어.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자고 있잖아.”
자존심은 조금 상했지만, 그 여자의 태도가 너무도 진지했으므로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세요? 그럼 제가 오늘 밤 돈 안 받고 보시布施를 할 게요.”
여자가 선뜻 말했다. 그때 하얀 블라우스 위로 쑥 불거져 나온 여자의 젖무덤이 묘하게 내 눈길을 자극했다.
나는 한없이 마음이 착잡했다. 그럼 소위 이것을 일컬어 육보시肉布施라고 하는 건가? 나는 여태 절에 살면서 그 육보시란 말을 너무도 수없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워낙 혼자서 따로따로 외롭게 사는 사문沙門들인지라……. 
“아유, 뭘 그렇게 주저해요. 보시도 몰라요?”
여자가 눈꼬리를 살짝 밀어 올렸다.  
“…….”
“왜, 있잖아요. 아무 욕심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인정을 베푸는 일 말예요. 저도 한때 어느 여승에게서 보시를 많이 받았는걸요. 그래서 그 덕분에 아주 밝게 살면서 학교 공부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그 스님이 그만 교통사고로…… 그 바람에…….”
여자는 말을 잇지 못 하고 멀거니 창 밖 흐릿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게 그 인심을 쓰려는 건가?”
“어쩐지 연민의 정이 일었기 때문이에요. 마침 비도 오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비가 멎어 있었다. 
여자는 나를 뒤에 달고 이리 저리 몇 골목을 돌더니 영등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성냥갑처럼 좁은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자는 서슴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빠도 옷을 벗으세요.”
잔뜩 쑥스러워 외면하고 서 있는 내게 여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퉁명스럽게 받았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지?”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나보다 나이가 많음 다 오빠죠 뭐.”
“그래 친오빠는 있어?”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런 오빠가 있음 여기서 이렇게 살겠어요?”
여자는 시큰둥하게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그 오빠가 되어 주면 안 될까.”
그러자 여자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말 정말이세요?”
“정말이지 않구.”
나는 부드럽게 여자의 어깨를 어루만져주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런 결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난 뒤 맨 처음 양심의 소리랄까, 뭐랄까. 
“그렇다면 그게 실은 진짜 보시예요. 그 스님은 그랬어요. 무엇보다도 외로운 사람에게 인연을 보시할 줄 알아야 한다고요. 우리 인생은 무시무종으로 윤회를 하는 거니까 빈부귀천 또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거래요.”
어느 사이 여자의 두 눈에는 물기가 그렁그렁 차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벗어놓은 옷을 도로 주워 입더니 아랫목에다 내 이불을 펴주고 나서 자기는 다소곳이 윗목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저도 가끔가끔 보시를 하며 살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너무 그 빈부귀천에 집착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불태우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나보다도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오빠는 뭐하는 분이세요?”
“…….”
하지만 나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직업이 뭐냐고, 궁금하다는 듯 여자는 몇 번 더 물었지만 그날 밤 나는 끝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나는 산에서 10여 년 도를 닦다가 하산下山한 지 얼마 안 된 터였다. 



강인봉
1950년 전북 김제 출생.  1979년 ≪한국문학≫ 신인상 당선.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소설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구나의 먼 바다, 다시 에덴에서. 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 첫사랑, 간월도. 산문집 풀,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법어집 늙은 원숭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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