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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계간평(시)/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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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양치기 소년들의 세계사
조하혜|시인
∙김언희, 「5:5」(시와 사상, 2007년, 봄호)
∙김이듬, 「다나이드」(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3-4월호)
∙맹문재, 「몸 밖의 몸」(문학·선, 2007년, 봄호)
∙유형진, 「낭만사회와 그 적들․1」(시인세계, 2007년 봄호)
∙이은림, 「자궁, 자화상, 그리고……」(시평, 2007년, 봄호)
∙황병승, 「미러볼」(현대시, 2007년, 3월호)
∙이장욱, 「전속력」(시와 세계, 2007년, 봄호)
∙이승훈, 「언어를 잊으려고」(리토피아, 2007년, 봄호)
타인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공포를 느낀다. 어느 날 양을 지키던 소년은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늑대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을 나는 생래적인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것은 양치기 소년들과 늑대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일군의 음모에 의해 유포되어 학습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이 되느냐, 늑대로 태어나느냐가 아니다. 양과 늑대, 백인과 흑인, 여자와 남자, 나아가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등 생물학적․ 인종적․ 성적․ 소유적․ 취향적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상상은 오랫동안 투쟁의 피를 흘려야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상상 영역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럼에도 양치기 소년들의 오래된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싸움의 기원으로서 공포의 환상 속에 은폐된 차이를 재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1. 공포의 외인구단
공포의 기록에 맞서는 공포의 외인구단 첫 번째 명단에 나는 불운한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이상을 떠올린다. 그는 요절하기까지 공포의 전율을 마치 지진을 감지하는 리히터 지진계처럼 온몸으로 체감한 시인이었다. 그의 처녀 소설 '12월 12일'의 서문에는 이상 문학의 출발점이 공포에 대한 기록에서 발원하였음을 드러낸다.
그의 시 「烏瞰圖」 연작시 가운데 ‘13인의 아해’는 그의 처녀 소설 '12월 12일'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공포에서 탈주하려는 이상 시의 시적 자아를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이상 문학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이상이 느낀 공포의 근원을 직접적으로 해명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피가학적이고 성애에 관한 이상한 집착을 보여주었던 그의 문학은 영화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처럼 현대인의 정신병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부러 정신분열을 앓는 사람처럼 세계를 기호화하면서 세계의 인식을 이루는 구조를 발견하고 마침내 이를 해체하였다. 그럼에도 공포에 대한 편집증과 공포에 대한 수사학을 발견하고 이것을 해체하는 동안 이상은 계속해서 죽음 욕망에 시달려야 했다. 죽음 욕망이라니, 죽음 욕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상의 죽음 욕망은 공포에서 비롯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상의 시를 단언할 수 없는 공포의 근원에 대해 ‘차이의 언어’를 통해 저항한 시인이라 생각한다. 차이의 언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상의 경우 그것은 그 자신이 밝힌 것처럼 공포에서 근원한다. 왜냐하면 공포는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차이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늑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양/늑대는 영원한 공포의 이분법이기 때문이다.
2. 5:5의 공포의 비율
주체에 대한 욕망도 이와 유사하다. 자아에 대한 욕망은 곧 타자에 대한 욕망을 지시하는 데 공포의 이분법 속에서 좌절된 자아의 욕망은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언희의 시 <5:5>는 이러한 성격을 드러낸다.
언제까지, 밤무대에 서 있어야 할까?
언제까지, 휘파람을 불어야 할까 한 잎 가득 흙을 물고?
언제까지, 머리와 따로 노는 가발을 써야만 할까?
언제까지, 잘못 배달된 꽃바구니는 문밖에서 썩어갈까?
언제까지, 더럽지도 않은 것들을 더러워해주어야 할까?
언제까지, 알려고 해서는 안 될까 가해자의 가해자를?
언제까지, 뒤를 밟는 자의 뒤를 밟아서는 안 될까?
언제까지, 부들부들 칼을 떨어뜨리고 웃어야 할까?
언제까지, 부득부득 칼을 쥐어주며 웃어야 할까?
언제까지, 왼손으로 멱을 따야만 할까?
언제까지, 뜨거운 맛에 먹어야 할까?
-김언희 「5:5」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세계를 5:5로 인식한다. ‘가해자의 가해자’를 알 수 없는 공포의 비율 5:5 속에서 그는 ‘밤무대’에 서 있는 딴따라 가수이기도 하고, ‘한 잎 가득 흙을 물고’ ‘휘파람’을 부는 벌을 받고 있는 자이며, 자신의 ‘머리’에 맞지 않는 ‘가발’을 쓰고 ‘5대 5로 가르마를 탄’ 우스꽝스런 자이기도 하다. 결국 이 시의 시적 자아는 공포의 비율 5:5의 세계에게 복수를 하려는 사람처럼 ‘가해자의 가해자’를 알아내려고 ‘뒤를 밟는 자의 뒤’를 밟다가, ‘부들부들 칼을 떨어뜨리고’ 울기도 하고, ‘부득부득 칼을 쥐며’ 미친 듯이 다시 복수를 다짐하며 웃는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5:5의 공포의 비율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김이듬의 시 「다나이드」 역시 세계에 대한 증오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 시의 표제작인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의 왕 다나오스의 50여명의 딸들 중 한명이다. 다나오스는 신탁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왕국이 사위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자 자신의 딸로 하여금 남편들을 살해하도록 만든다. 결국 50여명의 딸들 중에서 49명의 딸들이 남편을 살해하였는데 다나이드는 이들 중 한명의 이름으로, 일찍이 로뎅은 까미유를 모델로 하여 다나이드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바윗돌을 껴안고 처절한 고통을 느끼는 로뎅의 다나이드.
다만 반하거나 반한 척하는 사건들의 연속
(생략)
도대체 나는 뭐니?
아예 바위 속으로 들어가려고 그래?
거기 부르농빌의 페니스라도 있어?
그는 등을 돌리고 난 다시 바윗돌을 껴안는다
도대체 내가 어디 있는지
오직 한 번만이라도 알 수 없어 보았으면
연습부족이다
모퉁이돌이 조금 굴러 들어와 박힌 기분
불현듯 바위가 지반 전체가 약간 움직인다
얼마나 계속할지 말지 내 맘이지만
-김이듬, 「다나이드」 중에서
이 시에서 시적 자아가 껴안는 것은 ‘바위’이다. 그녀가 ‘바위와의 긴 포옹’을 하는 것은 ‘다만 반하거나 반한 척하는 사건들의 연속’ 때문이다. 남녀의 만남은 ‘척’하는 ‘사건’에 불과할 뿐이라는 인식. 그래서 그녀는 바위 속으로라도 들어갈 모양으로 바위와 포옹을 하는 것이다.
왜냐구? 이때 김이듬의 시적 자아를 욕망했던 시선들은 그녀를 비웃 듯 질문한다. ‘거기 부르농빌의 페니스라도 있어?’ 어쩌면 한때 그녀가 동경했을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페니스에 대해. 그러나 그녀는 그의 질문에 응수하지 않은 채 ‘다시 바윗돌을 껴안는다’.
5:5의 비율에 대해 정당한 거래조차 한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5의 비율로 자아를 구획하는 세계에 대해 복수와 증오조차 정당화될 수 없다니. 김언희의 시가 자아를 위협하는 파시즘적인 세계에 대한 전면 부정이라면, 김이듬의 시는 전혀 다른 페니스를 욕망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페니스 전통을 부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비단 여성시에서만 발현되지 않는다. 맹문재의 시 「몸밖의 몸」은 이러한 상황을 드러낸다.
몸 밖에서 몸이었던 것들의 더운 모습,
한 때는 힘이었거나 노동이었거나 성욕이었던
냄새 나는 저것들을 위해
몸은 성전이었다
노동과 성욕으로 성전이 낡아갔다
성전의 남루한 모습을 몸 밖의 몸이 보고 있다
무기력한 괄약근들은 곳곳에 구멍을
열어두는 것으로 수치를 대신하고 싶었던 것이다
구멍은 구원이었을까
통제 되지 않는 배설의 쾌감이 낡은 성전을 감싼다
몸 안의 체온 위로 몸 밖의 체온이 흘러내린다
마치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욕망을 더듬는
자위 같다 이 뜨뜻한 낭패를 몸 밖의 몸이 먼저 느낀다
몸이었던, 몸이어서 홀로 쓸쓸했던 기억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대지에 스민다
몸 안의 몸에서 몸 밖의 몸으로
나는 느린 발걸음을 옮긴다
-맹문재, 「몸 밖의 몸」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한때 ‘노동’과 ‘성욕’으로서 ‘성전’과 같았던 몸의 조감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오래된 몸의 건축물은 ‘성전의 남루한 모습’처럼 지금은 ‘구멍을 열어두는 것으로 수치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시적 자아는 ‘성전’처럼 견고했던 몸의 기억 속에서 ‘낭패’를 본 사람처럼 ‘몸’을 껴안는다. 그가 ‘몸 안의 몸에서 몸 밖의 몸’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수치’와 ‘낭패’에도 불구하고 몸을 껴안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노동’의 미래를 약속했던 몸의 역사는 ‘구멍’처럼 허점 투성이였다. 그것은 어쩌면 이데올로기적인 강요, 또 하나의 강압적인 페니스의 문화를 연상시킨다. 그는 이제 ‘수치’를 껴안으며 ‘몸 안의 몸’에서 ‘몸 밖의 몸’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주를 통해 그가 여전히 꿈꾸는 것은 건강한 몸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노동과 성욕의 주체로서의 몸에서 그의 몸은 소외의 몸이었으나 이제 그의 몸은 소통의 몸을 지향할 것이다. 소외에서 소통으로 나아가는 동안 ‘무기력한 괄약근’을 버리고 기꺼이 ‘뜨뜻한 낭패’를 향해 자신을 열어둘 것이다. 타자를 소외시키는 남성 중심의 페니스 전통을 부정하고 기꺼이 낭패를 감수하는 몸을 지향할 것이다. 맹문재의 시에서 노동시의 새로운 미래 가능성을 보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3. 낭만적 자화상의 폐기와 미러볼 거울
자화상의 역사를 살펴볼 때, 자화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프로이드나 니체처럼 경제학 원리를 들어 이를 이해한다면 나는 자아를 발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신을 이해하는 데 걸렸던 시간과 비용만큼 소비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주관적인 신을 발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키에르케고르나 물질적인 것에서 영혼을 발견하려던 카잔차키스처럼, 자아를 발명하고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 발전소를 짓는다 해도 자아에 소요되는 에너지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영혼이나 계몽에 대해 말하는 것은 베트남 쌀국수 집에 앉아 국물 요리에 잠긴 질긴 쇠고기를 음미하는 일보다 확실히 지루해졌다. 유형진의 시 「낭만사회와 그 적들 1」에서 고답적인 ‘설리반 선생’에 대한 시적 자아의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설리반 선생, 그것은 버려졌고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놀 땐 아무도 미워하지 마세요. 살아가는 일은 역시 싫은 사람들 투성인 감옥이라고 여우에겐 말해봤자 소용없어요. 그들도 한 패거리예요 설리반 선생. 그건 누구나 그래요 낭만을 지리멸렬한 언어로 표현할 때 흔히 빠지는 실수죠. 그때 연미복 차림의 제비들은 지나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할 만큼 했어요. 봄 따윈 과거분사라고 모두에게 실토했죠. 예, 그래요. 낭만에 빠질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일뿐이라구요. 이 사회에선 이제 버려졌고 던져졌고 가망없이 쓰러졌다구요. 그런 생각은 누구나 들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거기 수선화 꽂혀 있는 양동이 좀 갖다주시겠어요? 예, 그만 그만,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러니 이제 그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지껄이지 말아주세요. 아셨죠? 설리반 선생?
-유형진 「낭만사회와 그 적들․1-수선화 화원의 설리반 선생」
이 시의 시적 자아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설리반 선생의 계몽적 훈육법을 부정한다. 설리반 선생에게 배운 훈육법대로 단호하게 그를 가르치는 것이다. ‘당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지껄이지 말아주세요. 아셨죠? 설리반 선생?’ 가르치는 자의 위치 이동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소탕되거나 낭만사회가 붕괴되지도 않는다. 선생의 언술을 모방함으로써 계몽 언어의 지루함을 되풀이할 뿐이다.
게다가 낭만적 계몽에 대한 부정이라니, 너무 오래된 주제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새로움이라 부르며 2007년 봄에도 결연하게 낭만적 계몽과 한판 전투를 치루는 중이다. 새로움에 대한 지리멸렬한 싸움 중.
세계에 대한 의미 없음. 낭만적 자화상의 기능 폐기. 모방에 대한 천재적 유희. 그런데 이러한 조합의 파편들 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인간의 연대기적인 환상과 낭만적 자화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복제하기에 이른다. 이은림의 시 「자궁, 자화상 그리고……」는 이러한 상황을 드러낸다.
자궁은 칸트보다 위대하다*
나는 자궁이라 불리는 위대한 집에 산다
아마 나는 7월생이 되리라
나는 나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자궁 속에 드디어 나를 그려 넣었다
나는 천천히 완성되는 중이다
칸트가 죽은 뒤에도 우후죽순,
자궁들은 거짓말처럼 부풀어가고
거짓말처럼 부푸는 자궁 속에는
거짓말처럼 자라는 내가 있다
여름이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두 발을 쳐들고 돌아다니던 자궁을 벗어나
나는 나를 엄마, 라고 부르기 위해
애쓸 것이다 나를 빼닮은 나에게
사육되는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자궁은 칸트보다 위대하다
위대한 그곳에 나는 나를 그려넣었다
나는 악착같이 나를 닮아가는 중이다.
*영화 <헤드윅> 중에서
-이은림, 「자궁, 자화상, 그리고……」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더 이상 남녀 간의 성적 교환을 욕망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쾌락의 자리를 점유했던 성적 교환은 이 시에서 쓸모없이 폐기된다. ‘나는 나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진술하는 것은 남녀 간의 성적 욕망을 폐기하고, 스스로를 복제해 창조해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전언 앞에서 시적 자아의 ‘자궁은 칸트보다 위대하다’. 이제 이 전언 속에서 ‘악착같이’ 시적 자아는 자신을 닮아갈 것이다.
이러한 낭만적 자화상의 폐기 속에서 이승원의 시 「카고 컬트와 달콤한 수채」는 민족과 역사라는 지평 위에서 백인사회를 동경하는 저능아와 같은 사회에 대해 전면 부정한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팔아서 주택을 사들였어
깃털이 달린 옷을 입고 천박하게 하늘을 날았지
신분을 바꿔치기하고
명복을 만끽하려고
백인 흉내를 내고 여자 흉내를 내고
그러다가 백인 여자 흉내를 내고
아 지겨운 낭만주의의 저능
-이승원, 「카고 컬트와 달콤한 수채」
이 시에서 ‘카고 컬트’는 백인 사회와의 문명 접촉에 의해 전통 문화의 붕괴에 직면한 사람들이 백인 사회의 종교적 신화를 차용해 민족적 통일을 염원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만 나는 이 시에서 너덜너덜해진 ‘낭만주의’란 어휘를 줍는다. 코 푼 휴지 같고 폐기된 복사물 같은 이것은 무엇인가?
‘낭만주의’는 유형진 시의 (낭만적) 계몽과 이은림 시에서 ‘칸트’라고 하는 계몽 환상에 의해 유포된 (낭만적) 전체주의, 그리고 이승원의 시처럼 본질이 왜곡된 (낭만적) 모방 욕망 등으로 다양하게 인식된다. 그것은 유행가 가사에서 계몽적 영웅, 혹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젊은 시의 도처에서 낭만적 자화상을 폐기하려는 것은 이 때문일까. 황병승의 시 「미러볼」은 이러한 성격을 드러낸다.
미러볼을 돌리고 어두운 방에 누워
작은 거울 조각이 반사하는 빛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어야지 밤새도록
죽은 자들이 흥얼거리도록
내버려두어야지
나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다네
다만 내가 남긴 먼지와 먼지들
당신들에게 맡긴다 랄 라 라
두더지처럼 꿈틀거리며
떠다니는 먼지들을 바라봐야지
미러볼 미러볼
전쟁이 터져도 미러볼을 사자
옆집에 미사일이 떨어져도 미러볼
전염병이 돌아도 미러볼
엄마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미러볼
미러볼이 뭐길래?! 무시하고, 미러볼을 사자
이기적인 개새끼!!, 미러볼 미러볼이다.
-황병승, 「미러볼」 중에서
이 시에서 시적자아는 다자이처럼 ‘미러볼을 사자’고 말한다. 그리고 ‘미러볼’에 대한 그의 욕망은 ‘전쟁이 터져도’, ‘옆집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전염병이 돌고’, ‘엄마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계속된다.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미러볼’을 욕망하는 그를 누군가는 ‘이기적인 개새끼’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자아는 다자이처럼 ‘어떤 조합이나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을 독촉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가정을 갖지도 보험에 들지도 않고 기부금을 낸 적도 자원봉사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사랑을 믿지 않으며 섹스를 좋아하지만 섹스가 끝난 후에는 남자든 여자든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고 친구 혹은 우정이란 말처럼 불순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인물에 대해 ‘이기적인 개새끼’를 운운하는 것이다. 개체성을 지향하는 그에게 타자지향적인 사회는 ‘무시’라는 어휘처럼 관심 밖인 데도 말이다. 그러나 타자지향적인 사회에서 이러한 인물은 요주의 인물, 그러니까 위험인물일 수밖에 없다.
황병승의 시적 자아가 ‘미러볼’을 욕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하는 사회의 끈질긴 구애와 감시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물방울무늬 거울인 ‘미러볼’을 욕망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위조한 천재시인 이상처럼 ‘미러볼’에 의지해 자아를 복제함으로써 감시와 검열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황병승의 시가 폐기하고 싶어하는 낭만적 자화상은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지시한다. 그것은 영화 <졸업>에 나오는 엘리스 부인의 형상처럼 자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형상이거나 아마도 변태성욕을 가진 이상한 애인 혹은 마초지향의 성인 남자로 등장할지 모른다. 그의 시에서 ‘죽은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끊임없이 세계와의 불협화음적인 차이를 생성하려는 욕망 속에서 우리의 젊은 시는 이천년 대 새로운 언어와 우주를 꿈꾸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이미 1930년대 이상 시의 전통-차이의 언어- 속에서 예고편과 상영작이 쏟아진 이래 전연 새롭지 아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낭만적 자화상에 대한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왜인가? 타자지향적인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왔던 타자성에 대한 발현과 시도라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잠깐 옆구리로 세면, 어린 시절 뱀, 베라가 등장하는 티브이 만화 영화 <요괴인간>을 보며 인간은 아니지만 요괴인 뱀, 베라가 승리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독수리 오형제도 멋있었지만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고 잠깐 나왔다가 우스꽝스럽게 퇴장하는 악당들을 보면 우울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나는 그대가 그토록 혐오하는 계몽적인 ‘설리반 선생’, 낭만적 자화상에 대하여 악당들처럼 우울해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악령'을 통해 이런 말을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늑대가 나타났으며, 세계엔 지금 늑대의 공포를 제거해줄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양치기 소년들의 거짓말에 대해. 그리고 거짓말보다 더 무서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허무와 공포라고 하는 ‘악령’의 존재를. ‘길 위에서 때를 쓰고 울다간 순경이 나타나 잡아간다’는 어린 시절 엄마의 협박처럼 공포의 도덕성에 의해 흠씬 매를 맞고 자라난 새나라의 어린이, 계몽의 아이들은 지금 낭만적 자화상의 폐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피해자는 너무 많은데, 가해자가 하나도 없거나 아예 가해자라고 자신을 지목하지 않는 세상에서 악령은 도처에 출몰한다. 그러나 영화 <엑소시스트>의 연약한 신부처럼 악령 속에서 악령을 가두는 힘이야말로 인간의 순진하고 연약한 힘이 아니던가,
4. 공포에 접근하는 근사치의 언어와 언어의 공포
이장욱의 시 「전속력」은 적어도 일군의 젊은 시의 징후처럼 공포를 내면화하지 않는다. 그는 최소한 근사치에서 최대한의 공포를 재현함으로써 내면화되는 공포의 위협으로부터 공포를 정지시키는 유연한 근사치의 언어를 구사한다.
타조처럼 튼튼한 다리로
공포를 표현하자.
두 다리가 최대한 엇갈리는 순간
누구나 전속력에 도달한다는 것.
모든 죽음이 우연으로만 이루어지는
아주 단순한 세계를 상상할 때가 있어요.
당신은 그 세계에
참을 수 없는 호감을 느끼겠지만.
타조의 다리들은 지금
서서히 예감하는 중.
예감이란 연기와 같다가
갑자기 튀어오르는 검은 표범과 같다가
우리는 모두 요이,
땅!
드디어 타조는 화면 속을 질주하고
발자국을 마구 흘리고
모두들 있는 힘껏
무서운 웃음을 터뜨렸다.
변치않는 식욕은 두려워.
한없이 이동하는 초원 역시.
저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가위눌린 적이 있습니다.
질주하는 표범도 가위에 눌릴까요.
달리는 타조는?
우리는 전속력으로
정지했다.
-이장욱, 「전속력」
이 시의 시적 자아는 ‘타조처럼 튼튼한 다리로/공포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공포’는 ‘타조의 다리’에 의해 표현되었으나 타조를 향해 질주하는 ‘표범’ 역시 ‘공포’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여서 ‘모두들 있는 힘껏 무서운 웃음’을 터뜨린다. ‘속력’에 의해 ‘공포’가 표현되었으나 공포의 힘에 대하여 ‘무서운 웃음’을 터뜨리는 상황은 ‘우리는 전속력으로 정지했다’라고 하는 진술처럼 공포가 제로가 되는 상황을 지시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오래 전 미술사 수업에서 들었던 ‘미래파’를 떠올렸다. ‘우연’과 속도, ‘공포’를 표현하였으나 공포가 정지하는 순간의 속도감이라니. 0.0000000000000000000001의 근사치의 언어를 통해 그는 차이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훌쩍이지도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얻어 채이지도 않으면서 그의 시는 공포에 근접하는 근사치의 언어를 통해 내면화되는 공포의 위협으로부터 공포를 재빨리 정지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 놀라운 민첩성이 단 한 번의 포즈에 의해 연출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적어도 그는 아주 여러 번 ‘거리를 걸어가다가’도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내면화되는 공포를 체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의 시 옆에 이장욱의 시를 놓아둔다. 육체의 도식 속에 각인된 공포의 위협으로부터 끝끝내 이상은 절망하였으나 이장욱의 시는 내면화되는 공포의 위협으로부터 속도를 발견하고 근사치의 언어를 통해 차이의 언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승훈의 시가 환기하는 언어의 공포와도 다르다. 존재의 불안 원인을 언어의 공포에서 발견하는 이승훈의 시는 언어부정을 통해서 자아에서 비롯된 존재의 불안 원인을 해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생략)
모기가
나를 무는 밤 침대 아래 모기향을
피우고 쫒아도 달려드는 모기
미친 모기 저 모자도 미친 모자다
벽에 걸린 저 모자도 나를 모르고
달려드네 저 모자는 구두가 아니지만
아마 구두라고 생각할거야 그건
너희들 맘대로야 그러나 미친 모자는
행복할거야 누구나 미칠 때 언어를
잊을 때 (생략)
언어가
없다면 욕망도 없겠지 소외도 없고
얼음도 없겠지 아마 병원도 없겠지
나는 병원에서 시를 쓰고 하얀 병원
언어 병원 만두는 만족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망각에 도달하려고
언어를 잊으려고 언어 너머 언어
너머 있는 너에게 도달하려고 미친
모자가 되려고 나를 모르는 모자
나를 무는 모기가 되려고 모두 버리려고
시를 쓰네 언어를 잊으려고
-이승훈, 「언어를 잊으려고」
이 시에서 언어가 공포의 원인이므로 공포의 원인인 언어를 부정함으로써 시적 자아는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고자 한다. ‘망각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공포 속에서 망각에 도달하는 길을 발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전면 부정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전면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망각에 도달’하기 위해 자아 뿐 아니라 ‘모두’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자아 포기의 수순 뒤에 ‘언어 너머’에 도달하려는 그의 욕망은 언어라고 하는 육체의 형상 없이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나, 아마도 자아와 타자를 대신하는 ‘멸치’와 ‘모기’의 기표로 ‘미역 다시마’를 만나는 일. 지시적 언어에서 환유적 언어, 나아가 소멸을 지향하는 언어로 이동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자아가 없는 사람은 자아에 대한 환상이나 공포를 제거할 수 없다. 그런데 죽일 수 없는 자아의 공포를 위해 소멸의 언어를 지향한다라니.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더 있다. 색즉시공 속에서 언어는 색인가 공인가. 본디 없는 것이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였으니 언어야말로 술도 아니면서 흠뻑 취하는 취기에 지나지 아니한가.
조하혜
1972년 서울 출생. 1994년《현대시사상》으로 시 등단.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와 울지 말아요, 비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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