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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단편/김민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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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81회 작성일 08-03-01 02:15

본문

|신작단편|
이제 치마를 내려주세요
김민효


당신으로 하겠소. 나는 강수빈에게 손을 내민다. 좋아요. 그녀도 선선히 손을 내민다. 내 왼손등 위로 그녀의 오른손바닥이 겹쳐진다. 내 손등에 닿았던 그녀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떨어져나간다. 그녀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거린다. 나는 왼손을 내민 채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나와 눈이 맞추진 그녀는 이내 표정을 고친다. 아, 그렇지요? 힐끗, 그녀가 포켓에 찔러 넣은 내 오른손을 곁눈질한다.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표정과 시선을 조금도 놓치지 않는다. 표정을 수습한 그녀는 거둬들인 오른손 대신 왼손을 내민다.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편안하게 악수가 이루어진다. 그녀의 손이 괜찮은 기억력을 갖고 있다면 다음부터는 나에게 오른손을 내미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공간 손’의 모든 회원들처럼.
죽일까요, 살릴까요? 거울 벽을 향한 채로 그녀가 묻는다. 그녀의 질문에는 별로 무게가 얹혀있지 않다. 대답을 듣고 싶어서라기보다 어색함을 떨쳐버리겠다는 의지로 읽혀진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눈을 집요하게 좇는다. 거울 속의 그녀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친다. 나는 거울 속의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적절한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 그 어느 쪽일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너는 프로니까. 안 그래? 내 눈빛은 그렇게 말해준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진다. 일에 대한 두려움과 욕심이 팽팽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당신이 감당할 몫이잖아? 나는 거울 속의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강한 눈빛을 보낸다. 그녀가 눈을 깜박거린다. 거울 속의 그녀에게 박았던 시선을 빼내고 의자에 앉는다. 벽으로 향했던 그녀의 시선이 내 몸에 딸려온다.
나는 임의대로 작성한 계약서를 그녀에게 내민다. 그녀는 계약서를 대충 훑는다. 몽블랑 만년필의 뚜껑을 벗겨 그녀에게 건넨다. 그리고 계약서의 비워둔 공간을 짚어준다. 계약서에 그녀가 써야 할 글자는 세 자에 불과하다. 덧붙여 사인만 하면 계약서는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선뜻 이름을 쓰지 않고 만년필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여 마신다. 그녀의 쇄골이 깊게 파인다. 이윽고 한 획을 긋는다. 잠시 멈추고 들이켰던 숨을 조금 끊어서 내쉰다. 다시 한 획을 긋는다. 그녀의 손이 몹시 떨린다.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첫 글자인 ‘강’이 비로소 완성된다. 글자에는 손의 떨림이 그대로 묻어있다. ‘수빈’이란 글자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잠깐 멈추고 한꺼번에 숨을 내쉰다. 그녀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옆구리에 문지른다. 짜증이 나려한다.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그러자 그녀가 얼른 만년필을 쥔다. 이번에는 손놀림이 빨라진다. 손떨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불안정한 이름 세자와는 다르게 사인은 시원스럽고 힘차다. 나는 왼손으로 계약서를 가져온다. 바지 포켓에 넣은 오른손은 여전히 빼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딱 세 번만 봤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CD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오디션을 보러왔을 때 주었던 것이다. 나는 CD를 책상 서랍에 넣는다. 그리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두 개의 봉투 중에서 분홍색의 봉투를 꺼낸다. 출연료의 80%가 들어있는 봉투다. 봉투 속의 금액을 확인한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역시 당신도 프로시군요. 그녀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계약서에 있는 대로라면 계약 시 20%를 지급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 80%를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첨부된 입금증에 사인을 한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보다 훨씬 안정적인 필체다. 그녀는 계약서 한 부와 봉투를 핸드백에 집어넣는다. 핸드백은 그녀의 상체보다 훨씬 크다. 그녀의 몸뚱어리를 접는다면 통째로 집어넣을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크기에 비해 내용물이 별로 없는지 백은 홀쭉하다. 그녀는 백의 지퍼를 잠근 다음 손을 탈탈 턴다. 그리고 당겨 올라간 웃옷을 잡아 내린다. 그녀의 허리가 곧게 펴진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처럼 그녀는 사무실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녀의 시선은 아주 느리게 자리를 옮겨간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온통 거울로 된 벽이네. 3면이 거울인 벽에는 그녀가 무한정으로 증식되고 있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감았다 뜬다. 그녀가 오른손을 뻗어 벽 위에 새겨진 박쥐문양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검지로 박쥐를 문지른다. 아마도 나에게 자신의 누드를 보여줬던 날을 기억하는 것 같다. 
그녀가 아무리 문질러도 저 벽은 열리지 않는다.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저 벽은 열린다. 조건을 통과한 사람이란 말은 ‘공간 손’의 회원이란 말이다. 회원의 첫 번째 조건은 경제력이다. 두 번째는 숨어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범법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간은 절대사절이다. 다른 회원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곳에서는 일상에서의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 외에 몇 가지 자질구레한 조건들이 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통과하고 회원자격을 부여한 사람들은 내가 직접 저 벽 안으로 안내한다. 자신들이 분양 받게 될 방으로 안내될 때 그들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을 숨겨줄 혹은 그들이 숨어들 완벽한 장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쥐문양에 지문을 인식시킨 그 순간부터 그들은 회원으로 가입되기까지의 까다로운 조건과 번거로웠던 절차를 홀가분하게 벗어버렸다. 그들은 아무 때고 유리벽을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없어서 안심이 된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리벽을 쥐고 있는 것이 박쥐? 그녀는 다시 한 번 박쥐의 등을 문지른다. 유리벽은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출입문 쪽으로 돌아선다. 찌부러진 채로 모로 쓰러진 핸드백을 들어 어깨에 멘다. 이번 공연은 괜찮은 작품이 될 것 같지요? 잘해 보자고요. 그녀는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지른 다음 손을 내민다. 엉겁결에 나도 손을 내민다. 역시 내 예상대로다. 그녀는 프로다. 벌써 나와 악수하는 법을 익힌 것이다. 그녀의 왼손과 내 왼손은 편안하게 맞잡아진다. 손 작가님, 참가자들이 돌기 전에 치마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아시죠?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그렇게 드러낸다. 물론입니다. 특별제작을 의뢰할 작정이니까. 그들이 미쳐서 날뛴다고 해도 치마가 당신에게 안전지대를 확보해줄 겁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맞받아치듯 손을 힘껏 쥐었다 풀어준다. 그녀는 내 오른손을 곁눈질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포켓에 넣어두었던 오른손이 어느새 빠져나와 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몇 번이나 갈아 끼운 손은 여전히 이물스럽다. 그녀는 시선을 비끼지도 않고 내 손을 쳐다보고 있다. 나는 굳이 손을 감추지 않는다. 손가락을 쫙 편 다음 엄지를 까닥까닥해 보인다. 엄지만은 가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그릇처럼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연기라면 대단한 표정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익숙해질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담담해지지 않는다. 지금 내 머리를 대신하는 것은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다. 국전에서 대상을 받고 화려하게 등장했던 ‘화가 손 아무개’는 화단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하나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내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내 오른손이 절단 나던 그날은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날 내 몸은 이상하게도 근질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화실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가진단을 했다. 비워내지 않고는 참아내기 어려울 만큼 탱크도 가득 찼다. 화실에서 몇 차례 딸딸이를 쳐 보았지만 개운하지가 않았다. 휴지로 닦아낼 때의 그 찝찝함이라니. 내 손으로 물건을 쥐고 흔드는 일은 정말이지 할 말한 짓이 못된다. 단골 바에 가서 바텐더에게 작업이나 할까 하고 무작정 나왔다. 재수가 좋으면 그녀와 한바탕 붙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내 마음과는 달리 발길은 친구 녀석의 작업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녀석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 위에서 작업 중이었다. 아직은 원석인 바위 덩어리가 녀석의 드릴에 의해 쪼개지고 있었다. 보디빌더처럼 그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팔뚝의 근육이 불끈거렸다.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는데도 녀석은 알은 체를 하지 않았다. 드릴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등을 세게 얻어맞고서야 녀석은 드릴의 작동을 멈췄다. 야, 지금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순간인데 산통을 깨고 있냐. 녀석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작업을 방해해서 기분 나쁘다 이거냐? 내 말도 삐딱해졌다. 모처럼 친구라고 찾아왔더니 반기기는커녕 불청객 취급을 당하다니…… 내가 볼멘소리를 하자 녀석은 농담이었다고 금세 얼버무렸다. 완전히 노가다구만 무슨 오르가슴이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몸을 건너다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야, 모르는 소리 말아라. 너, 해머드릴을 작동시켜 본 적 없지? 아무리 기가 막힌 여자의 요분질도 이것만은 못할 걸. 녀석은 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드릴은 누구에게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둥 한 몸이 되어 무아지경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둥 녀석은 너스레만 잔뜩 늘어놓았다. 녀석이 옷을 입으러 들어간 사이 나는 해머드릴을 작동시켰다. 길들이지 않은 들짐승처럼 드릴은 거칠게 반응했다. 바위덩어리의 저항도 녹녹하지 않았다. 나는 드릴을 바위 덩어리에 꽂았다. 커다란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털구멍 하나하나까지 모두 열리는 느낌이었다. 찌뿌듯하던 몸이 순식간에 개운해졌다. 분탕질이 되어 있었던 머릿속도 환해졌다. 순간 드릴 끝이 퉁겨졌다. 나는 중심을 잃었고 오른손으로 바위를 짚고 말았다. 드릴은 내 손등을 파고 들어가 뼈를 부쉈다. 드릴의 작동이 어떻게 멈췄는지 기억은 없다. 고통보다는 진동의 쾌감이 온몸을 흔들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쾌감은 순간이었고 손을 잃어버린 고통은 깊고 길었다. 
나는 오른손을 바지 포켓에 집어넣는다. 바깥으로 빼놓았을 때보다 편안해진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뻣뻣하다. 내 앞에서는 담담한 척했지만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핸드백을 고쳐들고 대문 손잡이를 붙잡는다. 갑자기 그녀가 멈춰 선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올려다본다. 나한테 볼일이 남은 것은 아닌 듯 시선은 나를 비껴간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돌아선다.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통유리창이다. 조금 전에 그녀가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던 그 창이다. 투명하게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해를 가리자 그녀가 서 있는 풍경이 유리창에 고스란히 전사된다. 그녀의 모습은 실제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그녀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간다. 또각. 또각. 또각. 세 번까지 구두 소리를 세자 길 위로 그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간다. 그녀의 모습보다 그녀의 구두소리가 먼저 사라진다. 평평하지 않은 길은 흘리지도 않고 그녀의 구두소리를 전부 삼켜버린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공간 손’이 드디어 첫 출산을 하게 된 것이다. 초산이어서 몹시 불안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설렘임도 크다. 어떤 놈이 나올까? 내 새끼니까 골격은 짐작이 되지만 그렇다고 모양새나 성격까지 전부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썩 괜찮은 놈이 만들어질 거라는 쪽으로 기대를 모은다. 손이 후끈거린다. 감각이 없어진 오른손의 신경까지 가닥가닥 일어서는 느낌이다. 왼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눈도 감는다. 팽팽하게 당겨진 아랫배의 소리를 듣는다. 오늘 진행될 프로그램은 머릿속이 아니라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 그러나 그 통증에 버금가는  쾌감이 동시에 창자를 훑는다. 프로그램이 순서대로 나열된다. 미세한 간격까지 짚어진다. 아쉬움이 있다면 공개된 무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데도 내 이름을 걸지 못한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무대장치를 다시 살펴나간다. 조명과 음향시설을 점검한다. 특히 무대 중앙에 설치한 메인 조명을 꼼꼼히 살핀다. 빛의 밝기와 분사되는 각도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 메인 조명등에 씌워진 등갓을 떨어뜨려 본다. 등갓은 표시된 지점에 정확히 착지한다. 커다란 통꽃 한 송이가 땅위로 내려앉는 형상이다. 등갓은 붉은 공단에 최고급 레이스로 장식을 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에게 입혀질 치마다. 무대 중앙을 향한 다섯 개의 눈들에게 일일이 시선을 던진다. 그것들은 적당한 위치에서 자신의 몸을 숨긴 채 빨간 불빛으로 깜박거린다. 나는 그것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516을 마지막으로 회원 모두가 도착했다. 516의 표정은 유난히 굳어있다. TV에 비칠 때도 언제나 저런 표정이었다. 516보다 약간 앞서 들어온 408이 나에게  목례를 한다. 목례를 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라 눈도장을 찍는 것이다. 자신이 누려야 할 몫에 소홀함이 없도록 챙겨달라는 무언의 요구다. 매스컴에서 보았던 딱딱하고 엄격한 표정을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의례적인 겉치레는 애초부터 생략된다. 저들은 내가 던진 그물에 포획된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저인망 그물을 던졌다. 완벽한 잠적을 원하십니까? 홀로 잠수함을 타보세요. 도망자를 숨겨드립니다. 뭐 대충 이런 메시지를 온라인에 유포시켰다. 별로 기발하다고 볼 수 없는 메시지에도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내 메일박스는 용량이 초과되었다. 단시간 내에 메일이 폭주한 것이다. 나는 그물을 거둬들였다. 메일박스를 비워버리고 가입도 해지해버렸다. 그 많은 인간들 중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선별하기란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불특정다수를 향한 저인망을 버리고 애초의 목적대로 특정소수를 향한 그물을 던지기로 했다. 일단 이메일 주소를 변경했다. 그리고 약간의 돈을 투자하여 선별된 주소록과 인적정보를 매입했다. 그것은 아주 쉬웠다. 온라인상에서 구하지 못할 것은 없어 보였다. 흥정은 물론이고 지불까지 모두 온라인에서 이루어졌다. 송금은 인터넷뱅킹으로 처리되었다. 상대방은 곧바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넘겨주었다. 받자마자 한 사람을 찍어 전화를 넣어보았다. 그가 바로 516이었다. 그는 모정당의 대표 공격수다. 그는 시사토론 무대에 단골로 출연한다. 디지털 TV 화면에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방울까지 곧잘 잡힌다. 거품까지 물어 가면 자신의 정당을 대변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당을 위해서는 온몸을 던져서 막아낸다. 의결이 표류하는 현장을 포착하는 카메라에는 언제나 그가 잡힌다.  TV에서 목소리를 자주 들었던 터라 진짜라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잘못 걸었다고 적당히 얼버무린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보를 넘겨준 사람에게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은 주소라며 메일은 반송되었다. 이미 그는 이메일을 해지한 상태였다. 경과된 시간이 5분이나 지났을까. 하여간 내게 인적정보를 넘겨준 상대는 즉시 자신의 존재를 숨겨버린 것이었다. 
곧 눈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은 어둡다. 푸근하고 습한 공기로 미루어 폭설이 내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들은 자신들의 일상으로부터 조금 더 멀리 도망을 치는 셈이다. 도시에서 약간 비껴있긴 하지만 길이 좁은데다가 비포장 농로다. 이곳은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야 한다. 408이 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덩달아 516도 고개를 잔뜩 꺾는다. 곧 쏟아지겠는 걸. 408이 중얼거린다. 516은 별다른 반응 없이 꺾었던 고개를 내린다. 408 혹은 516은 그들의 호칭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들의 이름은 숫자로 표기되거나 불린다. 408은 4월 8일이 생일이고 516은 5월 16일이 생일이다. 그렇다고 회원 모두가 생일로 숫자를 정한 것 같지는 않다. 회원의 인적사항을 보면 생일과 무관한 숫자들도 많다. 408이나 516도 내가 주민등록 번호와 대조해서 짐작한 것이지 그들이 그렇다고 한 적은 없다. 탤런트 Y, 가수 J 역시 마찬가지다. 숫자로 나열된 그들의 기호는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호가 필요한 경우는 회비납부를 확인할 때뿐이다. 일부러 기억하기보다 오히려 일부러라도 그들의 정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피차 편안하다. 그러므로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일부러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열하는 숫자나 기호에 대해서 일부러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408이 유리벽의 박쥐버튼을 누른다. 갈라진 유리벽 안으로 그가 사라진다. 금세 벽이 닫힌다. 516도 박쥐버튼을 누른다. 그가 몸을 밀어 넣자마자 다시 벽이 닫힌다. 가수 J는 이틀 전에 이곳에 왔다. 그가 사라졌다는 내용이 오늘 아침 스포츠 신문마다 헤드라인으로 걸렸다. 잠적, 자살, 실종 등등의 단어들로 그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조작된 실종’이라는 추측기사도 보였다. 방송스케줄을 펑크 내는 일이 모험이라는 것쯤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출연하기로 했던 프로그램 담당자와 매니저의 당황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비춰지기도 했다. 사고가 아니길 바란다는 내용이 뉴스 말미에 덧붙여졌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여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형 너무 바빠서 죽을 것 같아. 그렇게 내뱉고는 저 유리벽 너머로 사라졌었다. 그가 어떤 얼굴로 다시 대중 속으로 귀향할지 나는 알 수 없다. J의 기호는 9494다.   
현관 출입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린다. 보안시스템도 가동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유리벽 안으로 들어간다. 회원들은 한 쪽에 차려진 음료나 와인을 마시고 있다. 그들은 몸이 부딪히거나 시선이 마주쳐도 서로 알은 체를 하지 않는다. 이런 모임을 수차례 갖고 있는데도 그들의 묵계는 깨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언제나 초면이며 앞으로도 구면이 될 것 같지 않은 몸짓과 표정들이다. ‘나’라는 구심점이 사라진다면 그들을 얽어맬 장치는 아무 것도 없다. 아, 총무는 제외한다. 내가 종으로 연결되었다면 총무인 0404는 회원들과 횡으로 엮어져 있다. ‘공간 손’을 운영하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잡일은 대부분 0404의 몫이다. 그는 회원들의 가려운 곳을 기가 막히게 긁어주는 재주가 있다. 나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회원이다. 본 공연에 출연하기로 된 강수빈도 그가 소개한 사람이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점이 혼란스럽다. 가축이나 사육하는 축산업자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림과 퍼포먼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각 예술장르에 대한 식견이 만만치 않다. 가끔은 나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어서 허겁지겁 좇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할 정도다. 그럴 때마다 불쾌감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먹는다. 그에게 휘둘릴 것 같은 예감으로 종종 불안하다. 이번 공연도 그와 상의한 끝에 결정을 했다. 그러므로 0404는 당신이 특별하게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요즈음 회원들의 눈빛을 자세히 본 적이 있습니까?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들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곧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사람도 몇 있던데…… 특히 9494와 999가 아주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나는 0404에게 슬쩍 운을 뗐다. 글쎄, 다른 회원들도 안심할 정도로 편안해 보이는 않았소. 그는 내 말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공간 손’에서 재빨리 손을 써줘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기획과 총무님의 능력을 모아 괜찮은 무대를 만들어 봅시다. 마약이나 섹스보다 더 매력적인 것으로. 나는 그에게 오노 요꼬의 퍼포먼스 한편을 보여주었다. 강수빈에게 빌려주었던 바로 그 CD였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십수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었는데… 군사정권 말기였던지라 퇴폐라고도 했고, 엽기적이라고도 했으며, 폭력적이라고도 평해졌던 작품이었다. 그 때는 관객들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맥없는 작품이 되고 말았었지요. 새로운 시도였다는 호평도 있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시기상조라는 평이 더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걷혔다. 그 공연은 선배작가 K에 의해서 이루어졌었다.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않았지만 능가해보고 싶었던 선배작가였다. 내가 있었던 그 현장에 0404가 같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작품의 의도를 총무님이 아신다니 반갑습니다. 런던의 신사숙녀와 우리 회원들이 어떻게 다른지 실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철저히 비공개라는 큰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비공개라는 것, 회원들이 작품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흔쾌히 동조를 해줬다. 동조를 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대신 무대 위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도 상관하지 마시오. 작품을 훼손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리고 이 작품을 연출했던 작가를 떠올려 보시오. 선배 K처럼 무대를 죽이지 말라는 충고로 받아들였다.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틀과 규제였다. 무대에 올려졌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려야 했었는데 선배 K는 관객을 너무 의식했다. 보이지 않은 어떤 힘의 눈치도 보았다. 0404도 나와 생각이 같았다. 실패의 원인을 알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 셈이었다. 0404가 자신의 역할만 충실하게 해준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나는 회원들에게 부담 없이 미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고 그들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폭력이 어떻게 표출되는 것인가를 잡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무대 중앙에는 갓 도살된 중돼지 한 마리가 삼지창에 꽂혀있다. 그 앞에는 크지 않은 단이 설치되어 있고 단 위에는 잘 벼려진 칼 댓 자루가 놓여있다. 강신무가 한바탕 벌일 굿판이 연상된다. 본 공연을 위한 일종의 제의의식이다. 오른손을 잃고 나서 나는 강신무가 벌이는 굿판에 주인공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무당은 50키로나 될까 말까한 왜소한 몸으로 100키로가 넘는 통돼지를 들고 춤을 추었다. 갓 도살되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번쩍 들고 그녀는 멍석 위를 빙빙 돌았다. 그녀의 버선발은 토슈즈를 신은 것처럼 곧추섰다. 치마폭이 팽팽해질 만큼 빠르게 돌던 그녀가 갑자기 멈췄다. 그녀는 팽팽한 광목을 찢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돼지 목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내 앞에다 돼지를 패대기쳤다. 그녀의 입에는 돼지의 목덜미에서 물어뜯은 살점이 물려 있었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살점을 내 얼굴에 뱉었다. 그리고 바가지에 담겨있는 돼지피를 머금어 내 얼굴에다 내뿜었다. 해머드릴을 직접 내 몸에 꽂아 작동시키려 했던 것과 엄청난 회전력으로 몸속을 관통한다는 총알을 열망했던 벌 치고는 가혹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서 행해지는 현란한 칼춤은 물론이고 소금세례며 소지한 재를 탄 물세례까지 고스란히 다 받았다. 어쨌든 굿판이 끝났을 때는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진동에 대한 열망도 많이 희미해졌다. 공기총을 들고 날뛰지도 않았다. 사실 총신이 짧았다면 손을 잃은 즉시  몸에다 총알을 박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무당의 신통력 때문인지 모르지만 진동에 대한 열망과 부서진 손가락 4개의 환지통이 사라졌다. 
저 돼지는 0404의 작품이다. 이 무대와 회원들을 정화시켜 주는 것이 저 돼지의 임무다. 머리뿐만 아니라 몸뚱어리 전체를 헌신한 돼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라. 어떤 불온한 요소가 이 무대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내가 돼지 머리와 떡시루나 올려놓고 간단하게 고사를 지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구태의연한 생각으로는 회원들을 설득할 수도 없을 것이며 동참시킬 수는 더더구나 없을 것이다. 다른 형식 다른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겁게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을 벗게 해줘야 하는 것이 내 임무다. 첫 번째 놀이마당은 헤르만 니치의 퍼포먼스를 차용했다. 갓 도살된 양이나 돼지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신체를 찢어발기거나 피와 내장을 관객들에게 뿌리는 무대를 두어 번 보았다. 처음에는 엽기적이었고, 충격적이었으며 나중에는 억제하기 힘들만큼 충동이 일었다. 사람이나 짐승을 살해함으로써 종족과 종족의 영역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의 의식과 어디쯤에선가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 회원 중에는 영상물이나 화보를 통해서 그의 작품을 구경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 무대에 올려짐과 동시에 그의 작품은 내 작품으로 거듭나리라 믿기 때문이다. 여기는 ‘공간 손’이고 지금은 2007년 겨울인 까닭이다. 그리고 작품을 완성시킬 사람들은 자만심과 교만함으로 가득 찬 내 회원들이다. 이렇게 조건이 다른데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돼지는 머리를 위로 한 채 사지를 벌리고 있다. 생이 끊기고 나서야 가져보는 직립의 자세다. 빨간 나비넥타이를 맸지만 암퇘지다. 돼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객석을 쳐다보고 있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0404의 완벽한 작품이다. 돼지를 사육하는 축산업자에게 완벽한 작품이란 뻔한 것이다. 맛있는 육질이 아니겠는가. 나는 0404의 생산물에게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을 위해서 그에게 돼지 한 마리를 특별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좋은 종자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최상의 프로그램대로 키워낼 것도 의뢰했다. 깨끗한 우리에서 적당한 운동을 시키고 영양이 균형 잡힌 사료를 먹여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야 좋은 결과물이 나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까탈을 부렸던 것은 그가 특별한 구조의 사육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최첨단시설을 갖춘 아파트형 축사에서 가축을 사육한다. 사료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샤워장치와 환기장치 그리고 위생처리가 가능한 도살장까지 그는 자신의 축사에 설치를 해 놓았다. 모든 것은 컴퓨터로 자동 처리된다고 했다. 이른바 유기농 채소처럼 웰빙용 가축을 사육한다는 것이었다. 종자가 우수하고 골격이 실한 수컷과도 교미를 시켰다오. 해볼 것은 다 해봤고 누릴 것도 다 누렸으니 저 놈의 한 생은 무척 행복했을 것이오. 수퇘지와의 절정의 순간에 저놈의 숨통을 끊었거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 그 공간이 바로 천국 아니겠소? 나는 녀석의 영혼이 천국으로 승천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천국이라고 말할 때 그는 무척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가축도 사는 동안 행복해야 하며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돼지는 더 없이 행복해 보인다. 입매가 살짝 치켜지고 눈 꼬리가 슬쩍 내려온 것이 영락없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형상이다. 무대에서 내려지면 저 녀석은 저녁 파티용 바비큐로 구워질 것이다. 저렇게 근사한 미소를 가진 녀석이니 맛 또한 일품일 것이다. 
0404가 돼지의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손놀림이 사랑하는 여자의 알몸을 쓸어내리듯이 부드럽고 애틋하다. 그의 손길은 정수리에서 뒷덜미 그리고 척추를 지나 꼬리에 이른다. 다시 그의 손은 삐뚤어진 빨간 넥타이를 고쳐 매준다. 그는 콩알만 한 젖꼭지에 입술을 댄다. 새끼를 낳아본 적이 없어서 덜 여물었군. 돼지 젖꼭지에서 입술을 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이 돼지의 성기에 머물렀다 떨어진다. 그는 돼지의 전신을 죽 훑어본다. 불규칙하던 그의 숨소리가 멎는다, 몇 초 동안. 그는 제단에 준비된 칼을 집어 나에게 넘겨준다. 칼끝이 내 가슴 쪽으로 향해있다. 나는 칼날을 받아 쥔다. 손바닥에 닿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짜릿하다. 나는 돼지의 몸뚱이에 오른손을 갔다댄다. 살의 탄력이 오른손바닥에 전해진다. 손이 뜨거워진다. 죽었던 신경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나는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아주 먼 곳에서 걸어오는 듯한 북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숲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북소리가 걸어 나온다. 태중의 심장박동처럼 쿵쿵거린다. 나는 0404가 건네준 칼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칼날이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배우가 아니라 연출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무대 밑으로 내려온다. 0404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찬물을 한 컵 가득 마신다음 와인과 잔을 들고 무대로 오른다. 0404의 기대를 저버리기로 결심한다. 나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돼지 입에 물린다. 와인을 넘치도록 따라놓고 넙죽 절을 한다. 0404가 무대로 올라온다. 나는 그를 제지시킨다. 회원들에게 맡겨봅시다. 저들이 주인공인 무대잖소. 나는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낮은 소리로 말한다. 음악을 꺼버리고 조도를 높인다. 메인조명에서 푸른빛이 쏟아진다. 돼지의 몸뚱이는 회칠을 한 것처럼 창백하게 보인다. 516이 무대로 오른다. 지폐 한 장을 입에 물리고 절을 한다. 손 작가, 공연을 망칠 작정이요? 0404가 역정을 낸다. 돼지를 손질하고,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음악을 편집하고, 잘 벼린 칼을 준비하는 등, 그는 나를 젖혀두고 많은 준비를 했다. 아마도 헤르만 니치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미리부터 회원들의 진을 빼버린다면 공들여 기획한 본 공연은 실패할 지도 모른다. 몇 사람이 더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분위기는 무르익지 않는다. 나는 0404의 팔을 붙잡은 채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참아낸다. 0404가 내 손을 뿌리친다. 음악을 재생시키고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칼이 쥐어져 있다. 쿵. 쿵. 쿵…… 타악기의 리듬에 맞춰 그가 춤을 춘다. 춤사위가 거칠고 크다. 돼지를 들고 춤을 추던 강신무와 닮아있다. 열정적으로 무대를 휘젖던 그가 두 손을 높이 치켜든 다음 합장을 하듯 모아 내린다. 그리고 돼지의 가슴에 칼을 꽂아 그어 내린다. 지퍼가 열리듯 가슴이 쩍 벌어진다. 심벌즈가 강하게 부딪힌다. 머리가 흔들릴 만큼 음악소리가 커진다. 칼날이 멈춘 곳은 돼지의 성기다. 열린 가슴에서 피가 솟아나온다. 숨통만 끊어놓고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0404의 치밀성에 또 한 번 놀란다. 아직도 따뜻하군. 손바닥으로 피를 한 움큼 움켜쥔 그가 피 냄새를 맡는다. 누군가 탄성을 지른다. 음악이 점점 빨라진다. 묵직한 타악기의 리듬이 실내에 가득 찬다. 회원들 모두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나는 멀찌감치 물러난다.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무대의 조도를 낮춘다. 푸른빛은 붉은 빛으로 바뀐다. 음은 점점 고조된다. 누가 누군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칼을 쥔 손들이 돼지의 가슴을 난자한다. 몇몇은 창자를 잡아당긴다. 창자는 바닥으로 쏟아진다. 마술 상자에서 끌려나오는 스카프처럼 돼지의 창자는 한참동안 끌려나온다. 저렇게 긴 것이 돼지 안에 담겨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여러 명이 창자를 붙들고 춤을 춘다. 칼날도 번뜻번뜻 빛을 발한다. 회원들의 몸짓이 격렬해진다. 무대 바닥이 핏물로 흥건해진다. 내장이 터져 오물이 쏟아진다. 붉고, 푸르고, 퍼런 색색의 빛이 무대 위로 쏟아진다. 핏물에 반사된 불빛이 자지러진다. 이제 돼지의 뱃속은 텅 비었다. 이대로 저들을 미치게 할 수는 없다. 음악을 꺼 버린다. 그들의 몸짓이 일순 정지된다. 조명을 약간 더 밝게 한다. 회원들의 얼굴에 표정이 어린다. 얼굴마다 땀이 번들거린다.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던 무표정이 한 꺼풀 벗어진 것 같다. 지고 있던 짐을 조금 덜어낸 듯이 가벼워 보인다. 입가에는 느낄 듯 말 듯한 미소도 번져있다. 잘 차려입은 그들의 옷이 핏물과 오물로 얼룩져있다. 그들은 멋쩍은지 서둘러 각자의 방으로 사라진다. 한 시간 뒤에 본 공연이 시작될 것입니다. 허둥지둥 사라지는 그들의 등을 향해 이미 안내된 프로그램의 순서를 일러준다. 0404는 번들거리는 땀을 훔치지도 않고 난자당한 돼지를 수습해서 주방으로 내간다. 이제 돼지의 소임은 끝났다. 그것의 피는 ‘공간 손’과 회원들을 정화시켜 안전하게 작품을 완성시킬 것이다.  
내부의 등을 모두 다 켠다. 동굴 속을 헤매다 갑자기 바깥으로 퉁겨진 것처럼 눈이 부시다. 새로 설치한 천장 중앙의 메인 조명 탓이다. 눈을 감았다 뜬다. 빛 무더기는 수북하게 쌓인 눈을 연상시킨다. 눈부심은 하얗디하얀 눈을 봤을 때와 비슷하다. 금방 눈을 쏟아 버릴 것 같았던 하늘이 생각난다.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릴까 그러나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보고 날씨에 대한 생각은 털어 버린다. 무대는 핏물과 오물이 뒤범벅이 되어 역한 냄새로 가득하다. 공기 정화기를 가동시킨다. 강력모터가 장착된 환풍기 소리가 요란스럽다. 무대 위에 깔린 비닐을 조심스레 거둔다. 핏물과 오물이 새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한다. 그리고 무대 위와 회원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를 깨끗하게 닦아낸다. 닦고 또 닦아낸다. 방향제 버튼을 누른다. 솔잎 향이 쏟아진다. 틈새까지 스며들도록 많은 양을 분사한다. 미쳐서 부유하던 냄새들과 소란스럽던 몸짓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진다.   
강수빈. 그녀는 지금 분장실에서 준비 중이다. 이름만 들먹이면 알만한 미용전문가와 코디네이터를 그녀에게 붙여놓았다. 그녀가 입을 드레스는 최고의 작품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디자이너 A가 제작한 것이다. 후배의 작품 속에 모사 된 크리스챤 라크르와의 드레스에 뒤지지 않는다고 A는 자부했다. 당신은 대림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배 아무개 화가의 작품전을 보았을 것이다. 그 작품전에 차용된 드레스가 모두 크리스챤 라크르와의 작품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크리스챤 라크르와나 화가 배 아무개보다 ‘치마를 올려 봐도 될까요?’라는 작품전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자부하는 A는 드레스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싫다고 말했다. 손 작가, 내 작품료를 지불하는 것이라면 그만두시게. 그러나 내 작품에 대해서 예를 갖춘 것이라면 기꺼이 받겠네. 그는 내가 건네준 수표를 확인하면서 별 필요도 없는 말로 자신을 수식했다. 0404에게 감사하게나. 이 작품은 그 사람에 대한 내 사랑의 표시이기도 하니까. 그는 돈을 손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0404에 대한 애정을 넌지시 내비쳤다. 아, 모델도 0404가 소개했다지? 내 작품을 소화할 능력이 충분해 보였어. 0404 그 친구 틀림없이 큰일을 낼 거야. 너무 오랫동안 움츠리고 있었거든. A는 생각보다 수다스러웠다. 어떤 과정을 통했던 간에 이제 드레스의 주인은 바로 그녀, 강수빈이다. 또한 그 드레스를 입은 강수빈은 내 작품으로 완성될 것이다. 
청소도구를 내다놓으려고 뒷문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저녁 내내 폭설이 내렸으면 좋겠다. 아스라하게 도시의 불빛이 보인다. 그곳으로 열린 길은 어둠과 눈이 지워버렸다. 오늘밤, 이곳은 일상과 무관하게 시간이 흐를 것이다.
창고까지 가려다 그만둔다. 걸레와 빗자루를 처마 밑에 세워놓은 다음 공연장으로 들어온다. 다시 한 번 무대를 점검한다. 조명의 밝기를 조절해보고 그녀가 앉을 의자도 제 자리에 배치한다. 스위치를 눌러 등갓을 떨어뜨려 본다. 치마모양의 등갓은 의자를 감싸듯 정확한 위치에 착지한다. 다시 등갓을 제 위치로 끌어올린다. 다음은 5대의 카메라를 살펴본다. 첫 무대의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다. 5대의 카메라는 제각각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곧 그녀가 무대로 나올 것이다. 카메라를 다시 작동시킨다. 카메라가 무대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무대가 녹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회원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만약 카메라가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연기를 하게 되거나 유리벽 속의 각각의 공간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무대 중앙에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희다. 드레스의 가슴은 깊이 파였다. 드러난 목과 어깨와 팔도 얼굴색과 같다. 반짝거리는 파우더를 발랐는지 가슴과 목에서 빛이 톡톡톡…… 반사된다. 화강암으로 깎아놓은 조각상 같다. 회원들이 하나 둘 객석으로 나온다. 절반쯤 미쳤던 얼굴과 몸짓은 완전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들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인다. 그들은 모두 성장을 했다. 처음 입었던 옷보다 훨씬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식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한껏 차려입었다. 마치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과 신부 같다. 999도 오늘은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어깨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스커트 자락은 허벅지까지 트였다. 오른다리 위로 꼬여진 왼다리가 트임 사이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쭉 뻗은 시원한 다리다. 999가 여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평소의 차림새로 보아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물론 999가 여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원으로 받아들인 이후 나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잊고 있었다. 헐렁한 재킷과 바지 그리고 워커나 운동화, 항상 깊이 눌러쓴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그녀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돼지를 수습해서 주방으로 갔던 0404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무대 중앙을 비추는 메인 조명의 조도를 최고로 높인다. 너무 밝아서 강수빈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형체와 드레스의 색깔 모두 완전히 휘발된다. 오직 무색으로 탈색된 빛 덩어리만이 무대 중앙에 쌓여있다. 무대를 쳐다보던 회원들은 하나같이 당황한다. 눈이 부신지 손차양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회원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지막으로 0404가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어느새 그는 완벽하게 차려입었다. 더펄더펄하던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묶고 수염도 깨끗하게 깎았다. 춤출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중후한 무용수 같다. ‘포 에버 탱고’에 등장했던 아르헨티나의 남자 무용수처럼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의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이곳이 아닌 특별한 곳에서 봤던 얼굴이다. 어디서였지? 무슨 일로 만났을까? 멈춘 기억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분명하지 않은 어떤 현장에 대한 기억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낸다. 메인 조명의 조도를 낮춘다. 강수빈의 모습이 점점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이 앉아있다. 이제는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것처럼 또 다른 색감이 느껴진다.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에게 던졌던 질문이 불필요했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은 것 같다. 지금 그녀는 하나의 사물이다. 그러나 마네킹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녀는 보여줘야 한다. 그녀에게 움직임은 허용되지 않는다. 눈알을 굴리는 것마저도. 그녀의 연기는 컨셉만 있고 대본이나 콘티는 없다. 나는 프롭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겁니다. 그녀를 점검하기 위하여 분장실로 들어간 나에게 그녀는 자신이 프로라는 것과 주체적으로 공연에 참석했음을 다시 강조했다. 손 작가님, 준비는 잘 되었지요? 그녀의 다시 한 번 자신이 입을 여벌의 치마를 확인했다. 물론. 강수빈씨가 끝까지 잘 죽어있기만 한다면. 또한 잘 살아있기만 한다면. 나는 그녀에게 짐을 되돌렸다. 작가는 내가 아니라 저 바깥에 있는 회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당신과 저 작가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도. 그러니 저들과 함께 잘 부활하도록 최선을 다해 애써보시오. 나는 그녀에게 일침을 놓았다. 그런 다음 그녀를 무대 중앙으로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부드럽게 흐르던 바이올린의 선율이 잦아들고 있다. 이어서 팀파니를 선두로 하는 타악기들의 합주가 시작된다. 경쾌하던 리듬이 심벌즈를 기준으로 갑자기 빨라진다. 앞 무대에서보다 더 현란하고 빠르게 음악은 연주되고 있다. 저 음악 역시 타악기를 위주로 편곡한 것이다. ‘은유’였던가 ‘열정’이었던가. 0404의 작품이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다. 풀어졌던 공기가 팽팽해진다. 회원들의 몸짓도 조금씩 들썩거린다. 메인 조명의 조도를 조금 더 낮춘다. 그녀에게 부분부분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사이드 조명을 일제히 켠다. 그녀에게서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림자를 갖지 않은 완벽한 물체가 된다. 강수빈, 그녀는 지금 박제된 여왕이다. 회원들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쏠린다. 음악은 조금 더 강렬해진다. 희미하게 밝혀두었던 객석의 조명을 완전히 꺼버린다. 회원 몇몇의 검은 실루엣이 성큼성큼 무대로 나간다. 준비된 가위는 하나뿐이다. 오직 한 사람만 가위질을 할 수 있다. 머뭇거리던 발걸음들이 갑자기 빨라진다. 516이 가장 먼저 가위를 집어 든다. 역시 공격수답다. 일간지 1면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전투적이었다. 강수빈에게 쏘아지는 조명의 일부가 516의 몸에 의해 잘려진다. 번쩍, 가위 날에 불빛이 미끄러진다. 입을 크게 벌린 가위 날이 강수빈이 입고 있는 드레스에 내려앉는다. 가위 날은 어깨에서부터 가슴 허벅지를 거쳐 스커트 끝단까지 잘근잘근 깨문다. 나는 아찔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천만 원의 작품료를 지불한 드레스. 천만 원의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무대에 깔린다. 516은 쉽게 가위 날을 닫지 않는다. 가위는 드레스의 전신을 부드럽게 애무한다. 몇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어떤 일이든 처음은 쉽지 않다. 516은 그 쉽지 않음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뒤따라 무대에 올라간 몇몇은 강수빈의 주위를 서서히 돌고 있다. 그들의 눈빛은 강수빈과 드레스와 516의 가위를 번갈아 오간다. 이윽고 그들의 동작이 멈춰진다. 가위 날이 드레스의 끝단을 베어 문다. 입을 다문 가위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진다. 가위를 넘겨받은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516이 잘라낸 부분만큼 끝단을 잘라낸다. 다음. 다음. 다음…… 가위는 계속해서 다른 손으로 넘겨지고 발목을 덥고 있던 드레스는 점점 짧아진다. 잘려지는 부위도 점점 더 넓어진다. 가위를 들지 않은 사람들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강수빈의 주위를 뱅글뱅글 돈다. 나는 슬그머니 녹화실로 들어간다. 5대의 카메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역할을 다하고 있다. 5대의 모니터에 강수빈과 회원각각의 표정들이 담겨지고 있다. 전등갓에 장치한 마이크가 그들의 숨소리며 입맛 다시는 소리까지 담아서 보내준다. 죽어있는가, 살아있는가. 강수빈에게 고정된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그녀는 무표정이다. 아직 그녀는 죽어있다. 회원들은 가위질을 하기 전, 하나같이 강수빈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시선을 움켜쥐지 못한다. 그녀의 시선은 그녀의 몸처럼 죽어있다. ‘여보, 앵벌이 다녀올게’라고 출근할 때마다 말한다는 1004가 가위 날을 크게 벌린다. 그는 성형외과 의사답게 가위질이 민첩하다. 그가 드레스의 양어깨 끈을 자른다. 그리고 브래지어 위로 너풀거리는 옷자락을 잘라버린다. 계속해서 가위질을 하려는 그의 손을 누군가 잡는다. 남의 몫까지 해치우는 것은 반칙이야. 그에게 가위를 빼앗은 이가 말한다. 그의 기호도 생각나지 않는다. 속옷이 보이자 좀더 과감해진 그들은 다시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탄성인지 울음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머리를 흔들고 휘파람을 불기도 한다. 그들의 눈빛은 모두 가위에 집중된다. 가위는 허벅지 길이로 짧아진 스커트 자락을 허리선까지 죽 그어버린다. 손바닥만한 삼각팬티가 입혀진 사타구니가 노출된다. 우우우. 환호성이 터진다. 이제 천만 원짜리 A의 작품은 강수빈의 허리에 겨우 매달려 너풀거리고 있다. 999가 강수빈의 등 뒤로 돌아가 간신히 매달린 허리선을 잘라버린다. 후루루 천만 원의 마지막 자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가장 훌륭한 선물은 완전한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 같다. 회원들이 자신들에게 베푼 선물은 조각조각 잘라져 섬유조각으로 흩어졌다. 목표지점은 여기까지다. 약속대로라면 이쯤에서 그들은 멈춰야 한다. 그러나 먹이 감을 향한 저들의 눈빛은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허기져 보인다. 드레스 마지막 자락을 잘랐던 999가 예상을 깨고 강수빈에게 다가간다. 순간 강수빈의 눈빛이 살아난다. 999와 강수빈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선다. 그녀들의 눈빛은 주위를 더욱 흥분시킨다. 999가 가위 날을 벌린다. 강수빈의 눈빛이 가위를 밀어내려고 기를 쓴다. 그녀의 몸도 살아나기 시작한다.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가위 날에 그녀의 시선이 ‘싹뚝’ 잘린다. 균형이 깨진 틈을 타서 999가 그녀의 브래지어 중심을 끊는다. 공기를 빵빵하게 채운 공처럼 가슴의 탄성이 살아난다. 강수빈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다. 이제, 치마를 내려 주세요. 음악소리와 회원들의 괴성에 그녀의 목소리는 뭉개져버린다. 나는 모른 체한다. 지금 무대를 내릴 수는 없다. 저들이 더 미쳐서 완전히 진을 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회원들의 목젖이 크게 움직인다. 강수빈의 움직임은 그들을 자극한다. 그들 중 몇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웃옷이 벗겨지고 아래옷이 벗겨진다. 자신들을 옭아맨 옷과 표정을 모두 벗어버린다. 강수빈과 999의 시선에 회원들이 퉁겨진다. 그들은 맨몸을 서로에게 비비적거린다. 그리고 뒤엉켜 춤을 춘다. 그들은 강수빈과 999를 에워싼 채 격렬하게 움직인다. 가위는 여전히 999의 손에 들려있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한다. 그녀는 강수빈의 시선을 뭉개고 그녀 앞에 꿇어앉는다. 999는 가위를 강수빈의 사타구니로 가져간다. 가위 날이 두 번 벌어졌다 오므리자 손바닥만한 팬티는 너덜너덜한 천 조각이 된다. 사이드 조명 한 줄기가 그녀의 사타구니를 파고든다. 수수수…… 터럭들이 일어선다. 999는 터럭이 소복한 사타구니에 고개를 묻는다. 우우우…… 다시 괴성이 다시 터진다. 겉옷을 벗었던 회원들이 속옷마저 벗어 던진다. 그들의 성기는 하나같이 팽팽하게 발기되었다. 오래 전에 체념해버렸다던 몇몇의 성기도 불끈 섰다. 그들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휘파람을 분다. 999의 머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강수빈의 유두가 999의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누군가 999의 머리를 내리친다. 0404다. 그의 눈빛이 이글거린다. 그는 고개를 수습하는 999를 다시 한 번 내리친다. 이건 반칙이야. 고개를 쳐든 999는 키득키득 웃는다. 멀대같은 몸이 드러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직선형이다. 그녀는 가위를 든 채로 강수빈에게 다가간다. 0404는 에워싼 회원들을 견제하느라 999를 통제하지 못한다. 네 가슴을 내게 줘. 공중에 들린 가위 날이 입을 벌린다. 손 하나가 999의 밋밋한 가슴을 훔친다. 강수빈이 카메라를 향해 눈빛을 보낸다. ‘이.제.치.마.를.내.려.주.세.요.’라는 강수빈의 목소리가 회원들의 가쁜 들숨에 빨려 들어간다. 나는 다시 미적거린다. 강수빈의 눈이 매서워진다. 나는 등갓으로 연결된 버튼을 더듬는다. 눈은 5개의 모니터를 바쁘게 살핀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진다. 터질 것처럼 팽팽해진 아랫배를 움켜쥔다. 허공을 휘저은 가위 날이 강수빈의 몸으로 내려온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진다. 등허리를 내리훑는 전율. 팬티가 축축하다. 등판도 푹 젖었다. 모니터를 다시 살핀다. 강수빈의 가슴에서 피가 흐른다. 양 팔도 죽죽 그어져 있다. 팔에서 흐르는 피는 깃털이 돋은 것처럼 팔을 감싼다. 눈을 질끈 감고 버튼을 누른다. 가위 날에 부딪힌 빛은 등갓 속으로 흡수된다. 강수빈에게 붉은 공단 스커트가 입혀진다. 붉은 스커트는 팽팽하게 부풀어있다. 고래힘줄은 아니지만 탄성이 강한 플라스틱 힘줄을 스커트에 심었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매가리가 없어 보인다. 무중력을 헤매는 몸짓처럼 그들의 몸짓은 둥둥 떠다닌다. 하나 둘 바닥으로 널부러진다. 실컷 두들겨 맞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LSD나 대마를 흡입한 것처럼 눈빛이 풀린 사람도 있다. 그들의 얼굴에서 일상의 표정이 완전히 벗겨졌다. 만지기만 해도 상처가 날 것 같은 표정들이다. 999는 몇 발작 뒤로 퉁겨진 채 헝클어져 있다. 그녀를 내리쳤던 0404는 보이지 않는다. 모니터를 다 뒤져도 그의 모습은 찾아지지 않는다. 강수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치마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손이 쑥 올라온다. 그 손에도 피가 묻어있다. 이윽고 상체가 솟는다. 0404다. 꽉 다문 입. 짙은 눈썹. 아, 저 얼굴은 11년 전의 K다. 공연에 실패한 후 참담한 얼굴로 자취를 감췄던 선배 K. 그의 피 묻은 손이 강수빈을 들어올린다. 허공으로 들려진 그녀가 양팔을 활짝 편다. 투명한 날개가 빛의 넓이로 돋아난다. 메인조명을 최고로 높인다. 펑. 조명등이 터져 버린다. 파.다.닥. 유리파편이 그녀의 날개 위로 쏟아진다. 그녀의 몸에 박힌 유리조각이 무수히 난반사를 일으킨다. 푸르고 붉고 흰 빛을 뚫고 그녀가 날아오른다. 각 방향에 위치한 5대의 카메라에 강수빈의 날개 짓이 가득 찬다. 카메라와 마이크의 전원을 내린다. 공연장의 모든 조명을 꺼 버린다. 나는 녹화된 테이프를 조심스레 챙긴다.



김민효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
추천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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