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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신작시/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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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해체
버려진 것들의 잔재를 올려다본다.
성능을 다한 집채 안의 것들이
거리에서 가만히 서로를 응시한다.
한 때 침묵의 근육으로
육중한 시간을 받들던 것들이
시효가 끝나 이삿짐에서 분리되다.
이쯤에서 휘발되어 가는
기억의 모서리를 훑어가며
딱지 한 장, 가슴에 붙이고 있다.
이제 깃털처럼 가벼워진 낡은 노동을
내려놓는 것이다.
버려진 것들의 잔재들이 길의 끝에서
버려질 나의 살과 뼈를 찬찬히 내려다본다.
견인차
너는 분명 도로에 서식하는 거미였어.
먹이가 이동하는 길목에 줄을 쳐 놓고
낮은 포복자세로 배를 깔고 앉아
보이지 않게,
언젠가 멈춰질 생의 질주를 즐기고 있었어.
털이 난 가느다란 다리를 굴리고 굴려서
드디어 진화 된 둥근 바퀴를 달고
얽히고설킨 세상의 위기를 향해
사통팔달 반짝이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데이터를 전송받고 있었지.
순간 네가 쳐놓은 덫을 피해
빠르게 지나가는 나를 보았어.
달려가는 속도만큼 너에게 딸려 갈,
도시 구획처럼 잘 짜여 진 오차의 범위를
자동 수신하고 있는 거리마저도
끝내, 가두고 마는 시선
피하지 못하는 장애물이었지.
변하지 않기 위해 변신한 생식기에
다운로드를 마치고 나온 오늘도
거미줄처럼 쳐진 도로에 서면
한낱, 이슬처럼 달려있을 뿐이었어.
권성훈
2002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 ≪문학 마을≫ 추천으로 등단. 2005년 올해의 젊은 작가상, 경기예술인상, 수원문학 작품상 수상. 시집 '푸른 바다가재의 전화를 받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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