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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시/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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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희
어머니, 풍선을 불어요
어머니, 풍선을 불어요
꿈도 없는 긴긴 잠에서 깨어난 남동생이
어머니가 사 주신 풍선을 불어요
박제된 시간에서 풀려나면서 호흡이 가쁜가 봐요
있는 힘껏 쪼글한 풍선 속으로 숨을 불어 넣어요
어쩌면, 풍선을 살리는 걸까요
백 년 동안 참았던 긴 숨을 내쉬는 걸까요
진보라색 풍선에서 연보라색 풍선이 될 때까지
연보라색 풍선에 창백한 눈물이 고일 때까지
풍선 속으로 길게 숨을 불어 넣어요
잔뜩 찌푸린 모습이 그가 태어날 때 터트렸던
소리 없는 울음을 닮았어요
그의 눈물은 말이 없어요, 몸이 부서져도 울지 않아요
풍선 속 공기가 그를 밀어내는 걸까요
가슴 속 공허가 그를 들이마시는 걸까요
풍선불기를 반복하는 동안 달이 일곱 번이나 부풀었어요
달이 무릎에 박혀 자라는 걸까요
그의 다리는 점점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가요, 어머니
보라색 풍선이 그를 불어요, 잊고 있던 꿈이 그를 불어요
링거 걸이에 매달아 놓은 풍선들이 탱글탱글 숨을 쉬어요
하얀 풍선을 닮은 그의 다리를 혈색 좋은 풍선들이 내려다 보네요
병실 휠체어엔 달빛이 고여 있어요
종이세상
종이태양이 떠오르면
종이남자가 종이세면대에서 종이수염을 면도해요
종이자동차를 몰고 종이빌딩으로 출근해요
종이빌딩 위로 가끔씩 종이구름이 흘러가요
종이남자는 종이책상에서 종이컴퓨터로 종이자판을 두드려요
종이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간을 쓸 때마다
종이은행에 저축해둔 종이돈이 줄어요
퇴근 후 종이남자는 종이식탁에서
종이여자와 함께 종이밥을 먹어요
종이남자는 낙서처럼 종이여자 속으로 들어가요
종이이불 속 종이사랑
왜, 물 한 바가지 뿌리시게요?
물 한 바가지면 풀 죽을 종이세상인걸요, 뭘
꼬깃꼬깃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시게요?
그랬다가 다시 쓰레기통 속을 뒤져 좍좍 펴시게요?
성냥 한 개비면 없어질 종이세상인데
불순한 통사도 눈감아 주시면서 아니 활활 태우시게요?
발로 밟으면 뭉개질 완전 종이세상인걸요, 뭘
힘 없는 자들에게 너무 민감하지 마세요
경우에 따라 종이세상을 차곡차곡 접어
푸른 하늘로 높이 날려버리세요
이게 바로 진짜 리얼리스트가 되는 길이라고 믿으세요
믿습니까?
최성희
2006년《시작》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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