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7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서동인/작품해설/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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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인
반란을 엿보다
― 붉은 일기․1
광릉내 도화 밭, 저 꽃사태
땅의 피 뿌리로 수혈 받은 반란 앞에
어질어질, 한 사내 수음을 한다
지 혼자 꼴리면 되었지
왜 꽃들을 미치게 하는가
뿌리 끝 꽃향기 날리는 사내,
가슴이 짜릿한
환장할 봄날에
꽃들이 수런거리는 소리
미친 놈, 미친 놈
하늘 누나가 내려요
― 붉은 일기․2
일기 검사를 한다 별을 닮은 성우,
수능 치른 큰 형과
대안학교 다니는 작은 형,
친구들 얘기도 늘어놓는다
사춘기거든요
준호도 마찬가지, 법대 다니던
큰누나 이야기 울컥,
덤덤한 내 목이 더 아프다
눈이 오네요 선생님, 하늘 누나예요
담배 끊은 아버지 연기가 다시 내려요
많이 쌓였으면 좋겠지?
못다한 말이 내려요
누나의 눈이 제일 아프단다
스륵 스륵, 울고 있잖니?
나무들의 수다
― 붉은 일기․3
나무들이 수다를 떤다 집 떠난 주인 아들이 왔다고, 가지 끝 바람을 불러 모아 손바닥을 뒤집는다 빈집 내력을 알고 있는 나무들, 집 지은 기념으로 뿌리내린 단감나무, 겨울 햇살도 시샘 내는 매실나무, 하늘 보란 듯 가시 세우는 유자나무, 팔자 기구해도 꿋꿋한 무화과나무, 화냥년 입술처럼 빨간 앵두나무도 손을 내민다 반가운 나무들 호들갑인데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매실나무, 날강도에게 몽땅 털렸다고 울먹인다 복숭아나무도 설익은 열매 도둑맞았다고 난리다 자주 좀 찾아오라고, 빈집을 지키는 나무들 주인의 손길이 그리운지 멀어지도록 잎새를 흔든다
호랑나비 아버지
― 붉은 일기․4
달의 골짜기 간다
그 곳의 경계 눈치 챘을까
공원묘지가 가까워지자
긴장한 차바퀴가 미끄러진다
장례식날 호랑나비로 날아가
산허리에 세 든 아버지
봉분에 내려앉은 달빛이 비껴 선다
죽어도 섬이 싫다던 아버지
파도마저 울다 간 바닷가 빈소 떠나
섬처럼 누워 계시군요
낯익은 얼굴도 있더구나
술친구도 생겼다는
아버지 말씀
늦었다, 어서 가봐라
중동역 다리미
― 붉은 일기․5
또, 만났습니다 다리미 사온 삼촌
굿판의 나라에서 무궁화 피도록
모나미 연필로 편지 보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모래 씹은 삼촌은
이제 제 나이를 닮았습니다
귀국 선물 전자시계는
열 살의 '광주'를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의 주름 펴지 못하는 다리미 타고
달려온 삼촌, 전남대 병원 중환자실
아버지 손을 포갰습니다
장례식장 빗줄기 머나먼 바다를 손질했습니다
알 수 없어요 미놀타 카메라가 시간을 도용할 때
바다로 가출한 누나, 사진 속에 없습니다
누렁이가 대신 찍힌 가족사진
중동역 가면서 바라봅니다
사막의 저녁이 붉은 커피를 마십니다
지구의 어떤 마을, 독한 대통령이 죽었습니다
중동역에 정박한 다리미 떠내려 갑니다
메이드인, 국적이 없습니다
17호선 국도
― 붉은 일기․6
그 길 따라 중학교에 갔다
나는 가을 선생, 1학년
국어책이 통통배처럼 떠다니는 교실
닻을 내리자, 봄도 아닌데 햇살을 몰고
김영랑 시인이 찾아 왔다
북을 치면서, 난데없이 소리하고 싶을 때
갈까~ 보다, 가, 을~ 까아 보다
어린 왕자 같다고 애들이 웃을 때
운동장 축구공이 창문을 깼다
국어책을 적시는 소나기 내릴 때
첫 사랑이 다녀갔다 굿하는
퇴근 길 거북 호수, 선소 앞바다 나비 울 때
개도 막걸리는 하얀 물거품으로 웃었다
감히, 이순신 장군과 동석을 했다
끝내, 김기림 시인은 오지 않았다
휴직한 국어 선생님 가신 날
화단에 핀 국화 옆에서 아이들이 울었다
이른 폭설로 국도 17호선으로 이탈한
가을 열차, 차창 속에 숨은 아이들
설익은 뺨을 가로수가 후려쳤다
돼지도 웃었다
― 붉은 일기․7
바리게이트 치고 이른 여름방학 선포한 검정 세단, 수산시장 갈매기 울고 뱃고동 울리는 학교 떠나 땡볕 허허, 벌판에서 웃었다 운동장 질경이 깔아뭉갠 아홉시 뉴스 카메라에 낙인찍힌 세대, 여름 내내 아침이슬 먹고 구정물 토하는 돼지도 웃었다 거짓말 같은 세상 믿지 않았다 선생님 없는 교실로 등교했다 그들만의 푸르른 상록수 부르면서 웃길 수 없는 개그맨의 꿈을 접었다 콩나물 시루, 고추 넣고 마늘 넣고 팍팍 무치는 이주일보다 세상이 더 웃겼다
대서양 넥타이
― 붉은 일기․8
바다는
대서양이 으뜸이라고
물이 좋다고
밤에만 출렁이는 그 바다
일상이 무료할 때
헤엄치고 싶은
그러나 폭풍우를 조심하라고
표류할 때는
명품 넥타이 풀어주라고
물뱀처럼 헤엄치라고
서울은 넥타이
떼 지어 다니는 물뱀의 바다
물 좋은 대서양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
― 붉은 일기․9
어제는 신도림역, 오늘은 종로 3가역에서 만났다 스트레스 해소에 제격이라고 황금돼지를 집어 던지는 저 사내,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기절한 돼지가 살아난다고 걸음을 멈춘다 죽었다, 신기하게 살아나는 돼지들 사내는 거품을 물고 연달아 돼지를 내동댕이친다
순식간에 팔려 나간 돼지들, 천 원 짜리 돼지를 떨이한 사내는 심심한지 행인들을 붙잡아 집어 던진다 행인들이 철길로 꼬꾸라진다 사람들은 황금돼지처럼 살아나지 못한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관짝처럼 떼 지어 달려드는 전동차가 도망치는 행인들 비명소리를 싣고 떠난다 전동차 꽁무니를 바라보는 사내가 키득키득 웃는다
가까스로 사내 손목을 뿌리친 나는 황금돼지 해, 우글우글 태어난 돼지 띠 걱정을 하면서 환승역으로 도망친다 순간, 내가 무슨 띠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죽었다, 살아난 돼지띠인가
시작노트
시는 박토에서 싹을 틔우지 않았다. 써야 하는 데 쓸 수가 없었다. 가슴이 박토처럼 메마른 시인을 외면하는 시에게 말을 걸면서 뭐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아, 미칠 것 같을 때 써내려 간 붉은 일기……. 이십대 이후 밀쳐 둔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재작년인가, 고향에 머물렀다. 신기하게 내 손등으로 날아온 호랑나비 한 마리, 장지에 모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버지라고, 호랑나비처럼 훨훨 날아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중학교 교실에서 과거 속의 나를 만났다. 교복 입은 사춘기 아이들 웃음소리로 피어난 화단의 국화, 그 꽃잎이 떨어지기도 전에 폭설이 내렸다. 미친 듯이 부둣가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시는 꿈틀거리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해질녘 노을 물들인 바다를 보면서 붉은 일기를 썼다.
고향에 내려 갈 때 입은 여름옷이 다음해 봄옷으로 바뀌기 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났다. 부끄러워 덮어버린 붉은 일기가 세상으로 걸어 나간다. 박토의 가슴에 시의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복토 작업을 해야겠다. 기름진 흙과 거름이 필요하다.
|작품해설|
환승역의 감각 내력來歷의 수사
― 「붉은 일기」 연작의 경우
장이지|시인
1. 연작의 ‘고리’
서동인의 「붉은 일기」 연작은 그것이 ‘연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일견 ‘붉은 일기’라는 부제가 일관되게 붙은 이 연작은 연작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일관된 ‘폼(form)’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타일이나 주제의 연속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화법이나 소재의 선택도 공통분모가 없어 보인다. 이 연작은 상당히 ‘느슨한’ 연작이어서 다시 한 번 시로 돌아가게 한다.
「붉은 일기」 연작이 연작으로서 다소 헐거운 연속성을 지니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일기’라는 형식이 지닌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서정시라는 것이 원래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부제로 붙은 ‘일기’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족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사족이 아니기 위해서는 ‘일기’라는 말 앞에 붙는 말이 더 중요할 것이다. 가령 노신의 「광인일기」는 광인의 광증에 기대어 자꾸 서사가 과장된다는 점에서 연속성과 일관성을 지닌다. 일기라는 것은 나날의 개인적이지만 의미 있는 사건들을 적은 기록물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다룰 수 있는 주형鑄型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일기에 해당되는 설명이고 시나 소설이 일기를 표방할 때는 어느 것이나 다룰 수 있는 방만함보다는 일정한 스타일이나 테마를 설정해야 비로소 시적 긴장감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것은 어떤 ‘집중’을 필요로 한다. 브람 스토커가 조나단 하커의 일기를 늘어놓아 만든 '드라큘라'라는 소설은 ‘진짜’ 일기라기보다는 드라큘라에 관해 집중된 가상의 세계이고 부동산 투기와 자본가의 착취라는 테마를 흡혈 모티프로 그린 것이다. 강우식의 「노인일기」 연작은 노인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진짜 일기의 고백물이기보다는 노인 문제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그것을 개인적인 세계로 표출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붉은 일기」 연작은 일정한 스타일이나 테마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기라는 말 앞에 붙은 ‘붉은’이라는 수식어는 도대체 어떤 한정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 생경한 고백의 수사 앞에서 시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붉은’이라는 수식어는 시적인 사건 이전의 개인적인 심정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연작들은 오히려 연작의 형태를 취하지 말았어야 좋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내 시인으로서의 감각이나 취향과 관련된 언급이다. 그런데 나는 이 연작을 ‘연작’으로서 내놓게 된 인간으로서의 서동인에 대해 좀 관심이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작은 연작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이 연작을 느슨하게 결합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고리(필연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고리’가 서동인의 시인으로서의 재기才氣에서 나오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무의식이라든지 본심本心의 세계에서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다고 생각한 것이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내가 본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2. 연작의 두 대극, 그 심상 지리
「붉은 일기」 연작은 하나의 도시가 잉태한 기획물이 아니다. 연작이라고 하면 역시 일정한 공간이 만들어낸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서동인은 끊임없이 공간을 만들고 탈주하기를 거듭한다. 광릉수목원(「반란을 엿보다」 연작 1번)에서 여수의 빈집(「나무들의 수다」 연작 3번)을 거쳐 ‘열 살의 광주’, ‘중동역’(「중동역 다리미」 연작 5번)을 지나 서울의 지하철 환승역에 이르러 도망치기를 거듭한다(「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 연작 9번). 어디에선가는 선친이 묻힌 선산이 떠오르고 또 어디에선가는 갈매기가 나는 수산시장이 떠오른다. 그는 토박이로서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국적도 없이 부유한다. 그는 ‘국도17호선으로 이탈한’(「17호선 국도」 연작 6번) 존재이다. 따라서 이 연작은 ‘국도’의 산물이고 ‘환승역’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음직하다. 그래서 이 연작을 통해 시인의 본심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국도’를 따라가거나 지하철 노선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긴 ‘따라감’, 여행도 아니고 방랑도 아닌 이 동력은 왠지 답답하다. 이것은 진정한 탈주脫走인가. 만약 그가 이 동력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면 「반란을 엿보다」를 연작의 첫 머리에 올려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릉내 도화 밭, 저 꽃사태
땅의 피 뿌리로 수혈 받은 반란 앞에
어질어질, 한 사내 수음을 한다
지 혼자 꼴리면 되었지
왜 꽃들을 미치게 하는가
뿌리 끝 꽃향기 날리는 사내,
가슴이 짜릿한
환장할 봄날에
꽃들이 수런거리는 소리
미친 놈, 미친 놈
― 「반란을 엿보다」 전문
이 작품은 「붉은 일기」 연작 가운데서도 제법 수작秀作에 속한다. 대작이나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교적으로 짜임새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연작의 첫 머리에 이 시가 놓여 있는 점이 불만스럽다. 이 시의 짜임새가 안정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불만스럽다. 이 시는 연작의 다른 작품들과 견주어 보았을 때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이 시는 대도시인 서울의 대극에 있으며 연작에 등장하는 다른 소도시들과도 비스듬한 각도에서 대결하고 있다. 공간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미감에서도 그렇다. ‘환장할 봄날’이라는 수사에서 폭발하고 있는 탐미적인 희열은 「붉은 일기」 연작의 여타의 시편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시가 연작의 첫 머리에 와 있는 것은 이 탐미적인 희열이야말로 서동인이 쓰고 싶은 시의 지향을 웅변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정이 지나친 해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붉은 일기」 연작의 다른 시편들을 경유하고 다시 이 시 앞에 돌아왔을 때도 이 단정이 지나치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광릉의 도화 속에서 한 사내가 수음을 한다. 그런데 수음을 하고 있는 사내를 엿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지 혼자 꼴리면 되었지”라고 흉을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물론 그것은 시적 화자일 것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와 ‘한 사내’의 관계에 대해 묻게 되면 이 문제는 의외로 복잡한 문제가 되고 만다. 붉은 도화의 미美에 매혹된 자는 종국에 누구인가. 황홀경을 경험한 자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에 이르러 ‘한 사내’와 시적 화자의 경계는 거의 무너지고 만다. 사실을 말하자면 꽃들은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내’를 미치게 한 것이 꽃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시적 화자는 ‘한 사내’가 꽃들을 미치게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꽃들의 자리로 물러나 ‘한 사내’를 관음증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황홀경은 ‘사내’와 ‘꽃’ 그리고 시적 화자의 거리마저를 완전히 지운다. 누가 누구를 미치게 하는지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적 화자의 관음증적 시선에는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내의 도취마저 미적인 것으로 포착된다. 이 사내와 꽃과 시적 화자의 삼각형은 절대 미美의 장에서 반향反響을 거듭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적 화자의 관음증적 시선이 자기애적인 황홀경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자기 시적 지향에 대한 자기애적 충일감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동인은 이 충일감을 하나의 ‘반란’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충일감이 온전히 충일감으로 끝나지 못하고 훼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미적 충일감은 “미친 놈, 미친 놈”이라는 꽃들의 수런거림에 의해 훼방을 받는다. 잘 만들어진 시답게 이 시는 탐미적인 것과 광기를 꽃들의 수런거림을 통해 결부시킨다. 그러나 탐미적인 것이 광기와 너무 안일하게 결부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시가 안정적인 것이 못마땅하다고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이 시의 완성도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시의 완성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친 놈, 미친 놈”이라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것은 정말 꽃들의 수런거림에 그치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진짜 미적 충일감에 대한 훼방일까. 이것이 역으로 미적 충일감을 고양한다고는 볼 수 없을까. 자기 비하를 통해서 서동인은 스스로를 더욱 고독한 존재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절대 미美와 예술적 광기가 반향反響하는 ‘도화밭’은 이상향일 뿐 실재가 아니다. ‘광릉’은 도시인들이 소풍을 가는 곳이지 생활이 있는 곳이 아니다. 생활이 있는 곳에서 서동인은 ‘환장할 봄날’을 끊임없이 꿈꾼다. 그래서 광릉에서 그가 본 ‘반란’은 ‘생활’에 대한 반란이 아니면 안 되었다. 광릉이 아닌 곳에서도 그러한 반란을 꿈꿀 수 있을까. 가령 서울에서는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미친놈이라는 야유가 오히려 스스로를 고무하는 응원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지점이 서울인데 「붉은 일기」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이 점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어제는 신도림역, 오늘은 종로 3가역에서 만났다 스트레스 해소에 제격이라고 황금돼지를 집어 던지는 저 사내,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기절한 돼지가 살아난다고 걸음을 멈춘다 죽었다, 신기하게 살아나는 돼지들 사내는 거품을 물고 연달아 돼지를 내동댕이친다
순식간에 팔려 나간 돼지들, 천 원짜리 돼지를 떨이한 사내는 심심한지 행인들을 붙잡아 집어 던진다 행인들이 철길로 꼬꾸라진다 사람들은 황금돼지처럼 살아나지 못한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관짝처럼 떼 지어 달려드는 전동차가 도망치는 행인들 비명소리를 싣고 떠난다 전동차 꽁무니를 바라보는 사내가 키득키득 웃는다
가까스로 사내 손목을 뿌리친 나는 황금돼지 해, 우글우글 태어난 돼지 띠 걱정을 하면서 환승역으로 도망친다 순간, 내가 무슨 띠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죽었다, 살아난 돼지띠인가
― 「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 전문
「붉은 일기」 연작에서 서동인은 ‘광릉 도화밭’의 대극에 ‘환승역’을 배치하고 있다. 「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에서 그는 신도림 혹은 종로 3가 환승역의 살풍경을 보여준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환승역에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집어던지는 ‘황금돼지’를 팔고 있는 ‘사내’와 조우한다. 시적 화자는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서 사내의 호객 행위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런데 황금돼지를 다 판 사내가 이번에는 행인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행인들은 황금돼지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그대로 거꾸러진다. 시적 화자는 가까스로 사내의 마수를 뿌리치고 환승역 통로로 도망친다. 죽었다가 살아난 셈이다.
‘환승역’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서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서동인은 「대서양 넥타이」(연작 8번)에서 “서울은 넥타이/떼 지어 다니는 물뱀의 바다”라고 이미 그 살벌함에 대해 고백한 바 있다. ‘물뱀’의 세계가 직접적인 대신 무슨 설화처럼 들린다면 환승역의 세계는 왠지 더 실감이 난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는 체험의 공간이 바로 환승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환승역이란 지하철을 갈아타는 곳이지만 과연 모든 사람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데 성공하는 것일까. 서동인은 환승역이 몇 사람쯤은 이 환승객의 대열에서 탈락시키는 공간이라고 의심한다.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기실 죽고 싶은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왜 죽고 싶고 죽이고 싶어 하는가. 답변이 이미 주어져 있다. ‘서울 살이’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매일 죽을 뻔하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무한 경쟁의 서울에서 살아남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환승역에서 시인은 도망 노예처럼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황금돼지 사내가 쳐놓은 호객의 덫에 현혹되어 걸음을 멈추는 순간 도망 노예는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이 숨 쉴 틈 없는 탈주의 세계에서 ‘절대 미’를 논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친 놈, 미친 놈”이라는 「반란을 엿보다」의 환청은 기실 ‘환승역’의 세계가 ‘도화밭’의 세계에 대해 던지는 냉소라고 보아야 한다. 이 냉소는 「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에서는 ‘사내’의 ‘키득키득’ 웃는 웃음으로 변형된다. 이 냉소를 자기 고양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기애의 세계가 ‘도화밭’이라면 이 냉소에 패퇴하면서도 서울을 떠돌 수밖에 없는 생활의 세계가 바로 ‘환승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힘이 센가 어느 쪽이 더 진정성이 있는가에 따라 이 연작의 성패가 갈린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 점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역시 ‘국도’를 따라가야 하는데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탐미주의도 아니고 풍자도 아닌 ‘내력’의 세계이다. 나는 이 ‘내력’의 세계가 수사학의 문제들을 품고 있다고 말하려 한다.
3. ‘내력’의 감춤과 드러냄
‘내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밟아온 자취’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것은 당자가 발설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취’여야만 하는 것이다. 가령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이 왼손잡이 ‘동이’에게 들려주는 사랑의 기억 같은 것이야말로 ‘내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그 내력의 시간 속에서 한없이 고요해지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내면의 흔들림을 경험해야만 하는 시간이 내력의 시간이다.
그런데 ‘서울’은 내력의 시간을 공유할 만한 여유가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끊임없이 탈주해야만 다음 열차에 탈 수 있는 환승역의 세계이다. 이 익명성의 공간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내력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내력마저도 잊어버리는 공간이 환승역이 아니었던가. 「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의 시적 화자가 “내가 무슨 띠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릴 때 서동인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내력) 자아 정체성을 상실했음을 무심결에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미’를 추구해야 할 ‘미’의 사도는 환승역에서 자신의 모든 지위를 상실하고 쫓기는 도망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도망 노예가 마지막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서동인은 ‘도화밭’과 ‘환승역’의 두 대극 사이에 ‘국도’를 놓고 그 끝에 ‘고향’을 그려놓고 있다. 그곳에서 서동인은 다시 내력의 시간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환승역의 세계로 되돌아갈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들의 수다」는 그런 의미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나무들이 수다를 떤다 집 떠난 주인 아들이 왔다고, 가지 끝 바람을 불러 모아 손바닥을 뒤집는다 빈집 내력을 알고 있는 나무들, 집 지은 기념으로 뿌리내린 단감나무, 겨울 햇살도 시샘 내는 매실나무, 하늘 보란 듯 가시 세우는 유자나무, 팔자 기구해도 꿋꿋한 무화과나무, 화냥년 입술처럼 빨간 앵두나무도 손을 내민다 반가운 나무들 호들갑인데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매실나무, 날강도에게 몽땅 털렸다고 울먹인다 복숭아나무도 설익은 열매 도둑맞았다고 난리다 자주 좀 찾아오라고, 빈집을 지키는 나무들 주인의 손길이 그리운지 멀어지도록 잎새를 흔든다
― 「나무들의 수다」 전문
서동인은 환승역의 세계에서 잠시 고향의 ‘빈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집을 그리는 방식은 제법 특이하다. 그는 집을 가족들의 거소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부재로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빈집’에는 가족의 부재로 인한 공허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 대신 집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 덕택이다. 이 나무들은 스러져가는 가족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집의 내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더 이상 가족이 없는데도 서동인은 ‘빈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기억을 더듬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 시의 전부는 아니다.
정작 이 시에서 나무들이 발설하고 있는 ‘빈집 내력’이란 무엇인지 묻는 것은 호사가 취미일 뿐일까. 나는 그것이 집 지은 기념으로 심은 ‘단감나무’에만 서려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다른 나무들은 표정은 있지만 집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유실수가 한 장소에 서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빈집의 내력은 오히려 다른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내력이란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왜 ‘집’으로 돌아왔는지 또 왜 ‘집’이 비어 있게 되었는지 물어야만 그 전말을 들어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집주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무들의 수다」가 감추고 있는 ‘빈집 내력’이란 기실 ‘집주인의 죽음’이 아닐까. 그것은 이 시의 첫 머리에 놓인 ‘주인 아들’이라는 기표가 시의 끝에 이르러서는 ‘주인’으로 전회轉回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때 좀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무들의 수다」에 이어 「붉은 일기」 연작의 네 번째 작품인 「호랑나비 아버지」가 죽은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간 이야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결국 ‘빈집’이란 아버지의 유택幽宅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내력’이란 아버지의 장례식 때 본 호랑나비를 아버지의 영혼으로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의 ‘내력’이란 수사학의 일종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서동인은 아버지의 산소를 찾는 것만으로는 시적인 사건이 될 수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자기만이 경험한 것(내력)이 여기에 개입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본 ‘호랑나비’야말로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아버지의 영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란 바로 이와 같은 수사학의 문제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수사학의 맥락에서 서동인 시의 ‘내력’은 단순히 내러티브의 차원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선 정감의 차원에서도 문제가 된다. 「호랑나비 아버지」에서 서동인은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죽어도 섬은 싫다고 하시더니 섬처럼 봉분으로 누워계신다고 말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고 나니 낯익은 얼굴들도 보이더라고 외롭지 않다고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독백이지만 ‘대화체’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서동인은 대화체가 주는 정감을 ‘내력의 수사학’을 통해 이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감’의 문제에 그는 민감한데 「호랑나비 아버지」만이 아니라 「하늘 누나가 내려요」(연작 2번)에서도 그는 대화체를 가장하고 있다.
「하늘 누나가 내려요」의 시적 화자는 제자들의 일기를 검사하면서 제자들과의 ‘못다한’ 대화를 시도한다. 그 시의 시적 화자는 제자들의 가정사를 엿보게 되고 가슴 깊이 공감을 느끼게 된다. 이들 시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함은 각자의 내력이 발설되는 순간의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의 결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 누나가 내려요」의 경우 「호랑나비 아버지」가 거둔 수사학적 성공에는 미달하고 있는데 이 점 역시 서동인의 ‘내력의 수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어째서 「호랑나비 아버지」는 수사학적으로 성공했고 「하늘 누나가 내려요」는 실패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가. 「호랑나비 아버지」의 경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시인 자신의 개인사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내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면 「하늘 누나가 내려요」의 이야기들은 시인 자신의 내력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데 지나지 않는다. 「하늘 누나가 내려요」는 ‘성우’의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준호’의 큰누나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쪽도 그 가정사가 깊이 있게 포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늘 누나’라는 기표가 자아내는 슬픔은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준호’의 큰누나에게는 무언가 숨겨진 내력이 있다. 그 내력은 이 시의 시적 화자로 하여금 “누나의 눈이 제일 아프단다/스륵 스륵, 울고 있잖니?”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내력에 대해 알고 있고 공감하고 있는 것은 이 시에서 시인 자신뿐이다. ‘준호’의 일기를 본 것은 그밖에 없는데 그는 ‘준호 큰누나’의 내력에 대해 함구해버린다.
서동인 시의 성패는 이 내력의 감춤과 드러냄 사이를 오가면서 갈리고 있는 형국이다. 아마도 그가 이 내력의 감춤과 드러냄에 더 익숙했다면 그는 ‘국도 17호선’으로 이탈하거나 환승역의 세계에서 전전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유택이 있는 곳 빈집이 지키고 있는 고향의 세계 내력의 원천지에서 안정감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향토사가로서 고향의 내력을 속속들이 전하지도 못하고 모험가로서 서울에서의 모험과 시련을 적절히 술회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내력을 독자들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것은 외로운 자가 자기의 마음을 누군가 이심전심으로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른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중동역 다리미」는 내력을 드러내야 할 타이밍에 내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서 시의 문맥이 부자연스러워지고 말았다.
또, 만났습니다 다리미 사온 삼촌
굿판의 나라에서 무궁화 피도록
모나미 연필로 편지 보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모래 씹은 삼촌은
이제 제 나이를 닮았습니다
귀국 선물 전자시계는
열 살의 ‘광주’를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의 주름 펴지 못하는 다리미 타고
달려온 삼촌, 전남대 병원 중환자실
아버지 손을 포갰습니다
장례식장 빗줄기 머나먼 바다를 손질했습니다
알 수 없어요 미놀타 카메라가 시간을 도용할 때
바다로 가출한 누나, 사진 속에 없습니다
누렁이가 대신 찍힌 가족사진
중동역 가면서 바라봅니다
사막의 저녁이 붉은 커피를 마십니다
지구의 어떤 마을, 독한 대통령이 죽었습니다
중동역에 정박한 다리미 떠내려 갑니다
메이드인, 국적이 없습니다
― 「중동역 다리미」 전문
「중동역 다리미」는 「붉은 일기」 연작 가운데서 가장 크게 실패한 작품이다. 이 시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서동인은 ‘삼촌’이 마침 아버지의 임종에 달려오게 함으로써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그 ‘삼촌’이 ‘다리미’를 사왔지만 다리미를 사와야 할 필연성이 이 시에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삼촌이 사온 다리미는 시간의 주름을 펴기 위한 시적 도구인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시간은 망자의 시간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서동인은 그 시간을 가족의 시간 가정사의 시간으로 확대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그 가정사의 내력은 온전히 발화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 모래 씹은 삼촌은/이제 제 나이를 닮았습니다.”는 응당 “이제 제 나이도 사우디아라비아 모래 씹던 삼촌의 나이를 닮았습니다.”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열 살의 ‘광주’”는 시인의 나이를 헤아려 보면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사건이 어떻게 시인의 유년에 개입해 있는지 이 시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바다로 가출한 누나’는 왜 집을 나간 것일까. 가난 때문인가 연인 때문인가 혹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인가. 가정사 이외의 설정들도 무언가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다. ‘굿판의 나라’라고 했지만 이 시와 ‘굿’은 어떻게 매치가 되는가. 그리고 ‘독한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독한 대통령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나는 이런 내력들이 이 시에서 감춰져 있기보다는 미처 들춰내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서동인은 자기만의 육성으로서 ‘내력의 수사’를 완벽하게 터득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내력의 수사’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다. 「돼지가 웃었다」(연작 7번)에서 그가 “운동장 질경이 깔아뭉갠 아홉시 뉴스 카메라에 낙인찍힌 세대”라고 스스로의 세대적 위치를 규정할 때 나는 솔직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물론 ‘전교조 세대’를 연상시키지만 아홉시 뉴스가 ‘전교조 세대’를 어떻게 낙인찍고 있는지 나는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이 세대적 감성에서 나는 수사 너머의 시인의 고독을 어렴풋이 본 듯하다. 혹시 그는 내력을 말하지 않고도 이심전심으로 누군가 자기와 같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의 우승열패를 떠나서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이런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4. 국도 위로 탈선한 기차의 풍경
서동인은 ‘도화밭’과 ‘환승역’ 사이에 ‘빈집’ 혹은 ‘아버지의 유택’을 배치했다. 결국 「붉은 일기」 연작은 도화밭과 환승역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보다는 고향과 개인사적인 내력이 그 중축이 되는 연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동인은 빈집 혹은 아버지의 유택의 세계를 유장하게 읊는 데 안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도화밭과 환승역의 두 대극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그는 고향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고향을 떠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 서동인은 이제 더 이상 고향에 대해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택이 겨우 그를 다시 고향으로 불러들였지만 이제 더 이상 아버지는 육성으로 그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모님을 여읨으로써 고향을 잃게 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제 국도 17호선으로 이탈한 시인의 등 뒤에 고향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떠나는 자의 절실함이 없이는 「17호선 국도」의 세계란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언급일까.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서동인만의 순결성을 입증한다고 보고 싶다.
그 길 따라 중학교에 갔다
나는 가을 선생, 1학년
국어책이 통통배처럼 떠다니는 교실
닻을 내리자, 봄도 아닌데 햇살을 몰고
김영랑 시인이 찾아 왔다
북을 치면서, 난데없이 소리하고 싶을 때
갈까~ 보다, 가, 을~ 까아 보다
어린 왕자 같다고 애들이 웃을 때
운동장 축구공이 창문을 깼다
국어책을 적시는 소나기 내릴 때
첫 사랑이 다녀갔다 굿하는
퇴근 길 거북 호수, 선소 앞바다 나비 울 때
개도 막걸리는 하얀 물거품으로 웃었다
감히, 이순신 장군과 동석을 했다
끝내, 김기림 시인은 오지 않았다
휴직한 국어 선생님 가신 날
화단에 핀 국화 옆에서 아이들이 울었다
이른 폭설로 국도 17호선으로 이탈한
가을 열차, 차창 속에 숨은 아이들
설익은 뺨을 가로수가 후려쳤다
― 「17호선 국도」 전문
서동인은 「붉은 일기」 연작에서 ‘고향’을 두 개의 범주로 그린다. 하나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빈집’의 세계 ‘아버지의 유택’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로서의 공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빈집의 세계만으로 된 고향이었다면 그가 자신의 내력을 말하는 데 혼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야말로 내력이 펼쳐질 수 있는 안정감의 토대라는 것은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동인의 ‘고향’은 빈집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 그는 빈집의 주인(아들)이면서 ‘국어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가 문학적인 차원에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교사로서의 공적인 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아버지의 유택’과 ‘교사’라는 직분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교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원론적인 물음이 서동인의 「붉은 일기」 연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 교사라는 직업이 서동인에게는 그대로 문학의 길과 등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7호선 국도」의 ‘가을 선생’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문학 선생’의 심상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뿌리에게'(1991)에서 보여준 나희덕 시인의 교사상像과 많은 점에서 비교된다. 서동인은 전교조에 대해 말하면서도 ‘어린 왕자’ 같은 포즈를 유지한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김영랑과 김기림을 호출하기도 한다. 죽은 시인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 시를 향유하고 세상을 시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야말로 서동인이 그리는 교사의 직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학교와 갈등을 겪는 교사의 고뇌라든지 제자들을 위해 교장에게 머리를 숙이고 서약서를 써야하는 인간적인 서글픔 분노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17호선 국도」에서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국어 선생님이 왜 휴직을 하게 되었는지의 내력이다. 그것은 “운동장 질경이 깔아뭉갠 아홉시 뉴스 카메라에 낙인찍힌 세대”(「돼지가 웃었다」)와 같이 상징적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얼굴이 밟혀서 온전히 떠나지 못한 채 17호선 국도로 탈선한 기차의 풍경은 정치적 감각이 묘하게 탈각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17호선 국도」는 그 자체로 도화밭의 세계와 환승역의 세계가 분열하기 시작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가을 선생’이 “갈까~ 보다, 가, 을~ 까아 보다”하고 난데없이 소리를 할 때 그것은 도화밭의 절대 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가을 선생’의 순수하고 따뜻한 감성은 현실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왕자’의 세계는 ‘축구공’이 창문을 깨면서 훼방을 받는다. ‘가을 선생’을 둘러싼 세계는 훼손되어 있다. 학교는 훼손되어 있다. 그가 휴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 비순수의 공간과 맞닥뜨렸을 때 서동인은 이 비순수와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가을 열차’를 타거나 ‘환승’을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의 탈주는 어쩌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가 바라는 절대 미의 세계 혹은 어린 왕자의 순수한 동화 속 세계는 현실에는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환승역의 도망 노예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다른 환승역에서 ‘황금돼지 사나이’와 만나게 되어 있다. ‘가을 열차’는 때 이른 폭설로 ‘17호선 국도’로 이탈할 운명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서동인은 그의 탈주를 멈출 기색이 없다.
나는 「붉은 일기」 연작의 순간적인 성패보다도 이 연작을 통해 자신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대인의 표정을 기억하는 것이 더 값진 일이리라 생각한다. 그 순수에의 지향이 「반란을 엿보다」의 자기애적 충일감에 함몰되지 않고 「죽었다, 살아나는 돼지들」에서처럼 환승역의 언어로 환승역을 비판하는 현실 감각을 확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17호선 국도」에서의 탈향이 혼자만의 결백을 위한 마음 편한 떠남이 아니고 등 뒤에 남기고 온 제자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떠나던 마음도 궤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떠남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동인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가 순수 지향의 저력으로 서울에서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버티는 힘의 부피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시의 내력은 어쩌면 더욱 구체성을 띨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서동인
전남 여수 출생.
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성균관대 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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