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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계간평(소설)/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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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27회 작성일 08-03-01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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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소설
상류층과 하류층을 말하는 방식
이정석|문학평론가


∙정미경, 「바람결에」(《문학동네》, 2007년 봄호)
∙김종광, 「빵집이 사라졌네」(《실천문학》, 2007년 봄호)
∙성석제, 「여행」(《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


1.
세상이 변했다. 그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들도 변했다. 70년대의 문제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개천을 경계로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를 선명하게 갈라놓았을 때, 그것은 사실성에 위배되는 우화적 공간배치쯤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 비현실적인 우화적 공간구도는 실제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가 한 인간을 평가하는 주요한 잣대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옷차림마저 강남스타일과 강북스타일이 따로 있을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개선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서울권과 지방의 격차와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불거져 나오는 지역감정은 또 어떤가. 이쯤 되면, 우리에게 공동체는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그리 엉뚱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수재의연금 모금이나 불우이웃 돕기 행사와 월드컵 같은 광적인 이벤트가 주는 일체감으로 둘러막기에는 공동체의 부재감이 너무나 크다. 공동체의 와해현상은 문학판에도 다양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오랫동안 한국문학의 주류를 형성해 오던 민족문학 혹은 민중문학이 급격히 위축되어 자신의 진로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지경에까지 빠져든 것이 그 대표적인 변화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그 곤경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문학적 경향들이 활발하게 움트고 있는 것이 요즘의 문학적 풍경이기도 하다. 

2.
‘한국문학의 오래된 금기를 깨뜨리고 부르조아 소설의 새 지평을 연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작가세계》, 2006 여름호)의 출현은 문학판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자그마한 사건일 수도 있다. “여태의 한국소설은 대체로 ‘없는 자의 예술’이었다. 중산층보다 못사는 계급의 서사였다. 가진 자의 서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허나 그건, 없는 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타자他者의 세계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가진 자가 들여다본 가진 자의 이야기다.”(신수정, 「황순원 문학상 예심평」) 그렇다. 이제까지 한국사회의 상류층이 문학의 영역에서만큼은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매도만 당하는 소외 받는 타자였다. 그간에는 가진 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 드문 기회조차도 기껏해야 자신의 탐욕과 졸부로서의 천품賤品을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 버리곤 했다. 이는 ‘천민 자본주의’로까지 불리는 한국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와 관련된 현상이지만, 거기에 어느 정도 원한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 아들의 연인」에서 상류층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삶과 내면풍경은 어떠한가. ‘나’는 “돈을 크리넥스 뽑아서 코 풀 듯 쓰는”(223쪽)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안락한 삶을 살아가지만 천박하게 돈 자랑을 하지도, 없는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교양과 세련된 매너를 갖춘 그녀는 곤경에 처한 이웃의 운전기사를 도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또 컨테이너에서 살 정도로 가난한 아들의 연인을 보자 단박에 “깨끗하고 반듯한 아이”(223쪽)임을 알아채고 자애심 넘치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 섣부른 동정심으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는 적절한 판단력과 처세술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결혼이라는 벤처에서 성공한 투자자”(226쪽)라 할 수 있다. 안락한 삶과 순수한 열정을 맞바꾸는 행복한 거래에 성공한 신데렐라인 셈. 그러므로 현재의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얼마만큼은 “제 안의 자신을 죽여버”(229쪽)려야 한다는 것을, 열정의 “뜨거움은 곧 가시고 돌은 천천히 식어갈 것이”(241쪽)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때때로 순수한 열정을 그리워하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비록 그 삶이 영원한 생명을 갖지만 그만큼의 젊음을 얻지 못해 늙고 시들어 버린 채 조롱 속에 갇혀 죽음만을 열망하는 무녀巫女의 운명과 같을지라도.
결국, 「내 아들의 연인」 속의 ‘나’는 금반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멍이 필요하듯이, 화려한 상류층의 삶도 내면의 공허를 동반할 수밖에 없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향수가 집요한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고 순간적인 몽상에 그치기에 거기서 우울한 멜랑꼬리가 배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내 아들의 연인」은 도식적 관념으로 상류층을 재단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과 내면을 담백하게 전해 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전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까지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상류층에게 경제적 사회적 위치에 부합하는 교양과 지적 수준을 찾아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정미경은 「바람결에」에서 중ㆍ상류층의 삶 속에 내재하는 불안과 결핍을 좀더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간다. “보이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218쪽) 이 말은 현재 한국 중ㆍ상류층의 의식을 지배하는 모토가 아닐까. 그 한 예로, ‘나’의 “엄마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이다.”(203쪽) “여동생 남편보다 당신 남편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오늘 결혼하는 조카의 신랑이 당신 사위보다 번듯한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되고, 하다 못해 키라도 작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게 살자니 늘 피곤하고 화가 나고 우울할 수밖에”(204쪽) 없지만, 자기 존재 이유를 자기 내부에서 찾지 못하기에 타자와의 가시적인 구별짓기의 노력이 힘겹게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한편, ‘나’는 그런 엄마의 삶에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지만 중ㆍ상류층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사랑하던 남자 윤과 헤어진 것도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그의 회의주의적 가치관 때문이다. 

윤.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던 남자. 난 내 아이가 자라난 후의 세계를 결코 낙관할 수 없어. 스스로는 낙관할 수 없으면서, 힘들겠지만 넌 여기서 한번 살아볼래,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거, 황당하도록 무책임한 거지. 방긋거리며 웃으면 예쁘겠지. 서툰 걸음걸이를 보면 왈칵 연민이 솟겠지. 처음 아빠, 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드는 순간엔 삶이 고해라는 걸 잊을 수 있겠지. 그런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해 한 생명을 세상에 던져놓는다는 거, 그거 너무 무책임한 거야.
-「바람결에」, 205쪽

어쩌면, 윤의 선택은 위선과 자기 기만으로 치장된 부르조아적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 허무와 삶의 공허를 정직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갖기 원하는 아내에게 자신과 아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죽는 것. 완전히 죽는 것”(잉그마르 베르히만, 「산딸기」 중에서)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인간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도 사실이다. 결국, ‘나’는 윤과 결별을 하고 “두 사람의 피가 섞인 아이를 갖고 싶어하고, 허리케인이 몰려오면 가족과 귀중품을 차에 싣고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킬 것 같은, 강도가 들어오면 기지와  완력으로 가족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은, 칠 년의 가뭄이 이어진다면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가 제 식구가 먹을 식량을 등에 지고 돌아올 것 같은 남자를 골라 결혼을”(213쪽) 한다. 
그러나 아이 낳는 것을 “적절한 계획과 노력과 투자를 해서 성취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생의 과업”(210쪽)으로 여기는 남편과 함께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와 그 사이에는 끝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자식이 부르주아적 삶의 행복을 완성하는 마침표라면, 아이의 부재는 곧 안정적 삶의 이면에 드리운 불모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표지가 된다. 그렇다면, 「바람결에」는 언뜻 평온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삶의 이면에 감추어진 생기 없는 부르주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3.
'경찰서여 안녕'과 '모내기 블루스'에서 익히 보았듯이, 김종광의 소설은 대부분 농촌이나 시골 소도시를 배경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은 생을 살아가는 주변부적 존재의 삶을 다루고 있다. 게다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해학이 묻어 나는 입담을 과시하며 이문구 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가난한 자들의 고달픈 삶을 다루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다는 타박을 받기 십상인 요즘의 분위기에서는 그리 긍정적인 미덕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종광의 소설은 경쾌하고 의뭉스런 입담으로 소설적 재미를 가져다 주는데 성공하며, 소위 말하는 민족문학 내지 민중문학이 이 시대를 헤쳐나가는 방향의 일단을 보여 준다.  
「빵집이 사라졌네」 역시도 김종광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소설세계를 그대로 이어 가고 있는 작품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완고한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아낙네 기분. 그녀는 어느 날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빵집에 취직을 한다. 광부 남편이 광산을 그만 둔 데다가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생활비가 떨어졌다고 아쉬운 소리를 하자,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서 취업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고되지만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는 지방대를 나온 자식들이 근근히 자기 밥벌이나마 하게 되자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리고 IMF의 고비마저 함께 이겨내며 서로 의지하던 빵가게 주인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사사건건 기분에게 트집을 잡자, 할 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다. 태작임에 분명한 이 작품에서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지는 것은 바로 그 시점에서다.

주인네는 기분을 한참 노려보더니 불쑥 물었네. “넌 성탄절도 없냐?” “부처님을 믿어유. 근디 아기예수님 태어난 날이 어쨌가니유?” “빚쟁이도 성탄절 같은 날은 돈 안 받으러 댕긴다고!” “성탄절은 어제였슈. 지났슈.” 
주인네는 돈 덩이 두 개를, 그러니까 이백만 원을 쥐더니 일어섰어. 그걸로 느닷없이 기분의 어깨와 뒤통수를 툭툭 내리치는 거야. “이게 돈이다, 쌍년아. 주고 만다. 주고 말아, 씨발 년 갖고 가. 갖고 가란 말이야!” 그리고는 돈 덩이를 획 집어던지는 거야. “지금 사람을 때렸슈?” “그래, 년아. 돈으로 맞아보니까 좋으냐?”
-「빵집이 사라졌네」, 92쪽

악착같이 퇴직금을 받으려는 기분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차일피일 퇴직금 지급을 미루는 주인네와 치열한 실랑이를 벌인다. 이때, 얌전하면서도 의뭉스럽게 주인네의 횡포에 대응하는 기분의 모습에서 순박하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중상을 읽을 수도 있겠다. 또,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주인네에게서 그동안의 문학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졸부상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남편도 없이 사업을 해서 자식을 가르치려 바동거리는 주인네를 온전히 가진 자라고 볼 수만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주인네 역시도 현실로부터 닦달을 당하며 고달프게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에 불과할지 모른다. 결국, 「빵집이 사라졌네」는 부도가 나서 주인네의 빵집이 사라지고 기분이 그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걸로 지방 소도시의 서글픈 현실묘사를 끝맺는다. 

4.
입담이 강한 이야기꾼의 소설에서 그 입담의 매력이 사라지고 나면, 작품이 다소 밋밋해지기 쉽다. 김종광의 「빵집이 사라졌네」가 그렇듯 입담의 선배격인 성석제의 신작 「여행」도 특유의 입담이 현저히 약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눅눅한 현실을 경쾌하게 감싸안으며 쾌활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사라지고 대신 칙칙한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드러내게 만든다. 
세 친구가 무전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겪게 마련인 사소한 갈등과 번잡한 난관이야 으레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진짜 문제는 또 다른 여행객들의 친절한 초대로 참석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벌어진다. 

“제가 무슨 결례를 했습니까? 이 친구가 잘못한 게 제 잘못인가요? 그럼 그쪽 친구 분은 뭘 잘 하신 겁니까? 여러분들은 양주 마시고 양담배 피우니까 우리와 수준이 다른 훌륭하신 분이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닌데. 우린 지금 나름대로 굉장히 힘들다구요. 힘들어서 우리끼리 조용한 데 놀러온 거예요. 더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거죠.” 
“빨간 외제 스포츠카 타고 띵까띵까 놀러나 댕기민서 뭐가 힘들다고? 노는 기 힘들겠어, 먼지 먹는 기 힘들겠어?” 
봉수가 놓치지 않고 틈을 파고들었다. 영훈이라는 청년 역시 재빨리 가세했다. 
“그런 콤플렉스 가지고 남한테 피해주면서 살지 마쇼. 근데 아까부터 왜 반말을 하고 그러냐?” 
“뭐, 콤플렉스? 이 새끼가 뒤질라고 지랄 떠네.”
-「여행」, 109쪽

무전여행으로 심신이 지친 그들을 초대해 준 여행객과 합석해 불고기와 캔맥주와 양담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소한 실랑이가 발단이 되어 양자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진다. 말 그대로 상류층 자제들과 하류층 자식들의 충돌이 발생한 셈. 그 와중에 하류층 주인공들의 콤플렉스와 맹목적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는 그간 성석제가 보여 준 인물표현 방식과 상이한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한참 모자란 존재에 평범함을 뛰어넘는 인간적 면모를 부여하거나(「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비천한 몸을 빌려 태어난 인물에게 세상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로 만들거나(「천하제일 남가이」), 누추한 이력들을 지닌 계원들에게마저 삶의 활력을 불어넣곤(「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했다. 그런 그가 하찮은 인물들에 부여했던 독특한 아우라의 베일을 활짝 걷어 내고 비루한 존재의 현실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본래 서사의 주인공은 신에서 영웅으로, 고귀한 신분에서 평범한 인간이나 그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점진적으로 변천해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문학에서 순박하지만 수난 받는 민중상과 부도덕한 상류층의 대립은 절대적 도식으로 통용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이제, 그 완고한 도식에 확연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정석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숭실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추천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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