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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발굴/손우성박사 유고/손우성//초점/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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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33회 작성일 08-03-01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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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_한국 최초 불문학자 손우성 박사 유고
생텍쥐페리의 ‘인간’
손우성


교량을 건설하던 인부가 무너지는 재료에 부딪쳐서 얼굴이 박살이 났다. 이 남자는 영원히 이성의 사랑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돌아서 다니면 다리를 놓지 않아도 되고 이 남자는 그 참혹한 부상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 동네 사람들은 이 자가 흉측한 면상을 갖게 되어도 좋다고 동의했던 것인가? “일반의 이해관계는 개개인의 이해관계들로 이루어진다.”고 기사는 말하였다. “이 다리는 흉측하게 된 얼굴을 보상할 값어치가 있는가?” 여기 리비에르는 다음에 기사에게 대답했다. “그렇지만은 인간 생명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항상 가치에 있어서, 인간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것이 무엇이지?”('야간비행' p.130)
생텍쥐페리는 작가이기 전에 행동가이다. 그는 작품 활동을 행동에 앞선 인생 성찰에 이용한다. 좀 소설 형태를 취한 것은 '남방우편기'(Courrier sud) 뿐이고 '야간비행'(Vol de Nuit)에서도 사건이라고는 야간 비행사의 실종에 관한 설명뿐이다.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에서도 내용은 작가의 체험담의 기록일 뿐 작품으로서의 구도


범초泛礁 손우성孫宇聲 선생은 한국현대문학 형성기에 ‘해외문학파’의 일원으로 프랑스문학의 전파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서구자 중의 한 분이다. 동경법정대학 문학부에서 한국최초로 불문학을 전공, 국내에 돌아와 성균관대와 서울대 불문과를 처음 창설한 초창기 개척자이기도 하다. 이번에 공개하게 된 「생텍쥐페리의 ‘인간’」은 선생께서 미수米壽의 나이(1993년) 나이에 집필한 원고로, 그동안 선생의 셋째 따님인 손정리 교수(한국교원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가능한 한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에 몇 군데 불분명한 조사와 맞춤법을 고치고 약호 처리된 저서명 등을 명기하는 것 외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발표하는 것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손우성 선생께서는 프루스트, 사르트르, 카뮈 등의 작가론을 비롯하여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에 관련된 글들을 남긴 바 있는데, 이번 생텍쥐페리의 ‘인간’론이 추가됨으로써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사상에 대한 선생의 관심의 폭을 전체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유족 측에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이가림(시인, 인하대 프랑스문화과 교수)

도 없다. 그러나 작가의 정신 속의 사건들 진행이 너무나 강렬하게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에 소설 작품의 걸작으로 통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이 작가가 시골의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신분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생성하는(devenir) 존재이지, 존재하는(être)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출생해서부터 저 혼자 자라는 것이 아니고 가정, 사회, 국가 등 외부적 영향의 수련을 받아서 인간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짐승과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정지상태의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생명의 본질이 변화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자이다. 항상 현재를 초월해서 그 너머로 자기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품격을 가꾸어가지 않는 자는 인간의 자격을 포기하는 자이다.
이 작가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한도를 체험하기 위하여 탐험을 해서 극한상황을 찾아갔고 마침내는 극한 상상 속에 인생을 탈출해 버렸다. 1940년 6월 프랑스군이 와해되기 직전인 5월말 생텍쥐페리의 2133부대는 36개 비행대에서 대부분이 격추당하고, 남은 것은 6개의 비행대뿐이었다. 세 대 나가면 한 대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출격명령을 받으면 그것은 죽음의 길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미 프랑스군 전체가 패퇴의 대혼란에 빠져서 작가가 소속하는 부대의 출격이 비록 정찰비행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와도 그 성과를 기록한 보고서를 송달할 곳이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있으니 행동해야 한다. 부대장은 계획을 세워서 정찰비행의 발진發進명령을 내린다. 그러면 부대원은 그 비행이 아무 소용없는 자살행위인 것을 알고 있어도 부대장은 명령할 의무를 가졌으니까 명령하고 부대원은 명령을 받았으니까 죽을 확률 60퍼센트의 비행의 길에 오른다. 그렇다고 군인 모두가 용감하게 목숨을 초개 같이 내던지는 것이 아니다. 개중에는 겁에 질려서 얼굴이 새파래지며 반사적으로만 몸을 놀리는 부대원도 있다. 이미 필요가 없어진 부조리한 출격인 것을 모두가 빤히 알고 있다. 이미 국가 자체가 와해 단계에 있으며 모든 명령계통이 단절되어 있어도 여기 군대의 한 단편이 남아 있으니 명령하는 자는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받는 자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가 보았자 십중팔구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명령을 명령대로 수행한다. 그들은 상관의 명령이니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의 명령은 바로 국가의 명령이니까 그대로 수행한다. 겁에 질려서 얼굴이 새파라니 물론 마음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겠지만, 이 개인에게는 개인이 이미 없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하는 것이니, 거기는 개인의 심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이 개인으로서 개인을 초월하는 인간의 경지가 바로 이 작가의 추구하는 바이다. 이렇게 훌륭한 군인들을 가진 군대가 어째서 적군과의 전쟁에서 패퇴하였는가. 작가는 그 원인을 추구해 보기를 거부한다. 다만 그는 인간의 길을 찾고 있다. 개인이 모여 개인들이 되면 거기 인간이 있는가? 그는 이것을 부인한다. 개인에도 개인의 집합에도 인간은 없다. 각 개인이 자기를 초월해서 개인들의 집합체를 자기 책임으로 떠맡을 때에 거기 인간이 출생한다. 아마도 이 작가의 조국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를 초월하지 못하고 대다수가 개인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한 공동체로서의 저항력이 없어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프랑스의 패전에 관해서 그 책임이나 원인을 구명해 볼 의도는 갖지 않았었다. 되레 인구수와 농민과 공업국민의 차이 등 자기나라가 독일인에게 석권당한 것이 아무 수치될 거리가 아니라고도 말하며 그러고도 프랑스가 전쟁에 참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적대국의 행동이 인종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 전쟁을 피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한 문제로 보는데 여기서 국가의 위신은 바로 인간의 존엄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간이라면 현대는 구체적으로 개인의 권익, 개인의 자유를 즐겨 논하는데 반해서 이 작가에게는 그것은 사고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다. 그가 세상에 부딪치는 것은 사람이라는 동물들의 족속이며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늘 인간이다. 대문자로 쓴 ‘인간’(Homme)이다. 당연히 개인들은 이 인간에 관련된다. 그러나 현대가 강조하는 이 개인의 특권은 서로가 심지의 교류(communion)로 서로 엉겨 붙어서 한 방향을 취하여 가야 할 인간들을 모래알 같이 서로가 남을 배격하는 연맥이 없는 집합체로 만들어서 인간의 길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즐겨 치닫는다. 이 집합체를 사람들은 곧잘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격상시키며 즐겨 인간을 그 위 앞 밑에 질식시킨다. 

“대중은 … 인간의 이미지를 혐기한다. 대중에는 조리가 없으며 동시에 가지각색의 방향으로 밀어가서, 인간의 창조적 노력을 말소抹消시킨다. 진정 인간이 축군蓄群을 눌러 뭉개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엄청난 노예제도가 생겨난다고는 보지마라. 그런 것은 축군蓄群이 인간을 눌러 뭉갤 때에 일어난다."('성채', XI. p.58'

인간에 잠깨지 않고 각기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곳에서는 인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개인들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화되면 각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인간성은 완전히 말소되고 여기 정말 엄청난 노예제도가 생겨난다. 이 작가의 생존 시대에는 그 폐해가 아직 크게 발달되지 않았었지만 그는 생리적으로 그런 경향에는 반발한다. 우선 개인이라는 관념을 그는 배척한다. “이 자들이 형제 같이 의좋게 살아가게 하려면 그들에게 탑을 쌓도록 강제해 보라. 그들이 서로 미워하는 꼴을 보고 싶거든 그들에게 재물을 던져주어라.”('성채', XI. p.59) 

서로 제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악머구리가 되어서 서로 싸운다. 본능으로 밖에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동물들이다. 거기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낯이 뜨거워지는 존재들이다.
사람은 아마도 그 자신으로는 인간의 값어치를 갖지 못한다. 자신을 초월해서 자기 밖의 사물들과 자기를 연결시킴으로써 동물적 우둔성에서 벗어나서 인간으로의 길을 찾아간다. 그 매체媒體로는 직무(métier)를 들 수 있다. “한 직무의 위대성은 아마도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맺어주는 일이다. 그것은 한 진실한 사치이다. 그것은 인간적 관계들이라는 사치이다."('인간의 대지', p.42), 직무는 인간을 따로따로 떼어두지 않고 서로를 얽어매어 놓는다. 거기는 각기가 무엇 때문에 일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내가 참여함으로써 일이 되어가고,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세상의 일의 진행의 어느 부분에 결함이 생긴다는 의식이 자기를 세상이 되어가게 하는 역군으로 격상시킨다.
하기는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는 자본가가 기업을 세워서 노무자들을 고용하여 일한 분량을 값어치로 따져서 임금을 지불하므로, 노무자는 임금을 많이 받아야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본가는 아무쪼록 임금을 적게 지불하고 상품을 많이 생산해야 자기에게 유리하니 여기는 특히 현대의 인위적 사상 대립의 격화 이후는 직무는 자본가에게는 착취수단이고 피고용자에게는 노력을 수탈당하는 노예작업의 틀이 되었으니 직무나 인간성과는 인연이 먼 현상이 벌어져 왔지만, 아마도 여기는 사고방식을 원초로 되돌려 놓아야 할 일이다. 우선 일하는 자는 능력자이다. 일 않는 자는 무능력자이다. 후자가 목숨을 붙여 살아가려면 전자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 일하는 자와 일 않는 자 사이에 연락의 줄이 맺어진다. 일이 복잡해져감에 따라서는 일의 종류가 복잡하게 달라짐으로써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각기 다른 일거리들을 가지고 연결되어서 생산이나 기타 사업들이 진행되어 나간다. 위에서 작가는 인간관계들의 사치라고 말했지만 이 인간관계들이 바로 인간의 위대성이다. 그것을 조종하는 것이 인간, 대문자의 ‘인간’(Homme)이다. 사람이 직책을 가지고 자기 밖의 사물들과 연결되었으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기가 아닌 다른 사물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의식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의의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자기가 자기를 경솔하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에 자각하게 한다. 직무는 그것의 수행에 노력이 필요하다. 직무를 잘 완수했을 때는 이 세상에 자기가 존재하는 필요성이 무게를 갖게 되며 그 반대로 직무의 수행이 신통하지 못할 때에는 세상에 대한 자기의 비중이 가벼워지며 남의 경멸과 아울러 그보다도 더 뼈아픈 자기경멸을 불러오게 된다. 이 세상에 자기가 설 자리를 찾기가 힘 드는 것을 느끼며 자기의 존재 자체가 괴로워진다. 사람은 사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 존재를 의식한다. 이 작가는 인간은 사물들의 관계들이라고까지 정의한다. 당연히 사물들 속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이 관계의 가장 농밀한 것은 직무(métier)이다. 인간의 무게는 직무와 관련이 크다. 이 작가는 자신의 직무를 찾아갖는대 상당히 고생하다가 마침내 비행기 조종사의 직무를 차지했다. 작가의 취미에 맞게 늘 극한사항에 처하기 쉬운 직책이다. 직장에서 맡은 일 말고 집안 살림살이도 직무이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가는 책임과 합치된다. 작가의 동료 기요메는 안데스 산맥 횡단 비행 중에 눈보라의 폭풍과 눈보라를 만나 불시착하여 기체는 파손되고 이 무인지경의 고산지대를 살 길을 찾아 사흘 낮 사흘 밤을 먹지 않고 굶어서 걸어 내려간다. 살 방도가 거의 없는 것은 명백하지만 적어도 자기 시체가 사람들에게 발견된 곳까지는 찾아서 내려가야 한다. 자기의 실종선고가 결정되면 그 법적 유예기간인 몇 년 동안 자기 아내는 보험금을 타지 못하니 그 동안 어떻게 살아가나?

“구제되려면 걸어야 한다. 또 한 걸음, 늘 똑같은 걸음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맹세하고 말하지만, 내가 한 일, 어느 짐승도 결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Ce que j'ai fait, je le jure, jamais aucune lête ne l'aurait fait.)('인간의 대지', p.56-57)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의지의 존재로서의 긍지. 어느 평자(Luc Estang)는 생텍쥐페리의 사상을 니체의 “권력의 의지"와 연관시켜 보는 것을 다른 평자(Jean-Philippe Ravoux)는 부당한 해석이라고 반박하고 있지만, 하기는 이 작가의 작품 중에서 의지에 관해서 말하는 대목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한번 정해놓은 일은 저돌맹진猪突猛進적으로 끝까지 밀어나가는 것이 그의 주역 인간들의 생활태도이니, 그들은 의지를 표방하는 일이 없이 의지인간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극한상태 속에서 곧잘 대문자 ‘인간’(Homme)을 발견한다. 생텍쥐페리는 파리에서 월남으로의 기록 작성을 위한 비행을 하다가 기계 고장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고는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도, 먹을 것도 없이 굶주림을 무릅쓰고 죽음의 직전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다가 원주민에 발견되어 구제받는다.

“우리들을 구제해 주는 그대 리비아의 베두인사람아, 그렇지만 그대는 내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리다. 나는 결코 그대 얼굴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인간이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인간들의 얼굴을 가지고 내게 나타난다. 그대는 우리들을 결코 뚫어지게 쳐다보지도 않고 벌써 우리들을 알아보았다. 그대는 친애하는 형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모든 인간들 속에 그대를 알아볼 것이다.”('인간의 대지', p.208)

이 작가가 찾고 있는 것은 각 개인의 특수한 개성의 장점이 아니다. 그는 사람을 갈라서 구별해 보는 현대의 분석정신에 넌덜머리를 낸다. 인간이니까 이 갈증에 말라비틀어져 금시 죽어가는 인간을 보고 무조건 물그릇을 들이댄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보편적인 인간으로 있는 인간을 찾는다. 그에게는 불필요한 구별이 싫다. 내 편과 적 편으로 갈라놓는 것이 싫다. 갈라서 쪼개놓는 과학정신의 해독으로 사람들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인간성을 상실한다.
지드는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멋진 서문까지 써주고 있지만 이 두 작가의 문장은 어딘지 친연성親緣性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그것은 아마도 둘이 다 성경의 애독자이며 그들 문장에 성경적 색조가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두 작가의 사상은 정반대의 방향을 잡고 있다. 전자는 세상이 승인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반발적 태도 때문에 개성적인 것을 좋아하고 인습적인 것을 거부하지만(거기는 작가로서 독자의 취미를 자극하려는 뽐냄이 숨겨져 있다고까지 보고 싶다.), 생텍쥐페리의 경우는 조상 대대의 언어와 습관을 받아서 모친의 젖냄새가 배어있는 경우가 아닌 외떨어진 인간에게는 대문자 ‘인간’(Homme)이 깃들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즉 사람이 아닌 짐승의 부류로 보려고 하는 기맥이 있다. 인간은 전체가 힘을 합쳐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노력에 참가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점차로 인간을 망각하며 우리들의 모랄(정신)을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였다. 우리는 각자에게 다른 개인을 손상하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돌 하나하나 보고 다른 돌을 손상 마라고, 그리고 진정 돌들은 뒤죽박죽 밭에 널려있을 때에는 다른 돌을 손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돌들은 그들이 정립하였을 대사원, 그들 자체에게 의미를 부여하였을 대사원을 손상하며 세울 수 없게 만들었다.”('전시 조종사' p.209)
개인들이 협력하여 쌓아올렸을 국가의 위대성을 희생시켰다. 그에게는 개성의 특수성, 개인의 자유 따위는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사상은 시대를 역행해서 고전시대의 보편적 도덕성을 재건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감성은 너무나 현대적으로 강렬한 개성을 발휘해서 아마도 사상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독자층까지 매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맹렬한 반감도 도발하였다. 그의 감성은 농밀하게 현대적인 반면에 그의 사상은 니체의 개인주의 사상을 부인하며 “자아는 가증可憎하다”(Le moi est haïssable)는 고전시대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현대적 문장의 특이한 감각 속에 고전적인 틀이 박힌 작풍을 취택하며 그의 거동 전체는 늘 개인적 경험들에서 보편적 의의意義로 지향한다. “나의 문명은 신에게서 물려받으며, 개인들을 통해서 인간의 존경을 정립定立하였다.”('전시 조종사', p.202) 그는 그 자신에서나 타인에서나 인간은 인간을 찾고 있는 것을 알아본다. 인간의 길은 윤리이다. 그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길의 탐구자, 즉 모랄리스트가 된다. 다른 자들과 다른 점은 그는 모랄을 남에게 강제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 모랄을 실천한다. 아무리 그를 비난하는 자들도 이 모랄의 실천 앞에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그는 소년시대에 가톨릭 신앙을 포기했다고 하지만, 그의 문명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물려받은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신에 관한 명상은 인간들을 평등한 것으로 정해 놓았다. 그들은 신 앞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평등은 의미가 명백하였다. 사람은 어느 사물에 관련해서 평등해야만 한다. 병졸과 부대장은 국가 앞에서 평등하다. 이 평등이 아무데도 연결지을 거리가 없으면 그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평등은 개인들을 통해서의 신의 권한의 평등이니, 그곳이 한 개인의 상승을 제한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일은 충분히 이해된다. 신은 이 개인을 한 방편(길)으로 취택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는 개인들에 대한 신의 권한의 평들이 문제에 오르는 것이니, 개인들은 누구이든 간에 동일한 의무들을 지고 동일하게 법을 존중해야 할 것이 이해된다. 개인들은 신을 표현하는 자들이니 그들은 권한에서 평등했었다. 신을 섬기는 자들이니 그들은 의무에 있어서 평등하였다.
평등과 동일성同一性은 같은 것이 아니다. 신 앞에 세워진 평등은 아무런 모순도 끌어오지 않는다. 여기 공통의 척도尺度를 갖추지 못해서 평등의 원칙이 동일성의 원칙으로 타락된 때에 선동정치가 숨어든다. 그때에 병졸은 부대장에게 경례하기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병졸은 부대장에게 경례하면 나라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을 존경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문명은 신에게서 상속해 왔으므로 인간들을 대문자 ‘인간’(Homme)에 있어서 평등하게 만들었다.”(전시 조종사', p. 200-201))

여기 그의 신관神觀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의 신은 바로 대문자 ‘인간’(Homme)인 것이다. 그것은 형체를 가진 인간이라기보다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고 은밀히 생각하고 있는 자기 형성의 목표로서 그 수많은 목표들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정신적 존재로서 당연히 모든 인간들을 내면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나 표면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나 그 초월된 상태의 인간이 무수히 많으면서도 결국 하나로 통일되는 대문자 ‘인간’(Homme)이다.
사람들 속에 인간이 깃들어있는 만큼 그 사람들이 이룩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인간이 거기 어느 특권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들 무지 때문에 배반하는 진실한 문명이 아직도 우리들에게 그 소멸을 면할 수 없는 광휘를 뻗히고 있으며,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우리들을 구제하고 있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적들은 우리가 인간에 잠깨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적들은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우리들을 흩어진 돌덩어리들로 밖에 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에 관해서 추억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 돌덩어리들의 한 집합체集合體에 한 의미를 주려고 시도하였다.
어느 자들은 잽싸게 단번에 논리의 가장 극단적인 결론으로 갔다. 이 집합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의 절대적인 집합을 만들었다. 돌들은 돌들과 동일해야만 한다. 그리고 각개의 돌은 홀로 그 자체에 군림君臨한다. 이 무정부 상태는 인간의 존숭을 회상하는데, 이것을 엄격하게 인간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한다. 그리고 이 엄격성에서 생기는 모순들은 우리들 사회의 모순들보다 훨씬 더 악질이다.
다른 자들은 밭에 흩뜨려져 있는 돌들을 긁어모았다. 그들은 대중의 권리들을 제창하였다. 이 절차는 결코 만족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다 한 사람이 대중을 압제하는 것이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면 대중이 단 한 사람을 깔아뭉개는 것도 똑같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자들은 이 권력 없는 돌들을 약취掠取해서, 이 합계를 가지고 한 국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국가도 역시 인간들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것은 똑같이 하나의 합계의 표현이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 위임된 집합체의 권력이다. 그것은 하나의 돌이 다른 돌들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그리고 돌들의 전체에 군림한다. 이 국가는 명백하게 집합체의 모랄을 설교하는데 우리는 이 모랄도 역시 거절한다. 그러나 인간만이 우리들의 거절을 정당화하는데, 이 인간을 회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 자신이 서서히 그리로 향하여 가고 있다.
전체주의, 나아가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총명한 고찰이다. 이 새 종교의 신자들은 광부 한 사람이 매몰됐다고 그를 구제하기 위해서 많은 광부들이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구제작업에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무더기 돌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중상을 입은 병졸 때문에 한 대부대의 전진을 저해한다면 그 부상병을 처치할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을 그들은 수학을 가지고 연구하며, 그리고 수학이 그들을 지배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보다 더 위대한 경지로 초월하는 기회를 상실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초월해서 자기들이 섞여 들어갈 아무것도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자기들보다 다른 것은 증오할 것이다. 모든 풍습, 모든 민족 모든 외래의 사상은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한 모욕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흡수하는 역량을 다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자기와 바꿔놓기 위해서는 인간의 팔다리를 끊을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인간을 설명해서 그의 갈망에 한 목표를 제공하고 그의 정력에 한 영토를 마련해 줄 일이다. 바꾼다(개종한다)는 것은 항상 해방하는 일이다. 대사원 (Cathédrale)은 돌들을 흡수할 수 있다. 돌들은 거기 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돌무더기는 아무것도 흡수하지 못한다. 그리고 흡수할 힘이 없으니까 그저 눌러 뭉갠다. 일은 그러하다. 누구의 잘못인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돌무더기가 흩뜨려진 돌들에 승리한다고 나는 놀라지 않는다.
그렇지만은 최강자最强者는 나다.
내가 나를 다시 찾아 갖는다면 나는 가장 강한 자이다. 우리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회복한다면 말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생활공동체를 세울 수 있고,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희생"이라는 저 유일인 연장을 사용한다면 말이다. 우리 문명이 세워놓은 대로의 우리들의 생활공동체는 그것 역시 우리들의 이해관계의 합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증여贈與의 합계였다. 그 속에는 목숨의 희생이라는 숭고한 증여도 들어간다.

나는 가장 강하다. 왜냐하면 나무는 토양의 재료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재료들을 자기에게 빨아들인다. 이 재료들을 나무로 변경시킨다. 대사원은 돌더미보다 비길 수 없이 더 찬란하다. 나의 문명은 그것만이 잡다한 특수성들을 잘라내지 않고 한 통일체로 맺어놓는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장 자이다. 나의 문명은 그것의 힘의 원천에 물마시며, 동시에 거기 생명력을 부어 넣는다.('전시 조종사', p.213-215)

문명은 인간이 이룩해놓은 것이며 이 문명은 다시 인간을 가꾸어 간다. 생텍쥐페리는 자연이라는 개념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그에게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건립建立이라는 생각이 집념으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 낱말에는 남을 가르쳐 준다는 얕잡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생텍쥐페리의 작품에 적용되면 그 본래의 이미지를 회복한다. 인간의 건립! 인간을 건조하기, 그를 말과 본으로 그 자신의 위에 올려놓기, 다 같은 뜻이다. 늘 그는 단 하나의 똑같은 기도를 발전시켜나간다.

“항상 똑같은 신화다…… 포기하라. 단념하라. 고민하라. 투쟁하라. 갈증의 사막들을 횡단해 넘어가라. 샘물들을 거절하라. 그리하면 나는 그대를 그대 자신의 꽃피움으로 인도하리라.”(C.N. Luc Estang 인용 p.108)

'야간비행'의 리비에르에게는 사람들은 사업의 진행에 사용되는 부수적 존재밖에 아니다. 20년간 착실하게 근무해 온 정비공 로블레가 실수를 저질렀다. 다른 고용인들의 본보기를 그 당장에 해고한다. 그리고나서 리비에르는 생각한다.
“사건들은 사람이 지배한다. 그리고 사건들은 복종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창조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찮은 사물들이다. 그리고 사람은 또한 사람들을 창조한다. 또는 악이 그들을 통해서 지나갈 때에는 사람은 그 사람들을 제쳐놓는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지 않았을 때의 이 작가의 생각이다. 그 다음이면 생각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의 부담에 정부의 부담이 과중해져서 국력까지 약화되는 것을 보면 다시 본연의 생각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해고는 했지만 그 해고당한 정비공의 가정 사정에는 작가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측은한 마음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이런 심정을 의지로 물리친다. 자비심은 인간의 비굴한 심정을 감싸주는 것이므로 사회에 백해무익한 것으로 본다. 약한 자들을 비호하면 약한 것을 유세로 더욱 못난 짓만 하게 된다. 각자는 자기 책임으로 자기 생활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약한 자는 모든 힘을 다 써서 강해져야 한다. 한 사회가 잘 되어가려면 그 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강력한 인간들로 가꾸어가야 할 일이다. 여기 리비에르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감독 로비노에게 부하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부하의 잘못을 발견해서 징벌을 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그대가 지휘하는 자들을 사랑하시오. 그러나 그 말은 이 밖에 내지 마시오.”(Aimez ceux que vous commandez. Mais sans le leur dire.)

속마음을 감춘다는 것은 힘이 든다.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고 평연하게 다른 얼굴로 대하는 태도는 역시 수련이 필요하다. 인간은 늘 자연적으로 나오는 충동을 억누르며 자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규정은 인간을 다루는 틀이다. 리비에르는 종사원들에게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게 한다.  인간은 이겨서 형체를 만들어주어야 할 밀蜜이었다. 이 물질에 영혼을 넣어주고 그에게 의지를 만들어주어야 했다.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루며 그는 노예 같이 혹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그들 자신의 외부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의지를 세워주는 것이었다……. 리비에르는 가끔 말했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 하는 일을 좋아하니까 행복하다. 그리고 내가 엄격하게 다루니까 그들은 자기들 일을 좋아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고통도 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힘찬 기쁨도 준다.
“그들은 강력한 생활로 밀어 넣어야한다. 그것은 고통도, 기쁨도 끌어온다. 그러나 이 강력한 생활만이 중요하다.”('야간비행', p.47)

어느 때 마음이 약해지려는 충동을 느끼며 리비에르는 생각한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동정해 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또는 그 마음을 감춘다……. 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에게 봉사한다. 사람들 비위 맞추는 것이 내 일이 아니다. 사건들이 잘 되어가게 보살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사건들을 잘 섬기도록 그들을 닥달한다.”('야간비행', p.103)
조종사가 맹렬한 폭풍우를 뚫고 구사일생으로 기류지에 착륙해서 수다스럽게 리비에르에게 그동안 겪은 공포감을 털어놓으니까 쌀쌀하게 대꾸하며 헛된 공상에 사로잡혔다고 냉소하며 그의 공포의 감정을 윽박지른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그 폭풍의 소용돌이를 잘도 뚫고 나왔다고 감동을 느끼지만, 동정하는 어조로 대하다가는 조종사의 마음을 더 약하게 만드는 것 밖에 소득이 없다. 그는 조종사의 공포감을 치유해줄 생각이다. 그는 어느 미지의 신비의 나라에서 요행히 돌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손바닥을 밝히는 등불조차 안 가지고 캄캄한 밤의 속속들이 핵심에 들어갔다 나왔어도 그의 어깨의 폭으로 이 미지의 신비경을 물리치며 그 속에서 이 미지의 신비경을 물리치며 그 속에서 아무것도 만난 것이 없음을 고백시켜야만 하였다. 냉혹은 인간의 역량을 키우는 방편도 된다.
야간비행 항공기가 실종되던 우울한 날. 리비에르는 그가 한 기사와 함께 건설 도중의 교량 밑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를 굽어볼 때, 기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 다리는 저 짜부러진 얼굴을 보상할 값어치가 있을까?” 이 다리는 농민을 위해서 건설되고 있다. 그 농민들은 다음 다리로 돌아서 갈 수고를 면하기 위해서 저렇게 흉측하게 한 얼굴을 짜부러뜨리는데 동의할 농군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교량을 건설한다. 기사는 붙여 말했다.“일반의 이익은 개별의 이익들로 형성된다. 그 이상 아무것도 더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리비에르는 뒤에 대답하였다. 그렇지만은, “인간 생명이 값어치 없는 것이라 해도, 우리는 마치 무엇인지 인간 생명보다 가치가 더한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무엇이?” 이제 비행기 승무원들은 실종됐다. 가정의 황금빛 등불 밑에서 가장이 돌아올 행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무엇을 갖다 주는 것인가? 자기는 무슨 명목으로 이 개인적 행복들을 박탈하는 것인가? 하기는 사람은 늙으면 모두 죽는다. 죽지 않고 지속되는 일들이 아마도 있다. 자기는 인간의 이 몫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이런 변명은 좀 쯥쯜하다. 그러나 어느 개인의 생명이 또는 육체가 희생당하거나 손상을 받는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일을 계속 할 값어치가 있느냐 하는 의념을 제기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들의 사업을 계속하여 나가는데 인간의 영원성이 있다. 이날 밤 조종사 파비앙의 아내에게는 한 우주가 무너지는 재난이 닥쳐오는 것이다. 이런 불행을 감수해 가면서도 우편물 수송을 위한 그 위험한 야간비행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인가? 하기는 모든 농가집들에 세월이 지나면 늙은 농군이나 그 아내는 저승으로 가며 그때마다 교회당으로의 장례의 행렬은 생활의 당연한 격식으로 계속 되풀이되며 슬픈 장면의 이면에는 새로 결혼한 젊은 농군 남녀, 그러다가 신생아의 우는 소리 그 방끗 웃는 미소 따위 이 농촌의 아니 이 세계의 일상 사건들이 꽉 차서 늙은 농군의 장례 행렬도 그중의 한 아름다운 경치로 진행되어가는 것이 인생의 진실이다.
리비에르의 사무소에서는 조종사 파비앙의 비행기가 와서 착륙할 희망은 완전히 없어졌다. 여기 찾아온 파비앙의 아내의 존재는 그 순간의 우주를 얼어붙게 한다. 이 야간비행이라는 행사 자체가 이 우주 파멸의 원흉같이도 막연한 의구심을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게 한다. 야간비행이라는 제도 자체가 얼어붙은 듯싶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는 듯 리비에르의 명령이 내려진다. 예정된 대로 다른 비행기의 출발의 명령이 내려진다. 어름장같이 냉혹한 것이 리비에르의 인간성이다. 이 냉혹이 세상의 붕괴를 막고 제대로 운행되게 한다. 인류의 미개발 분야의 개척이 계속되어 나간다.

승리…… 패배…… 이런 낱말들은 의미가 없다. 인생은 이런 이미지들 밑에 있으며, 이미 새 이미지들이 준비된다. 한 승리는 한 국민을 약화한다. 한 패배는 한 다른 국민을 잠깨운다. 리비에르가 겪는 패배는 아마도 진실한 승리를 끌어오는 한 약속일 것이다. 진행하는 사건만이 문제된다.(Une victoire affaiblit un peuple, une défaite en réveille un autre. La défaite qu'a subie Rivière est peut-être un engagement qui rapproche la vraie victoire. L'événement en marche compte seul.)('야간비행', p.187-188)

생텍쥐페리에게는 구체적 존재인 개인들에게는 동물적 존재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존경이 가지 않는다. 그의 인간은 모든 개인들에게서 뽑아낸 추상적 존재인 만큼 바로 파악되지 않는다. 거기 확실히 이 작가에게 전가할 수 있는 권위와 계급의 원칙을 적용해서 인간을 건립建立하고 다져놓고 수호하고 해야 할 가치들의 합계라고 간주한다면, 내면적, 다시 말하면 정신적 건조建造인 그의 인간사상은 그것이 포괄하는 상반된 요소들이 상충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일으킨다. 안정성과 운동이, 권위와 자유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적 면에 투영되는 사회적 면의 모순이 풀어질 길이 없다. 그러면 구체와 추상은 절대로 갈라진 융합될 수 없는 관념인가? 조국의 관념은 한 추상이다. 이차대전에 프랑스가 직면하는 이 작가의 조국의 위기는 그 추상이 직접 구체를 지배하는 작가 자신의 피와 생명이 연결된 구체이다. 추상은 개인들의 육신을 초월한 사고 속에 관념으로 생겨나서 육체인간들을 지배한다. 지배는 속박을 의미한다. 과거의 구제도 하에서의 보편적 원칙이 너무 엄격하게 각 개인들을 지배해서 생겨난 사회적 모순들을 현대인이 전복시키고 개인의 권리를 성화聖火하고 난 다음에는 인간들의 생활의 상호 연계가 의식적으로 무시되고 조리를 거부하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 성행하고 “지옥은 타인들이다” 라는 망령된 구호까지 환영받게 되었다. 그것은 개인주의의 귀착점일 것이다. 그런데 생텍쥐페리의 경우는 그의 사고방식이 가장 독창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그 사상의 내용은 현대의 자유분방성에 반발하며 개별보다는 보편을 찾고 자유방임보다는 절제를 권고한다. 하기는 그는 한 원칙하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이론가는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사고방식을 갖고 그곳이 서로 상충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본다. 잘못하면 그는 반동사상가로 지목될 위험이 많다. 그의 '성채'(Citadelle) 에는 한 절대적 지배자가 군림한다. 그는 왕에 관련된 낱말을 반감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를 현대의 프랑스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왕당주의자로 보아야 할 것인가? 다만 우리는 그가 과거의 전제 군주제도를 둘러엎고 세워 놓은 다음, 적군의 침입에 무참하게도 패배한 자유 민주 개인주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 않는 것은 확언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반대를 용인한다. 민주정치가 옳다면 군주정치에도 옳은 점이 있다. 그것을 그는 묘한 말로 표현한다. ‘친애하는 적’. 적은 미워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적은 언제 내 영역에 침범해 들어와서 나를 멸망에 몰아넣을지 모르는 존재이니까, 나는 늘 거기 대비해서 내 실력을 가꾸어 키우도록 노력해서 적에게 대비하는 강한 자로 만들어주는 고마운 자이니까 ‘친애하는 적’이다. 바다와 배가 그렇다. 바다는 그 폭풍우의 맹위로 산더미 같은 파도를 내리쳐서 배를 언제 부술지도 모르는 가장 큰 적이다. 그 때문에 배는 거기 대비해서 튼튼한 뼈대를 갖추고 아무쪼록 파도가 세게 부딪히지 않도록 뱃머리는 견고하고도 뾰족하게, 그리고 파도가 밀려 지나가도록 선체는 아름다운 유선형으로 만들어지게 유도하는 고마운 존재다. 그렇다면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은 프랑스의 숙적으로 항상 위험한 존재로 압박감을 주어온 존재이니 프랑스는 이 고마운 적에게 대응하게 자기 실력을 가꾸어 이차대전의 패전과 같은 참변에 미리 대비해야 하였을 것을 프랑스의 자유 민주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권리 주장에 몰두하다가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를 망각하고 패전의 굴욕을 치르게 하였으니, 그는 노골적으로 표현은 않고 있지만, 그 반대를 망각하고 있는 자유, 민주. 개인이라는 관념에 호감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인간은 자기 속에 개별로 따로따로 들어앉는 몇 개의 존재가 아니고 그 본질부터 자기를 초월하며 남과 유대를 맺는 연대적 존재이다. 관념이라고 보면 손에 잡히지 않지만 생활면에서 개인 개인이 떨어져 사는 분리를 불허하고 때로는 어느 강제를 인용하여 서로가 연계를 짓는 생활을 실천하게 하는 존재로서 구체적인 힘을 갖는 개념이다. 거기는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방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윤리적 의도가 담아져 있다. 인간의 개념은 말하자면 품위를 높이는 노력을 선양하고 순수한 공리주의, 판에 박힌 생활 태도나, 안락한 물질생활의 추구 등을 경멸하고 인간 존경을 예찬하며 사람을 깔보는 아이러니 취미를 배격하며, 명상하는 습성을 권장하고 허위를 징계하고 신실성을 찬양하며, 창조의 취미, 협력 또는 교환의 덕성을 가꾸는 형을 의미할 것이다. 그는 재산을 모아놓고 가만히 앉아서 놀고먹는 식의 칩거蟄居생활자(sedentaire)에 대한 경멸감을 몇 번 이고 토해낸다. 인간은 의미 있게 움직여야 하는 존재로 보는 면에서 말르로의 행동주의와 일맥상통하는데 전적으로 부합되는 사상은 아니다 말르로의 경우는 행동하며 바른 길을 찾아가는 느낌을 주는데, 생텍쥐페리는 미리 은근히 피해야 할 사고방식에 대한 암시를 준다. 그것은 유행하는 시대사상에 대한 반발이다. 그의 문체가 하도 참신해서 현대인에게 박진하는 매력을 주지만 현대의 소위 진보주의 사상과는 이가 맞지 않아서 전쟁 중에는 적도 많았던 모양이다.
개인의 권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것이 현대인의 갈망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작가에게는 대문자 ‘인간’(Homme)이 불쑥 나타났다. 인간이 그의 자리에 바꿔 앉았다. 뒤죽박죽의 군중, 그것은 밭에 흩뜨러진 돌덩이들이다. 이 돌들이 어느 법칙과 창조하는 의사에 따라서 맞춰져 가면 대사원을 이룬다. 그리하면 돌들은 하나하나가 대사원을 이루는 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뒤죽박죽인 사람들을 인간이 쳐다보면 한 인민이 된다. 인간은 이 인민과 나와의 공통의 척도이다. 그래서 비행단으로 달려가니까 한 커다란 불을 향해서 달리는 것 같았다. 인간이 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동무들의 공통의 척도인 인간이 말이다.

저녁이다. 모든 것에 암묵의 양해가 있는 것 같다. 발자욱 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시오, 대위님…….
-안녕하시오!
모르는 사람이다. 상관있나. 마음이 통한다. 인간이 내게 깃들어서 내 패들을 알아본다. 인민들, 민족들의 공통의 척도인 인간이 말이다. 여기 다시 한번 친연관계가 느껴진다. 이 저녁에 내게 깃든 인간은 내 편들을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프랑스 사람, 노르웨이의 노르웨이 사람들이 인간 속에 자기를 알아본다. 각국의 언어 습관 기타 모두 다르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만큼 부해진다. 아마 그 때문에 노르웨이가 침공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2133 비행대는 노르웨이에 가서 싸우고 싶어졌던 것이다.('전시 조종사', p.196-7)

개인들을 통해서 고찰된 이 인간이라는 왕자의 신앙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신앙이 세워놓는 인간관계들의 높은 소질을 구제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문명은 그 정력과 정수精髓를 상당히 소모하였다. 휴머니즘의 모든 노력은 오로지 이 방향으로만 쏠렸었다. 휴머니즘은 개인에 대한 인간의 우위優位를 밝히고 영속시키는 일을 유일한 사명으로 삼았었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설도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한 조국 한 영토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싶다면 거기 아무런 언어의 논법을 써도 소용이 없다. 한 영토를 구성하는 것은 밭들, 목장들, 가축들이다. 그 각개와 그 전부가 그들의 역할로 부하게 해주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런데 영토에는 물질의 분석으로 설명 되지 않는 무엇인지가 있다. 왜냐하면 지주들 중에는 자기 영토를 사랑해서, 온전한 상태로 보전되게 하려고 자기가 패가 파산하는 것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무엇인지’가 한 특수한 소질을 가지고 재료들의 품위를 높여준다. 그것들은 한 영토의 가축 한 영토의 목장, 한 영토의 밭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조국의 인간, 한 직책職責의 인간, 한 문명의 인간. 한 종교의 인간이 된다. 그러나 자기를 이러한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려면, 먼저 이런 것을 자기에게 세워놓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조국의 심정이 없는 곳에 어느 언어도 이 심정을 옮겨다 주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행위들에 의해서 밖에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존재를 자기에게 세우지 못한다. 한 존재는 언어의 영역領域이 아니라 행위들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본질적인 그 없어서는 아니 될 행위가 한 이름을 받았다. 그것은 희생이다. ('전시 조종사', p.206-207)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가 그 혜택을 받으려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증여에 의해서 세워졌다. 조국을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친다. 그것이 희생이다.
인간의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한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인간과 그에게 필요한 것, 그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리들을 서로 대립시켜서 증명해서는 아니 된다. 사람들은 모두 옳다. 논리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인류의 불행을 꼽사들에게 전가하는 자까지도 옳다. ……그 필요불가결한 것을 뽑아내보기 위해서는 한 동안 분열分裂들을 잊어야 한다. 분열들은 철통같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들을 끌어내며, 거기서 광신狂信주의가 흘러나온다. 좌익, 우익, 꼽사, 비꼽사, 파시스트, 민주주의자, 모두 서로 부실 수 없는 구별들이다. 그러나 진리는 세상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보편을 풀어내는 언어이다. 뉴톤은 수수께끼를 푸는 식으로 오래 감춰져 있던 법칙을 발견해 낸 것이 아니라, 사과가 목장에 떨어지는 일과 태양이 올라가는 일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언어를 세워놓은 것이다. 증명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진리이다. 이데올로기 가지고 떠들어서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것이 증명되지만, 그 모든 것은 대립된다. 아무리 토론해 보았자 인간의 안녕을 절망시키기 밖에 않는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서 보나 빤하지 않은가? ('인간의 대지', p.228-229)
전체주의의 포학한 제도는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있어서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사료飼料 가지고 살찌우는 짐승이 아니다. 물질적 번영과 안락은 우리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인간 존경 속에 성장한 우리들에게는 때로는 엄청난 축제로 벌어지는 단순한 만남은 무거운 압박감 밖에 주지 않는다.
인간 존경! 인간 존경! …… 이것이 자유인의 세계의 시금석이다. 천편일률의 나치제도는 오로지 저 닮은 것을 존경한다. 자기 밖에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다. 나치는 창조력을 가진 모순들을 거부한다. 상승의 모든 희망을 망쳐버리며 천년을 앞으로 인간 대신에 개미집에 우글거리는 로봇트를 세워놓는다. 인간은 세계와 그 자신을 변경시키는 역량을 가졌는데, 질서 위한 질서는 사람에게서 이 역량을 거세去勢한다. 인생은 질서를 창조한다. 그러나 질서는 인생을 창조하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들의 상승은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니고 내일의 진리는 지난날의 오류를 거름으로 가꾸어지며 그리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모순들은 우리들의 성장의 부식토같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자들 자신이 우리 편임을 알아본다. 이상한 친연親緣관계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 위에 세워진 친연이다. 근원이 아니라 목표에 세워졌다. 우리들은 서로가 다른 길을 잡아가며 같은 장소에 가서 만나려고 애쓰는 순례군들이다.
여기서 생텍쥐페리의 애타는 호소는 프랑스가 적군의 압제 하에 있을 때에 그 지식인들의 왈가왈부하는 서로 모순된 주장들의 훤소喧騷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자유인들의 상승의 조건인 인간 존경의 위기에 놓여있다. 근대 세계의 기구의 퇴락은 사람들을 암흑 속에 몰아넣고 있다. 문제들은 조리가 닿지 않으며 해결책들은 모순 덩어리이다. 어제의 진리는 사멸되었고 내일의 진리는 장차 세워가야 한다. 아무런 값어치 있는 종합도 엿보이지 않고 각기는 진리의 한 조각 밖에 잡고 있지 않다. 그저 모두 제가 옳다고 폭력에 호소하려고 든다. 이렇게 분열되다가는 우리가 동일한 목표로 지향해 나간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 각기가 파당적인 정열에 몰두하다가는 한 정책은 정신적으로 명백한 이치에 섬겨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쉽다. 행동하기가 아무리 긴박하다 하여도 그것을 지배하는 사명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행동이 무효로 돌아간다. 우리는 인간 존경을 세우고자 한다. 한 진영 안에서 어째서 서로 미워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무도 순수한 의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노선을 주장하며 다른 자가 택한 노선을 공격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이치의 조리를 비판할 수 있다. 이성의 움직임은 확실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같은 별을 향해서 애써 나가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인간 존경! 인간 존경! ……인간 존경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아져 있다면 사람들은 이 존경을 확고히 다져놓을 사회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제도를 세워놓고야 말 것이다.('어느 볼모에게 보내는 편지', p.37-39)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 자기를 초월한 것으로서의 인간을 ‘인간’(대문자로서의 Homme)으로 표현한다. 모든 인간들을 초월한 존재로 응집한 인간은 신 또는 하느님과 통한다. 그 의미에서 인간 각기는 그 초월하는 면에서 신을 대표하는 사절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상호간에 상대방을 존경해야 한다. 학자는 창고지기 자신을 존경해야 한다. 창고지기는 역시 하느님의 사절이기 때문에 학자는 창고지기를 통해서 하느님을 존경하는 것이다. 한 편이 아무리 값어치가 높고 다른 편이 아무리 용렬하다 하여도 어떠한 인간도 한 다른 인간을 노예의 지위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사절에게 욕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인간 존경은 개인의 용렬함, 어리석음, 무식함 앞에 신분을 천하에 꿇어 엎드리게 하지는 못한다. 그는 먼저 이 하느님의 사절이라는 신분의 영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들의 자격을 넘어서 사절 대 사절의 교섭으로 다루며 품위 높은 관계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하느님께서 물려받은 것으로 개인들을 통해서 인간의 존경을 세워 놓았다.('전시 조종사', p.201-202)




초점
적대적 비판에 대한 고독한 냉소
김성균|번역가



우리는 이른바 기득권층, 가진 자들, 권력자들, 상류층 등으로 통칭되는 사람들이나 무리나 세력에 대해서 반감이나 적대감을 품고 있거나 아니면 그런 감정을 표출하거나 그런 감정의 대상들을 비판하고 성토하는 이들을 가리켜 흔히 ‘좌익’, ‘좌파’, ‘진보적인 사람 또는 세력’으로 간주하거나 지칭해왔다. 그런데 이런 좌파 내지 진보세력을 반대하고 적대하는 이들로 여겨지는 이른바 ‘우익’, ‘우파’, ‘보수적인 ― 대부분 기득권층에 속하거나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나 신념을 공유하는 ― 사람 또는 세력’을 포함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좌파 또는 진보세력을 ‘맑스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간주하고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요컨대 기득권층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적대시’하고 ‘비판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거의 ‘맑스주의’ 전통에 알게 모르게 편입되고 또 암묵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그렇게 분류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전반적인 판세이다. 이 판세를 요약해보면 오늘날 ‘모든 진보는 맑스주의로 통한다’거나 ‘모든 진보의 원천은 맑스주의에 있다’는 명제로 집약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맑스주의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주적主敵 내지 대적大敵으로 간주된다. 아니, 그렇게 간주되어오다가 지금은 거의 패배한, 몰락한, 붕괴한 ‘주의(ideology)’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오여손잡이주이”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추억의 적이요 현재의 포로이기도 한 ‘실패한 이념이자 좌절된 본능인 동시에 운동’이기도 하다.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패배를 두고 새삼 의혹이나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 전체를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맑스주의의 패인敗因도 누누이 분석되고 선포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제대로 ‘몰랐다’거나, 아직 맑스주의를 실현할 ‘시기’가 도래하지 않아서 ‘때를 못 만났다’거나, ‘인간’을 몰랐다거나, 인간의 ‘심리‘와 ‘욕망‘과 ‘본능‘을 몰랐다거나 하는 패인들이 제시될 수 있고 또 제시되었을 것이다.
이런 판국이라면, 오늘날 대부분의 진보세력은 패배자들인 셈이다. 자본주의를 몰랐거나 때를 못 만났거나 인간․심리․욕망․본능을 모른 채 근 200년이 다되도록 자본주의를 상대하여 비판하고 투쟁하다가 끝내 패배하고 만 이런 ‘주의’에 자의로 편입되었든 강제로 편입당했든, 하여간 이런 ‘주의자’로 불리고 또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패배자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차별적인 세계화를 지극히 당연하게 인정하는 자본주의적인 ‘무의식’ 혹은 ‘본능’이 대세 중의 대세를 이루어 마침내 자본주의가 인간의 무의식 혹은 본능 자체가 되어버린 판국까지 벌어진 듯하다. 바꿔 말해서, 인간의 어떤 심리나 욕망이나 본능을 ‘억압-자극’하여 이용하고, 그런 술책에 편승하여 승리한 자본‘주의’가 이제는 아예 세계인들의 ‘심리욕망본능’ 자체가 되어버린 듯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또 계속 제기되어야한다는 주장도 진부한 단말마처럼 잦아들 줄 모른다. 말하자면 이미 패배하여 포로로 전락한 지경에서도 ‘포로의 복지개선 또는 생활수준향상’을 요구하는 비판만은, 늘 ‘적대적’이지만 ‘개선’과 ‘발전’을 요구하는 비판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패배를 모르는 듯한 패배한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형국을 관찰하면서, “자본주의는 어쩌면 원래부터 ‘적대적 비판’을 허용했고 심지어는 암묵적으로 그런 비판을 장려하고 부추겨 이용해왔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고질적인(?) 의혹이 다시금 내 입술(혹은 손가락?)을 간질임을 느낀다. 이런 의혹의 간질임을 조금 참다보면,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불가결한 적대적인 경쟁자요 일등공신이었다”는 의혹의 간질임이 쾌감인지 고통인지 모를 기막힌(?) 느낌마저 내게 선사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나는 “지금까지 맑스주의자들을 비롯한 이 ‘맑家’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들이 마셔본 좌파 내지 진보세력이 자본주의에 대하여 제기한 적대적이나 개량적인 비판들은 기껏해야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비판’에 불과했다”는 확의確疑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나의 ‘확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아니 이 확의에 관심이라도 보이는, 혹은 이 확의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의혹을 제기하거나 제기할 수 있는 맑스주의자 또는 좌파 또는 진보세력을 본 적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다.(물론 여기에는 나의 악질적인 게으름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그들은 적대적 비판의 ‘비장한 열정’만 알지 고독한 냉소의 ‘비극적인 쾌통快痛’은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오른손마저 다 ‘알게’ 왼손이 한 비판이 결국 오른손을 ‘위한 비판’이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비판의 심리학’ 내지 ‘비판의 생리학’을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적대적 비판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본주의와 부지불식간에 암묵적으로 야합공모하고 있는 자신들의 심리욕망본능을 도무지 자각할 줄 모른 채 일종의 ‘칸트 식 비판’(내가 보기에 ‘칸트 식 비판’은 진정한 전복이나 차이의 혁명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수성과 보존, 개량과 발전을 목표로 하는 비판이다.)만 남발해온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런 판국이니 내가 그들에게 “본시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충고는 고사하고 ‘손뼉소리도 두 손이 마주쳐야 난다’는 지극한 상식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구료!”라고 ‘냉소’를 던져봐야 그들로서는 소귀에 경을 읽는지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지 분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좀더 알아먹기 쉬운, 주류적主流的인, 학술적인 — 아마도 나의 고질적인 어투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하여간 — 표현법을 흉내 내어 말해보자면, 맑스주의자들을 비롯한 진보세력이 자본주의 대하여 가해온/가하고 있는 적대적 비판은 자본주의 심리학 내지 생리학도 모른 채 자본주의를 전복 내지 개선시키겠다는 포부에 들뜬 나머지 저지른 “자본주의를 위한 ‘쓴 약’ 달이기”와 다름없는 “적=잠재적인 친구를 위한 비판”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모든 적대적 비판’은 그래서 ‘잠재적인 친구를 위한 비판’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적=친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개선시키기 위한 충고와 같은 적대적 비판을 통해서는 결코 전복이나 혁명 — 나는 이른바 ‘진정한’ 전복이나 혁명이란 것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서도 의혹 중이다 — 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전복이나 혁명을 기도하지 않았던 비판이라면, ‘적대적일’ 필요도, ‘피 흘릴’ 필요도, ‘역사를 운위할’ 필요도, 그토록 처절하고 ‘가열 찰’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간,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적대적 비판 내지 반감에서 촉발된 갖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혁명들은 물론 심지어 프랑스혁명조차 진정한 전복과 혁명 — 그런 혁명이나 전복이 가설假說로나마 이루어질 수 있더라도 — 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확의에 의거하면, 이들 혁명은 ‘적과 친구되기 내지 적과의 동침’에 불과한 당연한 수순이었을 뿐이다. 
사실 여기서 ‘적’이라고 하면, 그들은 그들이 축출하고 숙청한(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혹은 그들을 그렇게 처우했고 하고 있을) 기득권을 지닌 육체적 인간들을 거명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적은 그런 육체의 주체인 적, 그런 주체가 이끌거나 이끌리는 심리욕망본능, 그리고 그런 본능이 추구하고 숭배하고 과시하기 원하고 ‘없으면 못살 것으로 여기는’ 그들만의 소중한 ‘가치’를 아울러 가리킨다. 진실로 적은 바로 그런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심리욕망본능이데올로기고정관념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대적 비판과 그런 비판에 입각한 혁명을 통해서는 기존의 기득권세력들 그리고 특히 그 세력들이 중시하는 가치와 완전히 단절하거나 그 가치를 전복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내세워 혁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의 가능성은 차라리 냉소 쪽에 더 많이 더 쾌통快痛하게 더 비극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냉소에 야합이나 공모가 깃들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적대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들 ― 기득권자들, 지배자들, 부자들, 상류층, 유한계급, 부르주아들, 보수세력 등등 ― 이야말로 바로 이 냉소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분별하게 잘 아는 자들이리라. 이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경멸’이나 ‘무시’도 냉소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경멸과 무시가, 그들을 불편하고 성가시게 만들 수 있는 적대적 비판세력의 적대감과 반감을 조장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경멸과 무시가 그들이 중시하는 가치의 최고성 내지 귀중성을 견지하고 보수하는 최적의 수단이라는 것 역시 ‘부지불식간’에 ‘분별없이’ 그리고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 경멸과 무시의 대상자들은 다만 자신들이 경멸받고 무시당했다는 사실과 경멸하고 무시하는 자들이 ‘가진 것’과 ‘중시하는 가치’를 자신들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지, 그들도 역시 그런 ‘가치’를 ‘중시하고’ ‘가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의 의미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나 자본의 악성惡性을 마음대로 비판하라. 하지만 나 자본은 너희 비판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억압하고 착취하겠다. 그래야만 너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자본의 귀중함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자본이 악하게 보이는 것은 자본이 너희에게 골고루 배분되지 않기 때문이지만, 자본이 골고루 배분된다면 너희가 과연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나 자본은 자본에 대한 너희의 적대적인 비판은 허용하되, 비판하는 당사자들은 때려잡는 것이다. 알겠느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러니 열심히 자본을 성토하고 자본가들을 성토하라. 그리하여 온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바로 그 길이 나 자본의 신성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길이니라!”

그래서 적대감과 반감은 경멸과 무시 앞에서는 태생적인 패배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탁월한 심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니체의 시각을 응용하여 말하자면, 적대감과 반감을 느낀다는 것은 적대와 반대의 대상자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똑같이 중시한다는 것, 아니, 차라리 그런 ‘가치’의 중요성을 배가시키는 야합공모활동에 적대적으로 부지불식간에 동참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적대시하는 자들의 가치와 위상의 확고한 ― 지독한, 일반적인, 염빙厭憑할, 보편적인, 징글맞은, 세계적인 ― 기반을 다지고 또 다지는 데 부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토록 자신들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무시하고 경멸해온 자들이 중시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 ― 주류세력이 중시하는 지배적인 ‘가치’ ‘문화’ ‘자원’ ‘지식’ ‘권력’ 등등 ― 을 적대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똑같이 공감하고 그것들을 똑같이 중시하며 그것들의 중요성을 배가시키는 데 기여하는 공모협잡과 다름없다. 그것은 “나도 그것들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다!”는 원망 혹은 원한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소치의 발로이다. 바로 이런 ‘동일한 욕망의 구조(내용과 형식)’를 사수하고 보수하기 위한 비판이 이 시대의 진보적이고 적대적인 비판의 진상이다. 이럴진대 원한=비판을 통해서 혁명이 어찌 가능할 것인가.
그렇다고 냉소만으로 혁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냉소는 단지 이토록 동어반복적인 비판의 굴레를 벗어나서 기득주류의 가치와 문화 따위와는 생리적으로 단절하고 결별하여 그것들을 전복시킬 수 있는, 아니 완전히 무시하고 경멸할 수 있는 조금 더 확실하고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비판보다 냉소가 혁명의 본령 ― 그런 본령이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다면 ― 에 훨씬 더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경제사회학자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은 맑스(Karl Marx, 1818~1883보다도 더 혁명적인 지식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베블런은 맑스보다 반세기 이후에 활동한 인물이지만, 19세기의 경험을 공유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베블런과 맑스의 결정적인 차이는 맑스는 비판을 택했지만 베블런은 냉소를 택했다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 볼 때 맑스의 『자본론 Capital』과 『공산당선언 The Communist Manifesto』은 시기를 잘 못 만났거나 오해받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적대적 비판의 산물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한 때나마 자본주의만큼이나 온 세계의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은 비판이 아닌 냉소를 기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숨기고 싶어 하는 유용하고 귀중한 본능과 가치를 일말이라도 드러낼 수 있었다. 맑스는 자본주의 본능과 가치를 가리는 데 봉사했다면 베블런은 바로 그런 본능을 드러내기 위해 냉소의 묘미를 선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 아마도 미국경제학계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기존의 갖은 학술적인 논리를 성가실 정도로 동원하면서 — 자본주의 문화는 야만적인 “약탈문화”에서 유래한 “금력과시문화”라고 비꼬았다. 진지하고 비장했던 맑스와 엥겔스와는 다르게, 자본가들의 심중에 더 깊이 비판의 바늘을 찌름과 동시에 그런 자본가들을 흉내내고자하는 많은 이들의 욕망의 실상마저 폭로하는 냉소까지 시전示展했다는 점에서 보면 100년 전의 베블런은 오늘날의 무수한 자칭타칭 진보지식인보다도 더욱 진보(역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베블런은 인간의 흉내와 모방의 심리학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아니, 다른 학자들도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심리학을 그들의 협소하고 옹색한 ‘학문’에 적용하여 설명하기를 기피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 스스로도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았을 터이고, 그래서 그런 불쾌한 심리학을 구차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학문적 허영과 권위로 무시했을 터이니 더욱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런 현실적인 맥락이 베블런이 구사한 비판을 풍자적인 비판 즉 ‘슬픈 냉소’로 견인했으리라.
그런데 냉소는 심리학적․생리학적 자각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냉소는 적대감이 아니라 비극정신으로 이어진다. 시대가 중시하는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아예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격하시키는 냉소는 그래서 허무주의적이지만 진정 혁명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냉소하는 인간은 고독하다. 베블런이 ‘일반적으로’ ‘대체로’ ‘대개’ ‘통상적으로’ ‘보통’ ‘대부분’ ‘다소’ ‘약간’ ‘어느 정도’ ‘예를 들어’ 같은 부사들을 그토록 성가시게 동원하면서 이른바 ‘논리의 일반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이유를, 나는 어쩌면 이런 냉소의 혁명성을 완화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냉소의 진미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하는 그의 냉소적인 관용과 친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억측한다. 내가 보기에는 다소 갑갑하게도 보이는 그런 식의 부사들의 남용을, 나는,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베블런의 비극적 인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조치들이라고 억측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베블런의 이러한 일반화 욕구 혹은 관용이 오히려 그가 구사하는 냉소의 의미를 흐리게 만들고 말았다는 데 있다. 나의 편견에 비추어보면 불필요해보이는 그런 번거롭고 귀찮은 노력은 그의 냉소에 맑스주의의 색채를 ― 자의든 타의든 ― 더 강하게 가미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의 분노와 원한감정을 더욱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학문하는 자들, 옹색하고 협소하기 그지없는 자들에 대한 과도한 배려와 일반 독자들에 대한 지나친 친절이 한편으로는 그의 탁서卓書의 의미를 반감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특히 ‘문명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이른바 야만적인 “약탈문화”의 잔재가 사라져가는 좀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로 전망하는 그의 시선은 다윈(Charles Darwin, 1809~1982)의 진화론을 현대사회에 너무 안이하게 해석적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즉 다윈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발전론’도 ‘진보론’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제반조건이 갈수록 나아지고 좋아지고 개선되고 복잡해지고 세련된다는 이론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존의 학자들의 대다수와 일반인들의 대다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베블런도 바로 이런 단순하고 편협한 맥락의 진화론을 서양의 경제사회문화에 적용하고 있다. 이런 안이함이 바로 ‘베블런 식 냉소’를 비판의 역부족으로 몰아간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 한편으로 ‘비판서’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한계는 베블런이 철저히 독자적인 시각을 고수하지 못한 데서도 연유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덕분에 이 책이 ‘미국’에서는 고전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판의 태생적인 역부족은 비판이란 본시 홀로하기 불가능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비판은 보편적인 논리를 근거로 삼아 타자를 지향하는 담론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인 비판은 모든 보편적인 논리 자체, 기존의 모든 가치 자체를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비판은 비판을 넘어서, 냉소와 전복과 ‘자아의 혁명’으로 파문되기 시작한다. 이 파문과 교차하는 것이 바로 냉소이다. 냉소는 자기에 대한 냉소, 자아에 대한 냉소, 즉 쾌통한 냉소의 통점痛點을 통과하여 자아의 혁명으로 나아간다. 그 길은 가녀린 자유의 꼬리빛이나마 언뜻 목격할 수 있는 고독한 길이다.
그래서 비판은 홀로 할 수 없지만 냉소는 홀로 가능하다. 일찍이 다른 이유에서 “혁명은 왜 고독해야하는 것인가를” 간파했던 시인 김수영이 지향한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의 이름도 내가 보기에는 “피의 길”이기보다는 이러한 냉소의 길이어야 했다.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를 전복시키고 기각하기 위한 냉소도 그래서 늘 고독하게 시작되어야한다. 베블런이 냉소보다는 비판에 — 자의든 타의든 — 경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가 철저히 독립독행하지 못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와 거의 동시를 살면서 『악마의 사전 The Devil’ Dictionary』이라는 ‘냉소의 정전正典’이라고 할만한 기서를 펴낸 독창적인 냉소가冷笑家 앰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 1842~1914)만큼이나 고독한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원한어린 적대적 비판보다는 쾌통하고 고독한 냉소야말로 진정 ‘자아의 혁명’을 가능케 할 지극하고 극단적인 비판의 출구임을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추천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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