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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특집/김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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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형이상학, 분열을 통한 사유
김무규|미디어학자
1.
영화에 관한 이론적 고찰은 참으로 다양하다. 비평도 그러한 고찰에 포함시킨다면 그 다양성은 간단히 규정될 수 없을 만큼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1) 첫째는 ‘어떻게 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며 따라서 그 가치는 무시될 수 없다.
2) 둘째 ‘어떠한 영화를 더 우수하게 평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평가는 항상 특정한 관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논의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3) 셋째는 반드시 그것이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어떤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고찰이나 주장을 위하여 영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경우이다. 사실 영화는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으로 영화가 많은 설명들을 위한 좋은 예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많은 대학의 강사들이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거나 내용을 이야기해주면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영화의 예로 복잡한, 심지어는 철학적인 설명도 손쉽게 행하는 서적들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서 주의 할 점은 그것이 꼭 영화이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이나 사건을 기록해둔 어떠한 형식의 매체이나 예술(매체나 예술과 같은 개념은 정의하기 어려운 데 이 문제는 우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문학, 음악, 회화, 연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본 글의 논지에는 커다란 문제는 없을 것이다)이라면 그렇게 활용되고 또 논의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구하고 필자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4) 네 번째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영화’에 대하여 탐구하는 경우이다. ‘영화는 다른 매체나 예술과는 다른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영화가 학문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제기이다. 즉 영화가 재현한 내용이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영화가 어떻게 미학적인 관점에서 혹은 재현방식의 관점에서 탐구의 대상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말한다.
필자는 네 가지의 관점 모두 어떻게든 형이상학적인 문제, 혹은 철학적인 논제와 연관되어 있지만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예술형식이나 매체와는 다른 영화에 고유한 의미작용, 기호작용, 재현방식 등의 미학적 차원이 흥미로운 철학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고찰에서 우리는 최근에 탄생한 예술이 지니는 가치를 실감하고 또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의 소설은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높이 평가받았으며 또한 소설의 독특한 재현방식과 그것에 연유한 사유방식이 새로운 사상과 사조의 성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영화의 미학적 차원이 다른 예술이나 매체의 그것과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 담긴 내용만을 영화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내용만 인용하는 것은 게으른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소설이 해냈던 것을 영화도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살려내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는 다른 어떤 것과 공유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은 영화를 철학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고, 나아가서 철학의 특수한 사유방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성립시킨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첫째로 영화적 독자적 표현방식(대체로 영화미학이라고 말하는)에 대한 설명을 행해야 하며 둘째로 어떠한 철학적 관점이 그러한 미학과 연관되어 있는지, 혹은 그러한 미학을 요구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검토하기 위하여 송일곤의 영화 <거미숲>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어려운 영화를 다루어야 한다. 네 번째 문제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일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 <거미숲>의 첫 장면, 끔찍하게 죽은 두 시신을 우연히 목격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동시에 관객은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후의 영화는 한참을 진행하여도 죽음의 원인을 속 시원히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의 흩어진 관심을 영화에 집중시키기 위해 사건해결의 단서들을 재빠르게 보여주지만 그래도 결국 영화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가 하나의 문맥으로 통합될 수 없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완전히 다른 성격의 두 영화를 힘들게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는 텍스트라는 동일한 장소에 이질적인 것들을 품고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미학적 특성은 어떠한 철학적 논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영화를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영화를 보고 이러한 어려움을 이미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 이러한 두 부분은 영화의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잘 조화되어 있고 그러한 조화의 규칙만 잘 이해하면(사실 관객들은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문제가 없다. 그러나 <거미숲>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우선 그 두 부분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해보겠다.
3.
영화는 특정한 대상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대상의 시간적 변화도 재현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사건의 시간진행을 표현하는 서사가 될 수 있다. 사진 한 장이나 그림 한 폭과 달리 영화는 발생된 많은 사건을 시간적으로 연결시키고 인과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처럼 <거미숲>에서 발생된 사건들이 시간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면 그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미숲>은,
1) 결말을 먼저 보여준다. 혹은 하나의 시퀀스에서도 시퀀스의 마지막 쇼트가 시퀀스의 맨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영화를 주의 깊게 본다면 첫 번째 시퀀스는 이미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시퀀스의 맨 마지막 쇼트, 즉 강민이 습격을 당하여 숲에서 누워있는 쇼트가 맨 앞에도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후에도 시간순서대로 사건들이 진행되다가 갑작스럽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플래시백(flashback)은 <거미숲>에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도 많이 등장한다.
3) 이미 발생되었던 사건이 다른 각도에서, 혹은 이미 발생된 사건이 왜곡된 모습으로 다시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한 번 발생된 거미숲 살인사건은 모두 세 번 영화에 나타난다. 하지만 모두 다른 버전이다.
4) 물론 시간적인 위치설정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꿈, 환각, 기시감과 같은 장면들도 더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역행되는 것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거미숲>에서는 시간순서대로 사건이 배열되는 안정된 서사가 존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안정된 진행을 급격히 역행하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만약에 영화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시간순서대로 배열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도록 하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그것과는 무관하여 사건의 시간적 배열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면 상영관에서 개봉할 수 없었겠지만). 바꾸어 말하면 시간의 순행과 역행이, 다시 말해서 서사적 진행과 그것의 반대되는 움직임이 영화에 동시에 존재한다.
물론 시간적 순행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평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영화가 반드시 모든 것을 시간순서대로 배열할 필요는 없다. 영화의 사건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 혹은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간적 흐름에 따른 서사는 종종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굿먼(Goodman, 1980)에 의하면 서사에서 결말을 먼저 보여주는 것은 서사를 연결되지 않는 배열로 진행되도록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사를 흥미롭게 만들고 때때로 서스펜스를 강화한다고 한다. 바르트(Barthes, 1974)는 이러한 것을 해석적 코드(hermeneutic code)라고 하였다. 예기치 않은 사건과 답변되지 않은 질문이 앞으로 독자가, 관객이 독해해 내야할 것이며 그러한 구성이 독서를 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다만 이러한 역행을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하다. 서사에 존재하는 코드는 서사를 행하는 사람과 그것을 독해하는 사람, 즉 영화제작인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약호, 즉 약속을 의미한다. 역행되어도, 혹은 서사적이지 않은 장면이 나오더라도, 서사적 연결이 느슨해지더라도 관객은 영화를 이해하게 되는 데, 이미 관객은 그러한 느슨함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약속에 의한 패턴과 그러한 패턴의 유형에 따라 영화를 장르로 구분한다(Schatz, 1981).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앞서 네 가지로 요약한 <거미숲>의 역행이 이러한 서사적 코드로도 설명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4.
서스펜스, 맥거핀, 추리, 해소, 혹은 반전 등은 히치콕(Hitchcock)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며 현대적인 ‘뒤틀린 서사’(twisted narrative) 영화에도 자주 나타난다. 그만큼 패턴화 되어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전반부에 제시하고 그것의 원인과 사건의 진실규명을 진행하는 경우이다.
<거미숲>의 경우를 살펴보자. 살해된 남녀를 목격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우연히도 유능한 형사는 그 목격자의 친구이다. 목격자는 형사에게 알고 있는 것을 진술한다. 한 사람은 사건을 보았으며,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정리해줄 것이다. 이것은 약간은 복잡한 서사를 지닌 장르영화의 진행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힘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것은 목격자의 진술이 번복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사건해결을 위한 단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잡하고 믿을 수 없는(강민은 시신을 목격한 직후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심리와 환상만을 정리하지 않은 채 제시하기 때문이다. 서술자(강민)는 서술하지 못하고 해석자(형사)는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갑자기 수사는 급진전되어 목격자와 형사는 모두 거미숲을 향해, 또한 사건의 해결을 향해 급히 이동한다. 이 부분은 교차편집으로 처리되는데, 이것 또한 문제해결을 위한 일종의 장르패턴이다. 아주 오래된 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과 최근 들어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Lamps>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화들이 이러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두 영화가 약간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건은 교차되어 나타나다가 상이한 두 공간이 하나로 모여진다. 그리고 일치됨으로 인해 사건은 해결되고 궁금증은 해소된다. 그러나 <거미숲>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갑자기 강민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게 되는 아주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유령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인물인 민수인, 황수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관객과 영화제작진 사이에 존재하는 장르영화의 게임규칙이 무너진다. 즉 장르영화에서 그러한 약호들을 파괴하는 영화로의 갑작스런 변화는 영화를 정리되지 않도록 한다.
5.
과거를 기억하는 인물과 그것을 정리해주려는 인물의 있으면(최소한 관객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반대편에 그렇게 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인물이 있다. 권위적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서술이 있으면 그러한 서술을 따르거나 보완해주지 못하는 영상이 있다. 이것은 언어와 영상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사친구를 만난 강민은 자신이 본 것을 그리고 죽은 남녀는 자신의 주변 인물임을 진술하려고 한다. 형사친구를 만난 강민은 이제 길고긴 회상을 시도하고 이제 영화는 강민이 행하는 언어적 진술을 영상으로 번역하여 보여줄 것처럼 되어있다. 많은 다른 영화에서 그렇듯이 말이다. 플래시백은 그의 과거를 파헤치고 싶은 형사나 영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객들에게 사건의 전후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플래시백은 서사역행을 보완하는 코드이다.
그러나 플래시백 이후 강민의 언어적 설명으로부터 통해 바통을 이어받은 영상들은 사실 강민의 진술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강민이 형사친구를 만난 직후에 나타나는 플래시백에서 갑작스레 죽은 부인과 꿈속에서 불가능한 만남이 나타난다. 즉,
1) 플래시백이후의 영상은 강민의 진술에 종속되어 제어되지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편다.
2) 그리고 강민의 진술을 영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기시감과 같은 부분도 있다.
3) 플래시백 내부에서 또 한 번 플래시백이 등장하여 ‘내부서사의 무한한 연결’(mise-en-abyme)과 같은 부분은 여러 차례 발견된다.
4) 혹은 플래시백 이후 나타나는 기억의 내부에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꿈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그리고 꿈은 사건해결에 아무런 단서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메타퍼로 기능하지 못한다.
플래시백은 형사의 수사에 영화사건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려는 관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 했던 기대와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플래쉬백은 시간순서의 연결보다는 언어와 영상의 분리를 표시한다. 강민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뒤를 돌아보는 행위를 하고 그 이후 시공간이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장면이 많이 존재하는 데, 이것도 좋은 예이다. 뒤를 돌아본 이후의 영상들은 대체로 연결보다는 분리를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영화의 영상은 사건을 요약하고 정리하여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려는 강민의 진술에서 독립하여, 즉 언어적 논리에 독립하여 영상적 논리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은 장르영화에서 일반적인 회상을 표시하는 약호화된 플래시백이나 메타퍼로 기능하는 꿈의 영상과 다르다. 즉 서사가 있으면 그것을 저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서사로 환원될 수 없는 영상(사진 한 장과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기시감, 문맥 없는 환각영상이나 꿈영상, 뒤를 돌아보거나 시선을 갑작스럽게 바꾸는 영상 등)이다. 이에 언어와 영상은 서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6.
손택(Sontag, 1961)은 언어와 영상이 조화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다. 그녀는 고다르(Godard)의 영화에 대한 글에서 그의 영화 <그녀의 생을 살다(Vivre Sa Vie)>는 “조각내고 해체하고, 흐트러뜨리고 분산시키는 기법”이 잘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 나타나는 영상들이 서술되는 언어와의 연관성을 파기하고 독자적으로 대상을 재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언어와 영상의 분리는 영화 곳곳에 나타난다. 카메라는 말하는 인물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나레이션의 내용과는 다르게 심리를 드러내지 않고 표정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 손탁이 말한 고다르의 가치는 이러한 ‘분리’를 통한 ‘탐구’이다. 영상이 언어를 거스름으로써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이 모여지게 되고 이러한 관심은 결국 언어 그 자체, 혹은 언어활동을 행하는 인물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치 <거미숲>의 강민이 사건을 진술하지 않고 자신의 기억을 관찰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상은 투명함이며 이러한 투명함에서 대상보다는 그러한 대상을 재현하는 주체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손탁은 고다르의 영화를 “투명한 텍스트이자 투명함을 연구하는 텍스트”(298)라고 말한 바 있다.
들뢰즈(Deleuze, 1985)가 영화와 철학과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그는 영화를 “이미지와 기호에 대한 새로운 실천”(544)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움이 필요한 이유는 영화가 주체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표현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본질에 보다 깊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에 있다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생성되는 영상은 영화작가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 진다. 이렇게 생성된 결과물은 의미를 중심으로 관심있는 것, 반응되는 것들을 추려내어 첨삭한 결과이다. 우리는 그것을 언어의 규칙범주인 계열체(paradigma), 통합체(syntagma)에 따라 각기 미장센(화면구성), 몽타주(편집)와 같은 용어로 표기한다. 그렇다면 영화작가가 지녀야할 의미라는 영상생산의 기준점이 사라진 상태가 반대로 존재할 수 있는 데, 이러한 상태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영상이 만들어 진다. 즉 내용도 없고 의미도 없는 영상, 주체의 통제에 벗어난 영상에서 또 다른 의미가 발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들뢰즈가 말한 시각기호(optosign)와 청각기호(sonosign)는 사건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멈추었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 영화는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격의 사유를 하게 된다. 대상에서 사유, 그 자체로 방향을 선회한다. 들뢰즈의 표현대로 ‘잠재적인 것’이 ‘실제적인 것’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즉 영화의 재현대상이 특정한 대상에서 그것에 관한 사유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이렇게 의미를 잃은 영상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되는 것으로써 이러한 발생은 곧 사건의 재현에 대한 사유의 발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영화의 관점은 메타차원으로 이동하며 사유 그 자체는 사유가 중단된 지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대립과 모순, 배치와 역설과 같은 것이 영화에 드러남은 단순한 혼란스러움으로 간주되기 보다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미숲>에서 흥미로운 사건의 연결방식도 바로 사유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사유를 사유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7.
앞서 언급된 <거미숲>의 문제점들은 주로 화자가 사건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회상은 복잡한 환각만을 불러일으킬 뿐이고, 인물들은 여러 차례 뒤를 돌아보면서 관객에게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한다. 실은 ‘말’하지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다. 이것은 인물이 더 이상 언어적으로 사건을 재현하고 서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주체, 사건을 장악한 서술자의 상실을 의미한다. 관객을 이해시켜주어야 할 영화도, 사건해결에 단서를 쥐고 있는 강민도 역시 더 이상 서(진)술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서술과 진술이 중단되는 지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서사가 중단되면 서사영화는 끝이 난다. 약호, 약속이 사라지면 역시 장르영화는 끝이 난다. 영상이 언어를 대신하지 못한다면 서사영상도 끝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것이 끝나도 종결되지 않는다. 영화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등장시킨다. 단순히 영화(카메라)가 본 것, 강민이 무의식적으로 인지한 것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보여줌에서 영상의 성격은 달라진다. 아마도 손택의 말처럼 ‘투명함’, 혹은 들뢰즈의 말처럼 ‘순수 시청각 기호’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렇게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들, 즉 영상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주체(화자 혹은 인물)의 서사의 중압감, 망설임, 중얼거림, 혼란스러움, 고통 등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활동과 재현활동이 중단되는 지점에서 비로소 주체의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상실된 모습이라 그렇게 믿음직하고 씩씩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러한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곳에서 주체는 더 이상 서사하지 않고 자신이 지금 서사를 하고 있으며 서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즉 영화가 재현해야할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그것을 메타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라보게 된다. 관찰은 멈추어지고 이제 관찰자 스스로가 관찰대상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는 주체는 이제 다른 문제를 제기하게 되며, 더 이상 본질을 탐구하는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본질을 탐구하는 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즉 끔찍한 사건과 같은, 전형적으로 영화적인 사건이 영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체에 의해 대상이 마음대로 해석되고 파헤쳐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대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쥐게 된다. 그러나 <거미숲>은 이러한 주체를 거부한다. 영화 <거미숲>에서 재현되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대상화된 사건뿐만이 아니라 대상화하는 주체도 함께 재현의 대상, 사유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결국 정리하지 않음으로써 정리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은 어찌 보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포함해야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것이 무엇이고 생각하는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우선되어야 하고 이러한 물음을 진지하게 던질 때에만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사유 안에 표상되는 것은 객체만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객체에 대한 표상인 동시에 언제나 이미 주체 자신에 대한 표상을 수반한다. 엄밀히 말해서 객체에 대한 모든 표상의 근저에는 이러한 자기 표상이 깔려있어야 한다.”(이유택, 2005) 정리된 서사영화, 재미있는 장르영화 모두 사실 “깔려있어야” 할 자기 표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거미숲>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모두 스며들어 있다. 다만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고 느껴지는 우리가 그러하듯이, ‘스며든’ 영화가혼란스럽거나 익숙하지 않다고 느껴질 뿐이다. 하나와 그것의 메타차원에 놓여있는 다른 하나를 동시에 표상하고 이러한 표상이 어떠한 형식으로 구현될 것인지의 질문을 던진다면 반드시 그것은 <거미숲>처럼 되어야만 하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국가의 탄생>이나 <양들의 침묵>처럼 단순한 미학으로는 답변되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들뢰즈, 질(이정하역). <시네마 2. 시간-이미지>(1985). 시각과언어 2002.
․샤츠, 토마스(한창호역).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1981). 한나래. 1995.
․손택, 수전(이민아역).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1961).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293-311면.
․이유택, 하이데거와 형이상학의 문제. <하이데거연구>. 제12집 2005(10). 5-30면.
․Barthes, Roland. S/Z. New York: Hill and Wang 1974.
․Goodman, Nelson. "Twisted Tales - or, Story, Study, and Symphony"(1980). In W.J.T. Mitchell (ed). On Narrative. Univ. of Chicago Press 1981. pp.99-115.
김무규
1968년 서울 출생. 독일 콘스탄츠 대학 미디어학 박사. 부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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