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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시/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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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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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버리고 떠난 새들도 무사하다. 깃이 빠지고 지쳤지만
다시 깃이 자라고, 하늘은 여전히 친근하게 길을 열어주고
여기서 버려져 울던 아이도 여전히 기찻길 옆에서 놀지만 무사하다.
버려질 때 울던 울음이 가끔 생각난 듯 울기도 하지만
이혼해 그를 버리고 간 세월이며 햇살이며 저녁이며 웃음이며
마지막 기차로라도 돌아오나 기차소리 들릴 때마다 손 흔들며
이 세상 절망이 무사하듯 그도 이곳에서
키 작은 해바라기처럼 담 위로 가까스로 고개 내밀며 무사하다.
오고가는 것들이 비를 만나서 옷이 흠뻑 젖어
종일 떨기도 하지만 이 세상 슬픔이 무사하듯 그들도 무사하다.
비린내
살아있는 것은 비립니다.
비린 동안 눈물도 만들고 사랑도 만들고 유산도 하고 어성초 같이 비린 그리움을 가집니다. 살아있는 것은 비립니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말에도 향기가 나고 가슴에도 향기가 납니다. 살아있는 것이 격렬할수록 비린내 진동하므로 토막 쳐진 생선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듯 자신 생각을 몇 겹으로 싸기도 합니다. 비린 손을 흔들며 저무는 것들에게 따뜻한 작별을 보냅니다.
자신의 비린내는 잘 맡지 못하므로 남의 비린내에나 질타를 보내는 자도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누린내가 아니면 비린내로 자신의 영역을 지켜야함을 아는 사람들은 존재의 비늘 온몸에 번뜩이며 비린내를 풍깁니다. 지느러미 끝없이 퍼덕이며 꼬리 꼬리쳐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전진하는 모든 것은 비립니다. 위장으로 자신을 숨기고 비린내를 지우는 것들은 결국은 죄의 수렁에 빠지는 스스로의 계략입니다.
살아있는 별도 비립니다.
세상이 저물면 떠오르는 별이 물고기자리가 아니어도 비린내를 밤하늘 가득 풍깁니다. 살아있는 별 어디 비린내 풍기는 소녀가 우물물을 길으면 비린 꽃들이 끝없이 피어납니다. 저 아득한 우주 모퉁이에서 울컥 밀려드는 비린내들, 그럴 때마다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이 흐르고 이 지구에는 죽음마저 푸르게 살아있는 날들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끝끝내 남아있는 비린 이름 하나, 저 퍼덕이며 살아있는 그리움들이란
김왕노
포항 출생. 199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당선.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2003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년 제7회 박인환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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