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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시/신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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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81회 작성일 08-03-01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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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
모래시계


태안반도 신두리에 가면 거대한 모래시계가 있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구멍을 향해 흘러내리는
실낱같은 내가 있다

누가 뒤집어 놓았는지
다시 시작되어버린 시간이 쏟아지고 있다
구멍을 향한 조용한 소용돌이
발밑에 세상이 또 하나 있다

키 작은 해당화 갯메꽃이 삭풍에 맞서고
가시만 잔뜩 오른 풀을 뜯는 소가 멀리서 보인다
썰물이면 바람의 나이테가 백사장에 드러눕는 곳

모래지옥으로 빨려들고 있다
좁은 하늘에서 쉼 없이 떨어지고 있는 사막
발밑에서 자꾸만 차오르고 있다
밤새 모래언덕 하나가 생겼다 사라지고
짙은 해무가 지워버린 옛길이 신기루처럼 보이는 곳

언제 다시 뒤집힐까
기다리는 시간은 오지 않을 듯 길다
깨지기 쉬운 유리병 속에서 흘러내리는 것들

신두리에는 바다를 향해 앉은 겨울만 있다



노새

-노새를 그리는 데는 고야가 필요하다 고야는 죽은 고야 한 사람 뿐이며, 노새가 그를 요구한다 해도 자기 몸의 고생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노새들이 만약 입을 열 수 있다면, 그 고경苦境을 덜어 줄 누군가를 찾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를 보러 사상터미널에 갔다
도착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차에서 내린 사상들이 이내 흩어졌다
모든 출입구가 잠시 북적거렸다

그는 손수레 옆에 서서 무거운 짐을 기다렸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는 자의 짐을 수레에 실었다
평생 타인의 짐을 실어 나른 그가 운다면
분명 나귀의 울음소리일 것이다

그도 한 때는 무거운 짐이었다
늙은 그를 터미널에 부려놓고 떠나버린 시간
검은 모자 밑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커다란 가방을 옮기고 있다

지금도 그를 그리는데 죽은 고야가 필요할까

무거운 회색조의 하늘에 그어진 수많은 빗금들
고독을 달래기 위한 자화상이
사상터미널에 걸려있다

*헤밍웨이의 「死者의 自然史」에서.

신정민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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