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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특집/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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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예술과‘돈'의 사회사
시선視線의 만화경, 최근 소설에 구현된 돈의 현상학
박수현|문학평론가
1. 천변만화하게 제 몸을 바꾸며 유영하는 돈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건 그렇지 않건, 돈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은 거의 없다. “그 어느 시절에도 돈에 무심하던 시절도, 소설도 없었”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 소설은 돈에 얽매어 있었다”는 평론가 김주연의 지적대로, 돈을 중심적 혹은 주변적 모티프로 차용한 소설은 흔하고 흔하다. 무엇의 편재omnipresence는 규정과 범주화의 시도를 난관에 빠트린다. 무규정 상태로 존재하는 일반성들을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범주화하는 일이 학문의 소임 중 하나라면, 자명하고 흔하게 존재하는 것은 학學의 테두리로 온전히 포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이야말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일으키고 또 해명하는 심층구조의 중핵적인 상징이”라는 우찬제의 지적대로, 과연 돈과 인간사는 뿌리 깊게 얽혀있기에, 소설에 나타난 돈의 의미에 관한 논의가 면면히 수행되어 왔다. 문학의 사회적 현실 반영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강령에 오랫동안 묶여 왔던 우리나라 문단에서, 소설에 구현된 돈의 의미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소외된 노동 계층의 실상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왕왕 논의되어 왔다. 다시 말해 돈은 물질 만능주의를 고발하고 가난과 노동현실을 분석하는 매개가 된 것이다. 한편 돈은 작가의 현실 인식의 근거로서 논의되기도 한다. 가령 어떤 소설에 돈이 주요 모티프로 쓰이는 현상은 작가가 자의식의 틀을 폐기하고 사회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표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나타난 돈의 현상학은 자주 이러한 범주화의 그물망을 홀연히 빠져나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문제이다. 돈을 바라보는 시선, 돈을 둘러싼 의식, 돈이 유발하는 감정은 몇몇 범주로 포착되지 않고 천태만상으로 구현된다. 인간사와 인간 내면에 밀접하게 연루된 돈은 고정적 의미화의 틀을 거부하고 소설 속을 유영한다. 서구의 고전적 정치경제학에서, 애초 돈은 상품들의 가치를 균일한 잣대로 추상화시킨 것, 개별 상품들의 질적․구체적․감각적 속성을 소거한 순수 추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돈은 이제 인간의 다종다양한 희로애락과 중층적인 욕망과 환멸 등 실존적 감정의 근원이며, 구도자적 깨달음의 원천이기도 하고, 각종 행동을 유발하는 추동력이자, 인물의 행불행을 관장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돈은 천변만화하게 제 몸을 바꾸어가며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 글은 최근 소설에서 다종다양하게 구현되는 돈의 의미를 되는 대로 한 자리에 모아 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물론 이 글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돈의 현상 양태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2. 원본 없는 이미지, 공허하게 자전自轉하는 돈
돈은 때때로 시뮬라크르로 기능한다. 인간은 종종 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다른 모든 가치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정한다. 돈은 자동적으로, 소유자의 존엄함, 우월감, 행복, 일상의 누추함에 대한 위로, 정상正常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등 온갖 바람직한 감정들을 수반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꿈 혹은 욕망의 중핵과 돈은 등치된다. 사람들은 돈의 내용물이 아닌 것을 돈이 함유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돈이 자신들의 궁극적인 욕망의 재현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패착이다. 돈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욕망하는 것은 성취감과 자유와 평온함 같은 어떤 실질적 가치일 터이지만, 그런 가치는 돈이 자동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돈은 원본 없는 이미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인공물인 시뮬라크르라고 볼 수 있겠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기호와 실재의 등가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재현’과는 정반대로, 시뮬라시옹은 기호의 가치를 부정한다. 시뮬라시옹의 대상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이다. 돈은 인간의 진짜 욕망을 재현하는 기호가 아니라 원본 없는 실재 주위를 공허하게 자전하는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정미경의 「호텔 유로, 1203」는 돈이 시뮬라크르로 구현된 사례이다. 주인공 “나”는 삼십대 중반의 이혼녀이다. 무명 시인이자 방송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명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중독되어 있다. 명품과 그 모조품들을 구입하느라 과도한 카드 빚을 지게 된 그녀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매춘에 나선다. 명품을 소유하는 순간은 “일상의 남루함이 일순에 사라지는 마술의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이 여겨지는 지나친 눈부심”이라고 묘사된다. 이 소설은 명품에 집착하는 여자의 심리를 예리하게 묘파한다. 명품은 그녀에게,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엄마의 삶을 되풀이하게 될 것 같은 끔찍한 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 “뭇별 속에서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 “세상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을 획득하”는 수단이다. 즉 명품은 남루한 현실과 현실의 자질구레한 고뇌와 초라한 엄마의 삶을 답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잊게 해주는 위안물이자, 현실이 제공하지 못하는 자존감을 부여해주는 존재 증명의 수단이요, ‘주변부의 초라한 현실의 자아’ 대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강력한 자아’라는 허구적 자의식을 선사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그녀 스스로 밝혔듯이,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돈의 내공”이다. 명품에의 욕망은 돈에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이 소설에서 돈은 생존 수단의 차원을 넘어선 잉여적 가치를 갖는다. 이 소설에서 돈-욕망의 실체는 불안과 자괴감에서 도피하고 허구적인 자존감과 존재감을 획득하려는 욕망이다. 실상 돈은 그녀의 진짜 욕망의 대상인 그런 가치들과 등치되지 않음에도, 그녀는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녀는 돈에 허상을 덧붙이는 도착에 빠지며, 돈에 부착된 허상은 그녀를 지배한다. 돈은 “본래의 고유한 목적성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 구현된 돈은 원본 없는 이미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인공물, 시뮬라크르이다.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을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 뜨겁게 느끼는 그녀는 원본과 허상이 도치된 욕망의 소유자인 것이다.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유리”는 자신을 부유하게 해 줄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지략가를 방불케 하는 무수한 전략을 구사한다.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기를 꿈꾸는 그녀는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고,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한다는 당위에 의해 이른바 여우짓을 스스로 정당화한다. 이 소설에서도 “돈”은 미래의 행복과 소유자의 지고한 가치를 보장해주는 기호로 상정된다. 돈이 그러한 인생의 실질적 가치를 보장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모른다. 이 소설에 구현된 돈의 실상은 유리가 꿈꾸는 가치를 재현하는 기호가 아니라, 원본에서 이탈한 시뮬라크르이다. 성석제의 「인지상정」의 “최우식”은 일생을 돈의 허상을 쫓는 데 바친 인물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거의 받지 못한 그는 자신의 힘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군다. 재산을 일구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전쟁 중 갑자기 징병된 사람들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전달해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정작 편지는 전달하지 않으며, 매사에 뇌물 쓰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막대한 부의 축적의 추동력이 만족을 모르고 악무한을 거듭한 욕망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이 소설에서 돈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지속적으로 허기를 유발한다. 만일 돈이 애초 욕망을 재현하는 기호라면, 돈을 소유함과 동시에 허기는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돈이 본래 욕망과 동치인 기호가 아니라 원본 없는 이미지일 뿐이기에, 욕망은 충족됨 없이 악무한을 거듭한다.
3. 인간 조건을 구성하는 돈
‘우물 안 개구리’라는 유명한 말의 출처는 『장자』이다. 출전을 뒤져보면 이런 설법을 만난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그 개구리가 살고 있는 좁은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 수 없는 것은 그 벌레가 살고 있는 철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 또 다른 옛이야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의 서두는 이렇다. 지하 동굴에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죄수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 장자의 이야기에서 개구리의 우물과 여름 벌레가 사는 여름철은 인간 조건에 관한 탁월한 비유이다. 플라톤이 제시한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채 지하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들 역시 인간 조건에 구속당한 인간 실상을 환유한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몇몇 조건에 결박되어 있다. 식욕과 성욕도 그 조건 중 하나일 터이다. 적잖은 소설들에서 돈은 이러한 탈각 불가능한 인간 조건으로 그려진다. 돈에 관련된 천태만상도 이 지점에서 연출된다.
돈을 상실한 인물들은 파멸에 이르기도 하고, 때로 돈의 가치를 부정했던 인물들은 삶의 신고를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수락하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돈이 인간사를 작동시키는 무시무시한 근원력임을 보여준다. 돈은 때로 그 소유자와 박탈자 간 경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공고화하는 지표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이렇게 쓸쓸하게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돈은 인간 간 애정과 신뢰를 표현하는 수단이거나 탈일상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매개가 되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이렇게 행복하게 쓰이는 경우 역시 돈의 위력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불행 뿐 아니라 행복도 돈을 매개로 직조된다. 모든 인간사를 작동하는 추동력이자 다종다양한 인간의 의식과 감정의 근원이 되는 돈은 이쯤 되면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조건, 탄생과 동시에 인간을 수감하는 감옥이라 이를 만하겠다. 소설에 표출된 돈에 얽힌 의식과 감정의 천태만상을 관람하노라면, 돈이 공기와 물처럼 인간 존재의 기본 전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그 천태만상 중 일부를 관람해 보자.
인간을 파멸시키는 원흉
다음의 두 소설은 돈을 상실한 인간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보여준다. 파멸은 이승우 소설에서 정신적 공황의 형태로, 성석제 소설에서는 총체적 몰락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두 소설 모두 돈에서 소외된 인간의 몰락과 파멸을 그림으로써, 인간의 존재 조건이 된 돈의 위력을 증언한다.
이승우의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의 “나”는 사업에 실패한 오십대 초반의 남자이다. 무리한 해외 투자와 외환 위기의 여파로 그의 회사는 “채무 비율이 너무 높은 악성 기업”이 되었다. 노조는 그를 악덕 기업주,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 간 무능한 경영자라고 지탄했다. “노조원들과 담판을 짓겠다고 들어간 농성장에서 그는 달걀 세례를 받았고 옷이 찢겼으며 무릎꿇림을 당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수치와 굴욕이었다. 수치와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날, 정부와 채권단은 그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루아침에 회사를 빼앗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자기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는 “불쑥불쑥 치솟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밤에 깨어 일어나 괴로워하며 벽을 치고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결국 자신이 만든 관 안에서 기식하기에 이른다. 이 소설에서 돈은 인간 내면의 황폐화와 직결된다. 그의 정신적 공황의 원인이 된, 아들 뻘 되는 노조원들에게 무릎꿇림을 당하는 수모와 회사의 도산은 모두 돈에 연루된 사건들이다. 그의 우울증은 박탈된 자존감으로 인한 분노와 허무함에서도 기인했겠으나, 돈이 주인이 된 세상에 대한 환멸에도 만만치 않게 빚지고 있을 것이다. 돈은 이 소설에서 그것이 상실될 때 정신적인 기반마저 모조리 박탈하는 절대절명의 요건으로 그려진다.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돈의 위력은 성석제의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서 보다 참혹하게 묘파된다. 주인공 “그”는 한때 장래를 촉망받던 화가였으나, 약삭빠르게 처신하지 못한 죄로 화가의 길에서 밀려 난 채, “이천 이백만 원”짜리 연립 주택에 살면서 부정기적인 부업으로 불안한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어느 날 그는 집주인에게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몽땅 날릴 위기에 처한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모색한 모든 방도는 다시 “돈”을 요구한다. 방도를 방도답게 만들 돈이 없기에 그는 점차 참혹한 영락의 길을 걷게 된다. 후배에게 수모를 당하고 아내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는 일쯤이야 비교적 견딜만하다. 최소한의 생계 방편마저 잃어버린 그는 도둑질도 일삼으며, 아내는 청력을 잃어가고, 아이는 집을 나간다. 결국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날, 아내는 베란다에서 투신한다. 이 소설에서 돈은 생존의 절대 조건이다. 그것을 상실한 자는 최소한의 생존 기반을 박탈당함은 물론, 타인에게도 존엄성을 훼손당하고 스스로도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못한다. 돈의 상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본 요건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도리를 운운하는 게 사치로 느껴질 만큼, 돈이 없는 현장은 절박하다. 돈 없음은 아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며, 남편에게도 노숙자 이상의 삶이 기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1920년대의 카프계 소설에서처럼, 돈은 이 소설에서 인간을 파멸시키는 원흉으로 지목된다.
얽히고 설킨 양가감정‘들’의 대상
김인숙 소설에서 돈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은 복잡다단하다. 인물들은 한 때 무시했던 돈의 가치를 어쩔 수 없이 수락하기도 하고, 수락한 자신을 한없이 자조하기도 하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돈의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들을 쓰라리게 연민하는 한편, 돈의 논리에 포획된 세상을 미미하게나마 다시 환멸하기도 한다. 돈은 애증 혹은 환멸과 투항의 양가감정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양가감정마저 단일하지 않은, 중층적인 양태로 구현된다.
「그 여자의 자서전」은 돈을 두고 느끼는 인물의 중층적인 감정을 핍진하게 묘파한다. 주인공 “나”는 “팔리는 소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작가이다. 그녀는 “자서전 대필” 일거리를 소개받고 “날 어떻게 보고 이러나 불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한 매문”을 한다는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착수한다. 자서전 대필로 받게 될 목돈이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벌어들인 어떤 돈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무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책을 읽어야 위인이 된다는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한동안 반자본주의적 투쟁에 참여해 온 이력도 암시된다. 그러던 그녀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녀는 텔레비전의 홈쇼핑 광고를 틀어놓은 채 글을 쓰며 충동적으로 물품을 구입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홈쇼핑 중독은 돈의 가치를 부정하고 돈보다 더 소중한 무엇을 꿈꿔왔던 과거의 그녀 모습과는 상반된다. 충동적으로 물품을 구매하고도 그것을 내팽개쳐 버리는 행동은 돈의 가치에 투항하면서도 다시 환멸하는 양가감정에서 비롯된다. 부정해 왔던 돈의 가치를 수긍하기까지 그녀가 겪어낸 현실은 엄혹하다. “늘 정해진 대로만 살았고, 그의 삶은 늘 가난한 정답으로 가득”찬 오빠는 생계의 어려움으로, 가난한 동생에게조차 물질적 도움을 기대한다. 반지하 방에 살면서 사귀었던 남자는 그녀를 떠나고, 그녀는 홀로 “거의 다섯 달 가까이나 머물고 있던 아이를 없애”버린다. 수술 받은 날 홀로 설렁탕을 사먹는 그녀에겐 “살아야지, 악착같이 꼬리곰탕 그릇의 밑바닥을 긁는 것처럼”이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돈의 가치를 부정했던 한 사람이 돈을 벌어야겠다고 작정하도록 몰아대는 세상사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그런 일은 도처에 널렸으리라. 그녀는 애초의 꿈의 기원이었던, 아버지의 책 예찬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이제 그녀는, “책 속의 길을 설파하던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위인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마침내 거머쥔 명예와 출세와 돈”이었을 것이며, “그가 진심으로 꿈꾸고 있었던 것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깔고 앉은 알량한 몇 십 평짜리 낡은 구옥의 집값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있다든가, 그가 깨알 같은 글씨와 숫자들로 가득 채워놓은 노트 속의 사업계획서가 현실화되어 돈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온다든가 하는 따위의 일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녀의 생각에 따르면, 자신은 꿈의 기원을 오해하고 있었다. 즉 자신에게 꿈을 심어준 아버지의 설교의 기저는 자본주의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돈이 인간사를 작동시키는 불변의 중핵이라는 사실을 수락한 그녀의 심경은 몹시 복잡해 보인다. 그녀는 “돈 몇 푼에 그런 인간의 전기를 쓰겠다고 나서다니, 부끄럽지도 않아?”라는 비난을 감수한 채, 이호갑이 “천하의 사기꾼이든 살인마든,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며, “돈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를 하나님으로라도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서전을 쓴다. 그녀는 일견 양심보다도 더 중요한 돈의 가치에 투항한 듯하지만, 그러한 자신을 한껏 모멸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렇게 하도록 몰아대는 세상의 질서를 환멸하면서 동시에 수락한다.
「바다와 나비」 역시 자본의 위력에 굴복한 세계의 정경을 쓸쓸하게 그린다. “나”와 “남편”은 대학시절, “암호를 대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밀실에서 중국혁명사를 공부했다.” 그 때 그들에게 “중국이란 나라는 금단의 나라였으나, 또한 금지된 이상理想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은 어떠한가. 조선족 여인은 스물다섯 살의 딸을 사십을 넘긴 노총각에게 시집보내서라도 한국으로 오게 한다. “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믿는 건, 돈뿐”이며 “중국도 결국,” “돈밖에는 믿을 게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의 거리에서 “빠른 것, 간단한 것, 포장된 환상, 결국 자본주의적인 것, 맥도날드”가 당당하게 존재하는 모습 역시 목도한다. 자본주의 전복이라는 꿈의 온상이었던 중국의 현재는 자본주의에 빈틈없이 침윤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여자의 자서전」의 “나”처럼, 「바다와 나비」의 “나” 역시 돈의 위력에 쓸쓸히 투항한다. 그러나 그녀의 투항은 중국의 현실을 인지한 소치만이 아니다. 중년이 되도록 살아 온 세월이 자연스럽게 돈의 위력을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 사정은 긴 설명이 없더라도, “이 지랄같은 나라에서 밥 벌어먹고 산다는 건” “정말 지랄 같은 일”이라는 인물의 대사를 빌지 않더라도, 누구나 짐작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돈의 위력에 투항한 정경을 목도한 “나”의 심경은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넋으로 보”이는 남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돈의 위력에 굴복하지만 실상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에서 남편은 그녀와 등치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중국행은 돈의 위력에 굴복한 자신과 남편에 대한 거부감의 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그녀는 남편을 솔직하게 연민하는 편지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그 편지를 찢어버리는 행위는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보인다. 「그 여자의 자서전」의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나”의 감정은 복잡다단하다. 그녀는 어찌할 수 없는 돈의 위력에 굴복하면서도, 그런 삶의 피로를 절실하게 연민하고, 연민에 빠지는 자신의 나약함을 경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렇게 짜여진 세계의 질서에 환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 소설들에서 돈은 얽히고 설킨 양가감정‘들’의 대상이다.
계층 간 부동不動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지표
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은 돈에 의해 구분된 계층 간의 경계가 얼마나 공고한지 보여준다. 상류층 여성인 “나”는 아들의 연인인 “도란”에게 양가감정을 느낀다. 도란은 컨테이너에 사는 극빈층이자,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명문대 대학원생이며, 부유한 연인에게 신세지기를 거부하고 부를 동경하지도 않는 속 깊은 아가씨이다. 그녀는 도란을, “깨끗하고 반듯한 아이”로 보고, “내 딸 성격이 이러면 참 예쁠 것 같다”라고 느끼면서도, “어쩐지 눈에 안기는 구석이 없는 아이”라고도 생각한다. 아들 역시 도란을 몹시 사랑하지만 결국 결별하는데, 결별의 사유를 일기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녀의 전부를 감싸 안으려는 내 태도와 그녀의 자존심은 늘 충돌한다. 그 아이의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모였을 때 너무 초라하고 입고 있는 것, 먹을 때 사소한 거 따지고 그러면 처음엔 화나고, 돌아서면 안쓰럽고, 그런 게 불씨가 된 것 같아. 가난이 D의 일부가 아니라, 공기처럼 그녀의 삶 전부를 지배하는 걸 보면 화가 나.” 아들의 일기를 훔쳐 본 엄마, “나”는 “넌 걔의 가난이 싫은 거야. 간단한 얘기 복잡하게 하지 마라”라면서 속엣말을 중얼거린다. 그녀는 빈부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인을 버린 아들을 조소하지만, 조소의 대상에는 그녀 자신도 포함된다. 그녀는 도란이에게 무척 호감을 느꼈으면서도 일부러 거리를 두어왔음을, 친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 이유가 아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 역시 도란이의 가난에 이질감을 느꼈고, 그것을 불편함과 불안함의 징후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돈은 그것의 소유자와 박탈자 간에 부동不動의 경계선을 설정한다. 돈을 소유한 모자母子는 돈이 없는 도란을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호감을 준 도란의 미덕은 도란의 가난 앞에서 무력할 따름이다. 모자는 결국 도란의 가난을 수용하기에 실패한다. 작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한국에서 빈부를 가르는 선이 점점 확고부동해진다는 세간의 우려를 상기시킨다. 한편 이 소설은 돈을 소유한 계층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들의 폐쇄성을 조소하던 엄마인 “나”는 억울한 처지에 놓인 경비원을 도와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다. 그 무관심은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를 거부하는 마음, 다시 말해 가진 것을 손해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어떤 일이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돈을 소유한 이들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정이현의 「소녀 시대」에서도 극명하게 확인된다. 압구정동의 로데오 거리를 산책하는 도중 부유한 소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수많은 애들 중에서 누가 딴 동네 사람인지 우린 그냥 한번 쓱 보면 골라낼 수 있다. 촌빨 날리는 딴 동네 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차갑게 쌩까준다. 두 번 다시 안 쳐다보는 것만큼 화끈한 복수는 없을 테니까. 무슨 복수냐고? 음, 똥개도 자기 구역이 있다질 않는가. 찌질하게 입고 남의 동네 넘어와 물 흐리는 것만큼 괘씸한 일이 또 있을까?” 이 소설에서 돈은 가진 자들만의 특권 의식을 부추기는 표지, 타인의 침입을 차단하는 공간의 수문장으로 기능한다.
온정과 꿈을 함의한 돈
이제 비교적 긍정적인 돈의 기능으로 눈을 돌려보자. 때로 돈은 소설에서 신뢰와 애정의 표현 수단이거나 탈일상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매개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따뜻한 정경조차 돈을 매개로 연출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돈에 결박된 존재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박완서의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돈은 애정 표현의 수단이자 신뢰의 근거로 기능한다. “나”의 파출부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촌 동생”은 점잖은 “영감님”과 재혼한다. 동생의 재혼에 줄곧 부정적이었던 “나”는 동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영감님”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재혼을 축복하기에 이른다. “나”의 심경 변화에 “집문서 옮겨주고도 천만 원짜리 통장도 내 이름으로 해줬어. 그밖에 적금도 하나 들어줬구”라는 동생의 전언이 중요한 몫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 집문서, 통장, 적금 등은 영감님이 동생에게 품는 애정의 신실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기능한다. 돈이 애정 표현의 수단으로 쓰인 것이다. 동생이 영감님에게 받은 “돈”을 계기로, “내”가 영감님을 대하는 마음은 불신에서 신뢰로 바뀐다. 돈이 신뢰의 근거로 작용한 것이다. 김훈의 「언니의 폐경」에서도 역시 돈은 애정 표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언니”는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는다. 사고 후 배상금, 퇴직금, 순직보상금, 생명보험금, 부의금은 “모두 이십 억이 넘었다.” 언니는 그 돈의 대부분을 결혼한 두 아들과 시댁 남자들에게 내주었다. “그렇게 다 뜯기고 나서 겨우 챙긴 얼마 중의 일부”인 “오천만 원”을 언니는 선뜻 동생에게 준다. 이혼을 전제로 별거를 시작한 동생은 십삼 평형 아파트를 얻고자 하는데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형 냉장고와 에어컨, 식탁과 장롱을 들이는 데” 필요한 “육백만 원” 역시 언니가 감당해 주었다. 이 소설에서 돈은 불행을 맞은 혈육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이며 온정적인 의미를 구현한다.
서하진의 「요트」에 드러난 돈의 의미는 이색적이다. 주인공 “나”는 사십대의 주부로서, 살던 집의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녀의 가족은 “한 눈에 들어오는 좁은 거실, 두 개의 작은 방”을 가진 아파트를 떠나 “오십 구 평의 새 아파트”로 입주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은 재개발로 가격이 오른 집을 팔고 강북으로 이사한 후 그 차액으로 요트를 구입할 것을 주장한다. 요트는 남편에게 “미지의 세계, 꿈의 공간”을 의미한다. “나”는 당연히 남편의 꿈에 회의적이다. 그녀는 꿈의 본질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가 마음을 바꾼 계기는 아들의 가출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다. 모범생이었던 고삼 아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집을 나간다. 어렵게 아들을 찾은 그녀는 아이에게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한 바퀴 돌자고 제안하고, 아들은 기뻐하며 마음을 열고 부모와 대화를 시도한다. 아들이 가출한 이유는 뚜렷하게 설명하기 어렵고, 고삼 수험생 처지로 돌리기만도 무언가 미흡하다. 아마도 그는 수험 생활을 겪으며 일상의 무의미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렇기에 그에게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일주하자는 제안은 마음의 빗장을 풀어 버리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요트를 구입하는 데 들 돈 “6만 달러”는 일상의 무의미성과 차폐성에 대한 대안으로, 꿈을 상징한다. 어쩌면 독자는 꿈 역시 6만 달러라는 돈으로 환산되는 현상 앞에서 자본주의의 위력에 혀를 찰지도 모르고, 돈의 액수가 적지 않음에 가진 자의 여유 운운하며 고개를 내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지불해야 하는 6만 달러는 일상의 안락함과 여유, 즉 실제적인 부富를 적잖이 포기할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희생적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반적인 경우 돈은 의식주의 여유로 대변되는 일상의 풍요와 등치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돈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단이 아니라 일상의 풍요를 희생해서라도 누리고 싶은 자유와 꿈을 의미한다.
4. 탈각된 돈
지금까지 살펴 본 소설에서 돈은 잉여적 욕망의 대상이거나 탈피 불가능한 인간 조건을 구성하는 요인이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잉여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 조건에서 해방 불가능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제 돈에 부착된 잉여 욕망을 탈각시킨 사례들을 주목해 보자. 이 경우 인물들은 돈에 부착된 잉여 욕망이 “실재계 속의 구멍”임을 잘 알고 있다. 욕망은 무한 증식되지만, 그것의 궁극은 텅 빈 부재일뿐이다. 욕망의 기만적 속성을 소거한 돈은 이제, 생존의 기본 수단으로서의 소박한 가치에 안주하게 된다. 돈은 그러나 여전히 인간 조건인 듯하다. 그래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돈에 결박당한 앞 소설의 인물들과 달리 다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돈을 외면하는 인물이 출현한다.
시뮬라시옹을 그친 돈
박완서의 「대범한 밥상」의 주인공 “나”는 살 날을 석 달 남겨 놓고 유산 분배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여고 동창생 “경실”을 찾아간다. 경실은 무남독녀 외딸과 사위를 비행기 사고로 잃고 두 손자를 사돈 영감과 함께 키워왔다. 그녀는 또한 무수한 억측을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억측의 대강은 이렇다. 딸의 장례식장에서 “눈이 초롱초롱해 가지고 밥을 아귀아귀 먹”는 그녀의 모습은 딸과 사위 앞으로 나온 거액의 보상금을 노린 욕망의 반영일 것이며, 손자를 키우기 위해 감행한 사돈 영감과의 동거 역시 보상금에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가 나중엔 사돈의 재산을 탐한 결과이고, 무엇보다 사돈과의 동거는 패륜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손자들을 다 키워 유학 보내고 사돈마저 저 세상으로 보낸 경실의 실상은 억측을 배반한다. “나”는 경실과 대화하는 도중에, 스캔들이었던 그녀의 선택이 불시에 부모를 잃은 손자들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에서 비롯되었으며, 손자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비하면 세상의 수군거림은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나”를 감화시킨 것은 “돈”을 대하는 경실의 “대범한” 태도이다. 경실은 세간의 억측과 다르게, 거액의 보상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장성한 손자들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실이 서울에서 받는 월세와 영감님의 월급을 “아껴 쓰지도 헤프게 쓰지도 않으니까 저절로 수입과 지출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 거액의 보상금을 수중에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큰 재물에의 욕망 때문에 소위 재테크를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 방식일 테니까 말이다. 경실은 살고 있는 시골집의 소유권을 설정하거나 세금을 적게 무는 방도를 고안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재산은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 얻은 거고 죽어서 가져갈 수 없는 거니까 결국은 이 세상에 속하는 건데 죽으면서까지 뭣 하러 참견을 해. 이 세상의 법이 어련히 처리를 잘 해 줄까봐. 손자들 말고 그거 가로챌 사람 아무도 없어. 손자들이 너무 잘나거나 너무 못나서 제 몫을 못 챙겨도 그게 이 세상에 있지 어디로 가겠냐?” 이것이 유산 정리를 거부하는 경실의 변이다. 또한 경실은 세금을 피할 방도를 궁구하라는 “나”의 제안을, “법이 정한 대로 뜯겨야지 어쩌겠어”라며 일축한다. 법의 혜택을 누려왔으니 돈을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고향산천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손자들에게 보내는 일조차 과욕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는 경실은 그대로 자연에 따르는 순일한 정신을 구현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돈이 거느리는 시뮬라크르들을 거부한 경지이기도 하다. 그녀는 돈을 일상을 영위하고 손자들을 키우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결코 그 이상 돈의 허상에 속지도 않고, 돈의 허상을 추구하는 잉여적 욕망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이 태도는 모든 행동의 원인을 물욕으로 해석하고, 죽는 날까지 돈 걱정을 하는 세간의 양태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경실에게 구현된 돈은 생존하고 인간의 도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 즉 허상을 걷어낸 실재로만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성석제의 「인지상정」의 결말은 평생을 돈에 집착해 온 인물이 죽음을 앞두고 돈의 허무함을 깨닫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우식이 죽음을 앞두자, 그의 세 아들은 각각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혈안이 된다. 아들들의 속셈을 눈치챈 우식은 “너희 삼형제가 각자 마대에 돈을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아서 내일 오전 열시까지 이리로 가지고 오너라”라는 명을 내린다. “아버지가 그들이 가지고 온 돈을 기준으로 능력을 평가하고 그에 비례하여 재산을 나눠주리라”고 짐작한 아들들은 각자 최대한 돈을 모아 담은 자루를 짊어지고 아버지의 병상을 찾는다. 세 아들의 돈은 병상에 올려진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의 행동은 어떠한가. 그는 돈을 공중에 흩뿌린다. 수표와 채권, 등기권리증, 부도어음마저 공중에 흩뿌리는 “그의 깡마른 얼굴에 웃음기가 감돈다.” “그는 웃는다. 웃으며 돈을 흩뿌린다.” 소설 전반에 걸쳐 그려진 돈을 모으기 위한 최우식의 쟁투와 세 아들의 사투를 염두에 둔다면 일견 어이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가장 그럴 법한 결말이기도 하다. 평생 자신을 옭아매었던 돈이 기실 텅 빈 구멍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비단 현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최우식은 돈의 잉여적 가치와 시뮬라크르적 이미지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매료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두고 돈의 허구성을 깨달은 듯하다. 이 때 돈에 덧칠되었던 원본을 상실한 허상은 지워진다.
다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외면되는 돈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과부가 된 서른 한 살의 여자 유선의 이야기이다. 죽은 남편은 꽤 이름이 알려진 작가였다. 아직 사별의 슬픔을 채 극복하지 못한 그녀에게 출판업자는 남편의 일기나 편지 등 내밀한 기록을 모아 출판하자는 제의를 하며 계약금 오백만 원을 건넨다. 제안을 수락할 의사가 없던 유선은 그 날 저녁 문득 남편의 컴퓨터 파일을 열어본다. 놀랍게도, 그녀는 파일에서 남편이 죽기 전 불륜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유선의 고뇌는 시작된다. 남편의 불륜은 그의 죽음이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부추긴다. 이러한 센세이셔널한 정황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유선은 경제적으로 유복해질 수 있다. “그의 모든 걸 까발리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스캔들의 가운데 놓이게 하고 싶”다는 복수심과 더불어 어려워져 가는 경제적 형편과 딸을 번듯하게 키우고 싶다는 소망은 남편의 일기를 출판해버리자는 마음에 추를 얹는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출판업자에게 개인적 파일이 모두 삭제되어 있더라고 거짓말하며 출판을 포기한다. 그녀는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고,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도 사랑의 정수로 인정하며, 남편을 항상 “피투성이 연인”으로 기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편의 배신조차 사랑의 일부로 포용하며 그 기억을 훼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그녀의 심경은 소설에 묘파된 두 사람 간 지극했던 사랑의 장면들로 개연성을 획득한다. 그녀는 남편의 스캔들을 세간에 알리며 일기를 출판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 욕망의 추동력은 복수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필요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실지로 그녀는 고뇌하는 동안 점점 경제적 궁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가 추종한 것은 돈의 논리가 아닌, 다른 논리였다. 그 다른 논리를 기억과 환상과 사랑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아무튼 이 소설에서 돈은 더 큰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외면해도 좋을 대상으로 부각된다.
5. 시선의 만화경, 가치의 만화경
소설에 구현된 돈은 다양한 양태로 현상한다. 가령, 돈은 물신주의에 포획된 인간상을 비판하는 매개라는 식으로 단일하게 환원되지 않는다. 돈에 관련된 인간의 의식과 감정이 천태만상으로 전개되는 정황은 돈의 탄생 배경과도 관련될 것이다. 돈은 원래 다양한 가치를 획일적으로 추상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여기에서 ‘획일적인 추상화’보다 ‘돈이 대변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해 보자. 인간이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가치의 수는 무한하다. 따라서 가치를 대변하는 돈을 바라보는 시선視線 역시 천변만화할 터이다. 단적으로 돈은 무수한 가치관이 각축하는 장이다.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풍문이 팽배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섣불리 돈이 소거된 정경을 꿈꿀 수는 없다. 그러나 돈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개인의 의지대로 선택 가능한 문제임에 분명할 것이다.
박수현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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