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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2007년 봄호) 서평/강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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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왕노 시집 <말 달리자, 아버지>
■황희순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
■전미정 시집 <봄볕 환한 겨울>
1.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있다. 그 정도만 다를 뿐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상처는 일종의 숙명인 셈이다. 이러한 상처는 부조리에 연유하는데 그것은 실존을 둘러싼 내․외적 조건들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 던져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구토(嘔吐)>에서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물 그 자체’를 직시할 때에 그 우연한 사실성(事實性)이 부조리이며 그럴 때에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그것을 다시 진일보시켜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1의 진리라고 하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태도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존재, 즉 인생 자체가 부조리인 셈이다. 이는 인간의 합리성과 세계의 불합리성 사이에 늘 모순이 늘 존재함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실존’이란 다름 아닌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존재라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인간에게 피치 못할 숙명으로 주어진 부조리를 누구나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이러한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가령, 관습적이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생활, 꿈꾸었던 이상이나 희망은 사라지고 삶에 뜻이 있는지 없는지도 문제 삼지 않는 무의미하고 건조한 생활 등이 이러한 경우이다. 주목할 점은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주장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좌절을 각오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복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부조리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땀 흘려 바위를 굴려 올리려는 존재, 결국에는 죽고 말 허무한 존재이면서도 열심히,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려는 존재가 시지프스이기 때문이다.
세 시인의 시집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지프스’라는 인물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 시인의 경우도 부조리와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끌어안으며, 이에 대항하여 인간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인간 세계의 부조리와 실존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의 언어는 몸의 언어라 할 만하다. 그 안에서 상처는 곪아 터질 때까지 삭히고 삭혀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피고름이 나올 때 그 상처위로 새살이 돋아난다.
2.
김왕노 시인이 인식하는 부조리는 거대한 기계 문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시작된 기계 문명은 우리 삶에 편리함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도구화, 관계의 단절,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등 문명이 만들어 낸 부조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고도로 기계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주체가 아니라 타자로 전락한 채 건강한 생명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흔히 현대를 인간 소외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 시는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어머니, 시간의 풀밭에 버려져 있다. 어둠이 와도 작동되지 않는 어머니 엔진이 올라붙은 어머니, 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 한 어머니, 아무도 찾지 않는 어머니, 풀이 서걱거릴 때마다 기억의 뿌리가 흔들려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는 어머니, 어머니 시간의 풀밭에 버려져 있다. 대량생산의 틈바구니에서 과열되던, 과부하가 걸렸던 어머니, 노을이 밀려들면 한창 때 만들어낸 눈물이며 사랑이며 그리움을 떠올리며, 어머니 저기 버려져 있다. 모타가 타버려 수리되지 않는 어머니, 기름칠 제대로 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 저기 혼자 버려져 있다.
―「쓸쓸한 기계」 전문
현대 사회는 기계 문명, 조직의 거대화와 관료제화, 집단 관계의 분화 없이는 사실상 존속될 수가 없는 사회이다. 이렇게 거대해지고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는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그 구성원들을 개성 있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되기를 요구한다. “마치 죽음의 낭만과 죽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곳, 막차도 첫차도 없는 스타크래프트의 서울”(「스타크래프트의 서울」)과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기계적인 규칙이나 원칙이 우선시됨으로써 인간 소외가 촉진된다.
이 작품에서 이러한 모습은 ‘쓸쓸한 기계’로 전락한 ‘어머니’로 형상화되어 있다. 어머니는 ‘대량생산의 틈바구니에서 과열’되고 ‘과부하가 걸려’ ‘모타가 타버’렸다. ‘수리되지 않’고 ‘기름칠 제대로 되지 않는 어머니’는 결국 용도 폐기된 채 ‘시간의 풀밭에 버려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한 때 ‘어머니’가 ‘만들어낸 눈물이며 사랑이며 그리움’은 그저 ‘기억의 뿌리’가 되어 흔들릴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자화상이며 실존이라는 점이다. ‘시간’으로 상징화된 거대한 문명의 흐름 속에서 현대인은 건강한 생명력과 존재의 모태, 근원적 안식처로 상징되는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 작품이다.
내 뿌리 약한 그리움도 모로 쓰러지고
내가 믿던 정의도 정부도 쓰러지고 뒷집 누나도 형산강 강둑에서 쓰러지고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쪽으로 쓰러지고 붉게 쓰러지고
사월도 오월도 썩은 고목 같이 쓰러지고 네 청춘도 모로 쓰러지고
술잔에 닿던 네 붉은 입술도 검은 눈동자도 쓰러져가고
누가 시도 때도 없이 도미노 놀이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세워 끄덕이며 앞세우고 가려는지 그 해, 붉게, 붉게
―「붉은 연쇄반응」 일부
이 작품에서는 ‘쓰러진다’는 시어가 반복되고 있다. 시어의 반복은 의미 강조와 운율 형성의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의미의 상징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쓰러져 가는 ‘그리움, 내가 믿던 정의와 정부, 뒷집 누나, 네 청춘, 네 붉은 입술과, 검은 눈동자’ 등은 ‘나’를 존재하게 하던 힘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쪽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이를 붙들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의미로 역설적으로 ‘쓰러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전제를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부조리한 세계나 사회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마치 ‘도미노 놀이 하’듯 모두를 쓰러뜨린다. ‘붉게, 붉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느끼는 아픔과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저 언덕을 넘어 어떤 종소리도 내게 울려오지 않았다/어떤 울음소리도 웃음소리도 오지 않았다/캄캄한 밤이어도 어떤 맑은 별도 내게 흘러오지 않았다”(「결핍」)거나 “글 행간 행간마다 검은 강이 흐르고 검은 꽃이 피고 날 좋은 때는 만장이 소설 가득 펄럭였다.”( 「쓰다만 소설」) 등과 같이 허무와 부정적 현실인식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재는 불안할 수밖에 없으며 부조리한 세계에서 상처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내가 버린 것이 결국 나를 버리고 떠났음을 아는 것은 금방이다”(「버렸다와 버려졌다 사이」)는 역설적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에게/먼 훗날 독이란 걸 모르고” (「물고기 여자와의 사랑」)라거나 “아물지 않는 울음이 있어, 항생제가 듣지 않는 상처가 있어, 결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결렬한 사랑도 없이 사랑은 가고」), 혹은 “슬프지 않는데도 눈물이 났다 오늘도 났고/어제도 났다”(「슬프지 않는데도 눈물이 났다」)는 시편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앞서 김왕노 시인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 현대문명의 무생명성 내지는 비생명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전미정 시인의 경우는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단절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문명의 신속화, 기계화, 자동화, 물량화, 규격화, 대중화 현상 등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반성, 무책임, 비인간화 등을 조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특히 현대 문명이 초래한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의 단절 혹은 피상적 인간관계는 그 존재로 하여금 부조리를 인식하게 하고 불안을 동반하게 한다. 다음 시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언제부턴가 한 사람만 사귀지 않는다
갑자기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워
이 사람 저 사람 걸쳐 사귄다
책도 한 권만 읽지 않는다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내 지식은 얼마나 불안해 보이는가
그래서 늘 여러 권의 책을 걸치고 읽는다
잠을 자면서도 깨어 있고
말하면서 침묵하는 법을 배웠고
가면서도 가지 않으며
웃으면서도 울고 있고
만나면서도 헤어지고 있었고
올라가면서 내려가는 법을 익혔고
칭찬하면서도 욕하고 있으며
열어주면서 잠그고 있는
모두 따지고 보면
하나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걸친다
자꾸 자꾸
―「걸쳐야 산다」 전문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통의 단절과 그로 인한 불안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책을 읽어도 사람들을 사귀어도 늘 불안하다.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렵고, 자신의 지식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두렵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 모두를 ‘하나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꾸 걸친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과 불안감은 일시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 해결은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처해있는 딜레마적 상황이 ‘자꾸 자꾸’ 반복된다는 것과 “외모와 첫인상만 보고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어떤 날은 하루 종일 다리가 빠지도록/진실한 정신의 창녀를 찾아다니다/낭패를 본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性書 시편․8―도서관에서」)라는 고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을 감추거나 타인을 왜곡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자신의 성대를 사용해 본 적이 그는”( 「O씨의 이목구비」)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모습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한 상처를 드러낸 작품이 다음의 경우이다.
그 가
만나는 만나는
사람들 속으로 울면서
만나는 울면서 울면서 만나는
사람들 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울면서
그가 만나는 울면서 속으로 울면서 그가 만나는
만나는 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울면서
만나는 울면서 울면서 만나는
사람들 속으로 울면서
만나는 울면서
그 가
―「그가 만나는 사람」 전문
이 작품이 주목되는 것은 형태가 특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우선 이 작품에서 ‘그’라는 존재는 상하로 대칭되어 있다. 그러면서 ‘만나는’이라는 시어는 좌우 대칭을 이루다가 마지막에 ‘울면서’라는 시어로 대치된다. 그리고 ‘울면서’는 ‘속으로’라는 시어와 호응하면서 안과 밖으로 자리바꿈을 한다. 한편 시의 왼쪽에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위치하고 오른쪽에는 ‘그가 울면서 만나는’이 자리하고 있다. 전자가 현실 속에서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로 인한 결과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형태상 상하 좌우 안팎이 서로 호응하면서 타자와의 소통의 시도와 단절, 그로 인한 슬픔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상하로 위치한 ‘그’는 자아와 타자를 모두 함의하며 ‘속으로’는 이들 모두가 그 슬픔을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며 살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시인이 “보고 싶다는 말을 들어도 외롭고/서로를 향해 팔을 뻗쳐도 허전하”(「우리 시대의 통화」)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결국은 “절망의 살덩이를 만나”(「언어의 춤판」)게 되고, 우리의 삶은 “피해자도 가해자도/주인공도 조연도 없는/너나없이 모두/누구에게 질세라/한평생 원 없이 주고받는/끝없는/상처주기게임”(「도미노 게임」)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4.
한편 황희순 시인이 느끼는 부조리는 어린 시절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체험은 유년 시절 가족사와 관련되어 있다. 어린 시절 가족과 관련된 체험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그 모습을 불쑥불쑥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그것이 아픈 상흔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일종의 각인 효과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 다음 작품의 경우가 그러하다.
가랑잎 쌓인 산책길
새털 몇 잎 흩어져 있다
그날, 콩마당질하던 해질녘, 아버지의 여자 때문에, 머리채 뒤잡혀 사립문 밖으로 끌려 나간 언니, 나뒹굴던 마당귀, 감나무 밑, 홍시 짓뭉개져 있던 거기, 한 움큼 뽑힌 머리카락, 콩깍지 밟듯 밟고 서있던 아버지, 등뒤, 풀썩 쓰러지던 어머니, 그림자, 흰 고무신 한 짝 뒤집혀 있던, 그 자리,
간밤, 새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새가 날아간 자리」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새털 몇 잎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사건의 발단은 ‘아버지의 여자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언니’가 ‘머리채 뒤잡혀 사립문 밖으로 끌’려 나가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끝내 쓰러지고 만다. ‘그날 그 자리’에서 목격한 일들은 화자의 무의식 속에서 가라앉아 있다가 흩어진 ‘새털’을 보는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여기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언니’와 ‘어머니’는 ‘새’로 치환된다. 이 새들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체험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인의 내면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시인은 그 “눈물나게 짠” 내면의 “상처를 굽고 또 구”(「엉겅퀴 붉게 피던―하동 돌고지山房 추억․2」)워 내며 “엎질러진 채 아직도 세상을 쫓겨 다니고 있다.”(「신세 조진 그 여자」)고 말한다. “그날 담장 밑 사잣밥과 나란히 놓인 할머니의 찢어진 그릇에 얇은 내 生을 담아본 적 있다.”(「버려진 신발을 보면 뒤집어보고 싶다」)거나 “벌레 먹은, 아까워하던 당신 딸을 이렇게 깨끗이/껍질 벗겨 놓았어요,”(「벌레 먹다」)라는 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은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칼날이 되기도 하는데 다음 작품이 이러한 경우이다.
과일가게 좌판, 봄볕 곁에 누운 지난가을 한자락, 계절을 잃은 눈빛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사과를 고르는 손끝에 묻어나는 가을 한입 베어 먹고 싶어 반으로 잘랐다 속이 푹 썩어 있다 자른 것을 얼른 도로 붙여 쓰레기통 깊숙이 쑤셔넣었다
(그런데가슴이왜이렇게벌렁거리지?심장에못박고간자식?때문에목구멍을무시로치받는병같은눈물?때문에이따끔취하는낮술?때문에도진울렁증?때문에폐차장근처만가면그곳으로몸밀어넣고싶은나?때문에빨리늙어버린엄니?때문에―끄억!흡!썩은내?도망가자!겉만멀쩡한
사과?가쫓아온다!업,業,업,業)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과를 자르듯 나도 한번……
이봐요, 칼 좀 다시 줘볼래요?
―「칼 좀 다시 줘볼래요?」 전문
이 작품에서 ‘지난 가을 한자락’은 지나온 삶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 애가 간 지 8년이 지났”(「시들지 않는 꽃」)지만 그날 이후 멈춰진 ‘나’의 시간이기도 하고, “강을 건너간 그 애”(「발효를 위하여」)로 인해 내가 휘청거리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다친 새끼 끌어안고 쩔쩔 매는 어미, 짐승일”(「단세포동물이 되다―병상일기․3」)뿐이었던 시간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지나온 나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런 시간을 간직한 사과는 곧 화자로 표상된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이 두려운 ‘나’는 ‘자른 것을 얼른 도로 붙여 쓰레기통 깊숙이 쑤셔넣’는다. 하지만 이내 가슴이 벌렁거리고 버려진 사과의 모습에서 ‘심장에못박고간자식’, ‘폐차장근처만가면그곳으로몸밀어넣고싶은나’, ‘빨리늙어버린엄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결국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행위는 그러한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주목할 점은 이 고통은 대를 물린 고통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수진이/한점 정물화로 남은 그들은 아직도 슬픈/내 기억의 중심에 있”(「기억의 중심」)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이 나아가 그 원인이 ‘업(業)’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면서 개인적 체험이 보편적으로 확대되고 상처의 극복을 가능하게 한다.
5.
지금까지 김왕노, 전미정, 황희순 세 시인이 부조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들을 보자
① 아직도 길 위에 자욱한 사라지는 것들의 발소리
그래도 사라지는 것들을 배려해
누가 켜준 저 가물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 몇 눈금의 목숨을 길 위에 써버리더라도
안개 피는 새벽쯤이면
이 국도 끝 그리운 집의 문을 소낙비 같이 세차게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푸른 국도」 일부
② 막막한 허공에서
첫 걸음마 떼듯
아찔하게 한 발씩 길 트는
그 앙상한 발끝
그 황홀한 식은땀
겨울 나뭇가지들이
아름다운 것은
―「겨울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일부
③ 보문산 등나무 그늘,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방울방울 떨어졌네 쓰름매미가 늦여름을 울고 햇살이 실바람에 찰랑찰랑 굴러다녔네 소주잔에 햇살을 담아 실컷 마셨네
올가을, 나 아무래도 아이를 밸 것 같아
내 몸이 환해지겠네
―「가을을 붙들다」 전문
①에 드러나는 김왕노 시인의 태도는 자기희생적이다. ‘오늘 밤 몇 눈금의 목숨을 길 위에 써버리더라도’라는 구절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마치 “굽은 청춘의 등에다/채찍을 휘두”(「말달리자 아버지」)르며 자신을 담금질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내 잠을 새파란 칼로 조각내어다오/베여진 상처의 아픔을 싹으로 내미는 씨감자일 테니/어느 배고픈 사람이 먹는/한 입 뜨거운 감자가 될 테니/저 아득한 어둠 속으로 나를 묻어다오/묻혀도 썩지 않고 자라는 매장된 꿈이 될 테니”(「감자」)라는 다짐에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배려’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라져서는 안 될 것들’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기반을 둔다. 그로 인하여 그 상처의 “눈물 속으로/아직은 버리지 않은 믿음을 앞세우고 깨금발 뛰며/저어기 내 꿈이 되어 귀가”(「내 안의 일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그 귀가의 목적지가 바로 현대문명으로 표상된 ‘국도 끝 그리운 집’이다. 여기서 ‘집’은 다름 아닌 온전한 육체와 정신의 안식처로서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전미정 시인의 경우는 부조리로 인한 상처를 보듬어 안으려 한다. 이와 같은 인식은 “따/스/한/그/곳/에/가/고/싶/다”(「봄볕 환한 겨울」)는 소망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상처를 보듬어 안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겨울’이라는 고통과 상처의 시간을 지나 ‘봄볕’으로 표상된 재생과 부활의 시간을 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에서 겨울나무는 새잎이 자랄 있도록 겨우내 길을 튼다. ‘앙상한 발끝’으로 흘리는 ‘식은 땀’은 ‘막막하’기만 ‘허공’에 부활과 재생의 길을 트는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행위야 말로 자아와 타자의 구별이 무화(無化)하고 참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황홀한 일이며 참된 아름다움이다. 그런 점에서 ②의 겨울나무는 시인이 표상이며, 김왕노 시인의 희생적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부활과 재생, 생명력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는 황희순 시인도 마찬 가지이다. 황희순 시인의 경우 이러한 점은 “산다는 건 작아지며 기다리는 것/ 뼈가 보일 때까지 도려내며 견디는 것”(「한낮의 섬」)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나를 조종하던 끈도 사라져” “울타리 훌쩍 뛰어넘어 무릎이 깨지도록”(「이제 넘어지고 싶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삶은 단순히 예전 삶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온갖 구정물에 빠뜨려 주눅 든 두 손 대신 깨끗이 놀아줄 씩씩한 손 하나 ”(「三手觀音像」)를 통해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세계를 자아 속에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③에서 보이는 모습도 그러하다. 이 작품에서 ‘나’는 ‘늦여름을 울고 햇살’을 ‘소주잔에 담아 실컷 마신’다. ‘가을’이 결실의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늦여름’은 인고의 시간이며 ‘울고 있는 햇살’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세계 놓여 있는 자아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마시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여 그 상처를 삭히기 위한 의지적 행위이다. 이러한 점은 ‘소주잔’이라는 시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를 통해 ‘햇살’은 새 생명의 상징인 ‘아이’로 잉태될 수 있으며, ‘내 몸’도 ‘환해지’면서 존재의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세 시인이 부조리를 인식하고 이를 나타내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그로 인한 상처에 끝내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를 극복하는 자세가 의지적이라는 점은 모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언급한 세 시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크게 보아 그렇다는 것일 뿐, 미시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면 엄연히 다양성이 존재한다. 비록 지향점이 같다고 하더라도 각 시집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망이 다양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시집과 개별 작품에서 이를 찾아가며 읽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므로 이는 시집을 읽는 독자들의 몫에 맡기고자 한다.
강원갑․2000년 ≪다층≫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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