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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신작시/양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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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애
선암사 홍교를 지나는 봄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피어오르는
초록빛 노을 자우룩한 사원이다.
저녁 어스름이 사원에서 사람들 쫓아내고 있다.
불결한 욕망을 걸친 봄이
저녁 어스름의 발자국 소리 피해
사원으로 걸어들어 오고 있다.
손에 쥐고 있는 제 탐욕을 내려다보는 봄
섬뜩 놀라며 갑자기 탁탁 털어낸다.
초록빛 노을 속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곁으로
봄이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사원의 다조를 거쳐 쌍지를 짚고
지원에 이르면서 봄은 더욱 목청 가다듬는다.
지금 봄은 계곡으로 흘러드는
금강경 홍교를 지나고 있다.
그곳을 들여다보던 봄이
살며시 흐르는 물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고개 들고 눈 감은 봄, 경련으로 뒤틀린다.
달라붙어 있던 욕정들 튀어 오르다가.
물속으로 떨어진다. 금강경 홍교 물로 씻어낸 봄의 번뇌
부르르 몸 떨며 하얗게 탈색된다.
초록빛 노을 몸에 두르고
텅 빈 충만으로 가득한 봄의 들린 마음
옅은 어둠을 밝히기 시작한 등불 향해 걷는다.
초록빛 노을에 싸인 진달래 한 송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 곁에 다소곳이 앉아
멀어져 가는 봄의 뒷모습 바라보고 있다.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는 창고
시멘트로 둘둘 말려 있는 창고
온몸이 갈라지고 터져 있는 데도 꿰맬 수 없다.
철대문에는 녹슨 자물쇠 채워져 있다.
장맛비 맞은 수탉처럼 주저앉아
발밑의 꿈틀거리는 지렁이나 바라보고 있는 창고,
팔다리 잘려나간 채 공터에 버려져 있는 인형처럼
찾는 이 하나 없다. 창고는 게으른 중년 여자의 비좁은 품
그곳에서 자란 언어들 자꾸 나동그라진다.
주둥이를 동여맨 것도 아닌데
언어는 낡은 창고 안에 갇혀 밖으로 나올 줄 모른다.
거기 머리채를 흔들며 악담을 퍼붓던 탐욕도
무기력에 점령당해버린 절망도 함께 누워 있다.
내장이 썩어가도 악취를 맡지 못하는 창고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 작은 배낭에 넣어
지난 시간의 길목에 밀쳐둔다.
헐거워진 망상이나 키우다가 녹슬어버린 창고
왼손으로는 문을 밀고 오른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창고 속에서는 연이어
무관심이 잉태한 침묵들 태어난다.
하얗게 마른 시간들 헐거워진 문틈으로 들어온다.
내려앉은 싱크대 밑 짓눌려버린 바퀴벌레처럼
혼절한 풍류, 납작 엎드린 채 일어설 줄 모른다.
이제는 바람조차 머물지 않는 창고
흩날리던 스카프 자꾸 목조여 오는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곡소리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다.
비켜갈 수 없는 이런저런 사건들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가 그냥 고여 있는 창고
전설을 타고 흐르던 이야기 죄 차단되어 있는 창고
작은 눈 하나 틔우지 못하는 식견으로
여태 도시의 빌딩 그늘 곁 바짝 붙어 서 있다
봄바람, 허옇게 들어나는 창고의 머리칼 핥고 지나가는데.
양정애
2007년《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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