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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시/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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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06회 작성일 08-03-01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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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낯선 영화와의 조우


난니 모레띠*의 노란 스쿠터에 열쇠를 꽂고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린다
열쇠 구멍 속에서 소리가 쏟아진다
소리는 보도블록 위에서 유리구슬처럼 튕겨지며
순간적으로 길을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다
그 짧은 순간에 한쪽 머릿속으로 들어차는 바다
이름 모를 섬에 갇힌다
손바닥을 뻗어 단단한 섬의 입구를 더듬는다
낡은 보도블록의 뒷면이 만져진다
심해 연체동물 같은 이태리어가 구불텅구불텅
소리를 따라 기어 다닌다
길이 들려졌을 때 함께 스며든 이미지들이
블록과 블록 사이에 끼인 채
생각의 완고한 경계를 흔들어댄다
미세한 균열이 춤을 추듯 섬 전체로 퍼져나간다
방사상의 울림이 소용돌이치며
굳어있던 무표정을 완전히 누그러뜨린다
다시 열쇠를 오른쪽으로 힘껏 돌린다
레디, 액션!
소리의 파도가 밀려와 철썩!

한순간에 불통의 섬을 휩쓸고 지나간다.

*난니 모레띠 - 이태리의 영화감독으로 <나의 즐거운 일기>, <아들의 방>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아들의 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피타고라스의 달


달이 숫자 모양으로 떠오르는 시간, 경리과 K과장은 버스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무심히 본다 어둠 속에 고여 있던 눈알이 희미하게 유리 위로 튀어나온다 눈동자 속으로 빌딩 창문들이 금전 출납부 잔고란 넘겨지듯 휙휙 지나간다 종일 자신이 들여다보던 아라비아 숫자들이 꿈틀거린다 123456789 눈알 속으로 파고들려는 듯 일제히 각을 뒤튼다 완전한 수로 끝나지 못해 버석거리는 숫자들, 그의 후줄근한 오늘 뒤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점점 더 눈알 안쪽이 부풀어 오른다 터질 것 같아, 아아 눈꺼풀을 질끈 내려감는다 그의 어지러운 하루가 으깨진다 고였던 숫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텅 비워지는 눈동자 속, 드디어 숫자 10이 그의 안구 속으로 굴러들어가 환히 박힌다.



정진영
1968년 충북 단양 출생. 2003년《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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