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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특집/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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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과 철학
박성수|영화평론가
1.
예술작품에서 우리가 일정한 주제와 문제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일정한 관점을 담고 있다면 예술작품이 내포하는 그러한 관점은 특정한 방식으로 조명될 수 있다. 한정된 시기에 생산된 예술작품들이 그 양식적인 특징에서 공통성을 보여준다면 그러한 양식적 특징은 역시 세상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방식의 선택을 함축하는 한에서 역시 특정한 시점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결국 예술작품은 비록 시기적으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것이 생산된 토양을 지배하던 세계해석과 상동성을 가질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예술과 형이상학의 관계라는 문제를 고딕건축에 대한 논의와 관련시켜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 이는 보다 전문적인 건축적인 논의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단지 예술이 형이상학 또는 세계에 대한 체계적 해석과 어떤 상동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개략적인 얼개를 그려보는 것에 국한된다.
중세 고딕 건축의 전성기는 기독교 사상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새로운 시민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정신의 영역에서, 그리고 조형예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계급의 삶과 태도를 반영하는 변화가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 이 시대의 조형예술은 거의 어느 형식을 보아도 이러한 시민계급의 생활감정의 입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들 조형예술 작품에는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서양정신의 일대 전환, 즉 신의 나라로부터 자연계로, 구극적인 것으로부터 바로 주변적인 것으로, 엄청난 종말론적 신비로부터 인간세계의 좀더 범상한 문제로의 복귀가 대표적인 문학작품에보다 일층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극단적인 보편실재론으로부터 그 중간적인 단계를 거쳐 결국 유명론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인 사조로서 고딕이라고 불리는 시기는 철학적 논의에서도 그 이후 근대의 철학이 다루게 될 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중세의 최성기인 고딕의 시기는 여전히 신학적 세계상과 종교감정이 지배적이었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래서 시민계급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지배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시민계급에 의한 변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신학적 질서는 일정한 안정적 갈등상태를 유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을 하우저는 “고딕의 이원성”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나타난 변화와 고딕 성당의 특징을 연관시키는 것은 그 건축물이 형이상학적인 질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이미 일정한 자명성을 얻게 된다.
2.
파노프스키는 고딕과 중세철학, 즉 스콜라철학 사이의 상동관계를 양자의 과정적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내고 있다. 즉 고딕 건축의 감각적인 형태와 내용, 그리고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적 교리 그 자체에서 상동성을 찾는 것보다는 당시의 건축과 형이상학에서 발견되는 절차의 논리적 특성에서 그것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히 고딕의 최전성기와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를 조응시키고 있다. 그것은 12세기 중반 이후부터 1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기다. 파노프스키는 이 시기의 고딕예술, 특히 고딕성당 그리고 스콜라철학은 단순한 시기상의 일치나 일종의 평행적인 상동성을 넘어서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
“고딕 예술과 스콜라철학 사이의 연관성은 단순한 ‘평행현상’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것이고 또 자문역할을 한 학자들에 의해 화가, 조각가, 건축가에게 행사된 개별적 ... ‘영향관계’ 보다 일반적인 것(이다). 평행현상을 넘어서는 연관성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인과관계이며, 개별적 영향관계와는 대조적으로 이 인과관계는 직접적 충격보다는 확산을 통해 발생한 것이다.”
이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일정한 정신적 관습 또는 “행위를 통제하는 원리들”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상동성으로서, 철학의 영역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이러한 습관 또는 원리들이 지배적인 것으로 확산됨으로써 그 두 영역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이 성립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원리들은 건축 또는 사상을 전개시키고 다루는 절차적 방식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고 파노프스키는 강조한다.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 그 저서들의 편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총체성(가능한 모든 경우들을 충분하게 열거하는 것), 둘째, 부분들 또는 부분들의 부분들을 그 상동적인 체계에 따라 배치하는 것(가능한 경우들을 충분하게 절합시키는 일), 셋째, 명확한 구별과 연역적 설득력. 이러한 구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명석함 자체다. 그것은 명석하게 해명하는 것을 기본적인 지향점으로 갖는 일종의 도식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당시 모든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음악이 정확하고 체계적인 시간의 배분을 통해 절합되었던 것 처럼, …… 시각예술은 공간의 정확하고 체계적인 배분을 통해서 절합되었다. 그래서 재현예술에서는 ‘명석함 그 자체를 위한’ 내러티브의 맥락들의 명석화가 이루어졌고, 건축에서는 ‘명석함 그 자체를 위한’ 기능적 맥락들의 명석화가 이루어졌다.”
파노프스키는 이 관련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딕 성당과 연관시켜 진술한다. 그에 따르면 먼저 고딕 건축은 총체성을 지향한다. 그것은 많은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시키고 체계화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성당은 모든 기독교적 지식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고 시도하면서 가능한 모든 요소들을 각각의 적절한 장소에 위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체계의 두 번째 구성적 특징인 상동적인 것의 절합은, 구조적으로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성당의 특징이다. 한 가지 예로 고딕성당의 첨두아치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형태의 아치는 세포처럼 궁극적으로 모든 천장을 같은 형태로 구축하고 있는데 이는 부분들의 상동성, 그리고 부분의 부분들의 상동성이, 스콜라 철학에서 논리적인 질서에 따라 유사한 형태로 구성되는 두 번째 구성방식과 거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거시적인 구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장식적인 세부에서조차 이러한 상동성의 절합은 눈에 띤다.
세 번째 구성원리인 명확한 구별과 그런 구별되는 것들의 논증가능성은 고딕 성당에서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고전적인 고딕 전성기의 표준에 따르면 개별적 요소들은 그것들이 설령 나뉠 수 없는 전체를 이루고 있을 때에도, 서로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음으로써 자신들의 동일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기둥은 벽 또는 다발기둥의 중심과 구별되어야 하고 늑재는 그 주변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 모든 수직적 구성요소들은 그와 이어지는 아치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명확한 구별을 조건으로 하는 부분들은 다시 항상 모여서 전체를 구성해내고 하나의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상호 연결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파노프스키는 스콜라 철학에서의 앞서 말한 세 번째 구성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건축과 철학의 상호연관성은 단순히 형식적 구성원리 또는 절차적 구조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하우저는 고딕 건축의 이원성에 대해서 말했다. 즉 고딕은 한편으로는 시민계급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는 영역에서의 자연의 재발견이자 합리성의 구현이기도 하고 또 감각과 상상에 대한 적극적 인정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중세의 전성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서 내면의 신앙, 외부세계를 초월하는 내적 진리의 자리에 대한 추구, 신비적인 구원에의 갈망 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딕 건축을 이러한 갈등 또는 분열의 이원성에 비추어서 설명하는 것이 헤겔의 견해이다.
3.
헤겔은 고대 그리스 예술이 물러난 이후의 시기부터 헤겔 자신의 시대까지를 예술사에서 낭만주의로 규정하고 있고, 이 낭만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형태를 고딕 성당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딕 성당은 이념의 나타남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분열적 형태이기도 하다. 이제 헤겔이 철학적 미학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고딕 성당의 아름다움을 살펴 보기로 하자.
헤겔은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고딕예술과 스콜라 철학과의 연관성을 보다 세계관에 바탕을 둔, 즉, 형이상학적인 또는 신학적인 이념이 감성적 형태로 구현된 것으로서의 고딕 건축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헤겔은 변증법적 매개라는 틀을 사용해서 철학과 예술의 관련성을 보다 긴밀한 것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고딕 건축에 대한 헤겔의 논의 전체를 다룬다는 것은 이글에서는 불가능 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파노프스키의 세 가지 구성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헤겔의 진술만을 다뤄 보기로 한다. 그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딕 건축에 관한 논의로서 그 특징을 진술하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찾아 본 것이다. 이때 파노프스키가 일정한 정신의 관습의 형성이라는 인과관계를 통해 해명을 시도했다면 헤겔은 그런 관련을 낭만적 건축에서 발견되는 내면과 외면의 분리, 그리고 내면 자체 안에서, 내면과 외면의 화해를 시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통해서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다.
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성적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념은 그것이 자신의 대립물 또는 자신의 타자를 경유하여 그 단계를 넘어설 때에야 진정한 이념으로 존재할 수 있다. 예술이란 정신 또는 이념이 스스로를 구현해 가는 역사적 과정에서의 필수적인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이나 이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그것이 자기자신 또는 즉자적인 것에 머물 때에는 비진리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타자를 통해서 즉 자기해체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신에 도달할 수 있으면 즉자대자적인 것으로 전화된다.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인 과정 때문에 예술은 중요한 고찰지점으로 간주된다.
“어떤 그려진 대상은 그 겉모습에 따라서만 그 대상일 뿐이며 따라서 가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경험적 세계의 대상 보다 덜 참되거나 덜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그 대상에 최초로 진리와 현실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에야 비로소 감각세계의 즉자적 사물이 정신에 대해 주어진 어떤 사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어진 사물은 예술적인 묘사를 통해서 객관세계를 뚫고 들어가, 개별적인 객체의 일면성과 우연성을 지양하고 대상과 그 개념을 일치시키는 일정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측면이다. 헤겔이 예술을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논의의 주요한 대상으로 삼는 까닭은 존재의 이와 같은 운동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낭만주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 또는 이념이 자신의 감성적 형태를 획득했던 고전주의 이후에 그러한 감성적 구현 자체를 벗어나서 즉 감성과의 화해를 넘어서서 다시 균열의 상태로 들어간 이후의 예술이다. 그 예술은 이제 분열의 상태에서 이념과 감성, 또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화해와 종합을 객관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부에서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객체와 주체 사이의 화해를 주체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 그 내부에 머무는 것이다. 내면적인 정서와 감정 안에서 주체, 객체의 통일을 찾는 것이고 그것이 객관적 규정을 벗어나는 한에서 그래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 머무는 한에서 그것은 내면으로 후퇴한 것이지만 동시에 무한히 자유로운 것이기도 하다. 헤겔은 낭만주의적인 예술의 이러한 특성을 고딕 건축에서 찾아낸다.
“…… 고딕식 건축물의 원래 특징은 어떤 규정된 목적을 지니고 있든 간에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자체에 완성된 건축물로서 스스로 서게 되는 데 있다. 그 건축물은 스스로 견고하게 영구적으로 서 있다. …… 고딕식 건축물은 외부로는 자유로이 솟아 오르면서 첨탑을 이루므로 비록 어떤 목적에 맞게 지어졌더라도 이는 곧 사라지고 건물 자체는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모습을 띤다. …… 그 건물이 숭고한 고요한 모습에서 보여주는 웅장함은 단순히 목적에 이용된다는 것을 넘어서 다시금 건물 자체가 지닌 무한성으로 나아간다.”
고딕성당의 독자성은 실제적인 모든 목적을 떠난 독자성으로서 이는 세속적 현실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그러한 것에 대해 닫혀진 내면성을 함축하는 것이며 여기서 고딕 건축에서 내부공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고딕 성당의 외부는 내부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한정짓는다. 그래서 고딕 성당의 외벽은 그것이 외부세계와의 절대적 단절을 함축하는 한편으로 내부공간을 한정짓는다는 것으로서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 외부에서 바라보이는 성당의 치솟는 형태는 내부공간에서는 더욱 더 내면화되어 “지상으로부터 영원하고 피안적이고 숭고한 것으로 고양되고자 하는 심정”을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잉 버트리스가 외부에서 분명 건축의 하중을 받쳐주는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위를 향한 상승의 운동을 주도하듯이, 내부에서도 역시 다발기둥들은 그것의 “위로 솟구치는 모양은 바로 지탱하는 것이 마치 자유로이 위로 솟은 것 처럼 모습을 바꿔 주”게 된다. 헤겔이 말하는 주체와 객체, 내부와 외부의 화해는 이러한 내부에서, 그리고 그러한 내부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외부는 내부를 덮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외부를 내부의 발견을 위한 매체로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고딕 성당의 위대한 역설이자 교묘한 특수성이다.
파노프스키가 상동성의 절합이라고 부른 것이 헤겔에서는 구조적 형식성을 넘어서서 다른 특징들과 결부되어 다시 낭만적 내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첨두 아치 형태는 다시 창문과 문틀에서도 반복되는데, 이러한 반복이라는 성격 말고도 그것의 크기라는 측면을 통해서 무한성과의 합일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상동적 구조를 가진 요소의 하나인 창문은 “그 크기가 웅장하여 시선을 그 아래 부분에 머물렀다가 곧장 위로 향할 수 없을 정도이며, 아치형도 위쪽으로 오므라든다. 이는 곧 보는 사람에게 위로 솟구쳐 오르는 듯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전달해야 한다.” 또한 스테인드 글래스가 만들어내는 빛 역시 마찬가지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단순한 빛의 투과가 아니라, 외부와 내부의 미세한 연결이라는 측면보다는, 일정한 밀도와 무거움을 지닌 채 스스로 독자적인 반투명한 빛이다. 그러한 어슴푸레함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외부와 내부의 변증법적인 절합이라는 측면 말고도, 파노프스키가 말하는 명석하게 구분되는 것들의 상호연역적 성격에 관련되는 측면도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바로 여기에 비로소 고도로 세분화되고 흩어지는 다양성에 완벽한 여지가 주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물론 여기에서 단순한 특수함들과 우연적인 개별성들 때문에 전체성이 부서져 흩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여기서 예술의 위대함은 나뉘고 조각난 것들을 다시금 저 단순성으로 환원시켜 준다. ……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이 폭넓고 현란한 개별성들을 가장 안전한 단일성과 명확한 대자성으로 총괄하는 일이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성당 전체의 총체성과 그와 대조되는 성당 내부 벽들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하고 개별적인 장식성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별되는 세부들을 이루는 것인데, 이러한 측면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고딕 건축이 가지고 있는,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낭만적 성격 때문이다. 내용과 형식의 고전적인 통일의 경우에 오히려 불가능했던 것이 그 분열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인데, 그것은 이념이 자신의 질료 또는 재료에 대해 전적으로 이질적인 태도를 보일 때, 다시 말해서 정신을 구현하는 물질이 정신 그 자체와 분리되어 전적인 무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바로 고딕에서와 같은 세부적인 장식성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즉 정신이 물질에 대해 보여주는 철저한 무관심 때문에 감성적 물질에 대한 극단적인 세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부적인 장식성의 그 자체적인 명확한 구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것은 물질로서 그리고 재료로서 정신 또는 영혼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이 말하고 있듯이, 낭만주의적 예술과 기독교적 신앙이 공통으로 같은 성격 때문에 그것은 내면과 외면의 진정한 화해나 통일이 아니라, 내면 속에서의, 거기에 국한된 통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고딕의 매력은 바로 이와 같은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세부적 개별성들과 무한의 상승을 통한 신과의 합일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 계기가 공존하고, 그 계기들은 정신의 우위 안에서, 정신의 내면 안에서 통일된다.
“사실상 성당은 개체와 무한이 함께 긍정을 이루는 장소다. 개체는 무한을 돋보이게 만든다. 성당은 또한 세부의 복수성이 …… 총체화하는 통일성으로 이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세부적인 현란함은 정신의 전적인 무관심을 매개로 해서 자신의 개체성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시 내면적인 총체화를 통해서 성당 전체로 합일된다. 즉 고딕 건축 즉 전형적인 낭만적 건축에서 “감각적인 질료적인 공간성을 지닌 덩어리에서 가능한 한 가장 내적인 요소가 보인다. 그러한 질료로 표현할 때에 할 일은 바로 그 질료성, 그 덩어리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처에서 구멍을 내고 잘게 부숨으로써 그것에서 그 질료가 가진 직접적인 응집력과 독자성을 외양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고딕의 이원성은 바로 기독교 신앙에서 영혼과 육체의 분열 또는 영혼 자체의 분열을 그대로 함축하는 것이다.
박성수
저서 영화, 이미지, 이론, 들뢰즈와 영화, 디지털 영화의 미학 등. 역서 정신분석운동,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뇌는 스크린이다 외. 한국해양대학교 유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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