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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시/배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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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14회 작성일 08-03-01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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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숙
오래된 우물이 있는 풍경


내 인생에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라곤 없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병든 이파리 같은 지상의 남루
홀가분한 허물 따위 날려버린 지 오래다  
떠돌던 바람이 귀를 빠끔히 열고 가끔씩
냉기를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왔으나
이내 허옇게 질려서 돌아나간다
반쯤 덮인 시멘트 뚜껑엔 오래된 이끼와 흙먼지가
꺼멓게 썩기도 하고 더러는 한 세상 표백할
파란 새움으로 돋아 생기를 뿜어내기도 한다  
나는 잊혀진 왕족처럼 적막한 고독과 삶의 녹 쓴 품위를 기억하지만
무채색의 따뜻함이 만월처럼 차오르고
스미는 것들의 저 아름다운 불시착을 본다
반대편으로 멀리까지 뚫고 나간 웅덩이는
시냇물을 자꾸만 제 목숨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하늘이 깜깜한 우물 한 쪽을 비집고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손발을 끄집어내고는
절벽 같은 삶의 안쪽을 망연히 들여다보고 있으리라
허방을 부여잡은
깜깜한 목통 속에 해를 넘긴 울음 한 자락이
늙은 개처럼 헐떡거리며 서쪽 하늘로 사라져 간다





새벽 무지개


모자 푹 눌러쓰고
새벽 비 한두 방울 떨어지는 화엄사 가는 길
여명의 푸른 기운이 채 퍼지기도 전에
검푸른 산 정수리에 홀연히 떠있는  
젖은 듯, 싸늘하고 습한 저 빛은
세상의 다리를 들어올린 이쪽과 저쪽에서
어느 이별을 쓸쓸히 건널 것인지
눅눅한 욕망을 포기했을 때
빛 부신 광배의 오색 빛 허리띠가 풀려나가듯
조금 더 슬플 것을 각오해야 했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이
활활 타오를 것도 없이
순정이라고 우긴 저 빛의 말랑말랑한 끝이
모든 혼돈의 시작일지 모른다는……
다리와 바위벽을 지나는 산골 물소리
돌아보면 너무 외롭거나 적막해 울컥 솟는 것이
금기의 그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배경숙
1991년 ≪창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영혼의 살풀이외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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