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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시/전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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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아
꽃의 전갈
이른 아침, 빛줄기 하나가
창 틈 사이로 전단지 한 장을 보내왔다
뒷집 뒤란 빨랫줄에 걸려있던
열여섯 먹은 미자 분홍색 브래지어를 닮았다
지면 가득 무료 개업을 시작했다는
마을 복덕방에 대해 쓰여 있다
눈꺼풀에 붙은 잠을 뚝뚝 떼어내며 걷고 있는데
나비 떼들이 골목 구석구석 쌓여있는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태풍으로 작년 벼농사를 망쳤다며 가계부 구석에
채무 고지서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던 태수 아버지
치매 걸린 시어미 수발에 볕들 날 없이
헝클어진 머리 손빗으로 빗어 올리는 영희 엄니
저마다 일렬로 나란히 서서
계약서에 적어야 할 내용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참을 고심하다 서툰 마음 일으켜 세워
또박또박 소망을 적어가는 사람들
복덕방 주인들은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환한 웃음 풀. 풀. 풀 날려준다
세든 집의 벽마다 꽃잎 벽지의 숨구멍이 심어지고
고주파의 향기가 전구 스위치처럼 내장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지천 가득
무료 복덕방이 성대하게 차려질 것이라는
꽃의 전갈이 왔다 한다
돼지
밥 내놓으라며
새벽마다 내 잠을 들쑤시는 돼지
사료 포대를 끌고 돼지우리로 가면
독 오른 돼지의 눈이 송곳처럼 나를 찌른다
참지 못한 돼지의 식욕에
밤새 수난을 당한 상수리나무 우리
껍질 밖으로 드러난 흰 뼈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무거운 비곗살을 매달고도
허겁지겁 먹이를 먹어치우는 돼지
목이 마를 때면 한번쯤
물통에 비친 제 얼굴도 쳐다봄직 한데
벌컥벌컥 물만 마셔댄다
돼지의 눈엔 세상이 다 밥으로 보이는가 보다
보이는 것마다 질겅질겅 씹어대도 성에 차지 않는 돼지
돼지는 비곗살에 몇 개의 통장을 숨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 통장이 우리 집의 밥으로 인출되고 동생 대학 등록금과
밥상의 메뉴를 바꿔놓기도 한다
돼지도 제 통장이 많을수록 추위로부터 오래 견딜 수 있고
굶어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까
통장이 미어지도록 더 많은 밥을 탐한다
돼지를 닮은 자들을 만나곤 한다
상수리나무로 만든 우리가 없는 곳에서
날카로운 눈이 내게 꽂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미래를 위해 한 순간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돈豚이 되어 돈錢 앞에 나란히 선 내게로 달려든다
새벽이 되면 살찐 돼지 울음소리에 맞춰
곤한 몸 일으켜 세운다
전정아
1973년 강원도 화천 출생. 2006년《문학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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